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스토이 글이 집에서 기르는 소라면, 도스토옙스키 글은 야생의 코뿔소다. 다듬어지지 않은 글, 길들일 수 없는 삶의 처절한 민낯. 포효하는 포식자들이 난무하고 이해할 수 없는 아이러니가 버젓이 신사의 영혼을 지배하는 곳이다. 생존을 위해 글을 썼다. 아니, 놀음과 술을 위해 글을 팔았다. 그는 결코 거룩하지도 않으며, 아름답지도 않다. 작부酌婦의 음탕함을 숨기지 않고 글로 토한다. 역겨움과 섬뜩함을 참아 내지 않으면 읽어 낼 수 없다. 이것이 도스토옙스키의 작품 세계다. 빚을 갚기 위해, 자연의 연인을 위해 미친 듯이 글을 썼다.

오타는 얼마나 많았던지, 편집자들은 원고를 수정하고 교정하기 위해 적지 않은 애를 먹어야 했다. 퇴고되지 않은 도스토옙스키의 글. 그렇기에 야생의 짐승처럼 사람들을 휘몰아쳐 간다. 석영중은 도스토옙스키의 이러한 면을 추려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예담)라는 책을 한 권 냈을 정도다. 그럼에도 그를 싫어하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그를 천재 작가가 아니라고 우습게 여기는 사람이 지구에 몇이나 될까. 반백이 가까워 오는 나이지만 단 한 명도 만나지 못했다.

도스토옙스키를 사랑했던 한 남자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에두아르트 투르나이젠. 칼 아담의 통찰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놀이터에 폭탄을 던진' 멋진 사나이 칼 바르트의 친구이며, 그와 함께 변증법적 신학을 발전시킨 인물이자 '영혼 돌봄' 개념을 정립하여 목회 상담의 이론적 단초를 제공한 인물이다. 에두아르트 투르나이젠의 책은 원시 밀림 속에서 보이지 않는 길로 인도하는 원주민과 같다. 그는 나의 손을 끌고 거침없이 도스토옙스키의 밀림 속으로 이끌어 간다.

<도스토옙스키, 지옥으로 추락하는 이들을 위한 신학> / 에두아르트 투르나이젠 지음 / 손성현 옮김 / 김진혁 해제 / 188쪽 / 1만 2800원

지난해 큰맘 먹고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읽기 시작했다가 포기하고 말았다. 100쪽도 되지 않는 분량 속에 등장한 수십 명의 인물이 쓰나미처럼 밀려들어 왔기 때문이다. 그들의 이름을 수첩에 메모하고 싶은 충동을 수십 번 느꼈다. 아마도 도스토옙스키 책을 읽어 본 사람이라면 느꼈을 충동일 것이다. 수년 전 읽은 <죄와 벌> 외에는 단 한 권도 읽어 보지 못했다. 그럼에도 영원한 숙제처럼 날 괴롭혀 왔던 도스토옙스키의 책들은 원귀冤鬼가 되어 꿈속에서도 읽어 달라고 아우성이다.

이 책은 한마디로 '지옥으로 추락하는 이들을 위한 신학'이다. 약간의 해석이 필요한 문구지만 제목으로 적절하다. 저자가 말하는 지옥은 무엇인가. 성경이 말하는 지옥이다. 그러니까 이 책은 지옥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삶을 살아가는 이들을 '위한' 신학인 셈이다. 엄밀하게 도스토옙스키 저작에 나타나는 다양한 군상群像을 통해 지옥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말한다. 저자는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도스토옙스키가 그려 낸 인물들을 살펴볼 것을 제안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은 도스토옙스키의 '인간론' 또는 '인간관'이라 해도 무방하다.

첫 장이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것은 당연하다. 2장은 '도스토옙스키의 사람들'을 살펴보고, 3장에서는 그들을 바라보는 '관점'을 탐색한다. 아마도 4장은 이 책의 절정이자 가장 중요한 인물인 '이반 카라마조프, 대심문관, 그리고 악마'에 대한 이야기를 세밀하게 추적한다. 마지막 5장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고 제목을 붙였지만 아이러니하게 '그럼에도 인간을 사랑하라'는 메시지를 담았다.

그럼에도 사랑해야 한다는 인간들을 누구일까. 아니 도스토옙스키가 그린 인간들은 어떤 부류의 인간들일까. 매우 적절한 구절이 첫 장 첫 페이지에 있다.

"아무것도 예상하지 못한 상태에서 전혀 길들여지지 않은 맹수들과 마주한 느낌."

그들이 바로 도스토옙스키가 그려 낸 인간들이다. 이러한 인간은 우리가 모르는 대상이 아니다. 그들은 우리의 친구며 가족이고 동료다. 그래서 "알면서도 모르고, 모르면서도 아는 얼굴"(12쪽)을 하고 있다. 온화하지만 살기를 품고 있는, 포악함과 잔인함, 비열함과 간교함을 숨긴 평범한(?) 사람들이다. 이 평범한 사람들은 베일을 쓰고 있으며, 야성과 본성을 감춘 이중적 존재들이다. 그들과 함께하는 세상을 우리는 '지옥'이라고 말한다. 자, 어떤가. 이제 그 인간들이 '바로 나 자신'이라고 자백하고 싶지는 않은가. 도스토옙스키의 손가락은 정확히 책을 읽는 독자인 '나'를 향하고 있다.

당최 변화의 가능성을 찾을 수 없는 범죄자가 있다고 생각해 보자. 당신은 그에게 어떤 판결을 내리고 싶은가. 무기징역? 아니면 사형? 문제는 그 범죄자가 타인이 아니라 바로 당신 자신이라는 점이다. 아니, 나 자신이라는 것이 문제다. 남이 하면 불륜이고 내가 하면 로맨스라고 했던가. 그렇다면 타인이 범죄하면 살인이고, 내가 범죄하면 무엇인가. 용서해 달라고? 그렇다. 그게 인간의 본성이다. 도스토옙스키는 바로 그런 인간들이 사는 세상을 '지옥'이라고 말한다. 그런 사람, 즉 당신 같은 사람들 말이다. 나 같은 사람.

"그가 보기에 인간은 그 자체가 하나의 질문이다. 자기 삶의 근원에 대한 질문, 단 하나의 위대한 질문, 하나님을 향한 질문과 다름없다." (67쪽)

투르나이젠은 정확하게 간파했다. 도스토옙스키는 질문한다. 그 질문의 본질은 '인간이란 무엇인가'이다. 인간이란 무엇일까. 4장이 답한다. 그는 무신론자이고 대심문관이다. 그리고 그는 '악마'다. 투르나이젠은 도스토옙스키가 교회의 허상과 꼼수, 간교함과 술수를 이반 카라마조프와 대심문관의 입술을 통해 적나라하게 그려 낸 장면들을 포착한다. 그것은 '소실점'의 하나님을 인간의 지성과 예측 가능한 삶의 그림 속에 "욱여넣고"(109쪽) 있는 인간들의 우상숭배 행위다. 교회의 우상숭배는 "손가락으로 하나님을 가리키고는 있으되 인생의 불가사의함에 대한 질문을 잠재워"(109쪽) 버린다.

즉 투르나이젠은 하나님을 인간의 이성으로 추론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일하심을 예측할 수 있다고 말하는 교회를 오히려 무신론자라고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창세기 3장으로 돌아가 보자. 첫 사람들의 타락의 핵심은 하나님을 통제하는 것이다. 모든 주도권을 자신이 쥐려는 것이다. 불순종, 타락, 범죄 등의 단어는 하나님의 계명과 명령을 전제한다. 하나님의 명령, 하나님께서 가지신 통제권을 자기 손에 쥐는 것이 타락이다. 그렇기에 하나님을 부정하는 무신론은 "악마적이고 사탄적이다"(116쪽)고 그는 말한다. '그럼 너희들은?' 그래, 교회는 하나님을 통제하려 하지 않는가.

"인간은 인간이고, 하나님은 하나님이다." 온갖 모순과 불합리함, 악과 어리석음을 지닌 존재가 바로 인간이다. 경건 속에 악이 있고, 믿음 안에 악마적 본성이 숨겨져 있다. 그들은 익숙하나 낯설다. 그것이 인간이다. 투르나이젠은 말한다. 그렇기에 용서가 필요하고 사랑이 필요하다고. 인간은 모순 속에서 끊임없이 '부활'을 "갈망"(133쪽)한다. 영원하고 완전한 세계로의 환원.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타인에 대한 부정과 악은 모순으로 가득 찬 인간을 정죄하거나 "신격화"(133쪽)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사람을 "붙잡고 씨름"(141쪽)한다.

이 정도면 인간의 이성으로 하나님을 난도질한 자유주의 놀이터에 떨어진 폭탄이지 않는가. 칼 바르트가 왜 투르나이젠과의 사귐을 중요하게 생각했는지 알 것 같다. 칼 바르트는 <로마서>(복있는사람) 2판 서문에서 이렇게 투르나이젠을 칭송한다.

"특히 투르나이젠은 갓 완성된 원고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고 평가해 주었으며, 원고의 내용을 더욱 깊고 명료하고 예리하게 만들어 주는 제안을 많이 해 주었다. 나는 그의 제안을 고스란히 받아들였다. 이런 그의 '헌신적인 노력은 숨겨진 기념비'가 되었다."

이뿐 아니라 키르케고르와 도스토옙스키에게 배운 것이 많다고 말하며 "특별히 에두아르트 투르나이젠의 암시가 내게 깨우침을 주었다"고 에두르지 않고 말한다. 보수적 장로교회 목사로서, 칼 바르트는 곁눈질로 바라볼 필요도 있겠지만, 인간과 하나님에 대한 깊은 통찰을 주는 이 책은 '아멘'으로 받아도 괜찮지 않을까. 참으로 멋지고 귀한 책이 번역되어 모두에게 강력 추천한다.

*이 글은 <크리스찬북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정현욱 / 크리스찬북뉴스 편집인, 에레츠교회 목사

외부 기고는 <뉴스앤조이>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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