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앤조이-최승현 기자] 신명기 22장 28-29절에는 다음과 같은 규정이 있다. "만일 남자가 약혼하지 아니한 처녀를 만나 그를 붙들고 동침하는 중에 그 두 사람이 발견되면 그 동침한 남자는 그 처녀의 아버지에게 은 오십 세겔을 주고 그 처녀를 아내로 삼을 것이라. 그가 그 처녀를 욕보였은즉 평생에 그를 버리지 못하리라."

2018년을 사는 우리는 이 구절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멀지 않은 과거에 한국에서도 이런 일이 있었다. <선데이서울> 1973년 5월 20일 자 기사를 보면 "5월 3일 정 모 군(17·경북 김천시)은 짝사랑했던 이 모 양(17)을 꾀어내 강제로 욕을 보이고 구속, 기소돼 1심에서 징역을 선고받고 고법에 항소했는데 이날 판사들은 '그럴 게 뭐 있느냐? 기왕 버린 몸이니 오히려 짝을 지어 주어 백년해로시키는 게 좋겠다'는 식으로 양가 부모를 설득, 법정에서 약혼까지 치르게 했다는 것"이라는 일화가 나온다. 무려 '사법부'의 이름으로 벌어진 일이다.

모세오경을 읽다 보면 여성을 차별하는 것 같은 구절이 많다. 그러나 박유미 박사(구약학)는 성경에서 여성을 배려하고 존중하는 정신과 교훈을 읽어 내야 한다고 말한다. 총신 출신인 박유미 박사는 10월 31일, 총신대 총여학생회비상특별위원회가 주최한 '반성폭력이 총신을 구한다' 세미나 강사로 나서, 성경이 성폭행을 보는 관점을 소개했다.

박유미 박사는 신명기 22장 28-29절에 오히려 여성을 보호하려는 정신이 들어 있다고 했다. 그는 "구약은 성폭행을 기본적으로 죽일 죄로 본다. 신명기 22장 26절에서, 약혼한 처녀를 강간한 남성은 죽이라고 하고 있고, 여성에게는 죄가 없다고 하고 있다. 그런데 28-29절은 여성이 약혼하지 않았을 경우 둘을 결혼시킨다. 당시 성폭행당한 여성은 가부장제 사회에서 갈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여성은 땅을 상속받지 못했다. 누군가의 아내가 되거나 아들을 가져야만 했다. 흔히 약자로 꼽는 '고아와 과부'가 그 사례다. 신명기 이 구절은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보장해 주라는 차원이었다. 남성이 평생 책임지라는 의무를 부과한 것"이라고 말했다.

박유미 박사는 도리어 예수님은 남성에게 엄격한 성 윤리를 요구하고 있다고 했다. "예수님은 여성을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간음한 사람이라고 했다. 여성을 성적 대상화한 것부터 간음이라고 했으며, 전후 맥락을 보면 한쪽 눈이나 손이 범죄를 저지르거든 없는 상태로 천국 가는 게 낫다고 말했을 정도다. 가히 혁명적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박유미 박사는 암논의 성폭행 사건에서, 죄를 인정하고 피해자 중심적으로 사고해야 한다는 교훈을 찾아야 한다고 했다. 뉴스앤조이 최승현

'구약판 미투 운동'
피해자 목소리 낸 다말
외면한 남성'들'

성경에는 여러 성폭행 사건이 나온다. 박유미 박사는 사무엘상 13장에 나오는 암논의 성폭행 사건을 주제로 강의를 풀어 나갔다. 우선 '다말 (강간) 사건'이라고 부르는 이야기를, '암논 성폭행 사건'으로 불러야 한다고 했다. 피해자 이름이 아닌 가해자 이름을 붙이자는 것이다.

다말은 사무엘하 13장 이야기의 주연이지만, 성경은 다말을 '다윗의 딸'이 아니라 '압살롬의 누이'로 소개하고 있다. 야곱의 딸 디나도 마찬가지다. "레아가 딸을 낳고"(창 30:21)나 "레아가 야곱에게 낳은 딸"(창 34:1)과 같이 아버지의 딸로 불리지 않는다.

그러나 성경은 다말의 목소리를 심도 있게 소개하고 있다. 성경 속 다른 강간 사건과 다른 점은, 다말은 유일하게 '피해자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점이다. 사무엘하 13장 12절을 보면 다말은 암논에게 "이런 어리석은 일을 하지 말라"고 소리친다. 디나나 밧세바, 사사기에 나오는 레위인의 첩은, 강간당할 때 어떤 생각을 했는지, 이후 어떤 목소리를 냈는지 알 수 없다. 유일하게 다말은 자기 목소리로 "옳지 않은 일"이라고 했다.

성경은 "암논이 그 말을 듣지 아니하고 다말보다 힘이 세므로 억지로 그와 동침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박유미 박사는 "성경은 다말이 죄가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는 피해자를 비난하는 문화가 있지만, 성경은 피해자에게 뭐라고 하지 않는다"고 했다. 성폭행 이후 다말은 성에서 공주가 입는 채색옷을 찢고 머리에 재를 뒤집어쓰며 크게 울었다. 온 성에 자신의 상황을 알렸다.

박유미 박사는 "암논은 다말을 쫓아내기만 하면 이 사건이 묻힐 줄 알았을 것이다. 다말이 침묵할 줄 알았겠지만 다말은 세상에 자신이 겪은 사건을 외친다. 부르짖는다는 히브리어 '짜아크'는 온 성이 떠나가듯 울었다는 뜻이다. 요즘의 '미투 운동'처럼 자신의 사건을 드러냈다"고 했다.

다말의 부르짖음을 외면한 것은 남성'들'이었다. 암논과 압살롬, 그리고 아버지 다윗이 '악의 연대'를 구축한 셈이라고 박유미 박사는 말했다. 암논의 성폭행 이후 성경은 "다윗 왕이 이 모든 일을 듣고 심히 노하니라"라고만 말하고 있다. 암논에게는 어떠한 처벌도 내리지 않는다.

박유미 박사는 "다윗은 아버지이자 왕으로서 율법과 도덕을 지킬 의무가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다윗은 철저히 암논의 아버지, 가해자 아버지로만 행동했다. 딸의 외침과 분노는 전혀 관심 없었다. 성경은 다말이 외롭게 지냈다고 기록했다. 다말은 고립되고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라고 했다.

범죄 알고도 덮은 '전과자' 다윗,
정치적 계산으로 사건 뭉갠 압살롬
남성의 '악의 연대'

다윗은 왜 가만히 있었을까. 박유미 박사는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강간(사무엘하 11장)한 적이 있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암논의 성폭행과 다윗의 성폭행에는 공통점이 있다.

다윗은 '왕'이라는 지위(위계)를 이용했고, 암논 역시 위력을 이용해 성폭행을 저질렀다. 또 성경은 다윗과 암논이 각각 밧세바와 다말을 아름답게 보았다고 기록한다. 눈에 보이는 대로, 욕망대로 행동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또 하나는 두 성폭행 사건 모두 '금지된 관계'였다는 점이다. 암논과 다말은 이복 형제자매다. 다윗은 유부녀를 강간했다. 신명기 22장에 따르면 다윗은 죽어야 한다. 레위기 18장도 형제간 성관계를 금지하고 있다. 둘 다 율법을 어겼다.

성폭행 이후도 유사하다. 다윗은 밧세바를 책임지지 않으려 집으로 돌려보내고, 임신 소식이 전해지자 전쟁에 나간 우리아를 불러들인다. 밧세바의 임신이 우리아 때문인 척하려는 것이다. 암논도 마찬가지다. 성폭행 이후 다말을 내쫓아 버린다. 다말이 "이렇게 하는 게 더 악하다"고 하지만 욕망을 채우자마자 물건 치우듯 내보내 버린다.

다말은 유일하게 '자기 목소리'를 낸 여성이었다. 박유미 박사는 '미투 운동'이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문제를 해결해야 할 이들은 다말의 목소리를 모두 외면했다. 그림은 얀 스텐의 '암논과 다말'.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이미지

다윗과 암논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결론적으로 성폭행 이후 다윗은 살았지만 암논은 죽었다. 박유미 박사는 이를 "다윗은 죄를 직면하고 회개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나단 선지자를 만난 다윗은 잘못을 깨달았고 벌을 받았다. 암논이 회개했다는 기록은 없다. 2년 후, 암논은 동생 압살롬 손에 죽었다.

다말의 보호자 노릇을 했던 압살롬도 이 문제를 적극적으로 처리하지 않았다. 박유미 박사는 "성경을 보면 압살롬은 다말에게 '잠잠하라'고 얘기한다. 제일 공감해야 할 압살롬이 다말의 입을 다물게 한다. 압살롬으로서는 암논이 자신을 모욕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아버지 눈치를 보면서 자신이 어떻게 왕권을 확보할 것인지만 관심을 가졌다"고 했다. 압살롬 또한 후에 다윗에게 반란을 일으키다 죽는다.

한 차례 회개한 경험이 있는 다윗도 아들 문제를 공의롭게 처리하지 않았다. 박유미 박사는 "다윗이 암논 문제를 제대로 처리했더라면 하나님께서 '너의 집에 칼이 끊이지 않는다'고 하셨던 말을 돌리셨을 수도 있다. 그러나 결국 스위치가 켜졌다. 왕위 서열 1~2위 아들을 모두 잃었다. 결국 아무도 행복하지 않은 비극적 결말이 찾아왔다"고 했다.

"성폭력 사건, 사회구조적 문제"
제대로 처리하지 않으면 공동체 불행

박유미 박사는 성폭력 사건을 '개인 일탈'로 볼 게 아니라고 했다. 사회적 취약 계층이 희생을 당하는 구조적 문제라고 했다. 구약에 나온 성폭력 사건 모두 이런 공통점이 있다. 야곱 공동체에서는 딸 디나가, 레위인의 첩 강간 사건에서는 외지인 레위인이 아니라 그의 첩, 즉 가장 낮은 계층인 첩이 성폭행 대상이 됐다. 다윗 궁정에서도 왕자가 아닌 공주가 희생자로 등장한다. 박유미 박사는 "성폭력은 힘의 논리가 기울어져 있을 때, 여성의 권력이 열등할 때 쉽게 일어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성폭력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공동체의 불행이 된다. 더 큰 폭력 상황을 발화하는 트리거인 셈"이라고 했다. 사사기에서는 레위인의 첩이 강간당한 후 이스라엘 모든 지파가 일어나 베냐민 지파를 싹쓸이한다. 암논 성폭행 이후 압살롬은 반란을 일으켜 이스라엘은 전쟁 상태로 접어들었다.

박유미 박사는 학생들에게 "피해자 입장에서 정의로운 방향으로 해결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이라고 했다. 죄를 지었으면 하나님과 공동체 앞에 철저히 회개하는 문화를 조성해 나아가야 한다고 제언했다.

"우리 사회가 왜 이렇게 여성 성폭행 문제를 제대로 대응하지 못할까. 그것은 우리 공동체가 건강하지 못하다는 징표이고, 하나님 앞에 올바르게 서지 못한다는 사인이다. 가해자가 죄를 직면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 디나를 강간한 세겜도, 레위인의 첩을 강간한 기브아 사람도, 암논도 모두 죽었다. 그러고 보면 성경은 참 무섭다. 죄를 직면하고 회개한 다윗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는 것의 중요성을 다시 생각해 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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