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선을 그어 놓고 모두에게 지키도록 강요하는 것이 법이다. 법의 선을 너무 좁게 그어 놓으면 억압하는 선이 되고, 그 선을 넓게 그으면 보호하는 선이 된다. 아무리 그 선을 넓게 그어도 선 근처에 있는 사람들은 억압과 불이익을 받게 된다. 그 선의 범위는 개인의 자유와 사회적 공익의 관계 사이에서 결정된다.

과거에는 성인 남녀의 혼외 성관계를 하지 못하도록 법으로 선을 그어 놓았었다. 하지만 그것이 인간의 자유를 과도하게 억압한다는 이유로 간통죄에 관한 법이 폐지되었다. 합의에 기초하지 않은 성관계 그리고 성인과 미성년 간의 성관계는 아직도 법으로 선을 그어 놓고 있다. 하지만 이 선을 더 밀어내려는 사람들이 있다. 미성년의 기준을 최대한 낮게 설정하려는 것이다. 얼마 전 프랑스에서는 그 기준을 15세로 기준을 낮추었다. 13세로 낮추자는 의견도 만만치 않았으나 지금은 일단 15세로 정해졌다.

이렇게 법의 선은 사회적 합의에 따라 변화한다. 지금은 인간의 자유를 극대화하는 쪽으로 법의 선을 밀어내고 있는 중이다. 문제는 그것이 인간의 본성을 더욱 타락시키고 사회질서를 혼란시키는 부작용을 낳는다는 것이다. 법의 선이 너무 좁아지면 인간성을 억압하고 사회를 얼어붙게 만든다. 반면, 그 선이 너무 넓어지면 인간성이 타락하고 사회는 혼란스러워진다. 여기에는 절대적인 정답이 없다. 오직 '적정선'만 있을 뿐이다. 법의 선을 옮길 때 우리는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 무엇인가를 잃는 것이다.

2.

선을 그어 놓고 모두에게 지키도록 권면하는 것이 도덕이다. 그 선의 범위는 오래도록 형성된 사회적 합의에 따라 결정된다. 강요가 아니라 호소하고 권면하는 것이기에 도덕의 선은 법의 선보다 훨씬 좁다. 선을 좁게 그었기에 그 선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 법의 선을 어기는 사람도 많으니, 도덕의 선을 어기는 사람이 더 많은 것은 당연하다. 그럴 경우, 인간성의 향상과 사회적 공익을 위해 그 선을 지키도록 교육하고 계몽하는 것이 유일한 방책이다. 도덕의 선을 강요하면 그 사회는 질식하게 된다.

우리 어릴 적에는 '도덕'이라는 학과목이 있었다. 인간의 품격을 지키고 사회적 질서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덕성을 교육하자는 명분이었는데, 자주 정권 유지의 도구로 사용되었다. 한 사회의 다수가 공감하는 정도의 도덕교육이 필요하다고 믿는 사람들이 아직도 적지 않다. 하지만 얼마 전 학교 교과 과목에서 '도덕'이 사라졌다. 여기에는 인성이 아니라 실력을 더 중시하는 세태도 큰 몫을 했겠지만, 도덕에 대한 우리 세대의 인식을 보여 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포스트모던 시대답게 도덕의 문제는 각자에게 맡기자는 것이다. 그것은 결국 각자 자기 원하는 대로 살아가게 하자는 말이다.

과거에는 결혼 관계를 넘어서는 성관계는 도덕적으로 옳지 않다는 것이 다수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합의만 있으면 도덕적으로 비난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점점 커지고 있다. 도덕의 선도 사회적 분위기에 따라 옮겨지는 것이다. 그로 인해 각 개인의 자유는 확장되고 성적 쾌락을 증대시켰는지는 모르지만, 인간의 성은 왜곡되고 가정 파괴는 더욱 심해지고 있다.

3.

선을 그어 놓고 그것을 자신의 기준으로 삼는 것이 종교다. 종교의 선은 많은 경우에 도덕의 선보다 더 좁다. 그 종교의 세계관과 교리에 의해 선의 범위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종교인들은 자신이 받아들인 그 종교의 세계관과 교리로 인해 그 종교의 선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자원하여 그 선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다. 그 선을 지키는 것이 인간의 구원을 위해 그리고 사회의 안녕을 위해 가장 좋은 선택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그 선은 다른 사람에게 강요해서는 안 되고, 권면할 수도 없다. 그 종교의 세계관과 교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왜 선을 그렇게 그어야 했는지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종교의 선을 지키려는 사람들은, 그 종교를 받아들이지 않는 절대다수의 사람이 자신들이 지키는 선을 지키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종교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자신들이 지키고 있는 선이 모두에게 가장 복된 삶의 방식임을 삶을 통해 증명하는 것뿐이다.

예수님은 이성을 성적 욕구 충족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도 죄라고 하셨다. 성적 윤리로 따지자면 선을 가장 좁게 그은 것이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그 선을 지키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외적 성결만이 아니라 내적 성결을 추구한다. 하지만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요구할 수는 없다. 요구해 보아도 소용이 없다. 아무 기준 없이 방탕하게 사는 사람에게 성결하게 사는 삶의 기쁨을 보여 주는 수밖에 없다.

4.

이런 점에서 본다면, 여러 사회 이슈에 대해 종교인들이 거리로 나서서 목소리를 높이고 힘을 행사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것은 자신의 종교의 선을 모두에게 강요하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는 사회적 합의를 통해 길을 찾아가게 되어 있다.

종교인들은 자신들이 선택한 선을 지키면서 자기가 속한 사회의 도덕의 선과 법의 선이 변화할 수 있도록 영향을 미쳐야 한다. 세를 규합하여 그 선을 옮기려 실력을 행사하면 오히려 설득력과 감화력을 상실할 뿐이다. 도덕에 대한 사회적 합의는 강요나 비판으로 변하지 않는다. 감동과 자각을 통해 서서히 변화한다. 그러므로 종교인들은 묵묵히 자신과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통해 감동과 감화를 끼치도록 힘써야 한다.

종교, 특히 기독교는 소수자로서 그들의 삶을 통해 사회에 선한 영향을 미쳐 왔다. 다수가 되어 세력을 통해 영향을 미치려 할 때면 언제나 선보다 악을 더 많이 만들어 냈다. 지금 지구상에 있는 나라 중에 종교의 선을 법의 선으로 만든 국가들이 적지 않다. 과거 중세 시대에는 기독교가 그랬고, 지금은 주로 이슬람 국가들이 그렇다. 종교의 선을 한 국가의 법의 선으로 만든 나라치고 인간의 자유가 질식당하고 사회가 얼어붙어 있지 않은 나라를 찾아보기 어렵다. 종교가 세를 얻으려 하고 그 세로 어떤 목적을 이루려 하는 것은 잘못된 길로 들어서는 것이다.

부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다수자가 되어 힘으로 세상을 바꿀 환상을 버리고 소수자로서 자신의 삶을 통해 진리를 드러내는 일에 마음을 돌리기를 소망한다. 그것이 소극적인 태도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 반대다. 세를 규합하여 목소리를 높이는 것은 쉬운 일이다. 반면, 자신이 선택한 선을 지키며 그것이 가장 자연스럽고 아름다우며 유익한 것임을 증명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희망은 거기에만 있다.

김영봉 / 버지니아 와싱톤사귐의교회 목사

이 글은 '법, 도덕 그리고 종교'라는 제목으로, 2018년 10월 22일 김영봉 목사(버지니아 와싱톤사귐의교회) 페이스북에 실렸습니다. 허락을 받아 게재합니다.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