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적 사고는 신에 대한 인간의 사유를 계시라고 여긴다. 예컨대 사람의 손에 의해 기록된 성경을 신의 계시라 읽는 것이다. 여기에는 증명할 수 없는 악무한惡無限이 숨어 있다. 과연 신은 존재하는가? 존재한다면 어찌 이 세상에 악이 관영하고, 강한 자가 약한 자를 괴롭히며, 순진한 어린 아기들의 죽음을 방관하고, 자연 재해의 악이 현실로 다가오게 하는가. 이런 질문 앞에서 신학자들은 할 말이 없다. 침묵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신의 부재증명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한계가 있다. 아퀴나스 역시 신의 존재 증명을 하겠다고 나섰지만 그의 주장 역시 공허한 되울림을 보내올 뿐이다.

신은 사실 존재 증명이나 부재증명 대상이 아니다. 여기에 함정이 있다. 신을 향한 신앙이 신의 이름을 오용하는 악무한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신의 이름으로 일어나는 거짓·위선·착취·폭력·살인이 인류의 역사 속에서 끝없이 일어났어도 여전히 그 바탕은 드러나지 않았다. 오래된 서구의 거대한 교회들은 하나님이 살아 역사했다는 진실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 종교를 지향했던 성직자들의 폭력과 착취의 증명이며, 그 유산을 자랑스럽게 이어받는 이들 또한 폭력과 착취적 종교의 속성을 사랑하는 이들이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허공에 달아 놓고 그들은 그들의 화려한 욕망을 가득 채웠다. 이렇듯 종교는 하나님 신앙을 오용한다. 그러므로 탐욕에서 유발된 착취와 폭력에서 스스로를 해방하고 사회정의와 인간의 자유를 사랑하지 않는 종교는, 사실 그 화려함 속에서 허무와 신의 부재증명을 드러내고 있는 셈이다. 이제는 사람들이 그곳에서 하나님을 찾지도 않는 관광 유산일 뿐이다. 이런 유물 속에 갇힌 하나님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아니다. 그런 하나님은 니체의 눈에는 죽어 버린 하나님, 아니, 진실과 정의와 자유의 생명력이 사라진 하나님, 그러므로 죽은 하나님이다.

신의 부재는 우리가 온갖 선함과 정의로움과 자유와 아름다움의 원천으로 여기는 신의 속성이 우리 안에서 부정될 때 일어난다. 그대가 선에 대한 믿음과 신념을 버리고 악의 수하가 될 때, 정의를 향한 갈망이 그대 내면에서 그칠 때, 그리고 더 이상 삶의 아름다움을 찾거나 관조하려 하지 않을 때, 신은 사실 그대에게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대는 여전히 신에 대하여 설교할 수는 있겠지만 그대 스스로 공허한 가슴을 쓸어내리며 살아야 한다. 그대가 정말 신실한 사람이라면, 나는 신의 존재 증명을 다른 데에서 찾으려 할 것이 아니라 그대의 정신세계에서 진실과 정의와 자유를 향한 그리움이 남아 있는지 스스로 묻는 데에서 찾아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그리움이 남아 있다면 그 그리움의 원천으로서의 하나님은 부정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그대를 끊임없이 진실과 정의와 자유로 부르고 계실 것이다.

오늘 아침, 서지현 검사와 안태근 전 검사장이 뉴스에 나왔다. "진실과 정의를 밝히는 길이 이리도 어려웠다"는 서지현 검사의 소회를 들으며, 나는 "진실과 정의"를 지키는 것을 소명으로 삼아야 할 검찰에 그 소명을 버린 자들이 득세하고 있다는 것으로 알아들었다. 검찰이라는 권력기관의 고위직을 가지고 있었던 안태근의 정신 속에서는 진실과 정의를 지키라는 검찰의 소명이 죽어 있었다. 그는 그저 한 개인으로서 동료 부하 여성 검사를 성추행한 것이 아니라, 검찰의 고위 권력자로서 동료 검사를 성추행한 것이다. 여기에는 성폭력범의 추잡함과 더불어 권력을 오남용하던 그의 습성이 깊이 배어 있었다. 그가 그동안 저지른 범죄적 행위가 얼마나 많았을까. 그의 권력에 의하여 정의와 진실이 얼마나 많이 가려졌을까 생각하게 된다. 공권력을 가진 공인이 그에게 맡겨진 권력을 오남용할 때에는 공과 사를 나누는 명료한 선을 흐려 버리는 방편을 택한다. 이런 행위는 법조계만이 아니라 종교계에서도 뿌리가 깊다.

공권력을 자의에 따라 오남용하는 자에게 어찌 정의를 구하고 진실을 지키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는 어느 교회 새벽 기도회에 나가 기도드린다고 했다. 과연 그의 신은 어떤 존재일까. 그의 추잡한 삶을 이어 가도록 방임하는 그의 하나님은 추잡한 하나님이다. 예수가 광야에서 추상과 같은 기준으로 마귀의 유혹을 물리치며 우리에게 일러 주던 그런 말씀의 하나님이 아니다. 오늘의 한국교회는 추잡한 하나님 신앙에 매료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신자들이 드린 수백억대의 비자금을 슬며시 감추어 두는 목사의 하나님, 전대미문의 거대한 액수의 퇴직금을 받아 챙기는 목사의 하나님, 그리고 구원을 갈망하여 하나님을 찾아온 여신도들을 성폭행해 온 목사의 하나님은 추잡한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한 분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틀린 것이다. 아니, 사람이 만드는 하나님은 참으로 여럿이다.

지난 2018년 한국교회 10대 뉴스를 살펴보니,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존재 증명의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 부재증명의 기표가 되고 있다. 세습족들의 행태가 1위, 한반도 평화 논쟁이 2위, 동성애 논란이 3위, 신도 성폭력이 4위, 이슬람 난민 이슈가 5위, 그루밍 성폭력이 6위, 가짜 뉴스의 진원지 보수 기독교가 7위, 대형 교회 목사 법원 판결 등이 우선순위에 들었다. 물론 이런 비위에 휩싸인 한국교회와는 달리 많은 교회에서는 정의와 진실, 자유와 평등, 사랑과 평화의 소식 전해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소리보다 하나님의 부재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한국교회는 온갖 파렴치한 짓을 벌이는 성직자들이 우글거리는 곳이 되어 가고 있다. 문제는 이런 파렴치한 일에 신도들도 익숙해지고 있다는 것이며, 나아가 신도들조차 파렴치한 행위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기독교 변종적 신앙인으로 양산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은 파렴치한 자기 목사를 옹호하며 마치 자신들이 하나님 신앙의 존재 증명자라도 되는 듯 오만한 행동도 불사한다. 이런 교회 안에서 부패하고 타락한 우리 사회를 바로잡을 수 있는 '진실과 정의'의 맑은 소리가 들려올 수 있을까? 안근태 같은 신자를 키워 주는 교회에서?

세습에 성공한 목사들이 주변의 환호를 받으며 영웅 대접을 받고 있는 한국교회, 그리고 그들을 영웅으로 모시는 졸개 목사들, 나는 그들에게 과연 예수가 일러 준 하나님 신앙이 있는지 의문한다. 최고의 권력을 누리며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법원의 독립을 자해하며 권력형 비리를 일삼아 온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구속되었고, 동료 검사를 성추행하던 안태근이 징역형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되었다. 이 나라 검찰과 법원에는 그래도 일말의 양심과 정의의 기류가 흐르고 있다는 것에 대하여 나는 감사한다. 그러나 한국교회 안에 만연한 부정과 부패, 독직과 권한 남용, 성폭행과 사사화의 범죄는 누가 단죄할 것인가. 그들의 범죄는 시간이 지나가면 저절로 덮이고 어느 누구도 들추어내 바로잡으려 하지 않는다. 이렇듯 정의의 기준을 잃어버린 한국교회는 정의와 진실에 대한 신념을 버린 성직자들이 활개치는 자리가 되고 있다. 어느 페친의 주장대로, 마귀가 존재하고 있다면 마귀는 이미 부패한 성직자들의 정신과 그들이 진 치고 있는 교회를 사로잡고 있는 셈이다.

광야에서 예수를 시험하던 마귀는 예수를 이기지 못하여 그를 떠나갔지만, 탐욕과 권력의 노예가 된 성직자 주변에서 희희낙락하고 있는 마귀는 없을는지…. 이 시대 우리가 찾아야 할 참된 신앙의 길은 거대한 무리가 모이는 권력 종교의 길이 아니라 참으로 지난한 좁은 길이어야 한다. 그래서 예수도 우리에게 "사람들이 많이 가는 넓은 길을 가지 말고 좁고 협착하고 어려워 찾는 이가 없는 좁은 길"을 가라 하셨을까.

박충구 / 감신대 은퇴교수

※ 위 글은 2019년 1월 24일 박충구 교수가 페이스북에 올린 것입니다. 허락을 받아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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