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기독교반성폭력센터 '교회 성폭력 생존자 글쓰기 자조 모임'에 참가하는 A 씨가 쓴 글입니다. - 편집자 주

죽도록 밉다는 것은 에너지가 필요한 일인데 내게는 그런 에너지가 없습니다. 지금은 하루하루 버티고 있습니다. 죽도록 밉고 어쩌고 하는 것조차 사치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내 안 깊숙이 그런 감정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잔잔한 바다 안의 거대한 빙산 같은 무의식 속에 죽도록 밉다는 나의 감정이 침잠되어 있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순간 울컥 억울하고 분하기도 하니까요.

당신은 거론할 가치조차 없는 사람인데 이렇게 지금 내가 에너지와 시간을 들여서 편지를 쓴다는 것 자체가 낭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쓰러져 자고 싶은데도 이렇게 쓰는 것은. 너무 머리가 아파서 자고 일어나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았습니다. 지금은 새벽 세 시 반입니다. 지금 눈에 눈물이 맺히고 얼굴 위로 눈물이 흐릅니다. 입을 앙다물고 아무 소리도 내지 않으려 하면서 이렇게 컴퓨터 자판을 두드립니다. 자판 두드리는 소리, 코 훌쩍임, 가끔 마우스 클릭하는 소리만 들릴 뿐입니다.

자기 전에 떠오른 것은 내가 피해자이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자꾸 기사에 나온 사람이 내가 아닌 것처럼 생각하게 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자고 깨어나 이불속에서 생각한 것은 당신도 가해자로 분류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은 "그런 일을 한 적이 없고, 우리 가족을 열심이 돌본 기억밖에 없다"고 장로를 통해 기자에게 말했겠지요.

나도 피해자이고 싶지 않고, 당신도 가해자이고 싶지 않고 사건을 없는 셈 치고 싶어 하는 듯합니다. 과거의 내 주변 사람들도 비슷한 것 같습니다. 당시 부모님도 그 일이 없는 것처럼 행동했고, 할머니도 "그냥 예뻐서 쓰다듬은 거겠지"라고 이야기합니다. 꼭 중요하지 않은 일처럼. 그냥 넘어가면 될 아무것도 아닌 일처럼. 정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일까요. 정말 일어난 일은 아무것도 아닌 일인 건가요? 나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 일은 분명히 큰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기사로도 나왔습니다.

요새 기독교반성폭력센터에서 진행하는 목회자 성폭력 생존자 글쓰기 모임에 함께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로 만들어진 모임입니다. 올해 상반기에 이어 하반기에도 참여하고 있습니다. 저는 모임에 두 번 참여한 최초의 사람입니다. 이 모임에 내 인생을 걸고 참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곳에서 아무 일도 겪지 않은 사람처럼 웃고 떠들기도 하지만, 나도, 그곳에 참여한 다른 사람들도 알고 있습니다. 나에게 분명히 무슨 일이 일어났고, 그 일이 내가 인생의 발걸음을 늦추고 모든 것을 뒤로 한 채 '치유 성장 글쓰기 자조 모임'에 참여하게 한 이유가 되었다는 것을요.

아예 티슈를 책상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눈물도 닦고 코도 풀었습니다. 제가 이렇게 하고 있는 일이 감정 낭비인 걸까요. 시간 낭비인 걸까요. 더 생산적인 일에 몰두해야 하는데, 돈도 벌고, 책도 읽고, 공부하고 해야 하는데 쓸데없이 많은 시간을 들여 쓸데없는 일을 하는 걸까요.

나는 지금 하나님을 마음속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내게 살아갈 힘을 달라고. 최근 당신의 과거 행적을 다룬 기사를 보았습니다. 당신이 담임하던 대전의 한 교회에 출석하던 여성 청년들이, 2XXX년 당신을 성추행 혐의로 상회에 고소했다는 것입니다. 피해자들은 당신이 목양실과 세미나실 등에서 강제로 껴안고 가슴을 만졌다고 했습니다. 기사에는 이 사건 외 몇 개가 더 적혀 있었습니다. 당신이 소속된 교단의 여성 단체들은, 이 같은 이유로 당신이 교단 내 중요한 직책에 있지 못하게 해 달라고 반대하는 중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몇 줄로 정리된 당신의 행동은 명백한 범죄행위입니다. 기사에 적힌 당신이 내게 한 행위들도 분명한 범죄행위입니다. 내 바지 속에 손을 넣고, 입 맞추고, 차 안에서 껴안고, 당신의 몸을 내 몸에 문지르고, 가슴을 만지고, 옷을 벗으라고 말하고.

지금 이렇게 쓰고 보니 당신이 내게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그때 나는 열일곱의 소녀였습니다. 그 후 수십 년이 지나서 나는 다시 컴퓨터에 앉아 그때를 떠올립니다. 열일곱. 얼마나 예쁜 나이입니까. 남자 친구를 한 번도 사귀어 보지 못한 열일곱 소녀였습니다. 가정 상황으로 건너간 미국에서 적응하느라 고생하던 소녀였습니다. 어떻게든 삶에 주어진 문제들을 신앙으로 풀어 가려 했던 소녀였습니다. 하나님을 만났고, 그분이 좋았고, 그 좋은 하나님을 아빠도 만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미국에 가서 아빠가 당신이 목사였던 교회에 다니게 되자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어주셨다고 행복해하던 소녀였습니다. 나는 열일곱 소녀였습니다. 나는 지금 내 인생에 일어난 일들을 되짚어 보고 있습니다.

최근 나는 당신의 몸에 관한 기억이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한 기억의 조각이 복기되었습니다. 왜 내게 그 기억의 조각이 있을까요? 한때는 당신이 어떻게 '성'을 이용해 내게 폭력을 행했는지 그 모든 것이 기억나지 않아 스스로를 자책하기도 했습니다. 상담 선생님은 내가 살기 위하여 그 기억을 꽉 누르고 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살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나는 살려고 무던히 노력했고, 지금도 하고 있습니다.

천국에서 당신을 보게 될지 안 보게 될지 잘 모르겠습니다. 만약 당신을 보게 된다면 아마 멀리 피해 다닐 것 같습니다. 만약 안 보게 된다면, 내가 그곳에 없는 걸까요, 당신이 그곳에 없는 걸까요. 당신이 없다면 당신 교회 사람들은 너무도 슬퍼할까요. 정말 좋으신 우리 목사님이 없다고. 당신이 원하는 것처럼 내가 그곳에 없다면 당신은 안도의 한숨을 쉬게 될까요. 어떤 일이 있었다고 말하는 내가 그곳에 없다는 것이.

당신은 큰 교회의 목사고, 당신이 속한 교단에서 중요한 자리를 맡을 수도 있는 순간입니다. 수천의 성도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다릅니다. 나는 지금 쉬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쉬면서 작은 집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이사하면서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그런데 버리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미국에서 당신이 목회하던 교회에서 반주하면서 샀던 작은 야마하 피아노입니다. 당시 내가 예배 때 반주를 하면 당신은 찬송가를 부르고 예배를 인도했지요. 그때 반주를 하면서, 찬양을 하면서 참 행복했습니다. 지금은 피아노를 치지 않고 있고, 이사를 할 때마다 짐스럽지만, 버리지 않는 것은 왜일까요.

당신은 지금 더 큰 교회에서 피아노 전공자의 반주에 찬송가를 부르며 예배를 인도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어제가 일요일이었네요. 당신은 어제가 예배를 인도하느라 가장 바쁜 날이었을 텐데 저는 하루 종일 잠을 잤습니다. 당신은 여전히 교회 안에 있지만 나는 어쩌면 교회를 다시 가지 못할 것도 같습니다. 교회를 너무 가고 싶긴 한데 갈 곳을 찾는 게 어렵습니다. 어제는 하루 종일 잠을 자다 밤에 잠깐 나와 산책을 했습니다. 그때 들은 냇가의 물소리가 음악 같았습니다. 그 소리를 들으며 언젠가 내가 다닐 교회를 꼭 만나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여기까지입니다. 이번에는. 언젠가 다시 내가 당신을 볼 날이 있을까요. 이 세상에서나, 하늘나라에서나. 저는 당신을 보고 싶지 않습니다. 당신도 아마 그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이렇게 당신이 내게 한 일들을 얘기하기 시작했으니 더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신은, 사람들은 나에게 전에는 이야기하지 않다가 왜 이제 와서 이야기하느냐고 물을 수도 있겠습니다. 전에 내 몸 어딘가에 꼭꼭 숨겨져 있던 이 이야기는 어느 순간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더 이상 숨어 있고 싶지 않다고. 나도 더 이상 숨길 힘이 없습니다. 이 이야기를 숨기느라 내 인생의 너무나 많은 에너지가 이제껏 소모되었습니다. 내 인생을 더 잘 꾸려 나가는 데 쓰여야 할 에너지가 당신이 내 몸에 저지른 행동을 숨기는 데 쓰였습니다. 더 이상 나는 숨기지 않겠습니다. 이 일은 당신이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지 내가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 아닙니다.

당신의 내게 행한 폭력이 이 세상에 없었던 일처럼 사는 것을 그만두기로 나는 선택했습니다. 당신이 행한 폭력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도 모르고 얼떨떨하게 서 있던 그 열일곱 소녀를 나는 안아 주기로 했습니다. 슬펐지만 슬픔을 표현하지도 못하고 아무렇지 않은 듯 매일을 살아야 했던 그 소녀를 안아 주고 미성년 조카들을 지속적으로 성적으로 괴롭혔던 당신의 폭력을 폭로하기로 나는 선택했습니다.

그 소녀는 아직도 웁니다. 그러나 그 소녀는 외롭지 않습니다. 아무도 믿어 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나는 그녀의 편이 되어 줄 것입니다. 언젠가 그 소녀는 울음을 그치고 다시 웃을 것을 나는 압니다.

기사에서 본 당신은 여러 명에게 성추행 가해를 한 혐의가 있었고, 여성 전도사와 육체적 관계를 했다는 시인도 했었습니다. 그리고 나도 당신에게 추행을 겪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도 당신은 건재합니다. 돈도 있고, 명예도 있고, 힘도 있습니다. 나는 돈도 힘도 없지만 진실이 있습니다. 진실은 참 느립니다. 내게도 느리게 왔고, 당신에게는 어쩌면 영원히 다다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그 진실이 내게 있습니다. 나는 이제 피아노를 조율하려 합니다. 진실을 노래할 것입니다. 진실을 쓰고 진실을 노래할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다시 당신에게 이렇게 편지를 쓸 것도 같네요.

그럼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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