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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기도하지 말까

[정신실의 신앙 사춘기] 영성 생활의 출발점

정신실   기사승인 2018.09.14  14:0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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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얘기다. 내 뇌 속에서 기도와 엄마는 한 뉴런으로 연결되어 있다. 기도를 논하려면 나의 엄마 이야기를 해야 한다. 기도 시간의 양으로 보면 엄마만큼 기도하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새벽 기도, 철야 기도, 특별 새벽 기도(그냥 새벽 기도와 다르다), 특별 철야 기도(마찬가지로 보통의 철야 기도와 다르다), 금식 기도까지. 엄마 평생에 드린 기도 시간을 모두 합하면 몇 년쯤 될까. 가늠할 수가 없다. 놀라운 일이다. 더 놀라운 것은 오랜 기도 시간 동안 크게 달라지지 않는 기도 제목, 그 한결같음이다.

엄마의 성경책 표지 안쪽에는 기도가 필요한 사람의 이름이 빼곡하다. 또 나라와 민족, 교회를 위한 기도 제목도 빠지지 않는다. 하지만 언제나 가장 절실한 기도는 자녀를 위한 기도. 요약하자면 아들딸의 학업·취업·결혼·건강·재물(운세…는 아님) 등. 내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한결같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아빌라의 테레사 같은 영성가들은 깊은 기도 끝에 몸에 성흔이 생기는 신비로운 하나님 체험을 했다는데. 기도의 시간으로 치면 우리 엄마도 못지않을 텐데, 우리 엄마는 어찌 '자녀들의 안녕'에만 머물러 있을까. 아니, 체험으로 치면 책 몇 권으로도 부족할 간증거리가 있다고 하신다. 한때 신유 은사를 받아서 중대한 병을 고치기도 했다며.

평일 낮에 '어머니 기도회'로 모이는 교회들이 꽤 있다. 가끔 그런 곳에 강사로 초대받아 가는데, 여성·일상 같은 주제로 내 삶의 이야기를 나누곤 한다. 가끔 강의 제목이 정해져 올 때가 있다. '기도하는 엄마', '엄마가 기도할 때' 같은 제목일 때는 가서 해야 할 이야기가 무엇이어야 할지도 명확하게 전해져 온다. 엄마가 눈물의 기도를 뿌릴 때 아이들이 어떻게 잘 자라는지, 좀 더 쉽게 말하면 엄마가 쌓은 기도 포인트로 아이 인생에서 바꿀 수 있는 상품은 무엇인지를 알려 주는 일이다. 그리하여 기도에의 열망을 불러일으킨다면 임무 수행 완료다. 그런데 나는 잘 그러지를 못한다. '어머니 기도회'의 조상님이라 할 수 있는 우리 엄마의 기도를 알기 때문이다.

나는 사실을 말할 수밖에 없다. "당신이 아무리 기도해도 아이가 꽃길만 걷지는 않는다"고 말해야 한다. 당신들보다 열 배는 더한 기도를 평생 자녀를 위해 드린 어머니를 알고 있다. 결과가 썩 좋지 않다. 엄마의 절절한 기도에도 나는 대학 입시에 실패했고, 친구들 중 마지막으로 결혼을 했으며, 경제적으로 넉넉했던 적이 없다. 학기가 시작하는 3월과 9월에는 좋은 선생님, 좋은 친구 만나라고 드린 철야 기도가 무색하게 몰상식한 선생을 만나기도 했고, 왕따로 고통받기도 했다. 엄마의 기도는 아이의 꽃길 인생을 보장하지 않는다.

솔직히 어머니 기도회가 불편하다. 내 엄마의 기도를 바라보던 복잡한 마음과 크게 다르지 않다. 어머니와 기도, 지고의 숭고함을 언표하는 두 단어가 만났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은 듯하니 말이다. 결국 내 아이 잘되게 해 주세요, 아닌가. '잘되는' 번영의 신학과 '내 아이만'이라는 이기심이 화학반응을 일으킬 때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안 봐도 불을 보듯 훤하다. 실제로 어머니 기도회가 흥하는 동네가 따로 있다는 것을 나는 알게 되었다. 아파트와 학원가로 이뤄진 조용한 중산층 동네, 아이는 오직 학업에 열중하고 엄마는 떡을 써는 심정으로 아이 옆을 지키는. '기도'라는 말만 뺀다면 대입에 올인하여 아이들과 한 몸으로 뛰는 입시 공화국 '대한민국 엄마'들과 무엇이 다를까 싶기도 하다.

솔직히 나는 그런 부류의 엄마들과는 다르다는 자의식이 있다. 아이를 학업 노예로 키우지 않으며 좋은 대학 보내는 것에 목숨 걸지 않는다는 자부심, 은밀한 우월감이 있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기도에 관해서도 그렇다. 기도의 절대 시간이야 우리 엄마를 따를 수 없지만, 질적 수준은 내가 더 높지 않겠나 하는 것이다. 기도로 90 평생을 살았다 할지라도 여전히 복을 구하는 기도에 머물러 있는 엄마와는 다르다는 자의식이다. 청원하는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 방언 기도가 아니라 침묵 기도, 관상기도를 하니 더 높은 단계를 구가하고 있는 것 아닌가.

얼마 전 역시 어느 어머니 기도회에 초청을 받아 갔다. 은밀한 우월감은 부드러운 말투와 겸손한 태도로 잘 포장하고 강단에 섰다. 강의를 마치고 내려와 이어지는 기도회에 앉아 있게 되었다. 입시의 계절이 다가오고 있으니 고3 수험생 엄마들의 기도가 절절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와글와글 엉엉, 엄마들의 통성기도에 둘러싸여 섬처럼 앉아 있다 혼자 뒤통수를 맞는 경험을 했다. 그 소리들이 나를 벌거벗기는 것 같았다.

'아이가 고3인데, 수능을 코앞에 두고 있는데, 시험 잘 보게 해 달라는 기도가 뭐 그리 잘못이라고! 잘되라는 기도, 복을 구하는 기도가 뭐 그리 잘못이라고. 그러면 기도하지 말까?'

내 안의 내가 고상 떠는 내게 말했다. 눈물 콧물로 얼룩지는 어머니들의 얼굴 옆에서 풀 메이크업을 하고 있는 데면데면한 내 얼굴이 한없이 민망했다. '기복적인 기도라고, 욕망에 찬 기도라고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그리 뜨겁게 기도해 본 적이 언제더냐.' 내 마음이 연탄재처럼 나뒹굴었다. 누가 누구의 기도를 함부로 평가하고 줄을 세울 수 있단 말인가. 실은 기도회가 시작되기 전, 강의 중에 엄마들 눈을 보았다. 우리 엄마의 기도로 내가 꽃길을 걸은 것은 아니지만, 엄마의 가시밭길을 건너는 힘이었을 것이라 말했을 때였다. 그러니 우선 내 1인분의 믿음, 1인분의 사랑을 채우기 위해 기도하자고 말했을 때, 흔들리고 촉촉해지는 눈동자를 본 것이다. 그때부터 내 높은 마음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존재의 심리학자라 불리는 에이브러햄 매슬로(Abraham H. Maslow)는 흔히 알려진 5단계 욕구 이론을 주창했다.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를, 가장 낮은 생리적 욕구부터 마지막 5단계의 자아실현 욕구로 설명한다. 1단계는 생존을 위한 욕구, 그러니까 의식주 같은 것들이다. 2단계는 신체적·정서적 위협으로부터 보호받고자 하는 안전의 욕구, 3단계는 집단에 소속되어 애정을 나누고자 하는 사회적 욕구, 4단계는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존중받고 싶은 존중·존경의 욕구이며, 마지막 5단계는 가장 자기답게 꽃피우고 싶은 자기실현의 욕구이다.

매슬로는 하위 욕구가 충족되지 않았을 때, 상위 욕구로 나아가지 못한다고 했다. 즉 생존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면 온통 세상이 먹을 것, 입을 것으로 보인다는 의미일 것이다. 애정을 미해결 욕구로 품고 있다면 그 단계에 머물러 온통 사랑받는 것에 매여 있을 터이다. 나는 우리의 기도 제목을 범주화한다면 매슬로의 욕구 단계와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당장 배고파 죽게 생겼는데 애정 운운하게 될까. "사랑이 밥 먹여 주냐"는 말이 나올 것이다.

배가 고플 때 배를 채우는 것을 구하고, 안전에 위협을 느낄 때 보호를 구하는 것은 정직한 기도이다. 때로 나는 더 성숙한, 고상한 신앙인이고 싶은 마음에 내 솔직한 욕구를 무시하고 초월적인 기도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철든 척하고 싶은 어린아이처럼.

테야르 드 샤르댕(Teilhard de Chardin) 신부 말처럼 우리는 "영적 경험을 가진 인간적 존재가 아니라, 인간적 경험을 가진 영적 존재"이다. 영성 생활과 기도의 출발점은 지질하고 하잘것없는 인간적 경험이어야 한다는 뜻일 것이다. 그러니 우리 엄마의 한결같은 기도 제목을, 어머니 기도회의 기도를 함부로 판단하지 않을 일이다. 물론 더 깊어지고 넓어지는 기도 생활, 더 고상한 욕구를 담아내는 기도로 성장하는 것은 각자의 몫일 것이다. 아, 각자의 몫일까? 오롯이 각자의 몫일까? 매슬로는 생애 후기, 자신의 이론을 수정하였다. 낮은 단계의 욕구가 충족되지 않아도 고차원의 욕구를 갈망할 수 있는데, 그것은 주로 종교를 통해 가능하다고 하였다. 욕구 단계가 위계와 서열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넘나들 수 있다는 뜻으로 들린다.

시험 기간 '어머니 기도회'에 나온 엄마의 마음에 단지 아이가 시험을 잘 보게 해 달라는 기도 제목만 들어 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 인식하든 못하든 그 엄마에겐 더 깊은 욕구, 영적 갈망이 있음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다면 왜 굳이 '기도의 자리'에 나와 앉아 있겠는가. 매슬로에 의하면, 자아실현의 욕구 그 너머에는 자기 초월이 있다. 성숙하여 자아실현에 도달한 사람들은 자기를 초월하는 선택을 하게 된다고 한다. 나의 필요를 구하는 기도로 시작해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기도로 진보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심리학이 말해 주고 있는 게 아닌가.

기도하는 사람은 무죄다. 개인적 안위를 구하는 데 머물러 있거나 때로 기복적이기만 할지라도 그렇다. 더 큰 힘, 그나마 하나님께 머리를 조아리는 것이 어딘가. 문제는 그 간절함을 미끼로 종교 장사를 하는 목회자들이다. 기도 자리에 나온 이의 욕구를 식별하게 하여 더 깊은 갈망을 일깨워 주지는 못할망정 그 간절함을 담보로 삼아 자기 권력을 쌓는 자들 말이다.

마이크만 잡으면 성령 충만(?)한 언어가 청산유수로 흐르는 목사가 있다(고 치자). 설교도 설교지만 기도회 뜨겁게 인도하기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데, 심장박동 수 올리는 BGM과 적당하게 감미로우면서도 선동적인 목소리로 천천히 불을 지피는 방법을 안다. 성능 좋은 마이크를 타고 흐르는 적당히 선동적인 기도 선창에 청중의 소리가 끌려가지 않을 방법이 없다. 높아지는 기도 소리, 점점 달아오르는 분위기.

마이크를 턱 밑에 대고 기도의 폭포수를 뿜어 대는 하얀 셔츠의 인도자가 오른팔을 든다. 본당 한구석 방송실을 향하여 두 번째 손가락을 들어 가리킨다. 손바닥을 위로 향하게 하여 파닥거리며 올린다. 눈을 감은 채로, 통성기도 소리는 멈추지 않은 채로 무언의 지시를 내리는 것이다. 응원단장이라면 소리를 지르라는 뜻이고, 방송실을 향했으니 BGM을 이빠이(네, 여러분이 아는 바로 그 이빠이!) 올리라는 뜻이다. BGM 볼륨이 올라가자 통성기도의 아우성도 함께 격렬해진다. 눈물이 흐르고, 가슴이 뜨거워진다. 어머니들은 큰 은혜를 안고 돌아간다.

성령의 역사를 부인하지 않는다. 성령께서는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우리에게 침노하신다. 그분의 침노에 가슴이 뜨거워지기도, 통곡을 하기도,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을 맛보기도 한다. 문제는 다른 목적을 품고 그것을 연출하고 연기하는 자들이다. 기도라는 가장 숭고한 행위를 수단 삼아 교인들을 종교 행위에 묶어 두고 위력을 행사하는 자들이다.

기도 외에 할 게 없다는 마음 가난한 이들에게 허튼 기도 응답의 환상을 심어 주는 것으로 복음을 대체하는 자들 모두 유죄! 화술도 부족하고 기도회 인도하는 현란한 기술은 없으니 새벽 기도, 특별 새벽 기도, 온갖 기도회 출석률로 교인들 죄책감과 두려움 자극하는 목회자 유죄! 이제야 의식화하여 영적인 삶에 눈을 뜬 이들에게 기복의 기도는 무조건 나쁘다 가르쳐 냉소를 조장하는 성경 교사들도 유죄! 자신의 과거를 혐오하게 되어 그나마 하던 기도조차도 하지 못하며 방황하는 사춘기 교인들에 영합하여 침 뱉고 욕하는 것으로 인기 얻는 얼치기 영적 사춘기 선배들 유죄! 내 유익을 위해서 타인의 영적 성장을 가로막는 모든 어른, 부모, 영적 지도자 유죄! 그러니 이제 기도 따위는 하지 않겠다고 주먹 꽉 쥔 우리 모두 유죄! (유무죄 판단의 주체는 누구냐고? 나다. 신학적 지식이라곤 없는 필자의 지극히 개인적인 판단이니 크게 '괘념하시길' 부탁드린다.)

다시 내 어머니 이야기이다. 아흔을 넘긴 엄마에겐 남아 있는 언어가 많지 않다. 했던 말 또 하고, 또 하고, 또 하는 것이 엄마의 일이다. 듣고, 듣고, 또 들어 드리는 것이 내 할 도리인 줄 아는데 쉽지는 않다. 그래도 늘 애쓰고 있다. 들어 드림의 끝은 대개 이 문장이다.

"기도 밲이는 읎다. 너 사모가 기도허야 혀."

이 레퍼토리가 시작되면 자리를 털고 일어날 때가 된 것이다. 이젠 엄마가 말하지 않아도 기도밖에는 없는 것을 안다. 간절히 바라는 바, 더 깊고 풍성한 기도의 삶을 살고 싶다. 엄마처럼 기도하고 싶지만 엄마 기도만큼 싫은 것이 없다. 엄마의 사랑과 기도 덕에 지금의 내가 있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엄마의 기도가 내게 남긴 폭력(그렇다 폭력이다!)의 기억을 엄마는 모른다. 앉혀 놓고 혼내고 말 일이지, 가정 예배 시간 기도의 말로 훈육을 대신했던 것은 일종의 폭력이었다.

'이건 기도야, 혼나는 거야' 헛갈렸던 기억. "엄마가 기도해 보니까 너 요즘…"으로 시작하여 나도 모르는 내 마음을 단정 짓기도 했다. "하나님 은혜다, 니가 잘나서 된 일이 아니여. 다 하나님 은혜여" 해 놓고 후렴구처럼 붙이는 말, "엄마가 얼마나 기도했는지 아니?" 다 하나님 은혜지만 기도는 엄마가 했으니 엄마를 찬양하라는 건가? 엄마는 잘 모르는 엄마 기도의 그림자를 안고, 나는 아직 투쟁 중이다.

내가 기도해 보니 이렇더라! 내가 기도해서 이렇게 된 것이다! 내가 기도하기 때문에 너의 길을 내가 알아! 이것만이 바른 기도야! 나의 체험만이 유일한 영성의 길이야! 교회 곳곳에서 우리 엄마를 만난다. 내 안에서 우리 엄마를 만난다. 기도 속의 소중한 체험을 들고 골방을 뛰쳐나와 목소리를 높이는 기도의 화신들이다. 깊은 기도 중에 누군가의 영적 상태가 보일 수도 있겠고, 하나님 뜻에 대한 확신으로 불탈 수도 있겠지. 하나님과 당사자 사이 은밀한 사랑의 언어를 누가 가늠할 수 있겠는가.

소중한 체험일수록 은밀하게 간직할 일이다. 자기과시와 남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떠벌이며 허비할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그 어떤 영성가의 기도보다 내 엄마의 기도를 사랑한다. 그럼에도 기도했기 때문이다. 그 모든 유혹에도, 그 유혹에 빠져 그림자를 드리우면서도 기도했기 때문이다. 나도 그러려고 한다. 내 그림자, 엄마의 그림자, 교회의 그림자를 안고 자주 유혹에 빠지지만, 그래도 기도는 하려고 한다.

정신실 작가가 '신앙 사춘기'라는 제목으로 칼럼을 연재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인터뷰 기사(바로 가기)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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