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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신앙을 뒤흔드는 무력한 예수

[서평] 로완 윌리엄스 <심판대에 선 그리스도>(비아)

김형욱   기사승인 2018.10.26  16:2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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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가 심판대에 선다는 것

한 남자가 법정에 섰다. 그가 사형선고를 받을 것이란 소문이 성내에 돌았다. 그는 법과 법정에 맞서지 않았으나 물러서지도 않았다. 그를 선생 삼아 따르던 이들은 도망치거나, 부인하거나, 배반했다. 법정에는 그를 죽여야 할 이유가 쏟아져 나왔다. 그는 놀라운 기적을 일으키지도, 당대의 식자들을 부끄럽게 만들던 명철한 말씀으로 반박하지 않았다. 그는 시종 침묵하다 어느 순간 이해하기 어려운 짧은 말을 할 뿐이었다(막 14:55-54; 마 26:59-68; 눅 22:66-23:12; 요 18:19-38). 재판 맡은 이는 어쩔 줄 몰라 판결을 서둘렀다. 십자가에 매달아 죽일 것.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그는 오로지 용서했다. 그의 용서는 자신을 모욕한 자, 팔아넘긴 자, 때린 자를 향했다. 따라서 용서는 저 심판대가 얼마나 불의한지 드러냈다. 심판을 받은 것은 그가 아니라 심판대에 둘러 모인 저들이자 심판대 자체이다.

예수를 판결한 심판대에는 두 가지 죽음이 교차한다. 먼저, 죄 없는 예수가 죄인을 위해 죽었으니 이는 신학적 죽음이다. 또, 예수는 고발당해 심판대에 섰고 법의 판결을 받아 죽었으니 이 죽음은 법적인 죽음이다. 예수는 신학적으로 죽임을 당했고 동시에 판결에 따라 합법적으로 죽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부활의 기쁨을 한시라도 빨리 만끽하기 위해 재판정 이야기를 무심코 넘겨 버린다. 이렇게 신학적 해석에만 초점을 맞추면 우리에게 익숙한, 성육신을 했고, 죄를 대속했으며, 무덤에서 부활한 예수를 만나게 된다. 그러나 이 해석은 우리의 신앙(우리에게 익숙한, 우리가 생각하는 신앙)을 고취할 순 있으나, 심판대에 서린 불의(이는 곧 우리의 불의이기도 하다고 전통적인 기독교 신앙은 고백한다)를 가린다. 심판대의 불의를 볼 수 없다면 예수의 용서가 갖는 심오함을 진지하게 고찰할 수 없다.

<심판대 위에 선 그리스도 – 우리의 판단을 뒤흔드는 복음에 관하여>(비아)는 예수가 우리 죄를 위해 죽고 부활함으로 그 죄를 말끔히 지웠다는 저 위대한 신학적 선언을 내리기 전에, 불법의 재판정에 홀로 선 예수가 무슨 말을 남겼는지 그리고 어떻게 죽었는지 살펴야 한다고 말한다. 그때에 우리는 복음서 저자들이 신중에 신중을 기해 작성한 저 재판정 이야기에 담긴 깊은 의미를 만날 수 있으며 저 위대한 신학적 선언에 담긴 뜻을 '지금, 여기'에 아로새길 수 있다.

<심판대에 선 그리스도 - 우리의 판단을 뒤흔드는 복음에 관하여> / 로완 윌리엄스 지음 / 민경찬, 손승우 옮김 / 244쪽 / 1만 5000원

우리의 판단을 뒤흔든다는 것

네 편의 복음서는 각자의 관점과 물음을 갖고 예수의 법정 장면을 묘사한다. 재판 중에 예수는 많은 말을 하지 않는다. 마가가 그리는 예수는 온갖 거짓 송사와 비방으로 소란스러운 법정에서 단 한마디, 그러나 모두를 압도하는 한 마디를 남길 뿐이다.

"내가 바로 그다."

예수의 이 짧은 대답은 법정의 합리성과 거리가 멀다. 거짓 증거는 확고한 근거로 반박해야 하고, 음해와 비방은 철저한 조사와 검증으로 되받아쳐야 할 것이다. 예수는 이상하게도 내가 바로 그라는 선언 외에 모든 것에 침묵한다. 법정에서 승리하기 위한 합당한 조치, 바꾸어 말해 기독교 신앙이 세상을 향해 갖추어야 할 마땅한 대응이 마가의 법정에는 발견되지 않는다. 기독교가 세상으로부터 존경과 경외를 일으킬 수 있는 강력한 근거가 바로 초월(이 초월은, 로완에 따르면 우리가 생각하는 '초월'이다)의 영역에 있는 것들, 예컨대 축복, 기적, 그리고 부활일 텐데, 마가의 예수는 초월보다 무력함을 선택한다(그리고 여기서 우리의 생각을 넘어선 '초월'이 드러난다). 그리스도인들이 참된 지혜를 얻기 위해선 무력함의 예수를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 마가가 그리는 예수의 핵심이자 이 책 전체를 여는 열쇠이다. 법정 밖에 서서 시시비비와 득실을 따지는 방청객이 되지 말고, 심판대로 걸어 나와 예수와 함께 저 불의한 재판을 함께 받아야 함을 말하기 때문이다.

마태와 누가의 법정 속 예수는 표현이 조금씩 다르나 마가와 같은 결을 갖는다. 마태는 우리가 온갖 지식으로 무장한다 해도 참된 진리이신 예수 앞에 서는 순간 미리 준비했던 그 모든 지혜와 지식이 빛을 잃어버린다고 말한다. 좌우 기독교의 신앙 논쟁은 그 승리가 아무 편에게 주어진다고 할지라도, 지금 죽어 가는 이웃의 고통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참된 지혜란 아름답게 치장된 신앙의 언어나 날카로운 지식의 도구가 아니라, 그저 입을 다물고 저들 곁에 나아가는 것, "희생당한 이의 관점"으로 세상을 사는 것이라고 마태의 예수는 말한다. 누가는 한발 더 나아간다. 어떤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의 불의에 맞서기 위해 냉철한 지식과 확고한 신념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우리는 자주 세상의 압박과 도저한 폭력에 다시금 무력감을 느끼고 괴로워할 뿐이다. 죄로 가득한 세상이 진리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누가는 말한다. 따라서 우리는 논쟁의 자리에서 고통받는 자의 자리로 가야 한다. 우리의 나약함을 인정하고 저들을 환대해야 한다.

요한복음에 묘사된 법정 장면은 공관복음보다 조금 더 확장된 형태이다. 법정에서 빌라도는 당혹감에 사로잡힌 채 "네가 왕이냐?"고 묻고 예수는 "네가 그렇게 말했다"고 답한다. 빌라도로 대표되는 로마의 권위, 제국의 위력이 예수와 충돌한다. 세상의 길과 예수의 길은 곳곳에서 부딪치고, 대개 예수의 길은 패배한다. 예수의 길은 분명 무력한 길이고 이 무력한 것은 위력을 이길 방도가 없기 때문이다(달리 말하면 이 무력한 초월의 힘은 인간의 권력에 맞서는 힘이 아니라 '넘어선' 힘이기에 똑같은 방식으로 응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이 두 길 앞에 결단해야 한다. 세상의 논리를 따를지 무력함의 길을 따를지.

네 권의 복음서가 묘사하는 법정의 예수를 보았을 때, 우리는 예수를 보는 듯하지만 되레 우리를 비춰 준다. 우리의 신앙은 권력을 추구하고, 지식과 논쟁을 통해 승리를 갈구하며, 세상의 불의와 맞서 싸우는 일을 최고로 여기고, 성공만이 우리의 신앙과 사역을 보존해 줄 것이라 믿는다. 그러나 심판대에 선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쓸모없는 증인'이 되어 예수와 함께 서기를, 전문 지식과 종교성을 내려놓기를, 문밖에서 굶어 가는 이들과 함께하기를, 그리고 이러한 삶을 살아 내기로 결단하기를 촉구한다.

그리스도와 함께 선다는 것

짐작건대 <심판대에 선 그리스도>는 적극적이고, 개혁적이며, 진취적인 그리스도인에게 다소 불편할 수 있다. 세상에 만연한 불의와 불공정에 맞서는 그리스도인들은 적극적으로 투쟁하고 지식 쌓기를 게을리하지 않으며 대안을 확보하기 위해 오늘도 고군분투하고 있지만, 로완이 말하는 예수는 그와 정반대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 책의 부제 또한 저 불편함을 인지하고 있다 - '우리의 판단을 뒤흔드는 복음에 대하여(How the Gospel unsettles our judgement)'. 네 권의 복음서를 마무리하고 순교자에 대한 통찰을 추가한 로완의 의도 또한 여기에 있다.

순교의 길은 교회가 처음 세워지던 시대부터 가장 고귀한 죽음이었고 정절의 상징이자, 교회 살리는 역설이었다. 순교자의 피가 교회에 떨어질 때마다 교회는 빠르게 자랐다. 그러나 불행히도 순교는 헌신의 기준이 되었고, 옛 그리스도인들은 앞다투어 순교자의 피를 흘리겠노라 자처하기 시작했다. 로완은 헌신을 욕망의 도구로 삼아 버리는 그릇된 순교 열정은 그리스도와 함께 심판대에 서는 것이 아닌 그리스도를 심판하려는 재판관이 되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뜨거운 헌신이 또 다른 차별과 억압으로 변질돼 버리는 불행은 오늘날에도 자주 일어나는 일이다. 로완은 (교세의 확장을 추구하는 보수적인 기독교인이든, 또 다른 세력에게 권력을 가져다주고자 하는 진보적인 기독교인이든) 변혁을 추구하는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이 자칫 빠질 수 있는 함정이라고 경고한다.

따라서 우리는 각자의 삶을 성실하게 살아 내는 "일상을 살아 내는 기예(the art of the ordinary living)"를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전문가이든, 활동가이든, 명망가이든, 혹은 평범한 이름 없는 한 명의 사람이든 같은 하루를 선물로 사는 그리스도인임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스도와 함께 심판대에 선다는 것은 특별한 능력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을 살아 내는 기예로 만드는 것, 그것이 우리를 비로소 자유롭게 한다. 그리고 이 자유를 맛본 이는 결코 물러서지 않으리라. 그는 다시금 불의에 맞설 것이고 약자의 편에 설 것이며 그릇된 것에 저항할 것이다. 그러나 심판대에 선 그리스도와 함께 선 자의 싸움은 이전과 같지 않다. 그는 자유와 안식 안에서, 예수와 함께 십자가를 질 것이기 때문이다.

김형욱 / 대학과 대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했고 <희망의 신비>(비아)를 옮겼다. 현재 청어람ARMC에서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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