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례 1.
세네갈에서 온 마우(가명)는 공장에서 일하다 손가락 두 개가 부러지는 사고를 당했다. 노동 현장에서 일어난 일인데도 사업주는 산재보험에 대해 설명해 주지 않았다. 뒤늦게 산재보험의 존재를 알게 된 마우가 사업주에게 산재 처리를 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사업주는 거절했다. 마우는 사업주의 뜻을 거스르고 자신의 권리를 주장해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다.

사례2.
베트남 출신 호짜이(가명)는 공장에서 일하다 발을 심하게 다쳐 병원에 입원해 있다. 입원한 지 2주가 지났지만 사장은 산재보험에 대해 일언반구 없었다. 산재보험 같은 제도가 있는지 알 길이 없던 그는 한 한국인의 도움으로 산재보험의 존재를 알게 됐다. 하지만 혹시라도 사장에게 찍힐까 두려워 신청을 꺼리고 있다.

사례3.
방글라데시에서 온 마누힘(가명)은 지난해 6월 산재 사고를 당해 손가락 하나가 잘렸다. 산재보험을 신청하려 했지만 회사가 극구 만류했다. 산재보험보다 더 많은 보장을 해 주겠다고 했다. 사업주 심기를 건드렸다가 받을 불이익을 걱정한 마누힘은 회사의 제안을 따랐다. 사업주는 돌변했다. 강제로 퇴원시키고 휴업 급여만 주고 보상은 해 주지 않았다. 복귀 이후에도 밤샘 노동은 당연한 일이었다. 참다 못한 마누힘은 회사와 싸워 직장을 옮기는 데 성공한 뒤, 전 직장을 상대로 산재보험을 신청했다.

[뉴스앤조이-이은혜 기자] 김달성 목사(65·평안교회)는 평일 대부분을 경기도 포천시의 한 병원에서 보낸다. 그가 만나는 이들은 사례에서 언급한 것처럼, 공장에서 일하다 상해를 입고 병원에 입원한 이주 노동자들이다. 손발을 다쳐 누워 있는 이들을 붙잡고 스마트폰 번역기의 도움을 받아 대화하다 보면 어느새 하루가 훌쩍 지난다.

포천 일대에는 공장뿐 아니라 기업형 비닐하우스도 많다.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주로 동남아시아에서 온 노동자들이다. 공장과 달리 이곳은 근로기준법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 근로기준법 63조는 농수산업에 종사하는 이들에게는 휴게와 휴일을 적용하지 않는다고 명시하고 있다. 1년 365일 가동하는 기업형 농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는 '노동자'가 아닌 셈이다. 노동법의 사각지대인 이곳에서 이주 노동자들이 처한 어려움은 무엇인지 귀 기울이는 것도 김달성 목사가 하는 일이다.

김달성 목사는 지난해 포천이주노동자상담센터를 개소하고 이주 노동자들과 함께하고 있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2월 1일, 경기도 포천 송우리 주택가의 한 오피스텔을 찾았다. 벨을 누르자 김달성 목사가 반갑게 맞아 주었다. 3평 남짓한 오피스텔 내부에는 교자상 하나가 놓여 있고 그 위로 성경, 유인물 등이 쌓여 있었다. 포천이주노동자상담센터라는 이름으로 이주 노동자들을 상담하고 주일에는 성경 공부를 하는 공간이다. 은퇴를 몇 년 남기지 않은 백발이 성성한 목사는 어쩌다 이주 노동자들과 함께하게 됐는지 조금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 봤다.

노동운동 꿈꾸며 목사됐지만
기복·성공 외치며 목회
교회·아내 잃고 잘못된 신앙 회개
포천서 노동자 만나며 새 삶

"지금 이주 노동자들 일하는 현장 가서 보면, 우리들 1970~1980년대 노동 현장이랑 별로 다를 게 없어요."

김달성 목사는 1979년 감리교신학대학교를 졸업하고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당시 노동운동에 뜻을 품은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공장에 취직했다. 하지만 열악한 환경 속에서 3개월 만에 각혈을 하고 그만뒀다. 노동자가 될 수 없으면 노동자들과 함께하는 교회라도 세워야겠다는 생각에 인천 주안공단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그렇게 10년을 노동자들과 함께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교회가 노동 현장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이 있었지만 1987년 6월항쟁 이후 사회는 급격하게 변했다. 노동운동에 앞장서던 교회들도 하나둘 사라져 갔다. 민주화 바람과 함께 교회는 노동운동이 아닌 사회복지 분야를 담당했다.

노동운동에 뜻을 세우고 목회자가 됐지만, 막상 사회가 요구하는 역할이 사라지자 평범한 목회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인천에서 목회하던 그는 교인 100여 명이 됐을 때쯤 예배당을 건축하기로 결심했다. 건물 부지는 교회가 살 테니 대출을 받아서라도 건축을 완성하자고 교인들을 독려했다. 교회를 위해서라면 융자를 얻으면서까지 건축하는 게 당연한 줄 알았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 기복신앙에 매몰됐다. 눈에 보이는 교회 건물, 양적 부흥이라는 허상을 가지고 교인들에게 헌금을 강요하는 설교도 했다. 물질적으로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라는 말도 했다. 지금 돌아보면 부끄러운 기억이다.

"한 15년 일반 목회를 하다가 2004년 아내와 사별했어요. 교회도 물질적으로 어려움에 빠지고 교인들도 떠나가는 아픔을 겪었죠. 그동안 저의 삶을 다시 돌아보게 됐어요. 내가 얼마나 기복신앙에 깊게 빠져 있었는지 성찰했어요. 나도 모르게 물신物神을 만들어 섬기고 있었더라고요. 말로는 하나님 영광을 위해 산다고 했지만 결국 나를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하는 짓을 한 거죠.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 싶어서 인천에 있는 걸 다 정리하고 포천으로 왔습니다."

처음부터 이주 노동자들과 함께하겠다는 마음으로 포천을 선택한 건 아니었다. 아예 새로운 곳에서 시작할 생각으로 포천에 자리를 잡았는데, 길에 나가면 이주 노동자가 많이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이주민은 현재 포천 인구의 약 11%를 차지한다. 막연하게 그들과 친구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포천 지역에는 기업형 비닐하우스가 많다. 이주 노동자들은 줄지어 서 있는 비닐하우스 끝에 만들어 놓은 움막 같은 곳에서 생활한다. 사진 제공 김달성

노비 취급받는 이주 노동자들
대화로 자존감 회복 돕고
당연한 권리 행사할 수 있도록 용기

친구가 되려면 우선 만나야 했다. 김달성 목사는 사무실로 쓰는 오피스텔에서 도보 10분 거리에 있는 병원을 무작정 찾아갔다. 포천시에서도 중형 병원에 속하는 이곳은 일하다 다친 이주 노동자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입원 중인 노동자들에게 다가가 말을 걸고 대화를 시작했다. 그들을 속여 돈을 뜯어내는 브로커 아니냐는 오해도 받았다. 하지만 진심이 닿을 때까지 계속 말을 걸었다.

영문을 모르던 이주 노동자들도 김달성 목사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저 친구가 돼 주려고 시작한 일이었는데 이들과 대화하다 보니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했다. 어떤 모양으로든 인간답지 못한 대접을 받고 있었다. 노동자들의 발목을 잡은 고용 허가제라는 악법, 임금 체불, 성폭력, 상습 폭행 등에 노출된 노동자들의 현실을 전해 듣고 처음 목회에 발 디뎠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 한국인 노동자들이 받던 취급을 지금 이주 노동자들이 받고 있었다.

노동자라면 기본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몇 가지 권리가 있다. 노동 현장에서 다쳤을 때 산재보험을 청구할 수 있는 것도 그중 하나다. 하지만 이주 노동자 중에는 산재보험을 아예 모르는 이도 많았다. 안다 해도 사장의 심기를 거스르는 게 두려워 신청을 포기한 이도 있었다. 김 목사는 이들과 대화하며 법적으로 필요한 일은 없는지, 누구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지 알아봤다. 노동자들은 김 목사와 대화하면서 자존감을 회복하고 "권리를 주장해도 되겠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이제는 김 목사를 '김패스터'라고 부르며 따른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사업주들에게 김달성 목사는 달갑지 않은 존재다. 병원에서도 그를 반기지 않는다. 산재보험 신청을 대리하는 병원에서는 임의로 서류를 작성해 노동자에게 보여 주지도 않고 기관에 제출한 적도 있었다. 외상을 입게 된 경위를 노동자에게 불리하게 꾸미는 것이다. 김달성 목사는 이런 현실을 보며 과거를 떠올렸다.

"약 40년 전 노동자들이 얼마나 열심히 싸웠어요. 그때 노동자들이 바랐던 건 사람답게 대해 달라는 것이었어요.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이주 노동자들은 당연한 권리를 주장하는 겁니다. 기업형 농장에 가서 보면 정말 기가 찹니다. 근로 시간, 휴일 다 고용주 마음대로입니다. 사는 곳은 또 얼마나 열악하고요. 이게 현대판 노비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시대가 변했다고 하지만 우리 주변에 조금만 눈을 돌리면 여전히 이런 일들이 도사리고 있더라고요."

1년 남짓 되는 시간 동안 이주 노동자들과 함께하면서 한국인들의 볼썽사나운 모습도 많이 봤다. 김 목사는 여전히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지 않고, 그 사람의 출신국으로 평가하는 모습이 한국 사회에 남아 있는 걸 보고 적잖이 놀랐다고 했다. 김 목사는 "가난한 나라에서 온 사람은 천대해도 된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교회 다니는 사람도 다를 게 없더라"고 말했다.

김달성 목사는 지난해 산업재해 피해자 증언 대회에 참석해 이주 노동자들이 처한 현실을 고발하기도 했다. 맨 오른쪽이 김달성 목사.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홈페이지 갈무리

김달성 목사는 이런 현실에 저항하기 위해 이주 노동자들과 함께 '우리는 노예가 아니다'라는 선언서를 지난해 4월 작성했다. 이 선언서에는 △저임금-장시간 노동 금지 △욕설·폭행·성희롱 금지 △근로계약 준수 △고용 허가제 폐지 등 이주 노동자 권리 실현을 위한 기본 내용이 담겨 있다. 김 목사는 오늘도 병원에서 처음 만나는 이주 노동자들에게 이 같은 내용을 설명하고 필요한 것은 없는지 묻는다.

동행하는 게 목회이자 선교
노동자가 주인공 되는 교회·사회 꿈꿔

그가 세 들어 있는 오피스텔은 월세 30만 원이다. 여기저기서 김달성 목사의 사역 소식을 듣고 조금씩 후원하는 사람들이 있어 다행히 월세는 밀리지 않는다. 하지만 나머지는 전부 자비량으로 하고 있다. "생계가 힘들지 않느냐"는 질문에 김 목사는 "어차피 혼자 살기 때문에 들어갈 돈이 그리 많지 않다"며 웃었다.

지금 하는 일에 '이주 노동자 선교'라는 이름을 붙이면 후원을 받기 더 쉽지 않겠냐는 조금은 짓궂은 질문을 해 봤다. 김달성 목사는 손사래를 치며 "'돕는다'는 말을 쓰는 것도 조심스럽다. 그냥 그들과 벗이 되고 함께하는 것 자체가 목회라는 생각으로 하고 있다. 마태복음 25장에 나온 것처럼 지금은 이주 노동자들이 '지극히 작은 자'라는 생각으로 하루하루 보내고 있다"고 말했다.

김달성 목사는 은퇴할 때까지 이 일을 계속하고 싶다고 했다. 그는 "처음 목사로 부르심을 받았을 때, 노동자가 주인공 되는 사회, 노동자가 하나님의 창조 역사에 동역하는 주체, 그런 노동자들이 함께 어울리는 교회를 꿈꿨다. 목회 말년에야 이 부르심을 이어 가게 돼 기쁘다"고 말했다.

김달성 목사가 일하는 오피스텔에 붙어 있는 문구. 김 목사는 이주 노동자들을 도우려는 게 아니라 그들의 벗이 되고 싶은 것이라고 말했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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