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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공공성은 왜 다른가

[제2회 기독교공공성포럼을 앞두고] 최대공약수의 공공성에서 최소공배수의 공공성으로

최규창   기사승인 2018.10.16  17:2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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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공공성포럼(정재영 대표)과 <뉴스앤조이>가 11월 6일, 13일에 제2회 기독교공공성포럼 '공적인 교회, 공적인 신앙'을 엽니다. 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 정재영 교수, 장로회신학대학교 성석환 교수, 토지+자유연구소 남기업 소장, 덕은동공동체 최규창 대표, 러빙핸즈 박현홍 대표, (주)늘푸른이야기 손민호 대표가 잃어버린 한국교회의 공공성을 되찾기 위해 풀어야 할 과제, 참고할 사례를 놓고 이야기 한마당을 펼칩니다. 행사에 앞서 11월 6일 강연자로 나서는 최규창 대표의 기고문을 소개합니다. 포럼 관련 자세한 사항은 http://joyproject.co.kr/ccg/index.html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 편집자 주


일본의 정치학자 사이토 준이치는 <민주적 공공성>(이음)에서 공공公共의 개념을 크게 세 가지로 구분했다. 우선 국가와 관계된 '공적인'(official) 것이라는 의미가 있고, 모든 사람들과 관계된 '공통적인'(common) 것이라는 의미, 그리고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open)는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이 구분이 비교적 적절하다는 생각이 들어 이를 기준으로 글을 써 보려고 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 세 개념이 조화를 이루기도 하지만 충돌하는 경우가 더 많다는 사실이다. 국가의 공공사업이 모든 사람에게 이로운 것은 아니며, 공통적인 것은 기본적으로 외부에는 닫혀 있는(not open) 것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 타인의 권리를 위해 나의 자유가 제한될 수 있고, 모든 사람의 평등을 위해 특정 집단의 자유를 제한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오늘날 공공성만큼 논쟁적인 개념도 드물 것이다. 상이한 개념이 동일한 단어 안에 내재하는 것이다. 만약 이것이 항쟁적 관계가 아니라면, 정치나 경제정책이 한결 수월했을 텐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교회 공동체가 생각하는 공공성 역시 이 딜레마를 시간에 따라 모두 경험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교회 공동체는 공적인 의미의 공공성을 강조해 왔다. 목회자 리더십을 존중하고 순종하는 방식으로 일사불란하게 성장주의를 지향한 결과 한국교회는 엄청난 양적 성장을 이루었다. 공적인 의미의 공공성을 강조하는 집단은 위계가 분명하고 직분이 다양화된다. 우리는 교회 내에서 목회자, 당회, 제직회, 공동의회, 운영위원회, 구역, 남·여전도회, 리더 모임, 구역장 모임 등 다양한 조직을 목격하고 있다. 또한 교회는 새벽 기도회, 주일예배, 수요 예배, 금요 기도회, 수련회, 소그룹, 구역 모임, 심방, 경조사, 체육대회, 봉사 활동 등 복잡한 프로그램들을 운영하고 있다. 이런 틀에서 공공성은 그것이 잘 유지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기독교공공성포럼(정재영 대표)과 <뉴스앤조이>가 11월 6일, 13일에 서울 중구 필동 희년평화빌딩에서 제2회 기독교공공성포럼을 엽니다. 6일 강연자로 나서는 최규창 대표. 뉴스앤조이 이용필

1970~1980년대 이데올로기 시대를 거치면서 우리는 '헌신'(commitment)을 그리스도인의 가장 중요한 덕목이라고 생각하고, '공통적인' 것에 순종하는 것이 곧 공동체라고 믿게 되었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모집 약관에 동의하는 '회원 가입'처럼, 모종의 강령에 동의하고 헌신하는 것을 의미했고, '자신의 욕망을 쳐서 복종시켜' 다른 이들과의 공통분모에 자신을 끼워 맞추는 훈련을 하는 것을 뜻했다. 그리고 그러한 공통의 가치를 위해 자신의 인생을 바치는 사람들을 가장 존경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그렇게 형성된 그리스도인의 '변혁 담론'은 캠퍼스에서는 세계관 운동과 찬양 예배 문화를 만들었다. 사회에서는 시민사회 영역 형성에 기여하기도 했다. 당시는 우리 사회가 기본적 '윤리'의 개념도 정립되지 못한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이러한 공공성 개념이 더 이상 사회적으로도 '공적'이지 않게 되었다는 데 있다. '공적인' 개념과 '공통적인' 개념의 공공성에 의존한 기독교 신앙은, 여전히 교회 안에서는 지배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이제 기독교와 세상 사이에 담을 형성하는 결과를 낳고 있다. 우리가 공적인 것이라고 믿었던 것은 오히려 '우리끼리의 공공성'이었음이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일부 목회자는 목사들이 세금을 내지 말아야 할 이유를 여전히 구약성서 레위기를 인용하면서 설명하고 있다. 기독교적 가치에 헌신하여 철저하게 훈련되고 세상을 변혁하기 위해 파송된 그리스도인들은 오히려 세상의 공적인(open) 영역에서 배제되고 충돌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 대부분은 아직 그것을 복음을 위해 받는 '억울한 고난'으로 여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오늘날 교회에 있어 공공성이란 과연 무엇일까. 막연히 '공적 신앙을 회복하자'고 말하는 것은 어떤 공공성을 회복하자는 말일까. 세상과 소통할 수 없는 '교회 내의 공적 신앙'이라면 굳이 공공성을 이야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제 교회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공공성 개념을 수용해야 할 시점에 와 있다.

예전의 공공성이 '최대공약수'를 찾아내서 거기에 헌신하는 것이었다면, 지금의 사회는 '최소공배수'까지 열어 놓고, 공동체 구성원들의 개성을 존중하고,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공동체를 요구하고 있다. 이러한 공공성에서는 '회원 자격이 없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생각이 다르고, 가치관이 상이한 사람들과도 대화하고 경청할 수 있어야 한다. 이상적인 공동체의 모습을 상정하고, 각자의 개성을 억압하여 거기에 헌신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하여 그들의 개성이 공동체의 모습을 새롭게 만들어 가도록 하는 것이다.

우리는 연일 배타적 기독교가 사회의 소수자들과 부딪치고, 진리의 이름으로 그들을 정죄하는 뉴스를 접하고 있다. 진리에 대한 확신 역시 시대마다 상대적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은 공공성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다. 우리가 누구이기에 진리를 확신하면서 타인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는 말인가. 동일한 단어를 사용해 왔지만, 우리의 공공성은 왜 다른가. 예수님이라면 이 시대에 어떻게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실천하려고 하실까. 새롭게 변화되는 시대에 우리가 추구해야 할 공동체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 것인가. 적어도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의 생에서는 이것이 피할 수 없는 질문임은 분명해 보인다.

현재 일어나고 있는 한국교회의 이례적 현상들(성도들의 대규모 탈교회 현상, 젊은 세대의 교회 기피 현상, 유명 목회자들의 도덕적 실패, 교회의 초대형화와 양극화, 시민사회의 지나친 교회 비난)은 교회가 이러한 공공성의 개념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공공성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는 '뜨거운 감자'처럼 취급되어 의제에도 오르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공공성 논의는 교리의 문제, 해석의 문제, 전통의 문제, 그리고 세계관 이슈를 모두 안고 있는 거대 담론이다. 이 주제를 통해 기독교 신학은 커다란 전환을 맞을 기회를 가질 수도 있다. 이제 한국교회 내에서 공공성에 대한 논의가 공적으로(publicly) 깊이 다루어져야 한다. 다양한 채널을 통해 이런 기회들이 만들어지기를 소망한다.

최규창 / 덕은동공동체 대표, <고통의 시대 광기를 묻다>(강같은평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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