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새해 첫날, 북한산 기슭의 영락기도원에 올랐습니다. 학창 시절, 집 근처 기도원 옆 계곡에 자주 갔었기에 친근한 곳입니다. 입구에 한경직 목사님의 '五천만을 그리스도에게로!' 돌비의 글귀가 맞아 주었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이 유신 독재 정권과 타협하였기에 민족 복음화 운동의 가치에 대한 의구심이 크지만, 그래도 대다수 한국교회를 전도 중심으로 묶어 낸 기치旗幟였습니다. '한국교회는 우리 사회에서 무엇으로 가치 있는 역할을 할 수 있을까. 그러기 위해 한국교회를 어떻게 재구성해야 하나.' 한국교회를 염려하는 이들을 짓누르는 과제입니다.

<초대교회사 다시 읽기>(홍성사, 2018)에서 최종원 교수(벤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가 던지는 말이 의미심장합니다.

"교회 역사에서 주류 교회가 자신을 내려놓고 변화를 추구한 역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본질에 대한 통찰, 원천적 가치에 대한 천착, 이것이 진정으로 필요한 때이다. 진정한 급진성은 신학적 사유의 진보성, 개방성에 근거하기보다, 복음의 근원적 가치를 지켜 나가기 위한 타협 없는 용기와 실천에서 찾을 수 있다. 역사상 위클리프, 후스, 루터, 웨슬리 등 많은 개혁가들이 이단으로 몰려 탄압과 비판을 받았다. 개혁을 꿈꾸는 이들은 이런 의미에서 급진적이어야 한다." (195쪽)

일제강점기 복음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타협하지 않은 주기철 목사님을 떠올립니다.

"예수님을 위하여 이제 당하는 이 수욕을 내가 피하여 이 다음 주님이 '너는 내 이름과 내 평안과 내 즐거움을 다 받아 누리고 내가 준 그 고난의 잔을 어찌하고 왔느냐'고 물으시면 내가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주님을 위하여 져야 할 십자가, 주님이 주신 이 십자가를 내가 피하였다가 주님이 이 다음에 '너는 내가 준 십자가를 어찌하고 왔느냐'고 물으시면 내가 어떻게 주님의 얼굴을 뵈올 수 있겠습니까? 오직 나에게는 일사각오가 있을 뿐입니다."

다섯 번째 구속되기 직전 산정현교회 제직들에게 아모스 8장 11-13절을 읽고 전한 마지막 설교입니다.

주기철 목사는 1897년 경남 창원군 웅천의 부유한 집안에서 출생, 오산학교에 입학하여 이승훈·조만식 선생 등에게 민족 교육을 받았고, 평양신학교 졸업 후 초량교회를 거쳐 마산 문창교회에서 시무하였으며, 1936년 평양 산정현교회에 부임하였습니다. 그가 평양신학교 부흥회에서 한 '일사각오'一死覺悟란 제목의 설교는 신사참배 반대 운동의 도화선이 되었고 이로 인하여 검거되었습니다. 1938년 2월 1차로 검속 투옥된 이후 1944년 4월 21일 평양 감옥에서 순교할 때까지 7년간 감옥에서 모진 고초를 겪었습니다. 그의 신사참배 반대 투쟁은 전국의 투쟁자들을 격려했고, 전국적으로 확산하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고유 종교인 신사 신도神社神道와 민간 신도를 국가 신도로 개편하고는, 천황을 절대적인 존재로 숭앙토록 하는 '천황제 이데올로기'를 정립하기 위해 신사 신도가 국가의 제사일 뿐 종교가 아니라는 주장을 통해 초종교적 절대 권력을 부여함으로써 국교적인 위치를 확립하였습니다. 거기다가 청일전쟁과 노일전쟁에서 신도를 군국주의와 결합하고 국민의 전의를 고양해 침략 전쟁으로 내모는 데 최대한 활용하였습니다. 일제는 신사참배를 우리 민족의 정체성 말살을 통한 황국 식민화와 침략 전쟁을 위한 노동력과 생명의 착취 수단으로 삼았습니다.

1925년 서울 남산에 조선 신궁을 건립하고 1930년대 들어 전시 체제를 강화하면서 신사참배를 강요했습니다. 공립학교를 넘어 종교계 학교에 참배를 강요하면서 기독교계와 첨예하게 갈등합니다. 신사참배를 거부한 학교장을 파면하고 폐교하였고 반대하는 선교사들은 본국으로 추방하더니, 마침내 개신교에서 가장 세력이 컸던 장로교회마저 굴복시켰습니다. 1938년 9월 10일,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열린 제27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이튿날, 총회 전 신사참배 반대 지도자들을 사전 구금하고, 선교사들과 총대들에게 참배 결의를 방해하지 않도록 엄중히 경고한 일제는 경찰을 동원하고 총대를 위협해 신사참배를 가결시켰습니다.

주기철 목사의 첫 부임지는 부산 초량교회로, 목사 안수를 받은 직후 1926년 1월 10일 초량교회 3대 담임목사로 부임하여 1931년 7월 5일까지 시무하였습니다.

초량교회 예배당. 이근복 그림

부산역을 마주한 초량동 언덕배기에는 '초량 이바구길'이 있습니다. '이바구'란 '이야기'의 경상도 방언입니다. 부산에서 가장 낙후한 동네였던 초량동에는 1876년 개항, 일제강점기, 한국전쟁과 피난 등 고단한 삶의 흔적들이 널려 있습니다. 특히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전국 피란민들이 산 중턱에 판잣집을 짓고 살아서 높은 곳에 마을이 형성되고 많은 계단이 생긴 것입니다.

초량 이바구길을 걸어 보니 참 정겨웠습니다. 초량초등학교 담장에는 이 학교 출신들을 소개하고 있는데, 이경규·박칼린 등을 볼 수 있었습니다. 168계단을 마주하니 아득했지만, 모노레일이 있어서 유유자적하게 타고 올라가 부산역과 부산항을 한눈에 볼 수 있었습니다.

이바구길 중심에 서 있는 교회답게, 초량교회는 127년의 긴 역사에서 항일운동과 신사참배 반대 운동, 한국전쟁 피난민들의 안식처로서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는 한국교회사의 보고입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이 지정한 한국 기독교 역사 사적지 3호로, 미국 북장로교 월리엄 베어드(William M. Baird) 선교사가 1892년 11월 설립한 한강 이남의 최초 교회입니다.

초량교회 근처에 있던 백산상회를 통해 독립운동을 한 애국지사 중에는 윤현태·윤현진 집사 등 초량교회 교인이 다수 있었습니다. 백산상회는 백산 안희제 선생이 1914년 세운 회사로, 상해임시정부와 광복군을 지원하는 군자금 모금에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초량교회의 항일운동 참여는 신망을 심어, 예배당 신축 헌금대장에 다수의 비신자 이름도 있다고 합니다.

6.25 전쟁이 일어나 피난민들이 물밀 듯이 몰려왔을 때, 초량교회는 전국의 교역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의 난민 수용소로 기능했습니다. 뜰과 마당은 온통 천막으로 덮였고, 국난 극복을 위한 구국 기도회가 열렸으며, 교인들은 피란민 구호에 전심을 기울였습니다. 이런 역사 유산이 2011년 개관한 '초량교회 역사관'에 잘 보존되어 있어서, 해마다 2000여 명이 찾는다고 합니다.

한국교회가 이 시대의 우상인 맘몬, 성공주의, 시장만능주의를 거부하고, 힘겹게 사는 이들과 공감하고 연대하여, 감동적인 이바구를 만들어 내는 것이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는 길이 아닐까요.

*'그림으로 만나는 한국교회'는 매월 2차례 업데이트됩니다.

이근복 / 목사, 성균관대학교와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을 졸업했다. 영등포산업선교회 총무, 새민족교회 담임목사,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교육훈련원장을 거쳐 현재 크리스챤아카데미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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