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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되고도 새로운' 20세기 복음주의 지성과 양심의 대변자

[20세기 세계 기독교를 만든 사람들⑦] 칼 헨리 - 불편한 양심·편집장·한국

이재근   기사승인 2018.10.25  14:0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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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 진영에서의 헨리의 위치는 신정통주의 진영에서의 카를 바르트의 위치와 로마 가톨릭 진영에서의 카를 라너의 위치와 비견된다." 미국 남부 앨라배마주 소재 샘퍼드대학 비슨신학교(Beeson Divinity School at Samford University) 학장인 역사학자 티모시 조지(Timothy George)는 칼 헨리(Carl F. H. Henry, 1913~2003)가 20세기 기독교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비교 방식을 사용해서 명료하게 설명한다.1) 공교롭게도 이들은 동명삼인同名三人, 칼/카를(Carl/Karl)이다.

카를 바르트는 20세기 세계 개신교 진영에서 가장 막강한 영향력을 떨친 신학자였다. 개신교 신학은 그의 등장 전후로 나뉘며, 그에게 동조하든 반대하든, 모든 신학자는 그의 글을 반드시 읽고 학문적 비평의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 가톨릭 신학에서 카를 라너도 그와 비슷한 역할을 한다. 아마도 라너의 비중은 바르트보다도 더 클지 모르겠다. 국적별·교파별·진영별·언어별 분화가 심한 개신교에 비해, 가톨릭은 내부 통일성이 상대적으로 더 확고하기 때문이다.

칼 헨리가 복음주의 진영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라너나 바르트에 비해서는 덜 견고하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신학과 지성보다는 행동과 운동, 실천에 더 방점이 찍히는 복음주의의 특성상, 복음주의의 대표자 자리를 부흥사 빌리 그레이엄, 혹은 설교자 마틴 로이드-존스, 혹은 더 대중적인 신학자 제임스 패커나 목회자 존 스토트에게 맡겨야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전 세기와는 다른 유형의 20세기 복음주의 운동을 하나의 조직으로 탄생시키고, 전면에 얼굴마담으로 나서기보다는, 배후에서 신학적 정교함과 일관된 사회의식을 조종간 삼아 복음주의 전체 네트워크의 방향을 이끈 항해사(navigator)였다는 점에서, 헨리의 역할은 지대했다. 1913년부터 2003년까지 긴 90년간의 '복음주의자' 헨리의 일관성 있는 궤적을 다음 세 단어로 정리해 보자: △불편한 양심 △편집장 △한국.

칼 헨리. 밥티스트프레스 갈무리

1. 불편한 양심 I - 회심

칼 헨리는 1913년에 뉴욕 맨해튼의 독일인 이민자 가정에서 8남매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1910년에 미국에 이민한 제빵기술자 카를 하인리히(Karl F. Heinrich)가 요한나 패트뢰더(Johanna Vaethroether)를 뉴욕에서 만나서 결혼했다. 부모는 큰아들의 이름을 영어식으로 변형된 아버지 이름인 칼 퍼디난드 하워드 하인리히(Carl Ferdinand Howard Heinrich)로 지어 주었다. 그러나 1914년에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독일이 미국의 적국이 되자, 차별과 핍박을 두려워한 많은 독일계 이민자가 그랬듯,2) 아예 성까지 영어로 바꾸어 버렸다. 그래서 카를 하인리히가 칼 헨리가 되었다.

헨리의 부모는 각각 독일인이 전통적으로 소속된 교파인 루터교와 가톨릭 교인이었으나, 교회에 출석하지도, 기도나 성경 읽기 등의 신앙생활을 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헨리와 동생들은 부모와는 상관없이 매주 먼 거리를 걸어서 성공회 교회 주일학교에 참석하면서, 성실성의 보상인 개근상을 늘 받았다. 헨리는 이후 12살이 지난 후 같은 교회에서 세례와 견진성사를 연이어 받고 성공회 교인이 되었다.3) 이 점에서 헨리는 20세기 초중반에 근본주의자 혹은 복음주의자로 이름을 떨친 많은 기독교 지도자의 성장 배경이었던 분리주의적 근본주의 가정 문화를 직접 체험하지는 못했다. 따라서 성인이 된 후 헨리가 당대 근본주의에서 느낀 양심의 불편함, 그래서 결국 근본주의를 이탈하게 만든 그 양심의 가책은, 가정에서 부모로부터 전수되어 형성된 인간적이고 관계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지적이고 사회적인 것이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

비록 부모는 그 역할을 하지 못했지만, 어린 헨리의 신앙 양심을 자극한 인물은 주변에 여럿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진학을 하지 않은 대신 그는 지역 주간신문 <이슬립프레스 Islip Press>에 타이핑 직원이자 지역 스포츠 칼럼니스트로 취직했다. 이것이 헨리의 이름을 유명하게 한 언론인 경력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기자 경력보다 더 중요한 경험은 이 회사의 감리교인 여성 밀드레드 크리스티(Mildred Christy) 부인과의 만남이다. 친모에게서 신앙적인 도움을 전혀 받을 수 없었던 헨리에게 영적 어머니가 되어 준 인물이었다.

회사 편집부 직원이었던 크리스티는 헨리의 기사를 접수하고 교정하는 일을 맡았지만, 동시에 자주 자기 집 식사 시간에 초대하거나 같이 차를 타고 귀가하면서, 거듭남의 필요성에 대해 강조했다. 또한 그를 18세기 웨슬리 형제의 모임에서 이름을 차용한 롱아일랜드 지역 '옥스퍼드그룹'에 초대하기도 했다. 당시 이 모임을 이끌던 인물 중 진 베드퍼드(Gene Bedford)와의 만남이 결정적이었다. 언론인으로서의 미래 전망에 고무되어 종교에 헌신하기를 주저한 헨리와 베드퍼드의 만남은 수차례 결렬되었다. 헨리는 <뉴욕타임스 The New York Times>를 비롯한 주요 신문사에도 기사를 송고하고 있었고, 롱아일랜드의 주간신문 <스미스타운스타 Smithtown Star> 편집자로도 일하는 등, 언론인으로서 전망이 매우 밝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933년 6월 10일 토요일 오전에 마침내 세 시간가량 베드퍼드를 만난 결과, 헨리는 회심에 이르렀다. 폭풍우 속에서 차 안에서 이루어진 두 사람의 대화와 극적인 회심을 헨리 스스로가 묘사한 상황을 읽어 보면, 그는 그 장면을 마르틴 루터의 1517년 95개 조항 발표 이전 폭풍우 및 이후 탑 체험과 유사하게 묘사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경험은 18세기 이래 영미 청교도와 부흥사들의 신앙고백문에서 흔히 읽을 수 있는 전형적인 복음주의적 회심 체험이었다.4) 즉 죄 용서와 하나님의 임재를 구한 기도, 죄 사함에 대한 내적 확신, 개인의 구원자로서의 예수 영접, 하나님이 인도하는 곳 어디든지 따르겠다는 헌신, 다른 이들에게 자신이 경험한 신앙을 나누겠다는 행동주의적 결단 등이 구성 요소였다.5) 하나님께 반역하는 죄인으로서의 가책에 시달리던 헨리의 불편한 신앙 양심은 이렇게 해방되었다.

2. 불편한 양심 II
- 신복음주의 신학자의 탄생
(휘튼/노던침례/보스턴/풀러)

극적인 회심을 경험한 이들 다수가 그렇듯, 회심 이후 헨리는 진로를 놓고 깊은 고뇌에 빠졌다. 전임 사역자가 되고 싶었던 그는 휘튼대학(Wheaton College)을 소개받고 지원 의지를 굳혔다. 그러나 그의 집안에서 대학 교육을 받은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는 점, 대공황기였던 당시 재정 상황이 극히 나빴다는 점이 문제였다. 그러나 학교에 다니는 동안 주변 도시들의 여러 신문사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하고, 학교에서 타이핑을 가르치는 수업을 맡는 방법 등으로 재정 문제를 해결했다.

철학과 학생이었던 헨리의 휘튼 생활은 그가 지성의 기반이 되는 학문의 기초를 쌓았다는 점 외에도, 평생 동역하게 되는 여러 동지를 만났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었다. 최고의 동지는 졸업반이던 1940년에 아내가 된 헬가 벤더(Helga Bender)로, 카메룬 파송 침례교 선교사의 딸이었다. 같은 기숙사에서 생활한 새뮤얼 H. 마펫(마포삼락, 장로회신학대학교 교수)과 하워드 마펫(마포화열, 대구 동산병원 원장)은 평양에서 활약한 미국 북장로교 한국 선교의 거인 새뮤얼 A. 마펫(마포삼열, 평양신학교 교장)의 아들들로, 둘 다 후에 선교사와 학자로 아버지에 필적하는 존경과 명성을 누렸다.6) 복음주의 부흥사 빌리 그레이엄, 풀러 동료 해럴드 린셀, 에드워드 카넬도 같은 시기에 사귄 친구들이었다.7)

휘튼에서 헨리의 사상 형성에 큰 영향을 끼친 스승은 학장 올리버 버스웰(Oliver Buswell, 1895~1977)과 고든 클락(Gordon Clark, 1902~1985)이었다. 휘튼에서 각각 신학과 철학을 대표하는 학자였던 두 사람은 각각 다른 면에서 헨리의 학자로서의 미래에 영향을 끼쳤다. 먼저, 1926년에 31세의 젊은 나이로 휘튼의 학장이 된 버스웰은 보수 신앙을 높은 학문적 기준과 연계하는 데 성공하며, 재임 시 학생 수를 이전의 세 배까지 늘리는 데 성공한 행정가이기도 했다. 버스웰은 1920년대와 1930년대 북장로교 논쟁기에 그레셤 메이첸을 따라 북장로교를 떠나 미국장로교회[PCA, 이후 정통장로교회(OPC)]를 세우고 1936년에 새 교단의 초대 총회장이 된 인물이었다. 그러나 메이첸과 종말론에서 견해차를 보여, 결국 1938년에 칼 매킨타이어와 함께 성경장로교회(BPC)를 세우지만, 이후 극단적인 전투적 근본주의를 지향한 매킨타이어와 결별하고, 1955년부터 복음주의장로교회(EPC)와 커버넌트신학교에서 활동하게 된다. 휘튼은 초교파 학교가 장로교 논쟁에 휘말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1940년에 이미 버스웰을 해임했다. 이 행보에서도 알 수 있듯이, 버스웰은 보수적인 근본주의 인사였지만, 전투적 근본주의에는 반대한 중용적 인물이었다. 헨리는 휘튼에서 학부와 신학 석사(MA)과정을 1938년에 마쳤는데, 그 시절의 헨리에게 학문과 신앙의 조화를 구현한 것으로 비춰진 버스웰은 지극한 존경의 대상이었다.8)

변증신학자로서의 헨리의 이후 진로에 가장 큰 지적 흔적을 남긴 인물은 장로교인 고든 클락이었다. 유신론의 합리성과 성경 진리의 명제적 본질을 강조하는 합리주의적 복음주의 주창자인 클락의 철학 입장은 이후 헨리의 저작에 큰 그림자를 드리웠다. 실제로, 헨리는 1946년에 출간된 자신의 첫 저작 <현대 지성 재형성 Rethinking the Modern Mind>을 자신의 스승인 "세 아테네 사람" 클락과 해리 젤레마, 코넬리어스 반틸에게 헌정했다. 1976년부터 1983년까지 발행한 대작 <신, 계시, 권위 God, Revelation, and Authority>의 서문에서는 자신이 가장 큰 지적 빚을 진 스승이 고든 클락이라 언급하며, 세 아테네 사람 중 최고의 자리를 클락에게 헌정했다.9)

언론인으로 활동하고 있던 칼 헨리는 회심 이후 전임 사역자로 진로를 틀었다. 사진 출처 칼헨리센터

헨리는 휘튼에서 석사 학위를 밟던 1938년에 시카고 서부의 노던침례신학교에 지원해서 목회자 과정을 밟기 시작했다. 휘튼은 특정 교단 소속이 아닌 초교파 학교였다. 그러나 이 학교의 학문을 이끈 주요 지도자는 장로교인이었고, 그가 가장 존경한 스승들도 장로교인이었다. 그런데 왜 헨리는 장로교 목회자 과정 대신에, 혹은 자신이 세례와 견진을 받은 성공회 대신에 침례교 신학교로 진학했을까. 1937년에 롱아일랜드에서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던 중, 헨리는 그 지역 바벨론침례교회의 성경 공부 모임에 참석했다가 신자 세례와 침례를 확신하기에 이른다. 결국 휘튼으로 돌아가기 전에 침례까지 받고, 성공회에서 침례교로 소속을 공식적으로 바꾼다. 미국 장로교의 지리멸렬한 논쟁 및 분열 상황에 혼란을 느낀 데다, 극적으로 만난 침례교 신앙에 대한 확신이 더해진 것이 원인이었다.10)

노던침례신학교는 원래 중서부 지역에서 북침례교 목회자 교육을 담당하던 시카고대학 신학부가 최첨단의 현대신학을 수용하자, 이에 대한 보수파의 대안으로 세워진 학교였다. 이 학교에 다니는 동안 헨리는 그의 경력에 덧붙여질 여러 타이틀을 얻게 된다. 결혼(1940), 휘튼 석사(1941), 노던침례신학교 신학사(1941), 시카고 훔볼트침례교회에서 목사 안수(1941), 노던침례신학교 신학 박사(1942) 등이었다.11) 그러나 이 학교에서 학사와 박사과정을 밟는 동안, 이미 그의 마음에는 휘튼과 노던침례신학교 근본주의가 결여하고 있는 약점에서 비롯된 의심이 싹트기 시작했다. 당시 학교 커리큘럼에 사회윤리를 다루는 과목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 주요 문제였는데, 이때 느꼈던 생각이 1947년에 등장하는 <복음주의자의 불편한 양심>의 기본 얼개가 된다.12)

1942년 5월에 박사 학위를 취득한 동시에 같은 학교의 전임 교수로 임용된 헨리는 1947년에 미시간 지역 종교 신문 <릴리저스다이제스트 Religious Digest>에 복음주의 기독교가 복음의 사회적 측면에 침묵하는 현상을 지적하는 일련의 기고문을 실으려다 거절당했다. 그러나 이 글은 네덜란드계 미국 출판사 어드만스(Eerdmans)의 제안으로, 단행본 소책자 형태로 출간될 수 있었다.13) 당시 추천사를 썼던 풀러신학교 초대 총장 해럴드 오켄가(Harold Ockenga, 1905~1985)는 "성경을 믿는 기독교인이 전쟁, 인종차별, 계급 격차, 노동권, 금주법, 제국주의 같은 사회문제와 관련해 잘못된 편에 서 있다면, 이제 담을 넘어 올바른 편에 서야 할 때가 왔다. 교회에는 대사회적 메시지를 지닌 '진보적인 근본주의'가 필요하다"며, 헨리의 이 책이 그 역할을 감당할 것이라 추천했다.14) 이 책의 출간은 "마치 포위된 근본주의 진영에 폭탄을 던진 것과도 같았다."15)

헨리에게 1947년은 인생의 새로운 이정표를 세운 해였다. <복음주의자의 불편한 양심>으로, 그는 근본주의 진영의 폐쇄적이고 자폐적인 고립주의가 종교개혁 기독교 및 19세기 복음주의의 역사적 전통에 어긋난다고 주장했다. 이런 현실을 바라보는 자신의 양심이 불편해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헤럴드 오켄가를 중심으로 보수 개신교인 147명이 이미 1942년 4월에 전미복음주의협회(National Association of Evangelicals, NAE)를 창설했는데, 이는 오켄가가 헨리의 책 서문에서 밝힌 소위 '진보적 근본주의'를 대변하는 기관이었다. 헨리가 1947년에 쓴 책은 그 점에서 비록 공식적이지는 않지만, NAE의 대사회 메시지 선언문과도 같았다.

같은 해 9월에 헨리는 오켄가가 총장으로 임명된 신설 풀러신학교의 교무처장으로 부임했다. NAE, 풀러신학교, <복음주의자의 불편한 양심>으로 대변되는 1940년대 '진보적 근본주의'는 1950년대 말에는 '신복음주의'(New Evangelicalism)로 알려졌다. 이 운동은 "지배적인 문화 및 신학 의제를 변화시키려는 선교 의식 때문에 독특하게 된 것으로, 이 선교 의식은 신학적으로 오류가 있는 이들을 떠나 지조 있는 고립을 지키기보다는 흔들림 없는 영향력을 떨치려는 운동"이었다.16)

1947년에 거의 확립된 헨리의 사회의식을 내용과 동시에 지위 면에서도 더 견고히 해 준 것은 그가 1949년에 보스턴대학(Boston University)에서 취득한 기독교 윤리학 분야 박사 학위(PhD)였다. 풀러신학교 동료 에드워드 카넬의 지도교수이자, 후에 흑인 민권운동의 기수 마틴 루터 킹의 지도교수도 맡게 되는 에드가 브라이트먼(Edgar S. Brightman)에게 지도를 받았다.

이렇게 학문성이 검증된 종합대학 학위까지도 취득하면서, 그는 선배들의 반지성적이고 반사회적인 근본주의와 결별한다는 선언을 분명히 했다. 결국 20세기 복음주의 대표 신학자 헨리는 칼뱅주의 개혁신학을 기반으로, 교회론에서는 침례교 회중주의를 따르지만, 동시에 초교파적 에큐메니즘을 지향하며, 한편으로는 근본주의의 반지성적·반사회적 고립주의를 탈피하여 적극적으로 복음의 총체성을 설파하는 개신교 복음주의 종합 세트를 인격·학문·활동에서 구현한 인물로 성장했다.

3. 편집장 - <Christianity Today

1942년부터 1947년까지 근본주의 노던침례신학교, 1947년부터 1956년까지 신복음주의 풀러신학교 교수를 지낸 헨리였지만, 그가 복음주의 운동에 가장 크게 기여한 영역은 신학교보다는 언론사였다. 젊은 시절부터 여러 신문사에서 타이피스트와 기자, 편집자로 활약한 경력과 재능을 다시 펼칠 수 있는 현장이었다. 1955년에 오켄가와 그레이엄은 1884년에 창간된 후 기독교 잡지의 선두 주자로 군림하고 있던 자유주의 성향의 <크리스천센추리 Christian Century>에 대응하는 복음주의 잡지를 창간하기로 합의하고, 기독교인 석유 사업가 하워드 퓨(J. Howard Pew)의 동의를 받았다. 그해 9월에 열린 이사회에서 헨리가 편집장, 마셀러스 킥(Marcellus Kik)이 보조편집자, 넬슨 벨(Nelson Bell)이 실행편집자로 선출되었다. 헨리는 이 잡지 <크리스채너티투데이 Christianity Today> 편집장을 맡아 12년간 봉사했다.

헨리의 지도 아래 <크리스채너티투데이>는 1년 만에 발행 부수에서 경쟁지를 넘어섰다. 처음에 격주간지로 창간된 이 잡지의 창간호를 1956년 10월 15일에 발간한 후 1년 뒤에 이미 3만 8000명의 유료 구독자를 확보했다. 이는 경쟁지 <크리스천센추리>보다 4000명이나 많았다.17) 헨리가 편집자로 일한지 12년째 되는 해에는 17만 부까지 발행 부수가 늘었다. 헨리는 장문 사설과 논문을 통해 부상하는 복음주의 운동의 정의와 방향을 제시했다. 그가 쓴 첫 사설에는 헨리가 이 잡지를 어떤 방향으로 이끌기 원했는지를 알 수 있는 내용이 담겼다. 이 사설에서 헨리가 강조한 세 가지 목적을 브라이언 스탠리는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첫째, <크리스채너티투데이>는 '전 세계의 점증하는 복음주의 학자 집단'이 현세대에 적합하고 타당한 방식으로 신앙을 해설하고 변호하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 즉, 이 잡지는 생각하는 남녀를 위한 잡지다.
둘째, 이 잡지는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으로서의 성경의 '완전한 신뢰성…권위…온전한 영감'에 대한 입장을 타협하지 않을 것이다. 즉, 이 잡지는 길 한복판에 애매모호하게 서 있는 잡지가 아니다.
셋째, 이 잡지의 목적은 힘과 권세의 회랑을 뚫고 전진하는 것이지, 신학교 강의실에서 강의만 하고 마는 것이 아니다. 즉, <크리스채너티투데이>는 삶의 모든 영역에 복음 메시지 전부를 적용함으로써 현대사회의 위기에 성경 계시를 적용할 것이다. 이는 근본주의가 '자주 실패한' 것이다."18)

헨리는 편집장으로 활동하며, 기독교적 가치와 원칙을 사회의 전 영역에 적용하기 위해서는 복음주의자들이 '후방'에서 나와서 '전방'으로 가야 한다는 주장, 즉 <복음주의자의 불편한 양심>에서 이미 했던 주장을 <크리스채너티투데이>에서도 수없이 반복했다. 신실한 복음주의 기독교인으로서, 기도와 경건 생활과 훈련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글을 썼다. 그러나 기독교인을 이 세상 및 이 세상이 당면한 필요에서 단절하게 하는 유형의 침묵주의 및 신비주의는 확고히 반대했다. 근본주의의 분리주의 성향을 파악하고 있던 헨리는 이 잡지가 소속이 다양한 복음주의 기독교인의 구심점이 되기를 원했다. 따라서 자신은 신학에서 개혁신학, 교회관에서는 침례교 입장에 있었음에도, 모든 범위의 복음주의자들의 다양한 견해를 <크리스채너티투데이>에 실었다. 또한 헤리트 코르넬리우스 베르카우어, 에밀 브룬너, 헬무트 틸리케, 카를 바르트 같은 저명한 유럽 신학자들이 미국을 방문할 때마다, 그들과 나눈 인터뷰를 실었고, 그들이 기고한 글도 가능한 한 정기적으로 실으려고 노력했다.19)

그러나 미국 복음주의 지성의 대변인으로 널리 명성을 떨치던 편집장 헨리의 위치는 1960년대에 위기를 맞는다. 신학적으로 그는 여전히 철저한 전통주의자였으나, 정치 및 사회관이 이 잡지를 재정적으로 후원하는 하워드 퓨에게는 너무 넓고 진보적으로 보였다. 퓨는 이 잡지가 1960년대의 진보적 사회운동과 에큐메니컬 운동에 더 단호하게 반대하는 견해를 표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헨리는 1968년 7월 5일에 압박 속에서 편집장직을 사임하고, 9월 27일 자로 이 직책을 풀러의 좀 더 보수적인 동료였던 해럴드 린셀에게 물려주어야 했다.20)

역사학자 마크 놀(Mark A. Noll)은 "창간 후 약 10년 동안 복음주의의 지성적 지도력에 활력을 불어넣은 이 잡지가 이후 상업적으로 변질되어, 뉴스와 중간 지식층의 종교 주석서 수준으로 변형되었다"고 1994년에 비판했다. 그 결과 "복음주의권 일반 대중을 위해 자연, 사회, 정치, 예술 세계를 진지하게 고려할 목적으로 존재하는 복음주의 잡지를 찾기가 힘들다"며, 이것이 바로 '복음주의 지성의 스캔들' 중 하나라고 지적했다.21) 마크 놀이 이 잡지의 지성적 전성기로 잡은 초기 10년은 바로 헨리가 편집장을 역임한 시기와 일치한다.

칼 헨리(왼쪽)와 <크리스채너티투데이> 설립자 빌리 그레이엄. 칼 헨리가 첫 번째 호를 들고 있다. 크리스채너티투데이 갈무리

편집장 사퇴 후 헨리는 잉글랜드 케임브리지대학에서 1년간 안식년을 보낸 후, 이스턴침례신학교(East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로 이동해서 1969년부터 1974년까지 5년간 교수로 일했다. 이 기간 중 1976년에 <신, 계시, 권위 God, Revelation and Authority>의 첫 두 권이 출간되었다. 여섯 권으로 된 이 책은 헨리의 대표작으로, 20세기 전 세계 복음주의 신학자가 쓴 모든 신학적 인식론 저술 중 가장 탁월하고 가장 오래 활용되었다. <신, 계시, 권위>는 헨리의 지성의 폭이 얼마나 넓은지, 또 경쟁하는 신학 입장들을 서로 비교하고 통합하는 능력이 얼마나 탁월한지 보여 주는 대작이다. 예컨대, 이 책에서 그는 세속주의, 자연주의, 실존주의 및 다양한 유형의 현대 무신론을 광범위하게 다룬다. 또한 해방신학, 급진 페미니즘, 과정철학 및 신학을 포함해서, 그가 비정상이자 이탈했다고 판단한 신학 견해들을 아주 잘 알고 있었음을 보여 주었다.22)

4. 한국 - 월드비전과 ACTS

사람들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헨리가 한국 및 한국교회와 맺은 인연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한국과 인연을 맺게 된 계기는 이스턴침례신학교에서 사임한 1974년부터 1986년까지 그가 국제월드비전(World Vision International) 주 강사로 활약한 일이었다. 월드비전은 1950년 한국전쟁 당시 거리를 떠돌던 전쟁고아와 난민을 돌보기 위해 중국 선교사 출신의 침례교 목사 밥 피어스(Bob Pierce, 1914~1978)가 설립한 국제 구호단체였다. 창설 시기부터 한국이 주 활동 무대였기에, 그는 한경직 등 한국인 지도자들과도 긴밀히 협력했다.23) 따라서 월드비전의 유명 강사였던 그가 한국을 자주 방문한 것은 자연스러웠다.

헨리는 1974년 4월부터 7월까지 세 달간의 아시아 투어 중 첫 방문지로 한국을 찾았다. 당시 그는 그해 서울에 정식 설립된 아세아연합신학대학원(ACTS, Asian Center for Theological Studies and Mission)에서 2주 반가량 강의했고, 장로회신학대학과 서울신학대학, 침례신학대학에서도 강연했다. 또한 '엑스플로 74'를 준비하던 CCC 회관에서 강의하고, 한경직 목사가 시무하던 영락교회에서도 설교했다.24) 이는 국제 복음주의 대표 대변자 중 하나인 헨리의 광범위한 세계 복음주의 네트워크의 결과였다.

1974년에 설립된 ACTS의 초대 이사장은 미국 교계에도 널리 알려진 한경직, 원장은 휘튼 기숙사에서 동고동락한 마펫(마포삼락), 부원장은 미국복음주의신학회를 본 따 한국에 한국복음주의신학회를 창립한 한철하였다. 또한 국제 CCC 창립자 빌 브라이트와 한국 CCC의 김준곤은 헨리가 교수로 가르친 풀러신학교 출신이었다. 비록 김준곤은 헨리가 1956년에 학교를 떠나고 1년 후인 1957년에 풀러에 들어갔지만, 교수로서의 헨리와 이후 편집장으로서의 헨리의 명성을 익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헨리는 ACTS가 1974년에 국제복음주의신학대학원으로 한국에 설립되었을 때, 초대 원장을 맡아 달라는 요청을 받은 바 있었다. 그러나 당시 한국의 혹독한 겨울 날씨 등을 들어 그 제안을 거절했다. 그러나 1974년 첫 강의를 포함해, 1980년까지 다섯 차례 월드비전 강사로 한국을 찾을 때마다 ACTS에서 3주, 혹은 그보다 짧은 강의를 맡았다. 이런 인연으로 그는 자신을 ACTS의 '설립강사'(founding lecturer)로 지칭했다.25) 1975년에 두 번째로 한국을 찾았을 때에는 구어체 영어 성경으로 미국 복음주의자들의 사랑을 받은 리빙바이블(Living Bible) 번역자 케네스 테일러(Kenneth N. Taylor, 1917~2005)와 마펫(마포삼락)의 집에서 조우하기도 했다. 헨리와 테일러와 마포삼락은 모두 휘튼 동기였으며, 헨리와 테일러는 노던침례신학교 동문이기도 했다. 이때 헨리의 아내 헬가는 한국식으로 환갑잔치를 치르기도 했다.26)

1993년 남침례교신학대학원 앨버트 몰러 총장(왼쪽부터)과 칼 헨리, 빌리 그레이엄. 밥티스트프레스 갈무리

그렌츠와 올슨은 두 사람이 공저한 20세기 신학자들에 대한 지성적 전기에서, 헨리를 "결코 한 진영에 국한된 입장이 아니라 광범위한 복음주의 연합 사상을 대표하는 신학을 구가"한 인물로 평가한다.27) 또한 "구속의 메시지야말로 삶의 모든 영역에 함의를 갖고 있다"는 확신하에, "역사적 기독교를 유력한 세계 이데올로기로 제기시키려는 비전"을 품은 인물로 묘사한다.28) "복음주의 신학의 제1의 해석가요, 지도적 위치에 있는 이론가요, (중략) 전통 전체를 대변하는 비공식적 대변인"29), "20세기 신학적 선각자 중 한 사람"30)이라는 다른 학자들의 평가도 인용하면서, "20세기 후반 가장 탁월한 복음주의 신학자는 분명히 칼 헨리"라고도 선언한다.31)

그러나 헨리는 분명 신학자 이상의 인물이었다. 그는 1940년대 이후 등장한 신복음주의 운동, 즉, 고전적 종교개혁 신학과 영미권 청교도 및 부흥 운동의 '오래된' 전통을 충실히 따르면서도, 20세기 분리주의적 근본주의의 고립형 게토에 머물지 않고, 여러 기독교 전통의 다채로운 유산을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지성과 사회의식, 연합 정신으로 포괄하는 '오래되고도 새로운' 복음주의 기독교의 대변자였다.

1) T. George, "Carl Ferdinand Howard Henry," 티모시 라슨 외 편, 『복음주의 인명사전』, 이재근, 송훈 역 (서울: CLC, 출간 예정)
2) 미국에서 앵글로색슨계 주류 배경이 아닌 이민자들이 사회적 신분 상승을 위해 이름과 성을 바꾸는 일은 역사적으로 매우 흔했다.
3) 박찬호, 『칼 헨리: 복음주의 신학의 대변자』 (서울: 살림, 2006), 41-45.
4) Carl F. H. Henry, Confessions of a Theologian: An Autobiography (Waco, TX: Word Books, 1986), 44-58. 박찬호, 『칼 헨리』, 53-71.
5) 스탠리 그렌츠, 로저 올슨, 『20세기 신학』, 신재구 역 (서울: IVP, 1997), 466.
6) 박찬호, 72-74.
7) 그렌츠, 올슨, 『20세기 신학』, 466.
8) 박찬호, 74-76.
9) 브라이언 스탠리, 『복음주의 세계 확산: 빌리 그레이엄과 존 스토트의 시대』, 이재근 역 (서울: CLC, 2014), 206. 박찬호, 77-81.
10) 박찬호, 81.
11) 그렌츠, 올슨, 467.
12) 박찬호, 83f. 『복음주의자의 불편한 양심』(박세혁 역, IVP, 2009)의 원제는 The Uneasy Conscience of Modern Fundamentalism으로, 정확하게는 "현대 근본주의의 불편한 양심"이지만, 헨리는 이 책에서 근본주의와 복음주의를 큰 의미상 차이 없이, 전반적으로 보수주의 개신교인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상호 교차적으로 사용하므로, 번역상 큰 문제는 없다.
13) 박찬호, 87f. 스탠리, 236.
14) 칼 헨리, 『복음주의자의 불편한 양심: 복음주의 그리스도인의 현실 참여 선언문』, 박세혁 역 (서울: IVP, 2009), 13.
15) 스탠리 그렌츠, 『기독교 윤리학의 토대와 흐름』, 신원하 역 (서울: IVP, 2001), 232.
16) George M. Marsden, Reforming Fundamentalism: Fuller Seminary and the New Evangelicalism (Grand Rapids: Eerdmans, 1987), 60-68. 스탠리, 62f.
17) 박찬호, 112.
18) 스탠리, 67f.
19) T. George, 『복음주의 인명사전』.
20) Marsden, 260. 박찬호, 245.
21) 마크 놀, 『복음주의 지성의 스캔들』, 이승학 역 (서울: 엠마오, 1996), 29.
22) T. George, 『복음주의 인명사전』. 헨리의 신학과 변증학 이론을 체계적으로 요약 정리한 대표적인 글로는 그렌츠, 올슨, 『20세기 신학』에 실린 "칼 헨리: 현대주의에 대한 복음주의적 대안," 465-476과 스탠리, 205-209가 있다. 그의 윤리학에 대해서는 그렌츠, 『기독교 윤리학의 토대와 흐름』, 232-235를 보라.
23) http://www.worldvision.or.kr/business/worldvision/global_worldvision/history.asp.
24) 박찬호, 248f, 255.
25) Henry, Confessions of a Theologian, 361. 박찬호, 254f.
26) Henry, Confessions of a Theologian, 358. 박찬호, 255.
27) 그렌츠, 올슨, 『20세기 신학』, 464.
28) 같은 책, 463.
29) Bob E. Patterson, "Carl F. H. Henry," in Makers of the Modern Theological Mind, ed. Bob E. Patterson (Waco, TX: Word, 1983), 9.
30) R. Albert Mohler, "Carl Ferdinand Howard Henry," in Baptist Thinkers, ed. Timothy George and David S. Dockery (Nashville, TN: Broadman, 1990), 518.
31) 그렌츠, 올슨, 『20세기 신학』, 4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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