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토록 강력하고 집요한 악의 정신이 지배해도
자기 영혼을 잃지 않고 희미한 등불로 서 있는 사람
어디를 둘러 보아도 희망이 보이지 않는 시대에
무력할지라도 끝끝내 꺾여지지 않는 최후의 사람

최후의 한 사람은
최초의 한 사람이기에
희망은 단 한 사람이면 충분한 것이다

-박노해,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중

조지송 목사님이 별세하신 지난 1월 22일 저녁, 민중 교회 목회자들과 함께 유족들을 위로하며 드린 추모 예배에서 제가 설교할 때 인용한 시입니다. 이 시의 '최후의 사람'은 숨은 의인으로, 다름 아닌 조지송 목사님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분을 아는 이들은 다 동의할 것입니다. 더 나아가 조 목사님은 자기 삶을 통해 갈릴리 예수를 생생하게 드러내신 분입니다.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이들의 친구였던 예수님처럼, 목사님은 평생 생존권을 빼앗기고 공돌이·공순이로 폄하되던 노동자들의 친구로 사셨습니다. 또 목사님이 영등포산업선교회에서 보여 준 사회적 영성은 민중신학 형성에 결정적으로 기여했습니다.

구약성서 이사야 53:2-4의 말씀이 조 목사님을 잘 그려 냅니다.

"그는 주님 앞에서, 마치 연한 순과 같이, 마른 땅에서 나온 싹과 같이 자라서, 그에게는 고운 모양도 없고, 훌륭한 풍채도 없으니,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모습이 없다. 그는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고, 버림을 받고, 고통을 많이 겪었다. 그는 언제나 병을 앓고 있었다. (중략) 그는 실로 우리가 받아야 할 고통을 대신 받고, 우리가 겪어야 할 슬픔을 대신 겪었다."

산업 선교를 개척하신 목사님에게서는 선구자·지도자의 위세나 우월 의식은 전혀 찾을 수 없었으며, 다정다감하셨지만 원칙적이셨고, 기업주의 횡포와 불의, 독재 정권에는 단호하셨습니다. 늘 허름한 점퍼를 입고 다니셨는데 언제 어디서나 당당하셨습니다. 그래서 군사독재 권력도 목사님의 신념을 꺾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제가 장신대 신대원을 마치고 1983년 영등포산업선교회에서 노동자 사역을 시작할 때, 초대 총무이셨던 조지송 목사님에게 5개월간 노동 훈련을 받았습니다. 저는 신분을 속이고 공장에서 일하면서 매주 한 번씩 목사님에게 노동자 생활을 점검받았습니다. 오로지 현장 노동과 노동자들과 어울리는 것에 집중하도록 교육받았습니다. 목사님은 이론이나 조직보다는 노동자의 고통스런 삶에 공감하는 것을 훈련시키셨습니다.

목사님의 약력을 보면, 주목할 것이 별로 없을 정도로 한눈팔지 않고 현장 중심으로 사셨습니다. 황해도 황주에서 태어나 한국전쟁 때 월남해 결혼하고, 신학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노동을 체험하고, 1963년 한국교회 최초로 산업 전도 목사로 안수받아 이듬해 영등포산업선교회에 부임해 19년간 사역하셨습니다. 무리하신 탓에 지병이 악화해 산업 선교 일선에서 은퇴하고, 충북 청원군의 농촌에서 살다가 판교로 이주해 10여 년 투병하신 것이 이력의 전부입니다. 저서도 없고 목사 외에 특별한 직책(영등포산업선교회 총무직도 부담스러워하셨습니다)을 맡으신 것이 없을 정도로, 오로지 산업 선교와 노동자에 집중하셨던 것입니다.

오로지 노동자들과 같이 울고 웃으며 삶을 동행하신 사실은, 대화를 나눌 때도 알 수 있었습니다. 자기 이야기는 하지 않으시고 항상 노동자들의 어려움과 고통을 말씀하셨습니다. 공안 정보기관에 감시당하고, 권력의 사주를 받은 매스컴에 의해 빨갱이라고 매도당하고, 주류 교회로부터 비성경적이라고 비판을 받았지만 개의치 않았습니다. 일부러 낮은 사례비를 받고 밤새워 일하시며 온갖 어려움을 겪으셨지만, 한 번도 본인의 고초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을 듣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신학은 달랐지만 인간적인 따뜻함으로 지원해 준 방지일 목사님에 대한 감사의 뜻을 여러 번 밝히셨습니다, 나이 들어 변절하는 이들이 두드러지는 까닭에, 보상 의식의 작동을 신앙으로 누르시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초지일관하신 목사님의 사역은 더욱 소중하게 여겨집니다.

조 목사님은 일찍이 노동자들의 대안적 삶에 대한 창의적인 모색으로, 국내 최초의 신용협동조합과 주택조합 등을 설립하셨습니다. 노동자들을 인간답게 대우하는 폐타이어 재생 공장을 운영하기도 하셨습니다. 한편 목사님은 감성이 풍부하셔서 노래를 만들고 시를 쓰시고 사진을 찍고 그림을 그려서 카드로 보내 주시기도 했습니다.

노동문제에 집중하셨던 목사님은 노동자들이 자기에게 신앙과 신학을 가르쳐 준 스승이었다고 고백하시며, 노동자를 예수로 여기고 정성을 다해 섬기라고 신신당부하셨습니다. 1970년대 초부터 영등포산업산업선교회가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해 더욱 적극적으로 일하면서, 기성 교회의 기업주 장로들과 갈등이 깊어져 교회 후원이 끊겨도 노동자 중심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럴수록 "노동조합이 곧 노동자들의 교회"라는 확신이 더 커진 것 같습니다.

목사님은 열린 마음으로 일하셨기에, 공장에서 예배하고 성경을 공부하는 '산업 전도'가 노동자들에게 거부당하는 것을 아시고는 과감하게 이를 포기하고 노동자의 권리 향상에 집중해 '산업 선교'라는 새로운 길을 열었습니다. 많은 소그룹 활동을 통해 깨어난 노동자들이 노동 현장에서 민주 노조를 세우고 어용 노조를 민주화하는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고, 이로써 우리나라 민주 노동운동의 초석이 놓였습니다.

추모 예배 설교에서 제가 인용한 박노해의 시는 "그대, 희미한 불빛만 살아 있다면 /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로 끝납니다. '바보들의 행진'을 이끄시어 우리 시대 노동자들과 교회의 희망이 되신 조지송 목사님을 이제는 다시 뵐 수는 없지만, 남아 있는 이들이 목사님의 신앙, 노동자 사랑, 삶의 철학, 치열한 현장성을 되살려 내면 목사님은 사라지지 않고 끝까지 영원한 불빛이 될 것입니다. 일생 동안 자유를 위해 헌신하신 존경하는 목사님, 하나님나라에서 자유를 만끽하옵소서.

자유 찾아가는 길이 멀고 험해도 우리 모두 손을 잡고 그 길로 나가자
정의 없이 평화 없다 큰 소리 외치며 평화 위한 우리 주장 만방에 전하자

-조지송 작사·작곡, '자유찾아가는 길' 1절

이근복 / 목사, 성균관대학교와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을 졸업했다. 영등포산업선교회 총무, 새민족교회 담임목사,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교육훈련원장을 거쳐 현재 크리스챤아카데미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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