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앤조이-박요셉 기자] 전주화평교회(이영재 목사)는 교인들에게 기본 소득을 나눠 준다. 매달 첫째 주 일요일이 되면 전주화평교회 교인들은 예배당 앞에서 한 사람씩 자신의 이름이 적힌 봉투를 받는다. 작년 5월부터 시작해 이제 19번이 지났다. 금액은 매달 1만 5000원 안팎. '소득'이라고 부르기에 민망할 수 있지만, 전주화평교회는 포기하지 않고 기본 소득을 꾸준히 시행하고 있다.

"액수가 적더라도 어느 교인도 배제해서는 안 된다." 11월 21일 전주에서 만난 이영재 목사는 기본 소득을 시행할 때 세운 원칙을 들려주었다. 돌도 안 지난 갓난아이도 어른들과 똑같은 액수를 받는다. 이 목사는 전주화평교회가 시행하는 기본 소득 실험은 실효성보다 '상징성'이 강하다고 말했다. 교회는 서로의 신앙뿐 아니라 삶까지 책임지며 돌보는 한 공동체라는 것.

당연히 용처는 상관하지 않는다. 이 돈으로 가족끼리 외식을 하는 교인도, 여행을 위해 저축하는 교인도 있다. 가장 신나는 건 아이들이다. 기본 소득을 나눠 주는 날은 주일학교 출석율이 100%다. 중·고등학생들은 게임방이나 노래방으로 몰려간다. 교회학교 선생님들에게 커피를 쏘며 생색내는 아이들도 있다.

그래도 헌금인데, 이렇게 써도 되는 걸까. 이영재 목사는 웃으며 말했다. "원래 마음대로 쓰라고 주는 게 기본 소득이다." 한두 번은 이벤트로 느끼겠지만 꾸준히 지급하면, 아무 조건 없이 모두에게 돌아가는 기본 소득의 정신을 어렸을 때부터 체화할 수 있게 된다. 그 정신은, 성서에 나오는 '희년'과 닮았다.

전주화평교회에서 기본 소득 씨앗을 뿌리는 사람들.  왼쪽부터 김문곤 목사, 정우주 집사, 박대식 집사, 이영재 목사. 뉴스앤조이 박요셉

18세기 미국 사상가의 '기본 소득
'
전 세계에서 각종 실험 정책 도입

이영재 목사 "희년 운동에 가까워

공동체 안에 가난한 자 없어야"

기본 소득은 모든 시민이 조건 없이 매달 현금으로 지급받는 급여를 의미한다. 18세기 미국 사상가 토머스 페인이 처음 내놓은 이 개념은, 200년 동안 주목받지 못하다가 최근에야 대안 경제로 부상하고 있다. 핀란드·캐나다 등 일부 국가는 2017년부터 주민 중 일부를 무작위로 선정해 기본 소득을 나눠 주는 실험을 시행하고 있다.

이영재 목사가 기본 소득에 관심을 두게 된 건 2016년 7월 서강대학교에서 열린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 세계 총회에 토론자로 참석하면서부터다. 이 개념을 성서적이라고 느낀 이 목사는 그날 이후로 기본 소득 전도사가 되었다. 그는 주일예배 설교를 비롯해 평소 대화나 식사 자리에서 교인들에게 기본 소득을 소개했다. 교인들과 인문학 공부 모임을 열어 전문 서적과 글을 함께 읽기도 했다.

이 목사는 기본 소득에서 '희년'을 발견했다. 성서는 희년이 되면 토지를 본래 소유주에게 돌려주고 부채를 탕감하라고 명시하고 있다. "희년 제도는 토지가 부유층에 편중되는 경제적 양극화를 방지하고, 빈곤층으로 전락한 이들이 회생할 수 있도록 돕는다. 이러한 모습은 초대교회에서도 찾을 수 있다. 초대교회 교인들은 재화와 물건을 서로 통용하며 가난한 이가 없게 했다." 이 목사는 한 공동체 안에 가난한 자가 없게 하라는 것이 성서의 명령이라며, 교회가 이를 준행할 책임이 있다고 덧붙였다.

이영재 목사는 기본 소득에서 희년을 발견했다. 뉴스앤조이 박요셉

교인들, 매달 기본 소득 위해 헌금
조건 없이 모든 교인에게 1/n

'보편성'에 집중한 상징적 시도

"공산주의 아니냐" 반발하는 교인도

전주화평교회는 2017년 3월, 집사 5인으로 구성된 '기본소득위원회'를 만들었다. 위원장은 30대 중반 정우주 집사가 맡았다. 이들은 교회가 기본 소득을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지 고민하다가 현재 모델을 떠올렸다. 한 달간 교인들이 낸 '기본 소득 헌금'을 모아 다음 달 첫째 주 일요일, 전 교인에게 1/n로 나누는 방식이다.

기본 소득에는 일반적으로 5개 원칙이 있다. △보편성 △무조건성 △개별성 △현금 지원 △충분성이다. 기본 소득은 한 사회 구성원이라면 누구나 소득·자산·연령·국적 등과 상관없이 받는 것이다. 지급 형태는 현금이어야 하고, 수준은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는 정도여야 한다.

정우주 집사는 "기본 소득 모델을 놓고 위원들과 오랫동안 고민했다. 처음에는 3~4명을 선별해서 6개월 동안 50만 원씩 지급하자는 안도 나왔다. 하지만 누구도 제외돼서는 안 된다는 보편성 원칙을 더 강조하면서 전 교인에게 지급하는 안이 채택됐다"고 했다.

이영재 목사는 "많이 주면 좋겠지만 우리는 작은 교회라서 한계가 있다. 마치 구약 성서에서 에스겔·예레미야 선지자가 상징적인 행위를 했던 것처럼, 기본 소득을 통해 우리의 신앙을 나타내고 외부 교회나 지자체에 이 운동에 동참하라고 메시지를 전달하는 의미가 크다"고 말했다.

정 집사는 "사람이 사람답게 행복한 삶을 누리기 위해 만들어진 제도가 기본 소득이다. 지금은 액수가 적어 외식 한 번 할 수 있는 정도지만, 액수가 커지면 기술을 배운다거나 주거 문제를 해결하는 등 다양하고 생산적인 활동에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고 설명했다.

전주화평교회는 매달 첫째 주 일요일 모든 교인에게 기본 소득을 나눠 준다. 헌금 봉투와 기본 소득 봉투. 뉴스앤조이 박요셉

전주화평교회는 이농한 사람들이 만든 작은 교회다. 아이들까지 포함해 출석 교인이 100여 명이고, 60~70대 어르신이 많다. 이영재 목사가 기본 소득을 처음 소개했을 때, 대다수 교인은 생소해하고 어려워했다. "일도 안 했는데 돈을 주느냐", "공산주의 아니냐"며 반발하는 교인도 있었다.

일부 교인은 지금도 기본 소득을 거절한다. 이 목사는 "매달 첫째 주 일요일 기본소득위원회가 기본 소득이 담긴 봉투를 들고 예배당 앞에 서 있다. 몇 분은 봉투를 받지 않고 예배당에 들어간다. 처음에는 어떻게든 전달하려고 했는데, 그분들 뜻을 존중하는 게 더 맞을 것 같아 억지로 건네지 않는다"고 말했다.

기본소득위원회 박대식 집사는 "위원들도 처음에는 이 제도가 지속 가능할지 우려했다. 그런데 교인들 인식이 차츰 달라지는 걸 느꼈다. 기본 소득 헌금에 참여하는 사람이 늘어나는 추세다. 사실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 내 것을 남에게 조건 없이 주는 모습은 찾기 어렵다. 그런데 이러한 행위가 사회를 보다 나은 공동체로 바꾼다는 인식이 교인들에게 퍼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김문곤 부목사는 "아이들도 기본 소득이 어른들의 헌금으로 마련한 사실을 알고 있다. 우리 교회가 어떤 취지로 이 제도를 도입했는지 이해하고 있다. 몇몇 아이는 방학 때 아르바이트를 해서 기본 소득 헌금에 동참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박대식 집사도 "우리 아이를 봐도 확실히 달라지는 걸 느낀다. 처음에는 그냥 아무렇게나 사용하는 것 같았는데 점차 의미 있는 일을 찾고 있다"고 거들었다.

박 집사는 친구들을 만나면 빼먹지 않고 교회를 자랑한다고 했다. 그는 "친구들을 만나면 꼭 나오는 이야기가 대형 교회 욕이다. 왜 교회가 몇 백 억짜리 부동산을 소유하는지, 부자끼리 교회를 물려주는지, 각종 비리·비위 문제가 터지는지 비판한다. 그동안 가만히 듣고 있기가 괴로웠는데, 이제는 자랑스럽게 우리 교회 사례를 들려준다"고 말했다.

정우주 집사(사진 오른쪽)는 기본소득위원회를 이끌고 있다. 뉴스앤조이 박요셉
출석 교인 100명의 작은 시골 교회가 지역 사회에서 기본 소득 운동을 견인하고 있다. 뉴스앤조이 박요셉

'기본소득전북네트워크' 창립 주도

프로젝트에 1200만 원 출연

전주화평교회는 지역 사회에도 기본 소득 씨앗을 뿌리고 있다. 이영재 목사는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 관계자들과 만나면서 지역사회에 기본 소득을 알리고 지자체에 목소리를 내는 시민 단체가 필요하다는 데 공감했다. 2017년 2월, 전주화평교회 교인들과 전주 지역 시민 단체는 '기본소득전북네트워크'를 창립했다. 정우주 집사가 대표를 맡았다. 이들은 전주시 내 기본 소득 조례 제정을 목표로 시민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기본소득전북네트워크는 지난해 2월 기본 소득 사례를 연구하기 위해 '쉼표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지원자 중 무작위로 4명을 선정해 6개월간 매달 50만 원을 지급하는 프로젝트다. 프로젝트에 필요한 예산 1200만 원은 전주화평교회가 전액 출연했다. 국내 기본 소득 관련 프로젝트 중 교회가 이렇게 예산을 내놓은 사례는 처음이다.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는 올해 모범 실천상 수상 대상자로 전주화평교회를 선정했다. 지난해에는 성남시에 청년 수당을 도입한 이재명 당시 성남시장이 수상했다.

정우주 집사는 "기본 소득이라는 개념은 사실 200년 전 미국 사상가가 처음 제시한 아이디어다. 이를 현재 학자들이 다시 발굴해 정책에 반영하고 있는 상황이다. 어떻게 보면 기본 소득이 성서와 밀접한 개념인데, 왜 교회가 미리 이런 생각을 하지 못했는지 아쉽다. 교회가 성경을 바탕으로 세상을 조명하면서 다양한 논의를 할 수 있는 곳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영재 목사는 "한국교회는 지금까지 영혼 구원만 지나치게 강조해 왔다. 이웃과 사회의 구원을 향한 고민이 부족하다. '기본 소득'을 받는 교인들은 왜 우리 교회가 이 실험을 진행하는지 알고 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올바른 신앙이 무엇인지, 건강한 공동체가 어떤 모습을 해야 하는지 고민을 유도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기본 소득은 피 흘리지 않는 혁명과 같다. 단지 돈을 나눠 주는 게 아닌, 국가의 본질을 재조정하는 일이다. 벌써 국내에서도 청년과 농민들을 대상으로 기본 소득 실험을 시행하고 있다. 앞으로 다가올 기술 발전으로 인한 대량 실업 사태에서, 기본 소득은 경제 체제의 대안이 될 것이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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