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념은 '그때'로 가 보는 것이지 그곳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기념은 시간 여행이라고 할 수 있다. 그때로 돌아가 일이 일어난 정황을 잘 살펴 지혜를 얻은 후 '현재'로 돌아와 지금 우리 삶 가운데 일어나는 일에 지혜롭게 대처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는 수많은 기념일을 지키면서 살지만, 정작 기념일을 통해 지혜를 얻는 일에는 서툴다. 개인에게는 생일이라는 기념일이 있지만, 생일을 기념하며 '나는 누구인가' 진지하게 성찰하는 사람은 드물다. 그렇다 보니, 우리는 매년 생일을 맞으면서도 '그 모양 그 꼴로' 살아간다. 부부에게는 결혼기념일이 있지만, 둘 사이에 애틋하고 감미로웠던 첫 사랑의 기억, 또는 '둘을 하나 되게 하신 주님의 뜻'은 묵상하지 못하고 기념일을 지나가기도 한다. 그렇다 보니 결혼 생활이 권태롭게만 다가온다.

기독교인으로서 (특별히 개신교인으로서) 우리가 종교개혁 기념 주일을 지키는 이유는 '500년 전 종교개혁이 있었구나' 하며 역사의 사건을 배우기 위함이 아니다. 그 사건이 지금 우리 시대에 아무런 교훈과 지혜를 주지 못한다면, 그것을 통해 우리의 삶과 신앙이 더 진보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무엇 때문에 '기념'하는가.

종교개혁이 남긴 유산은 참 많다. 그중 소중한 유산 두 가지만 소개하려 한다(옥성득 교수가 자신의 블로그에서 밝힌 종교개혁 유산 중). 첫째는 루터가 <독일 민족의 그리스도인 귀족에게>(1520년)라는 글에서 주장한 '만인사제론'이다. 루터는 더 나아가 <교회의 바벨론 유수>(1520년)에서 가톨릭교회가 가르쳐 온 사제와 평신도 구분을 거부하며, 제도권을 통해 받은 사제 안수가 성령을 통해 받은 평신도 안수를 무시한다고 지적한다. 안수 독점권은 그리스도인의 형제애를 몰락하게 하고 교회 내에 계급을 형성했다. 루터는 이 모순을 신랄하게 비판하며 교회 민주화를 이끌었다.

둘째는 종교개혁 전통에 서 있는 필리프 슈페너(Philipp Spener)가 <경건한 요청>(1675년)에서 재발견한 '만인제사장설'에서 비롯한 '경건한 모임'이다. 말씀과 기도는 목회자(사제)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루터가 이끌었던 교회 민주화는 단순히 신분(직분) 평등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신앙의 핵심을 함께 공유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신앙의 핵심은 말씀과 기도이다. 그것은 목회자만 행해야 할 영성 훈련이 아니다. 교회 모든 구성원, 즉 이제 제사장(사제) 역할을 감당하게 된 모든 그리스도인의 과제인 것이다. 그래서 슈페너는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말씀과 기도 훈련을 실행하기 위한 '경건한 모임'을 만든다. 이는 나중에 경건주의로부터 배워 존 웨슬리(John Wesley)가 발전시킨 '속회(class meeting)'와 같은 것이다.

정신과 의사 정혜선은 '적정심리학'을 펼치며 이런 주장을 한다. "스스로 치유할 수 있는 치유가 가장 중요하다." 자기 문제를 스스로 치유하지 못하고 전문가에게 의존하여 치유하러 다니면 일상생활을 영유하기 힘들다. 자기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면 정서적 피폐와 심리 불안정이 삶을 짓누른다고 한다.

우리 신앙은 왜 성장하지 못하고 점점 피폐해져 갈까. 우리는 왜 신앙 안에서 담대한 마음을 갖지 못하고 심리적 불안에 시달리며 살까. 종교개혁이 우리에게 가져다준 소중한 유산을 아직도 물려받지 못하고 신앙 문제를 '전문가(목회자/사제)'에게만 맡기면서 살고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닐까.

건강해지려면 스스로 운동을 해야 한다. 옛날 양반들처럼 땀 빼는 일을 종에게 시키면, 자기 건강은 스스로 지킬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먹고살기 바쁘다'는 핑계로, 신앙 문제를, 구원 문제를 전문가에게만 맡겨 놓고 사는 것은 아닐까. 겨우 예배하는 것으로 우리 신앙을 지켰다고 생각하고 만다. 바쁘다는 핑계로, 종교개혁 전통이 우리에게 물려준 소중한 유산인 '경건한 모임'을 물려받지 못한 신앙인처럼 산다.

종교개혁이 우리에게 물려준 유산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구원 문제를 '남의 손'에 섣부르게 맡기지 않는 것이다. 스스로 구원 문제를 세심하게 돌보기 위해 교회 공동체를 민주화하고, '주인 의식'으로 공동체에 적극 참여하는 것이 종교개혁이 우리에게 물려준 소중한 유산이다.

우리 신앙은 어떠한가. 아직도 종교개혁 이전에 머물고 있는 것은 아닌가. 최신 테크놀로지가 반영된 기기(device)를 사는 데는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으면서, 신앙의 선조가 물려준 중요한 핵심 '기술'을 우리 신앙에 적용하고 반영하는 데는 왜 그렇게도 서툴고 게으른가. 민주적 교회 공동체에 적극 참여하여 서로가 신앙을 세워 주는 것이 종교개혁을 '기념'하는 참된 방법이다. 기념은 실천이지 회상이 아니다.

종교개혁 전통에 서 있는 우리는 조금 더 똑똑하고 부지런해져야 한다. 종교개혁을 기념하면서, '나는 동일한 제사장이다'는 자기 인식이, 신앙 핵심을 실천하고자 '경건한 모임'에 참여하는 주인 의식이 반석에서 물 나듯 터져 나오길 소망해 본다.

장준식 / 미국 북가주 세화교회 목사

외부 기고는 <뉴스앤조이>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