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트리피케이션과 교회

최근 한국의 사회적 문제 중 하나로 떠오른 개념이 있다.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이다. 젠트리피케이션 개념의 핵심은 서민들이 모여 있던 옛 공간이 미학화로 소비주의의 구미에 부합되는 관심 공간으로 부각하면서 부동산 투기 자본이 집중되는 현상이다. 이로 인해 지역 원주민들, 지역 소상공인 임대 사업자들이 정작 그 지역에서 소외되고 밀려나는 결과를 맞이한다.

자연 발생적 미학적 가치를 함유한 벨트 생성이 오히려 그 지역에서 오랫동안 활동하던 이들을 밀어낸다는 논리다. 이러한 작동 기제의 근간엔 언제나 그렇듯 자본이 존재한다. 투기 자본의 탐욕에 의해 본 지역의 미학적 뿌리조차 소비재, 다시 말해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해 버리는 것이다.

필자는 젠트리피케이션 개념을 좀 더 확장해 살피고자 한다. 흔히 젠트리피케이션의 근거로 지형적 인접성을 꼽는다. 다르게 말해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이 나타나는 곳은 다수의 인구가 자연스럽고 무리 없이 이너 서클(Inner circle) 할 수 있는 대도시를 중심의 공간이라는 것이다. 큰 범주에서 보면, 이 현상으로 본래 자신들 자리에서 밀려나는 이들은 이너 서클이 아닌 아우터 서클(outer circle)의 궤도로 밀려나게 된다. 소외되고 밀려난 원주민들은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의 퇴적물 취급을 받는데, 이러한 취급에 대한 자조적 표현으로 '지방'1)이란 워딩을 사용하기에 이르는 걸 우리는 어렵지 않게 보게 된다.

이러한 사회적 현상에서 종교 시설은 과연 어느 정도로 심각성을 공유하고 있을까. 특히 한국 개신교는 어떨까.

한국 개신교 교회 건축은 여러 경우의 수로 분류되겠지만 대세는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보인다. 한 가지는 소비재, 곧 부동산 투기 자본이 집중해 몰리는 곳에 자리 잡은 교회는 더욱 그 위세를 확장하거나, 투기 자본의 중심으로 더 깊이 들어가려고 욕망하는 것에 집중한다. 다른 한 가지는 신도시를 목표로 잡고 교회를 선점해 지어 올리는 것이다. 두 가지 방법 모두 한 가지 공통분모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않는다. 바로 관심 공간의 중심에서 가장 화려한 신의 영광을 구현하고 싶은 욕망을 숨기지 않는다는 점이다.

경북 김천이라는 지방 도시에서 반세기 이상의 역사를 지닌 김천서부성결교회 건축 칼럼을 쓰고자 했을 때, 필자에겐 이 문제가 필연적으로 다뤄야 한다는 나름의 당위성으로 다가왔다. 한국 개신교의 종교 시설 전통에서 이너 서클의 반대 급부인 아우터 서클에 울며 겨자 먹기로 자리 잡은 교회와 지방의 관계, 이 관계를 새롭게 혁신하는 개신교 교회 건축의 토착화에 대한 미학, 더 나아가 그 미학이 어떤 건축학적 위치로 자리매김하는지를 살펴보는 건 향후 교회 건축의 미래를 진단하는 일까지도 포괄할 수 있다는 생각이 앞섰기 때문이다.

김천서부성결교회 예배당. 사진 제공 김천서부성결교회

지방, 욕망의 잔류물
혹은 또 다른 지점

개신교 교회 건축에 있어서 '지방'은 소비재의 욕망에 어떻게든 편입되려 애쓰는 동안 자연스럽게 퇴적되거나 잔류되는 개념이 되어 버렸다. 이 대목에서 지방의 종교 시설은 욕망의 뒤란으로 밀려난 소외의 퇴적물로 하향 평준화한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패잔병 같은 생각과는 다른 지정학적 위상, 곧 욕망의 방향성과 무관한 독립적 미학 가치를 인정받는 움직임 역시 선명해지는 것이 사실이다.

지방의 교회 건축을 바라보는 시선은 두 가지다. 한 가지는 지방 교회를 대도시 중심의 개신교 교회 문화에서 이탈된 일종의 젠트리피케이션 개념으로 인식하는 경우다. 소외된 교회로 인식하는 것이다. 이를 더 위악적인 성공 위주의 개신교 개념으로 견주어 보면 실패하거나 주류에서 밀려난 교회로 보는 인식으로 하향 진화한다.

그렇지만 반대 개념도 엄존한다. 지역사회에 견고하게 뿌리내린 교회들은, 지방을 대도시에서 밀려난 지역으로 간주하는 우매한 착오에 자연스럽게 반기를 들게 해 준다.

중앙정부의 주요 정책으로까지 떠오를 정도로 대한민국의 대도시, 수도권 집중 현상은 심각하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다분히 피플 파워(people power)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개신교회의 체질적 특성 역시 대도시와 신도시 위주로 집중되는 걸 막지 못한다.

하지만 지방 교회는 이러한 체질적 움직임에 반기를 든다. 피플 파워에 의존하는 교회 트렌드와 무관하게 지역사회에 뿌리내린 교회는 인구 변동, 인구 축소라는 변수에 맞서 그 지방의 지형학적 특수성과 상징성을 선도하는 종교 시설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렇듯 지방의 역사와 보폭을 함께 맞추는 시도 내지는 현상을 필자는 교회 건축의 미학다움으로서 토착화2)라 명명하고자 한다.

김천서부성결교회,
전형성에 새로움 포개다

김천서부성결교회는 1952년 7월, 김천시 평화동에 세워져 그곳에 뿌리를 내리고 교회 역사를 지속해 왔다. 김천서부성결교회는 김천시라는 지방 도시, 그 지역 공동체와 호흡을 같이하기 위한 시도를 멈추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이 교회가 지역사회에 토착화한 교회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인구 절벽, 인구 축소 문제가 실감되는 지방 도시의 핸디캡에도 김천서부성결교회는 교인 수의 역성장을 일군 교회로도 새롭게 평가되는 추세다.

물론 교회라는 정체성에서 우선순위는 사람, 지역이 아니라 하나님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자리 잡고 사는 지역, 그 공간의 지형적 정서와 호흡하는 일을 멈추지 않고 유지·지속하는 것 또한 교회의 또 다른 정체성임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김천서부성결교회는 건축적 의미로서 토착화를 건실히 유지해 왔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경우 토착화의 미덕과 한계가 동시에 제시된다. 김천시란 지역이 갖는 의미를 만약 부동산 투기나 이너 서클 관점으로만 평가한다면 주류로 보기는 어렵다. 눈에 보이는 영향력이나 인구 감소 추이로만 판단할 경우 김천시는 변방의 지방 소도시일지도 모른다. 토착화한 교회는 이러한 외부 시선에 아랑곳 않고 김천시 지역 공동체를 존중하는 태도를 그 교회의 존재 지속만으로 설득 근거로 제시한다. 소비재 중심의 문화, 관심 공간 위주로 집중되는 사회현상과 상관없이 김천서부성결교회는 지형학적 변방을 인정하지 않고 그 지역의 상징적 지위를 지속한 것이다.

이 경우 한계점 역시 고스란히 노출된다. 바로 전형성이라는 함정이다.

숱한 문제점이 있는 피플 파워를 좇는 개신교 교회 건축과 교회 프로그램은 한 가지 강점을 갖고 있다. 매번 여론의 구미에 맞게 빠르고 역동적인 변화를 추구한다는 점이다. 새로운 시대 변화, 교회로 모인 구성원들의 트렌드와 시국 정서에 나름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생존력을 키운다는 점에서 토착화한 지역 교회는 상대적으로 약할 수밖에 없다. 토착화한 전통을 내세우는 것만으로는 전형성을 벗어날 방법이 묘연한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김천서부성결교회는 여느 반세기를 넘긴 교회와 마찬가지로 교회 증축과 리모델링 과정을 거쳤다. 기존 건물만으로는 수용하기 어려운 교인의 확장, 좀 더 현대적인 프로그램 도입과 미학 창출을 위한 교회 내적 고민의 산물이 반세기를 넘어서는 교회 역사 속에서 치열하게 진행돼 왔다. 고민이 일어난 근거는 앞서 말한 토착화한 지역 교회의 상징성과 전형성의 함정이라는 한계 극복, 두 가지 문제에 대한 대안 마련을 위한 고민으로 읽힌다. 그리고 김천서부성결교회는 적절한 미학적 대안이 담긴 건축을 제시했다.

예배당 내부. 사진 제공 김천서부성결교회

토착화와 새로움의 공존

김천서부성결교회는 교회 증축의 한 방법으로, 기존 건물에 새롭게 리모델링되는 건물을 자연스럽게 이어 붙이는 공존형 모델을 선택했다. 기존 교회 건물을 허물지 않고 보존하면서 모더니즘 양식의 건물을 새롭게 도입하는 증축을 시도한 것이다.

구건물과 신건물의 건축적 분위기는 사뭇 상이하다. 표면적으로만 보면 부조화로 읽힌다. 구건물의 교회 건축 양식에 맞추든지, 구건물을 철거하고 새로운 모더니즘 건축 양식의 신건물을 전면 도입하는 방법이 언뜻 보기에는 더 합리적으로 보인다.

김천서부성결교회는 '공존'을 선택했다. 옛것과 새것이 함께하는 공존 모델을 선택한 것이다. 이 시도가 가져오는 효과는 토착화와 새로움의 공존으로 읽을 수 있는 교회 건축의 탈기능적 원형을 제시한다.

교회 건축은 일반 건축 시설과도 구별되며, 여타의 종교 시설과도 구별되는 생리적 특질을 갖는다. 이 특질은 개신교 고유의 본령에 대한 반응으로 연결된다. 본령적 반응의 궁극에는 신의 임현에 대한 항존적 새로움이 자리하고 있다. 신의 임현은 늘 푸른 소나무처럼 불변한 고정성을 상징한다. 그에 반면 개신교회를 대표하는 복음은 날마다 새로울 것을 요청한다.

김천서부성결교회는 항존적 새로움을 지속 가능하게 하는 하나의 방편으로 구건물과 신건물의 부조화적 조화를 도모했다. 이러한 시도는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지방에 자리 잡은 토착화한 개신교회 가운데 또 하나의 공간 미학으로 기념될 것이다.

김천서부성결교회 조감도. 구건물(왼쪽 갈색 건물)에 신건물을 이어 붙이는 방식으로 증축했다. 사진 제공 김천서부성결교회

지방, 토착화, 그리고 교회

대도시, 투기 자본, 피플 파워. 세 키워드가 한국교회의 필요조건으로 작동한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 한국교회는 자신들이 깃발을 꽂은 곳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부동산 가격이 오르고 교육의 명소가 되었다고 주장할지도 모르지만 이는 지독한 착각이다. 이를 계속 주장한다면 끝내 교회는 대국민 사기 집단이 될 것이다.

상식적인 말이지만 교회는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다. 교회는 주류와 비주류, 이너 서클과 아우터 서클의 차별이 없는 평등한 공간을 지향해야만 한다. 그것이 교회라는 합의가 가능하다면, 이제 다시 새겨 넣어야 할 한국교회의 필요조건 키워드는 달라져야만 한다.

지방, 토착화, 그리고 교회 그 자체로서의 교회가 21세기 한국교회가 품어야 할 건축의 화두가 되어야 할 것이다.

예배당으로 들어가는 입구(위)와 측면(아래). 사진 제공 김천서부성결교회

1) 필자가 본 칼럼에서 사용한 '지방'이란 용어는 욕망의 코드에 의해 퇴락했다는 뜻으로 사용한 한시적 의미이지, '수도 이외의 지역'이란 사전적 의미가 아님을 밝힙니다. 혹시라도 '지방'이란 용어 사용에 불쾌감을 느끼셨다면 사과드립니다.
2) 본 칼럼에서 명명한 토착화는 기독교와 지역 문화의 융합을 시도한다는 의미에, 교회 건축이 지역 문화의 상징성으로 기능한다는 건축 미학적 의미를 가미한 것임을 밝힙니다.

소설가 주원규 목사가 '예배당 건축 기행'을 격주 간격으로 연재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인터뷰 기사(바로 가기)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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