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교회 예배당. 이근복 그림

서울 정동길로 들어가는 골목 안쪽에 한성교회가 있습니다. 눈여겨보지 않으면 교회가 있는지 알 수 없는 데다가 표지판에 '여한중화기독교 한성교회'旅韓中華基督敎 漢城敎會라고 적혀 있어 착잡했습니다. 旅韓의 '旅'는 '나그네'란 뜻이니, 1912년 설립하여 106년이 지났는데도 재한 중국인 교회 교우들은 스스로 한국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 여행객과 같은 신세라고 느끼는 게 아닌가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한국 화교 그리스도인들의 이런 인식은 한국 국민의 뿌리 깊은 중국인 혐오감에서 왔다고 봅니다. 요즘 우리 사회에 성소수자, 난민, 여성, 노인, 탈북자, 장애인을 향한 혐오와 배제가 부쩍 심해졌습니다.

旅韓中華基督敎라는 교단 명칭에서 정현종 시인의 '방문객'이란 시가 떠오릅니다.

"사람이 온다는 건 / 사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 그의 과거와 / 현재의 / 그리고 /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하략)"

타인을 환대하면 과거, 현재, 미래의 인생에서 자신이 풍요해지는데도 타인을 단호하게 거부하는 이들이 늘어납니다. 공자의 논어에 "삼인행필유아사언三人行必有我師焉"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세 사람이 길을 같이 걸어가면 그중에 반드시 내 스승이 있다"는 뜻입니다. 다른 사람을 존중하여 스승을 찾던 옛 전통은 사라지고 어느덧 일상적으로 차별하는 사회가 된 것입니다. 환대의 공동체인 교회마저도 미움과 배제로 나아간다면 우리 사회의 통합은 불가능하고 결국 모두 불안하게 살 수밖에 없습니다.

화교는 다른 나라에 정착하여 사는 중국인들로, 전 세계에 4000만여 명이 있다고 추정합니다. 중국인에게는 '상인종'이란 별명이 있습니다. 이들은 사업에 뛰어나 현지의 정치·경제·사회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한국이 19세기 말에 개항하자 인천 등에 들어온 중국 노동자들로 화교가 형성되었습니다.

한국 정부가 각종 제도로 제한하고 차별하여 한국 화교들은 다른 나라와는 달리 위축되어 살았습니다. 1992년 한중 수교 이전에는 요식업에 종사하는 화교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수교 이후에 많은 여행객이 들어오고 중국 유학생이 늘어나고 이주노동자로 일하는 중국인들이 많아져 화교 사회가 활기를 띠고 있습니다. 2010년 기준으로 한국 화교 인구는 귀화자를 포함해 5만 명 정도입니다.

재한 중국인 교회는 한국의 대표적인 마이너리티 이민자 교회입니다. 한성교회는 기독교 신앙을 버리지 않으면 산 채로 매장하겠다는 아버지를 피하여 조선으로 도망친 중국 산둥성 출신 한의사 처따오신(차도심)에게서 싹이 텄습니다. 그는 한국에서 선교 활동을 하던 데밍(C.S. Deming) 선교사를 만났고, 두 사람이 1912년 YMCA에서 예배하는 것으로 첫 화교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데밍 선교사의 모금 활동으로 1919년 화교들은 서소문에 예배 처소를 마련할 수 있었고 전국에 화교 교회가 설립됩니다. 1937년 중일전쟁으로 교회 운영이 불가능하게 되었고, 6·25 한국전쟁으로 교회당이 파괴되어 화교 대부분이 서울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매클래인(Helen McClain) 선교사가 앞장서서 해외 모금을 하여 1958년 교회의 초석을 놓고 1960년 예배당을 완공하여 한성교회는 다시 자리를 잡았습니다.

한국 중국인 교회사에서 화교 그리스도인 왕공온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국 선교 초기, 기독교가 세운 교회·학교·병원 등은 한옥을 개조하여 건물로 사용했습니다. 1890년대부터 서양식 건축물들을 세우기 시작하였는데, 다수가 중국인 업자들이 시공한 것이라고 합니다. 1920년에 건축 기업인 '복음건축창'을 세운 왕공온은 1918년 서울에서 열린 중국인 대상 부흥 집회에서 기독교로 귀의하여 조선중화기독교회 경성교회 교인이 되어 세례를 받은 인물입니다.

왕공온의 복음건축창이 5년 만에 건축 업계 1위로 오를 정도로 많은 공사를 수주했는데, 이는 조선중화기독교회를 자립하게 하고자 했던 데밍 선교사가 적극적으로 추천하고 선교사들이 호응한 결과였습니다. 왕공온이 중화 기독교회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하여, 화교 교회가 토지와 건물을 매입하자 상당액을 부담하였고 사회 구제 활동에도 적극 동참합니다. 이화여자대학교 프라이스홀과 음악당, 대강당 그리고 러시아총영사관은 왕공온이 시공한 대표 건물입니다.

서울시 미래 유산인 한성교회는 건물만이 아니라 한국교회와 중국 교회가 기대하는 미래입니다. 2012년 여한중화기독교회는 100주년을 맞이하여 정동 한성교회에서 '화교교회 1세기, 회고와 전망'을 주제로 세미나를 열었습니다. 이 자리에서 주제 발제자인 강인규 교수(대만 중원대)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여한중화기독교회와 한국교회가 그동안 긴밀한 관계가 아니었음에 아쉬움을 느낀다. 앞으로 새롭게 다가올 100년의 역사 가운데 중화 교회와 한국교회가 손을 잡고 선교 중국을 향해 함께 나아가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기를 소망한다."

신자가 3000만 명(1억 명까지 보는 경우도 있음 – 필자 주) 규모인 중국 교회는 한중 관계 발전과 동북아 평화에도 중요합니다. 중국 교회가 한국교회를 무너뜨린 외형적 성장주의, 반영신학, 성공주의 신앙, 개교회주의, 근본주의로 빠지지 않고 건강한 교회로 성숙한다면 세계 교회의 희망이 될 것입니다.

한성교회 2층 예배당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조금 낡았지만 내부는 정갈하였습니다. 중국어로 된 주보 표지의 표어를 알아보니, "신앙의 길은 조화와 평화를 귀히 여기는 것이고, 일어나서 전도하라"는 뜻이었습니다. 1912년 창립하여 발행한 주보에는 유전명 담임목사 이름과 106권 35호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습니다. 현재 전국에 일곱 화교 교회가 있습니다. 정동의 한성교회가 그동안 소원했던 한국교회와 단단한 연대를 형성하여, 중국교회와 함께 동북아의 새로운 미래를 열어 가길 기도하며 햇살 가득한 교회에서 나왔습니다.

*'그림으로 만나는 한국교회'는 매월 2차례 업데이트됩니다.

이근복 / 목사, 성균관대학교와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을 졸업했다. 영등포산업선교회 총무, 새민족교회 담임목사,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교육훈련원장을 거쳐 현재 크리스챤아카데미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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