평화와통일을위한연대(박종화 이사장) 1월 15일 새해 기도회에 이은 이만열 교수의 특별 강연회에서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났을 때 교회 역할이 컸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우리나라 1600만 인구 중 기독교인은 24만여 명으로 1.5% 정도에 불과했지만, 만세 운동의 전국화 단계에서 기독교 역할은 지대했습니다. 주동 세력, 체포·투옥자와 관련해 3·1 운동에 참여한 기독교인의 운동량은 20~30%로 계량화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학자들은 기독교 민족운동이 한말부터 시작했고, 그 연장선상에서 기독교가 3·1 운동을 주도했다고 봅니다.

이는 장인환의 스티븐스 암살, 전덕기의 을사오적 처단 미수, 안중근(천주교)·우덕순(개신교)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 이재명의 이완용 암살 미수 등에서 극명하게 나타났습니다. 이 전통을 '독립협회 → 상동파와 황성기독교청년회 → 신민회 → 105인 사건 → 신한청년당 및 송죽회'로 이어지는 항일 민족운동 흐름이 송계백·서춘·백관수 등 기독교인이 주도한 2·8 독립선언을 거쳐 3·1 운동으로 전개됐다는 것입니다.

그날 이만열 교수는 3·1 선언서에 나타난 독립사상은 기독교 이념과 긴밀히 관련됐다고 말했습니다. 3·1 운동이 고종을 복귀시키고 전제군주 체제로 돌아가려는 복벽주의를 극복했고, 다소 부진했던 독립운동을 통합 및 활성화했으며, 주권재민의 민주 공화제 주창, 무장 독립 투쟁을 본격화했다는 점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또 세계사에도 영향을 끼쳐 약소국가의 반제 독립운동에 큰 자극을 줬으며, 3·1 운동이 민족주의를 넘어 동양과 세계 평화를 위한 운동이었다고 했습니다.

경기도 화성 지역의 독립운동이 3·1 운동의 무장 독립 투쟁에서 영향을 받아 공격적 투쟁을 전개했다는 사실을 제암리3·1운동순국기념관 자료와 비디오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화성에서는 3·1 운동 직후 구국민단을 조직해 활동하면서 주민의 민족 역량이 커져, 면사무소와 주재소, 우편소, 동양척식회사에 방화하고, 일본 경찰 처단과 일본인 상점을 파괴하는 등 운동의 혁명적 성격이 드러났습니다. 특히 기독교인․천도교인․유학자가 같이 협력해 독립 투쟁을 전개했습니다. 이 사실은 종교와 이질적 교리를 초월한 증거로, 화성 지역 3·1 만세 운동의 가장 중요한 역사적 의의입니다.

시위가 격화하자 일제는 주동자 검거에 나섰고, 한밤중 마을을 포위해 초가집에 불을 놓아 피신하는 남자들을 무조건 체포하거나 사살하는 등 무자비한 행태로 이를 진압했습니다. 이 폭압적 진압 작전의 대미로 벌어진 것이 제암리 사건입니다.

1919년 4월 15일, 아리타 도시오 중위가 이끈 일본군은 제암리를 포위하고 15세 이상 남자들을 제암교회로 몰아넣었습니다. 출입문을 폐쇄하고 창문으로 총을 난사하며 예배당에 불을 질렀습니다. 탈출하는 이들에게는 총탄을 퍼부었고, 일하다가 달려온 부인 2명도 사살해 23명이 희생됐습니다. 일제 군인이 지른 불은 바람을 타고 제암리 초가 마을 전체를 삼켰습니다. 이들은 인근에 있는 고주리마을로 가서 천도교 지도자 일가족 6명도 살해했습니다.

참혹한 사건은 언더우드 선교사와 미국 커티스 영사를 통해 외부로 전해졌습니다. 특히 스코필드 박사(Frank W. Schofield, 한국명 석호필)의 용기 있는 행동으로 일제의 만행이 전 세계에 알려졌습니다. 기념관 입구에 있는 스코필드 박사의 동상은 분노에 찬 얼굴로 카메라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결연해 보였습니다.

당시 한미 관계나 정교분리를 내세운 미국의 선교 정책에 비춰 보면, 그 역할이 참 대단해서 석호필 박사를 3·1 운동 민족 대표 제34인으로 인정하는 데 거부감이 없습니다. 저도 석호필 박사를 잘 모르고 있다가 몇 년 전 '호랑이스코필드기념사업회' 회장 정운찬 전 총리와 사무총장 김재현 박사를 만나면서 알게 됐습니다. 제암리 사건은 1982년 전동례 장로 등의 증언으로 희생자가 발굴돼 순국기념관 오른쪽 계단 위에 천도교인·기독교인 29명이 합장돼 있습니다.

'제암리 학살 사건'에 비견하는 사건으로 중국 간도 '장암동 학살 사건'이 있습니다. 제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교육훈련원장으로 일하던 2010년 7월 1일, 중국 연변에서 민족 독립운동을 중심으로 신학생 해외 훈련을 할 때 용정 장암촌을 탐방했습니다. 마을 앞쪽 언덕에 큰 봉분이 있고 '간도 참변' 연장선에서 희생된 이들을 기리는 '장암동 참안 유적비'가 있었습니다. 1920년 10월 청산리 전투에서 크게 패한 일본군은 그 보복으로 한인 사회, 항일 단체, 학교, 교회 등을 초토화했습니다. 이 간도 참변으로 한국인 3700여 명이 피살됐는데, 가장 참혹했던 사건이 '장암동 학살 사건'입니다.

연길현 장암동 주민 대부분이 예수교 신자였기에 장암동은 '예수 마을'이라고 불렸다고 합니다. 1920년 10월 30일 용정에 주둔하던 일본군 제4사단 28여단 스즈키 대위는 군인 70여 명과 헌병, 경찰 등으로 구성한 '토벌대'를 거느리고 남양평수비대와 합세해 새벽에 장암동을 포위했습니다. 이들은 청장년 33명을 반일 부대와 내통했다는 이유로 교회 안에 가둬 놓고 불을 질렀습니다. 불 속에서 뛰쳐나오는 이들을 마구 찔러 죽이고 다시 불 속에 던졌고 민가 11채와 영신학교를 불태웠습니다.

며칠 후 일본군은 다시 마을에 쳐들어와 유족들에게 강요해 무덤을 파헤쳐 시체를 조짚단 위에 모아 놓게 한 뒤 석유를 붓고 태워 버렸습니다. 유족들은 참혹하게 이중 학살된 시체를 가릴 길이 없어, 재를 모아 28명의 합장 무덤을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합장 무덤에 묵념한 후 잡목이 우거진 불탄 교회 터를 내려다보고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암교회는 1905년 감리교인 안종후의 사랑채에서 시작됐습니다. 순국기념관 옆에 자리한 교회는 일제 만행에 불탄 후 1938년 기와집으로 지어졌다가, 1970년 일본의 교회와 양심적 사회단체가 속죄의 의미로 보내온 성금을 바탕으로 건축했습니다. 2001년에는 정부가 이 일대를 순국 유적지로 지정하면서 예배당이 지금의 현대식 건물로 다시 건축됐습니다. 들어가 보니, 천장에 나무를 많이 사용해 격조가 있는 아담한 예배당이었습니다. 사람들이 거의 보이지 않는 제암리 유적지를 걷다 보니, 기독교 신앙으로 민족운동을 치열하게 벌인 선배 기독교인들의 기개가 느껴졌습니다.

제암교회 예배당. 이근복 그림

올해는 3·1 운동 100주년을 맞아, 많은 성명서와 세미나 및 행사가 준비되고 있습니다. 2007년 평양 대부흥 100주년 대회처럼 이벤트로만 끝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아직 일제 잔재와 군사독재의 적폐를 청산하지 못한 처지에 어떻게 3·1 정신을 되살릴 수 있을지를 고민하게 됩니다. 무엇보다 3·1 운동 정신의 자주독립 사상을 깊이 새기고, 한반도에 자주적 평화통일 체제를 구축해 건실한 민주공화국을 세워야 할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희생을 감수하고 신앙 의지로 독립운동에 헌신한 선조들을 기리며 마음가짐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 사회와 민족 역사에서 시대적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음에 수치심을 갖는 것입니다. 엄혹한 시대를 치열하게 살면서도 늘 부끄러운 마음을 가졌던 윤동주 시인처럼, 한국교회가 자성적 성찰을 통해 부끄러움을 간직할 수만 있다면 희망이 있습니다. 윤동주 시인의 내면세계를 설파한 김응교 교수 저서 <처럼>(문학동네)에서 한 말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윤동주의 부끄러움은 성서적인 기원을 두고 있고, 윤리적인 부끄러움도 있지만 결국은 역사 앞에서 헌신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치열한 부끄러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383쪽)

2월 18일 전북 군산에서 기독교대한복음교회 '목회 아카데미' 첫날을 진행하고, 일본 구옥을 펜션으로 바꾼 월명동 숙소의 다다미방에서 잠을 자다가 밤비 내리는 소리에 깼습니다. 윤동주가 쓴 '쉽게 씌여진 시'가 떠올라 시를 찾아 읽고 방을 살펴보니 다다미 6개를 깐 '육첩방'이었습니다.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중략)

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 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여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하략)"

- 윤동주, '쉽게 씌여진 시' 중

*'그림으로 만나는 한국교회'는 매월 2차례 업데이트됩니다.

이근복 / 성균관대학교와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을 졸업했다. 영등포산업선교회 총무, 새민족교회 담임목사,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교육훈련원장을 거쳐 현재 크리스챤아카데미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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