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안을 향한 신학'과
'교회 밖을 향한 신학'

나는 두 학교에서 신학 수업을 받았는데, 그 두 신학교의 목표는 매우 달랐습니다. 첫 번째 학교는 제가 학위를 받았던 연세대학교입니다.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기독교 대학이지만, 사실 신학과가 있고 채플이 있다는 것 말고는 세속 대학과 별반 다를 것이 없습니다. 이런 대학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신학과의 목표는 '세속 사회, 세속 학문과 기독교, 기독교 신학의 접점 찾기', '기독교인뿐만 아니라 타 종교인, 비종교인에게 기독교적 교양을 전달하기' 등이었습니다. 두 번째 학교는 목회학 석사(M.Div.) 과정을 거쳤던 고려신학대학원입니다. 그곳에서 공부하며 계속 고민한 문제는 '어떻게 하면 올바른 교회를 만들어 갈 수 있을까'였습니다. 아마 다른 신학교 신학생들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목회자의 소명을 받은 신학생들은 좋은 목사가 되어 좋은 교회를 만들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공부하고 있을 것입니다. 정리하자면, 양쪽 모두 좋은 기독교인이 되어야 한다는 목표는 동일하지만, 고려신학대학원은 '교회 안을 향한 신학', 연세대학교 신학과는 '교회 밖을 향한 신학'을 지향하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상이한 신학적 지향점은 20세기를 대표하는 두 명의 개신교 신학자들, 칼 바르트와 폴 틸리히에게서도 나타납니다.1) 바르트의 신학은 '교회 안을 향한 신학'입니다. 그는 신학(교의학)이란 "하나님에 관한 말의 내용에 관해서 그리스도교 교회가 수행하는 학문적인 자기 검토"라고 말합니다.2) 다시 말해, 신학은 교회의 고백이 올바른 것이 될 수 있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그 고백을 "비판하고 수정"하는 학문이라는 것입니다.3) 물론 바르트가 늘 교회만 바라보며 신학 작업을 한 것은 아니지만, 그에게 신학의 1차적 사명은 교회의 올바른 신앙고백이었습니다.

이와 달리 틸리히의 신학은 '교회 밖을 향한 신학'입니다. 그에게 신학이란 "교회의 기능으로서 교회의 필요에 봉사"하는 학문이며, 그 필요는 새로운 세대, 새로운 상황에 적합하게 기독교의 진리를 "해석"하는 것입니다.4) 이를 위해서 그는 변화하는 상황이 제기하는 실존적인 철학적 물음에 기독교의 상징 언어로 대답하는 '상관관계' 방법이라는 것을 나름대로 제안했던 것이지요. 올바른 신앙고백이 1차적 관심이었던 바르트와는 달리, 틸리히의 1차적 관심은 변화하는 상황 속에 있는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게 진리를 제시하는 것이었습니다.

<문화의 신학> / 폴 틸리히 지음 / 남성민 옮김 / IVP 펴냄 / 280쪽 / 1만 5000원. 사진 제공 IVP

종교, 궁극적 관심, 
그리고 그 표현으로서의 문화

'교회 밖을 향한 신학'을 추구했던 틸리히에게 인간의 삶으로서의 '문화'는 매우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하나님은 '무한'할지라도 그 하나님을 수용해야 할 인간은 '유한'한 상황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한과 유한의 관계 설정은 신학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였지요. 이 문제를 고민한 것은 비단 틸리히만이 아닙니다. 칼뱅 역시 <기독교강요>에서 '하나님의 후회하심'과 같은 표현이 성경에 나오지만, 이것은 실제로 하나님께 인간과 같은 감정이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의 수준에 맞추어 계시하심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그것을 '맞추심'(accommodation)이라고 했지요.5) 무한한 하나님과 유한한 인간의 질적 차이에도, 하나님을 표현할 수밖에 없고, 표현해야 하는 유한한 인간의 상황을 칼뱅도 이미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고, 이는 바르트, 틸리히 등을 위시한 모든 신학자에게 공통적으로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유한한 상황에 처해 있는 인간은 자신의 상황이 어떠한지 끊임없이 고민하는 한편, 학문·정치·경제·예술·과학 등으로 그 상황을 표현합니다. 그런데 표현이 있기 위해서는 먼저 상황에 대한 앎이 있어야 하고, 또 그 이전에 상황에 대한 질문과 고민이 있어야 하는데, 이 상황에 대한 질문과 고민이 발생하는 계기는 일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갑자기 찾아오는 어떤 놀라움, 자각, 깨달음을 통해서 상황에 대한 고민과 물음이 발생합니다. 아무런 의식 없이 살아왔던 삶이 갑자기 낯설게 되고, 그 문제와 진지하게 직면하게 되는데, 바로 그것이 '종교', '궁극적 관심', '궁극적으로 관심을 가지게 된 상태'입니다.

틸리히는 이 '궁극적 관심'이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지상명령의 추상적 번역이라고 말합니다.6) 여기에서 주의해서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사랑은 강제적으로 명령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사랑하라'고 명령하십니다. '명령된 사랑'은 대단히 이상한 것이지만, 사랑의 경험이 있는 사람은 사랑이 불가항력적인 명령과 같이 자신에게 다가온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거부하고 싶어도 거부할 수 없도록 내 온 존재가 상대방에게 사로잡히게 되는 것이 사랑입니다. 궁극적 관심은 그런 것입니다. 내가 어떤 대상에게 스스로 관심을 기울이는 것도 아니고, 어떤 대상의 권위에 굴복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 무언가 - 주체와 대상의 분리 이전의 것 - 에 불가항력적으로 사로잡혀서 온 존재를 기울이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궁극적 관심'입니다.

이 '궁극적 관심'은 문화를 통해서 표현됩니다. 그래서 문화에는 인간의 실존적 물음이 담겨 있습니다. 궁극적 관심에 사로잡힌 자는 문화적 창조 활동을 통해서 불안·소외·무의미·혼란 등 인간 실존의 문제를 표현하게 되는데, 누구는 '과학'(아인슈타인)으로, 누구는 '예술'(피카소)로, 누구는 '경제'(마르크스)로, 누구는 '철학'(칸트)으로, 누구는 '정신분석학'(프로이트)으로 표현합니다. 세속 학자들은 그 문화를 문화 자체로 이해하고자 하지만, 신학자 틸리히는 그 문화들 속에서 작용하는 '종교', '궁극적 관심'을 읽어 냅니다. 그 종교적 관심이 문화들 속 깊은 곳(depth)에 있고, 문화는 그 관심이 드러나게 된 매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틸리히는 '종교는 문화의 실체이고, 문화는 종교의 형식이다'라는 유명한 명제를 제시했던 것이지요.

이것을 조금 전통적인 방식으로 말해 보겠습니다. 문화는 결코 하나님과 별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별개로 존재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이원론'의 함정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창조하심으로 말미암아 있게 된 것이며,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보존되고 있습니다. 인간이 살아가는 삶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 교회만이 하나님의 통치 영역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이방 민족, 비신자 또한 그 영역에 속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모든 문화는 하나님의 다스림 속에 있다고 말할 수 있고(사탄, 또 고레스 왕도 사용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합시다), 사람들은 그 다스림 속에서 문화를 창조해 온 것입니다. 따라서 신학자는 문화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물론 문화의 구원의 문제는 논의해야 할 또 다른 문제겠지요.)

틸리히 신학에서
<문화의 신학>의 위치

틸리히는 <조직신학>에서 신학의 두 축으로 상황과 기독교 메시지를 제시합니다. 그런데 이 책 <문화의 신학>은 후자, 기독교 메시지를 설명하는 책이라기보다 전자, '상황'을 설명한 책입니다. 상황과 연관하여 기독교 메시지를 해석하는 작업은 그의 <조직신학>에서 이루어졌지요. 이 <문화의 신학>을 통해서 독자들이 주로 알게 되는 것은 틸리히가 상황을 이해하는 철학적 틀과 문제의식입니다. 특히 1, 2, 3, 4, 5, 7장은 틸리히 신학의 철학적·이론적 틀과 문제의식을 알려 주는 중요한 작품들입니다.

이런 이유로 이 책 <문화의 신학>은 그의 <조직신학>을 읽기 위한 예비 단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신학 작업으로서의 문화의 신학은) 모든 문화적 표현들 배후에 있는 신학을 분석하여, 철학, 정치 체계, 예술 양식, 일련의 윤리적, 또는 사회적 원리들의 근거에 있는 궁극적 관심을 발견하려는 시도이다. 이 임무는 종합적이라기보다는 분석적이고, 조직적이라기보다는 역사적이다. 그것은 조직신학자의 작업을 위한 예비 작업이다."7)

다른 한편으로 이 책은 <조직신학>이 실제로 적용된 사례 모음집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틸리히는 '문화의 신학'과 '조직신학'의 관계에 관해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우리의 문화적 실존의 구체적 문제들에 이 원리들을 적용하는 것은 구성적인 문화 신학의 임무이다. 조직신학은 원리들을 진술하는 것으로 제한되어야 한다."8) 다시 말해, <조직신학>에서 연구된 원리들을 구체적 상황에서 적용한 것이 <문화의 신학>이라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신학의 원리들을 규명한 <조직신학>과 그 원리들을 규명하기 위한 예비 작업인 동시에 그 원리의 적용이기도 한 <문화의 신학>은, 상황과 기독교 메시지라는 틸리히 신학의 두 축에 해당하는 양 기둥과 같은 작품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진 제공 IVP

<문화의 신학>의 목적

틸리히는 <문화의 신학>의 마지막 글 '기독교 메시지의 소통'에서, 복음을 소통한다는 것은 상대방으로 하여금 믿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찬성하거나 반대할 수 있도록 복음을 제대로 제시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과거의 문화적 형식으로 계시적 진리를 현대인들에게 전하면서, 그것을 믿지 않는 책임을 현대인들에게만 돌리는 것은 올바른 제시 방법이 아닙니다. 상대방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그가 알아들을 수 있게 제시하는 것이 올바른 방법일 것입니다. 틸리히의 의도는 결국 그것을 하자는 것이고, <문화의 신학>이 보여 주는 모든 작업은 그 목적에 초점을 맞춘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제시했다고 해서 반드시 상대방이 기독교 메시지를 수용하게 된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제시된 기독교 메시지, 제시된 복음에 대해서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것은 결국 상대방의 결단 문제이고, 또 찬성하도록 결단케 하는 것은 결국 '성령'의 사역일 것입니다.9) 인간의 열심,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복음을 소통함에 있어서, 인간 능력의 한계와 함께 기독교인들이 힘써야 할 노력의 방향을 제시했다는 점은 오늘날의 부흥주의적 신학에 깊이 침윤되어 있는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신학과 세상의 소통을 소망하며

역자 개인의 우려입니다. 과거 독재 정권 시절 민주화 운동을 하던 사람들이 감옥에 갔을 때, 그들은 감옥에서 몰트만의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같은 신학책을 읽으며 용기를 얻었다고 합니다.10) 교회의 이야기에 관심을 가졌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지금 교회 밖 사람들은 신학책을 읽지 않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신학자의 책이라 해도 말입니다. 그들은 기독교에 관심조차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믿음이 없기 때문에 당연한 일일까요? 탈기독교적 경향이 만연한 모든 곳에서 그럴까요? 아닙니다. 유럽의 교회 밖 학자들은 신학을 연구하여 신선한 통찰을 얻고 있습니다. 지젝, 아감벤, 바디우, 데리다, 이글턴 같은 학자들 말입니다.11)

이에 반해, 한국의 지성인들은 기독교에, 신학에 관심이 없습니다. 아마 한국교회가 한국 사회에서 올바른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고, 실망스러운 모습을 많이 보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니 신학이라는 학문마저도 거들떠보지 않게 되는 것이고, 교회 스스로, 그리고 교회 밖 사람들이 쌓아 올리는 벽이 높아져만 가는 것이지요.

그래서 틸리히의 <문화의 신학>이 필요합니다. 20세기 최고의 신학적 지성이 현대의 상황, 문화를 어떻게 읽어 내고 있는지, 세상과 어떻게 소통하고 있는지, 대학의 채플실을 기독교인뿐만 아니라 비기독교인들로 꽉 채웠던 틸리히의 소통의 힘이 무엇이었는지, 지금 우리 한국교회는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살펴보고 세상과 소통하는 단서를 얻어야 할 것입니다. 게토가 되어 가는 교회가 다시 세상과 소통하게 되기를, 또 그 일에 <문화의 신학>이라는 작은 책이 자그마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기를 역자로서 진심으로 바랍니다.

1) '폴 틸리히'(Paul Tillich)라는 이름을 독일어식으로는 '파울 틸리히'로, 영어식으로는 '폴 틸릭'으로 읽어야 합니다. 하지만 저는 성은 '틸리히'라는 독일어로, 이름은 '폴'이라는 영어로 읽고자 합니다. 그 이유는 틸리히의 신학적 뿌리는 독일이고, 그가 신학적으로 만개했던 주요 활동 무대는 미국이기 때문입니다. 두 문화에 걸쳐 있는 그의 삶의 궤적을 반영하여 '폴 틸리히'라고 읽고자 하는 저의 의도를 틸리히 본인도 기꺼이 동의해 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2) 칼 바르트, <교회교의학 Ⅰ/1>, 박순경 옮김(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3), 27.
3) 칼 바르트, <교회교의학 Ⅰ/1>, 31.
4) Paul Tillich, <Systematic Theology>(Chicago: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51), 3.
5) 존 칼빈, <기독교강요 상>, 원광연 옮김 (고양: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03), 1.17.13. "우리가 연약하여 하나님의 그 높으신 상태에까지 도저히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하나님을 묘사할 때에는 우리의 역량에 맞추어 묘사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이해할 수 있도록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게 우리에게 맞추어 표현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 자신의 본연의 모습 그대로가 아니라 우리에게 비쳐지는 모습대로 자신을 표현하는 방법을 사용하시는 것이다."
6) Tillich, <Systematic Theology>, 11.
7) Tillich, <Systematic Theology>, 39.
8) Tillich, <Systematic Theology>, 149.
9) 틸리히는 고린도전서 12:1-12을 본문으로 한 '신학자'라는 설교에서, 이 문제를 다룬 바 있다. Paul Tillich, <The Theologian(PARTⅠ)>, The Shaking of the Foundation (Harmondsworth, Middlesex: Penguin Books, 1962), 122-5. "(바울은) 말한다.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는 자는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도 성령으로서가 아니면 '예수는 주다'라고 말할 수 없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수용하는 자는 바로 그 수용을 통해서 자신이 하나님의 영을 받았음을 증명한다. 인간의 정신만으로는 '내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수용한다'라는 진술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10) 위르겐 몰트만,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그리스도교적 신학의 근거와 비판으로서의 예수의 십자가(몰트만 선집3)>, 김균진 옮김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17).
11) 유럽 정치철학의 '종교적 전회'에 관해서 김성민, <바울과 현대철학>(서울: 새물결플러스, 2018)을 참고.

남성민 / 연세대학교 신학과와 동 대학원(조직신학, Ph.D.), 고려신학대학원(M.Div.)에서 공부했다. 현재 대구 시온성교회 대학청년부 담당목사로 섬기고 있다. 논문으로 <폴 틸리히의 구원론 연구>(박사 학위논문)가, 옮긴 책으로 <문화의 신학> (IVP), <루터전집 47>(공역, 출간 예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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