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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목사님 유진 피터슨을 추모하며

유진 피터슨 전문 번역가 양혜원 작가 기고

양혜원   기사승인 2018.10.24  15:3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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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을 당하면 주변 사람들은 잠시 바빠진다. 물론 그냥 바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지인의 죽음 소식은 그 바쁨 속에서도 잠시 손을 멈추고 사람을 멍하게 만드는 면이 있다. '아, 갔구나… 이젠 다시 볼 수 없구나' 하는 생각과 더불어 이상하게도 그의 모습이 더 선명해진다. 더 이상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집착 혹은 안타까움 때문일까. 더 이상 볼 수 없는 그의 모습들이 응축되어 더 생생하게 다가온다.

어제 하루가 그랬다. 가족도 친척도 아니고, 심지어 그분이 평소 알고 지내던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변방에 있을, friend도 아닌 acquaintance 정도 급인 내가 마치 대단한 지인이라도 되는 양 나의 일상이 잠시 멈추었다. 그렇게 하던 일들을 잠시 멈추고 얼마 전에 내가 번역한 그의 마지막 책을 출간한 복있는사람 출판사의 의뢰로 이미 미국에서 나온 추도문을 급하게 번역하고, 오늘은 이렇게 나의 추도문을 쓰고 있다.

그의 죽음 소식을 접한 사람들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들을 보니 그를 책으로만 접한 사람들도 나처럼 마치 지인의 죽음을 슬퍼하듯 제법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그의 글을 더러 인용해서 올린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데 그게 나의 번역이라 기분이 묘했다. 나의 글은 아니지만 번역하는 과정에서 내가 묻어난 그 글을 보면서 말 혹은 언어라는 것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언어는 피터슨이 무엇보다도 공을 들인 영역이기도 하다.

유진 피터슨 목사.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이미지

미국의 문학 평론가이자 전기 작가였던 리온 에델(Joseph Leon Edel, 1907~1997)은, 문학 전기 작가는 자신이 전기를 쓰는 그 문학 작가의 글을 아주 꼼꼼히 읽기 때문에 그 인물 자체를 파악하게 된다고 했다. 그래서 이 사람이 이런 일을 했을 법한 사람인지 아닌지도 어느 정도 판단이 선단다. 피터슨을 만난 적이 없는 사람도, 그리고 그를 한번 만났을 뿐인 나도, 그를 이렇게 제법 가깝게 느끼는 이유는 아마도 우리가 그렇게 그의 글에 깊이 빠져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그를 육신으로는 알지 못했지만, 그의 글을 통해서 어느 정도 그를 만난 것 같은 느낌을 경험했던 것이다.

글에는 왜 그런 효과가 있는 것일까. 왜 상대를 만나지 못해도 글만으로도 그를 아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일까. 그동안 학자들은 언어의 추상성을 넘어 언어의 물질성을 이야기해 왔다. 언어로 이루어지는 생각은 추상적 관념의 영역이고 행동하는 몸은 구체적 물질의 영역이라는 이분법을 넘어서, 몸과 언어는 인식의 한 덩어리라는 이 관점은 우리가 글을 통해서만 만나는 사람도 마치 아는 사람인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이유를 어느 정도 설명해 주는지도 모른다. 피터슨은 이러한 언어의 성질을 너무도 잘 이해했다.

그의 책을 여러 권 번역했지만, 생생한 이미지로 내 머리에 박힌 것은 성경을 마치 링거주사 맞듯이 읽는다고 한 표현이다. 마치 주문 외우듯이 성경을 읽는 행위, 뭔 말인지 몰라도 그냥 눈으로 보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행위를 그는 이러한 이미지로 표현했다. 그것은 글을 모르는 그의 손자 한스가 아주 경건하게 성경을 펼쳐 들고 눈으로 지면 위를 따라가는 행위로 그것을 읽었다고 생각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그는 생각했다. 이렇게 펄펄 살아 있는 언어가, 육신으로 오신 언어가, 왜 그토록 공허하고 빈 말이 되었을까, 그는 반문했다. 그가 직접 이렇게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글에서 이 심정이 느껴진다. 그리고 번역은 이 문제에 대한 그 나름의 답이었다. 성경의 언어는 지금 우리를 위한 언어이다. 이것은 만질 수 있는 언어이다. 그래서 그는 그 언어가 실제로 만져질 수 있도록 번역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아가서 자신의 목회도 이 번역의 일환이었다고 말한다.

말과 삶의 일치란 단지 내가 하는 말을 삶으로 옮겨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또 하나의 율법주의로 빠지기 쉽다. 우리의 말은 우리의 삶과 일치하지 않으며 일치할 수 없다. 나는 환경을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말을 하지만 비닐봉지의 사용을 피할 수가 없다. 줄이려고 애를 쓴다 해도 여러 가지 쓸모 때문에 나의 행동이 나의 말을 탈피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런데 심지어 우리가 삶을 일치시키고자 하는 말은 환경보호 정도의 말이 아니다. 하나님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삶은 그 일치 불가능성 때문에 몸부림치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은혜가 그토록 감격스러운 것이다.

피터슨이 성경은 살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라고 한 말은, 말과 행위를 일대일로 대응시키듯이 우리가 성경대로 살 수 있는데 성경을 제대로 몰라서 그렇게 못 산다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이라는 이 언어의 신비함으로 들어서면 우리의 경직되고 낡아 빠진 언어들이 다 깨지면서 정말로 살아 있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비로소 어렴풋이나마 보게 된다는 뜻이다. 그의 번역은, 그의 글은, 경직된 언어에 갇힌 이 신비함을 어떻게든 전달해 보려는 노력이었다. 경직된 언어는 곧 경직된 삶을 반영하기에 생명으로 가는 길에서 목사로 부름 받은 그에게 이 사명은 제법 긴박한 것이었으리라.

10여 년간 그의 책을 번역하고 난 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를 직접 만날 기회가 있었다. 몬태나에 있는 그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으며 그가 해 준 닭고기 바비큐를 먹고, 식사 전에는 그의 아내 잰과 함께 셋이서 손을 잡고 기도도 했다. 그리고 그곳을 다녀가는 손님들을 위해 마련된 방명록에 한마디 쓰라는 잰의 제안에, 실제로 만나면 자기 글과 다른 작가들이 있는데 당신은 그렇지 않아서 감사하다는, 이제 와서 생각하면 제법 건방지면서도 진부한 이야기를 남겼다. 그때만 해도 나는 말과 삶의 일치를 아주 협소하게,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다소 거창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마치 나는 말대로 사는 사람이 될 거라는 비장한 각오를 다지는 치기 어림 같은 것으로 말이다. 

미국에서 박사 공부를 하는 동안 '피터슨 읽기'에 대한 책을 냈지만, 내가 오랜 세월 번역을 통해 그로부터 받은 수업이 내 장에서 소화가 되어 내 언어로 나오기 시작한 것은 박사를 마치고 나서이다. 그래서 종교여성학의 내용을 정리한 (곧 나올) 신간에도 그에 대한 챕터가 하나 들어가 있다. 내 생각의 중요한 뼈대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박사 공부를 마칠 무렵 그는 어디든 내가 가고자 하는 곳에 자신의 추천서가 필요하면 말하라고, 기꺼이 써 주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나와 내가 하는 작업에 대한 신뢰를 보여 주었다. 아, 내가 그때 받은 감동을 그에게 제대로 전달했던가. 분명 고맙다고 하긴 했는데, 얼마나 잘 표현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작가들은 안다. 이 글은 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일단 내 손을 떠나면 독자들의 해석과 판단에 따를 뿐이기 때문이어서도 그렇지만 (이것은 다분히 포스터모던적인 관점이다), 글로 써도 될 정도의 그리고 읽는 이들의 공감까지 자아내는 통찰들은 나의 특별함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내게 주어진 선물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이다(이것은 다분히 신앙적인 관점이다).

우리가 글로만 만나던 작가를 실제로 만났을 때 실망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분명 그가 자신의 글은 선물임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피터슨을 만난 사람들도 그에게 실망하지 않았던 것일 게다. 역사와 문화와 언어와 인종과 성별과 세대가 다른 내게도 전달될 수 있는 선물을 받은 그는 평생을 열심히 그 선물을 풀어 주었다. 그 풀이의 길목에 내가 번역으로 기여할 수 있어서 참으로 감사했다. 그리고 그 선물 덕에 나도 나의 선물을 풀어 갈 수 있게 되어서 참으로 감사하다.

목사님, 그때 닭고기 조금 덜 익었었는데 그래도 맛있었어요. 집 앞 그 넓고 예쁜 호수에 발이라도 담그고 올 걸 그랬다 싶네요. 사모님이 자기도 이젠 나이 들어서 언제 아플지 모르니 목사님한테 집안일을 가르친다고 하셨는데 결국 목사님이 먼저 가셨네요. 사모님도 사실은 그게 마음이 편하셨을 것 같아요. 맨날 "Dear Eugene and Jan"이라고 편지를 썼는데, 이제는 "Dear Jan"이라는 편지를 하나 써야겠어요. 목사님이 받은 선물 성실하게 다 풀어 주고 가셔서 감사합니다. 그 덕에 우리도 선물을 받았습니다. It’s so wonder-full.

양혜원 /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했다.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여성학과에서 석사과정을 공부했으며, 미국 클레어몬트대학원(Claremont Graduate University)에서 종교여성학(Women's Studies in Religion)으로 석사 및 박사 학위를 받았다. 기독교 서적을 수십 권 번역한 전문 번역가이면서, <유진 피터슨 읽기>(IVP)·<교회 언니, 여성을 말하다>(포이에마) 등을 쓴 작가다. <그 길을 걸으라>·<이 책을 먹으라>·<유진 피터슨>(IVP) 등 유진 피터슨의 저작을 10권 넘게 번역했다. 현재 일본 난잔종교문화연구소 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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