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산속의 세월호 마을

일본의 시골 지역에는 교회가 거의 없기 때문에 멀리 효고현에서 오는 교인도 있다. 한 번은 야마모토山本 자매가 사는 효고 동북부의 탄토쵸但東町까지 가정방문을 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아름다운 426번 국도를 달리다 목가적인 쿠바타久畑 마을에 이르자 우람한 느티나무와 삼나무 숲에 숨어 있는 이치노미야신사一宮神社가 눈에 들어온다. 뭔가에 이끌린 듯 차를 세운 나는 어느새 신사 경내를 거닌다. 이곳의 '느티나무 숲'은 효고현 지정 천연기념물로서 가장 큰 나무의 높이는 35m에 수령은 500년 정도라 한다. 그 숱한 세월歲月 동안, 이 시골 마을은 저 바깥세상에서 밀려들어 오는 파고를 어찌 다 넘어왔을까.

이런 생각에 잠겨 숲길 뒤로 걸어가니 뜻밖의 공간이 나온다. 전쟁에 나가 목숨을 잃은 지역 젊은이들의 혼을 기리는 '충혼탑'忠魂塔 세워져 있다. 일본의 신사에 가면 흔하게 볼 수 있는 국수주의 선양 공간이라 여겼다. 그런데 그 오른쪽에 세워진 다른 비석 하나가 낯설기 그지없다. '대효고개척단 순난자의 비'大兵庫開拓団 殉難者之碑弾…. 이내 뒤쪽 비문을 조심스레 읽어 내려간 나는 아연啞然하고 말았다.

"1944년 3월, 대효고 개척단원 476명 만주 빈강성 난서현 북안촌, 쌍합 촌락 두 곳 입식入植(식민지 이주). 1945년 8월 17일 345명 입수 자결入水自決하다."

(昭和十九年三月大兵庫開拓団員四七六名満州浜江省蘭西縣北安村, 双合屯二入植シ昭和二 十年八月十七日三四五名入水自決ス)

※ 빈강성은 만주국 시절 일본이 만든 행정구역으로 지금의 헤이룽장성 남부 지역이다.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 건설이라는 구호로 국민을 속이던 일본 정부는, 전쟁 막바지까지도 자국 농민들을 무리하게 만주와 몽골 지역 등으로 이주시켰다. 이른바 '만몽개척단'満蒙開拓団이라는 미명하에. 일본 정부는 선량한 농민들에게 본래 주민들의 토지를 빼앗고 그들 위에 군림토록 했다. 이 시골의 농민들은 한순간에 식민지에서 지배자, 가해자가 되도록 강요되었다.

효고현 탄토쵸에서 발견한 '대효고개척단 순난자의 비'. 뒷면에는 '입수 자결하다'라는 글씨가 하얗게 강조돼 있다. 사진 제공 홍이표

문제는 패전 직후 그들이 한순간에 버림받았다는 사실이다. 관료와 군인들은 패전 직후 저마다 살길을 찾아 도망쳤고, 남겨진 노인, 여성, 어린이들은 본토인들과 소련군 등에 의한 폭력과 살해, 강간 등에 노출되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강요된 것은 집단 자결이었다. 굴욕적 강간과 죽임을 당할 바에는 장렬히 자결하라는 지시와 명령…. 고향을 떠나 1~2년 만에 죽음을 직면한 피해자, 희생자가 되고 말았다.

정부의 정책과 지시를 믿고 따르며 1944년에 만주로 떠났던 탄토쵸의 농민들도, 이듬해(1945) 패전 소식을 듣게 됨과 동시에 나라로부터 버림받았다. 그들은 결국 어른, 아이 할 것이 없이 몸을 줄로 묶고 돌을 매달아 집단으로 물에 빠져 죽은 것이다. 국가는 그렇게 이 벽촌의 양민들을 사지로 내몬 뒤 무책임하게 돌아섰고, 저 비석 하나를 세워 주며 할 일을 다 한 것처럼 침묵하고 있다.

아연함은 곧 애곡哀哭으로 바뀌었다. 어쩌면 그리 똑같을 수 있을까. 만주로 떠난 탄토쵸의 주민들 숫자가 4년 전 세월호에 탑승한 승객 수와 같은 476명인 것이다. 그리고 희생자 숫자도 세월호 306명을 조금 웃도는 345명이다. 그리고 두 사건 모두 희생자들을 물속으로 몰아넣었다.

1944년 476명 만주행, 익년 345명 집단 익사…
2014년 476명 제주행, 익일 306명 집단 익사…

교회 하나 세워져 있지 않은 일본 벽촌에서의 심방길에, 필자는 무책임하고 야만적인 국가권력이 힘없고 죄 없는 가난한 사람들의 생명과 인권을 어떻게 대하였는지 다시금 목도하였다. 세월호 참사가 있기 70년 전에 이미 탄토쵸 476명의 생명은 '대효고만주개척단'의 배에 올라탔고, 결국 낯선 땅 강물에 수장되었다. 국가로부터 그 어떤 보호도 받지 못한 채 허망하게 죽어 간 70년 후의 세월호를 이 낯선 일본 땅에서도 마주한 것이다.

'만몽개척단'이라는 이름의 수많은 세월호

2년 전(2016) 8월 14일, 일본 NHK는 '마을 사람들'村人은 만주로 보내졌다 – 국가정책 71년째의 진실'村人は満州へ送られた~"国策"71年目の真実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방영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 관련 내용이 프로그램 다수를 차지하는 상황에서 낯설고 새로운 주제였다. 만주사변과 중일전쟁 발발 이후, 일본 정부는 만주와 몽골의 개척단 파견을 획책했고 그 목표 수는 500만 명에 달했다. 골치 아픈 국내 빈곤층을 해외로 내보내어 국내 경제를 관리하면서 동시에, 식민지를 관리할 자국민 수를 늘려 더욱 효과적인 수탈과 전쟁 동원을 도모하기 위함이었다.

이 방송이 일본에 소개될 무렵, 국내에서는 그와 흡사한 정치인의 발언들이 들려왔다. 박근혜 당시 대통령은 기업인들이 모인 자리에서 제2의 중동 붐을 조성하라며, "대한민국에 청년이 텅텅 빌 정도로 한번 해 보세요. 다 어디 갔냐고…"(2015.3.19.)라고 말했다. 당시 여당 의원이었던 정운천 씨(새누리당)는 "콩고, 캄보디아 등, 전 세계 오지에 청년 10만 명쯤 보냈으면 좋겠다"(2016.10.11.)고 주장하였다. 일본의 대표적 방송사는 수십 년 전 자국민을 무책임하게 해외로 내몰았던 사실을 고발하고 있건만, 한국의 위정자와 언론들은 자국 청년들의 무책임한 해외 방출을 궁리하고 있었다. 그 무모한 발상의 뿌리에는 과거 일제의 식민지주의가 벌였던 만몽개척단의 역사가 있다.

1930~1940년대 나가노현의 만몽개척단 모집 포스터(왼쪽). 대륙으로 가는 배에 승선하러 가는 개척단 농민들(오른쪽). 사진 제공 홍이표

패전 때까지 보내진 일본인 개척민 수는 목표에 못 미쳤지만, 27만 명 이상이었고, 전황이 불리해져 위험이 극대화된 1943년 이후에도 6만 명 이상이 바다를 건너 한반도를 거쳐 만주로 향했다. 위 다큐멘터리는 3만 5000명이라는 가장 많은 지역민을 사지死地로 내몬 나가노현長野県 한 마을의 비극적 일화를 소개한다.

시모이나군下伊那郡 토요오카무라豊丘村의 35세 촌장 쿠루미사와 모리胡桃澤盛 씨는 마을 주민 95명의 집단 자결 소식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 결국, 패전 후 41세가 되던 해에 "개척민들에게 죄송할 따름이다"라는 유서를 남긴 채 목을 매 자살했다. 그가 남긴 1만 쪽 분량의 일기에는 탁무성拓務省과 농림성 등 중앙정부와 각 도도부현(지방정부)이 교묘하게 마을 촌장들을 유도하여 만주 개척민 인원수를 강제 할당하였고, 그 확보 인원만큼 지역 보조금을 주는 등, 사탕과 채찍을 동원해 이주를 획책했던 경위가 일기에 자세히 기록돼 있다.

남성 농민들은 도착 직후 모두 군에 소집되었다. 일본이 항복한 다음 날부터 현지인들은 여성을 강간하고 어린이와 노인들을 폭행했다. 73명은 산속으로 도주하던 끝에 결국 집단 자결한 것이다. 어른들은 아이 20명을 먼저 죽인 뒤, 서로가 서로를 칼로 찌르며 죽어 갔다. 낯선 대륙의 산속은 그야말로 지옥이었다.

오직 전쟁과 부국강병의 광기에 빠져 있던 국가의 폭력 아래에서, 국민의 생명과 안전은 뒷전이었다. 그저 나라의 정책을 믿고 따르라는 말만 반복했다. 476명이 승선하였던 세월호가 일본 도처에서 무모하게 출항하였던 것이다. 만몽개척단의 현지 관리자는 관동군이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 아버지도 당시 그 일원이었다.

양심의 가책으로 괴로워하는 쿠리미사와 촌장의 모습과 달리, 당시 개척단 사업을 담당한 고령의 전직 관료들이 반성 없이 뻔뻔스럽게 증언하는 모습은 너무나 대조적이다. 자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결코 책임지지 않는 국가권력의 모습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정책'이라는 이름의 악마는 지금도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하여 발악發惡하고 있다. 수년 전 한국에서는 용산과 쌍용자동차가 그랬고, 마침내 세월호가 그랬다. 하지만 아무도 책임지는 이 없는 역사는 지금도 똑같이 반복되고 있다.

귀환자들의 이름 '히키아게'引揚

국가로부터 버림받은 사람들의 집단 자결도 비참했지만, 죽지 못한 채 남겨진 이들의 삶도 결코 순탄치 않았다. 그동안 압제하에 분노하고 있던 식민지민들의 보복 폭행과 약탈, 강간과 살인 등이 횡행했지만, 여성과 어린이, 노인들은 보호받지 못했다. 그동안 역사는 이 시기 한반도와 만주, 중국 등지에서 일본 민간인들이 겪은 일들을 마땅한 응보라는 전제하에 침묵해 왔다. 정작 심판받아야 할 일본의 지배자, 권력자들은 여전히 일본을 통치하며 떵떵거리고 있지만, 밑바닥에서의 희생은 늘 힘없는 민중의 몫이다. 일본에서는 이들 귀향자, 귀환자들을 '히키아게'引揚라 부른다. 우리에게 '인양'引揚이라는 말은 '세월호'를 통해 새롭게 일상화했다. 그렇다. 그들은 저 깊숙한 죽음의 바닷속에 빠졌다가 기적처럼 건져 올려진 이들이기에, 일본은 고향에 돌아온 이들을 '히키아게'(인양)라 부른다.

일본의 수도 도쿄東京 한복판의 아사쿠사浅草 센소지浅草寺에 가면 1997년에 세워진 모자지장존母子地藏尊이 있다. 이 석상은 1945년 일본의 패전 직후, 만주 등지에서 피난해 오다 목숨을 잃은 일본인 모자母子를 기리는 상징물이다. 겨울이 되면 이 석상에 빨간색 털모자와 목도리, 담요 등이 잔뜩 걸쳐진다. 꽃과 떡 같은 공물도 놓인다. 한국의 소녀상처럼 말이다. 이 석상은 전쟁으로 인한 가장 큰 피해자는 '여성'과 '어린이'임을 웅변하고 있다. 석상 뒤에는 다음과 같이 건립 취지가 적혀 있다.

도쿄 아사쿠사의 모자상. 사진 제공 홍이표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소련 참전으로 혼란 상태가 된 중국 동북부(구 만주)로 피난을 떠나던 중에 목숨을 잃은 일본인의 수는 20만 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혹한의 광야에 내몰려 헤매던 중에 모자가 생이별하거나 굶주림 혹은 역병으로 고통받던 중에 죽는 등, 그 비극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입니다. 희생된 모자의 영혼을 위로하며 또한 아직도 재회할지 모를 부모와 자식의 애끓는 마음의 기억하며, 두 번 다시 전쟁이라는 잘못을 반복하지 않기를 기원하면서 이 자리에 모자지장母子地蔵을 건립하였습니다." (1997년 4월 12일, 원주願主 치노 세이지千野誠治, 디자인 치바 테츠야ちばてつや, 글 모리타 겐지森田拳次, 만주満州지장건립위원회, 만주満州지장건립응원단, 중국잔류고아원호기금)

우리는 히키아게들을 향한 식민지민들의 보복성 폭력을 내심 합리화한 뒤 침묵하고 외면해 왔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들의 고통과 슬픔도 우리가 함께 아파하고 고민해야 할 숙제이다. 소녀상에 털모자와 목도리를 씌워 준 그 마음이, 모자상에게 하였던 그것과 결코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일본의 모자상 철거를 요구할 수 없듯이 일본도 소녀상의 철거를 요구할 수 없다. 아픔의 경중에 차이가 있을지라도 서로 공감하고 존중할 필요가 있다. 우리 인간은 모두가 '죽음의 바다' 속에서 구원받을 날을 앙망하며 사는 '히키아게'(인양)들이기 때문이다.

'인양'의 차별과 배제

필자는 한국에서 손님들이 오면, 목회지인 미야즈宮津에서 30분 거리인 마이즈루舞鶴로 자주 안내했다. 러일전쟁 당시의 옛 군항 시설도 곳곳에 남아 있어 한반도와의 복잡한 인연을 체감할 수 있는 이곳은, 전쟁의 진원지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패전 이후 히키아게(귀환자)들이 돌아오던 관문으로, 전쟁 종착지로서의 이중적 의미를 지닌다.

유골로 마이즈루로 돌아온 히키아게들. 사진 제공 홍이표
상륙 부두의 현재 모습. 사진 제공 홍이표
히키아게(귀환자) 위로 행사를 펼친 탄고미야즈교회丹後宮津教会 교인들. 사진 제공 홍이표

1945년 가을부터 1976년까지 30년 동안 대만, 남양군도, 한반도, 만주, 시베리아 등지로부터 총 629만 명(군인 군속 311만 명, 일반인 318만 명)의 일본인이 전국 각지의 항구로 귀국했다. 최초 4년 동안인 1949년까지 624만 명이 돌아왔으므로 이 기간 전체 귀환자의 99%가 돌아온 셈이다. 이는 인류 역사상 최대의 단기적 집단적 인구 이동으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북한 지역과 만주, 몽골 지역의 일본인들은 소련의 포로가 되어 그 후 10년 이상 고통스러운 시절을 보내던 많은 사람은 귀환에 시간이 오래 걸렸다. 마이즈루는 마지막까지 이들의 귀환을 책임진 항구였다. 1945년 10월 7일에 인양 제1선 '운젠마루'雲仙丸의 입항 이후 1958년까지 13년간 한반도, 중국(만주), 시베리아 등지의 포로로 고통받던 히키아게(인양) 66만 4000명이 마이즈루 땅을 밟으며 귀국했다. 일본의 항구들 가운데 가장 긴 세월 동안 귀환의 관문 역할을 감당한 것이다. 감격스레 하선하던 부두 일대는 1970년에 히키아게引き揚げ기념관으로 조성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하지만 이곳 선착장에 올 때마다 필자는 엔도 슈사쿠遠藤周作가 소설 <침묵>에 쓴 이 말을 늘 되뇐다.

"인간은 이리도 슬픈데, 주여 바다는 푸릅니다."

보편적 인류애를 품고 최대한 고통받던 일본인들 처지를 공감하려 애씀에도 한국인으로서 복잡한 심경에 휩싸이기 때문이다. 바다는 그저 고요할 뿐이지만, 더 허망하고 비참한 죽음을 맞았던 동포들의 아우성이 들리는 듯하니 말이다.

1945년 8월 24일, 아오모리탄광에서 강제 노동에 시달리던 조선 동포 5000여 명(일본 정부 발표는 3725명)이 구 일본 해군 수송선 우키시마마루浮島丸를 타고 부산으로 돌아가던 중, 마이즈루에 입항하였다. 하지만 원인을 알 수 없는 폭발과 함께 배는 침몰했고 수많은 조선인이 목숨을 잃은 현장이 그 선착장 바로 앞에 있다. 시신 수습과 함께 발표된 사망자 최종 인원은 549명(일본인 25명)이다. 최근의 세월호처럼 선체 내 희생자까지 수습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더 막대한 사망자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그 진상은 여전히 미궁 속이다.

고요한 마이즈루만의 물속에는 9년 동안이나 우키시마마루가 그대로 잠겨 있었다. 수면 위에는 선체 꼭대기의 안테나와 대공 소총 등이 노출돼 있었다. 그 앞으로 만주와 시베리아에서 인양引揚돼 돌아오던 일본인 귀환자들의 배가 10년 동안 오갔다. 전쟁 이후의 '인양'(히키아게) 과정에서조차 차별과 배제의 역사는 이처럼 극명한 대비를 이룬다. 1954년 일본 정부는 침몰선을 인양해 고철로 매각하였고, 이후 진상 조사도 회피로 일관해 왔다. 아… '인양'引揚(히키아게)이라는 말이 이처럼 속을 후벼 팔 수 있을까. 진도 팽목항과 목포신항에 가 보지 않아도, 마이즈루 앞바다에 이르면 북받치는 서러움을 가눌 길이 없다.

구소련의 귀환(인양) 선박 고우안마루興安丸가 1954년에 마이즈루만으로 들어오는 모습. 물에 잠긴 우키시마마루의 상층부가 해수면 위로 노출돼 있다. 우키시마마루순난자를추도하는모임 소장 미우라 히데오三浦日出夫 촬영. 사진 제공 홍이표

2016년 10월 10일, '마이즈루히키아게기념관(귀환자 기념관)' 소장 자료들에 대한 유네스코의 세계 기억 유산 등록이 최종 결정되었다. 일본 정부의 '국내 후보 지정'을 통한 적극적 지원으로 이뤄진 일로서, 기념관은 새롭게 조성되어 방문객을 맞고 있다. 씁쓸한 것은, 자국민(일본인) 수난과 희생의 기록들을 '유네스코 기억 유산'으로 지정받기 위해 분투하는 동안, 일본 정부는 2014년 중국이 추진하던 일본군 '위안부' 등에 관한 유네스코(UNESCO) 세계기록유산 등재 철회를 요구했다. 2015년 10월 14일에는 중국의 난징 대학살 문서들이 기록 유산으로 지정되자 일본 언론은 '외교 실패'를 비판했고, 자민당을 중심으로 철회 운동이 일어났다.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은 "유네스코를 정치적으로 이용해서 일‧중 간 과거 한때의 부負의 유산을 무의미하게 강조하는 것은 매우 유감"이라고 강조했으며, 그에 동참한 한국 정부도 똑같이 압박했다. 2015년 12월 28일, 박근혜 전 대통령에 의한 굴욕적인 위안부 협상이 타결되자, 한국 정부(여성가족부)는 기다렸다는 듯이 '위안부 기록 유산 등재' 지원을 위한 한국여성인권진흥원과의 사업 위탁 체결 직전에 그 사업을 백지화했다(<서울신문> 2016.1.11.). 이어서 국회에서는 정부(여가부)가 일본군 위안부 기록물 유네스코 등재 추진을 위해 편성돼 있던 2016년도 여성가족부 예산 4억 4000만 원 집행도 중단한 사실이 밝혀졌다.

패전 직후 식민지에 잔류한 일본인들이 폭행, 살인, 강간, 약탈, 포로 수용 등에 무방비로 노출되었던 역사는 함께 가슴 아파해야 할 불행한 인류사의 한 장면이다. 가난한 일본 민중을 '지배자', '가해자'로 둔갑하게 한 이들은 국가 권력 뒤에 숨은 소수의 권력자였다. (물론 600만 명 이상의 히키아게(인양자) 모두가 전쟁범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하지만 일본인 히키아게(인양자)만을 강조하면서, 일본군 '위안부', 강제징용, 강제징병 등으로 고통받고 희생된 식민지민들의 역사는 차별하고 배제하는 일본 정부 태도에는 분명 문제가 있다. 과거 자신들이 '가해자'가 되도록 식민지로 내몰았던 이들을 이제 다시 '피해자', '희생자'로 둔갑시켜 국가의 선전 도구로 활용하는 것은 비판받을 수 있다. 마이즈루의 바다는 그 끝나지 않은 차별과 배제를 여실히 보여 준다.

잊혀진 세월호, '우키시마마루'의 순난殉難

번듯하게 세워진 '히키아게기념관' 바다 건너에는 '우키시마마루 순난의 비'浮島丸殉難の碑가 세워져 있다. 1970년대에 양심 있는 마이즈루 시민들과 일본기독교단의 야나기 코자부로柳幸三郎 목사 등의 종교인, 그리고 조총련 등이 연합하여 '우키시마마루 폭침 사건 진상 규명 운동'을 전개했다. 결국 8년 뒤인 1978년 8월 24일에, 침몰 현장에서 가장 가까운 시모사바카下佐波賀의 언덕에 희생자들을 위로하는 기념물이 세워진 것이다. 정확히 40년 전 일이다.

우키시마마루 순난의 비 동상(왼쪽)과 뒷면(오른쪽). 사진 제공 홍이표

기념물 뒤의 건립 연도(1978년)를 물끄러미 바라보면 그때 고국의 정부는 무얼 하고 있었는지 묻게 된다. 그 당시 대통령은 유신 독재를 강화하면서 민청학련 사건(1974)과 인혁당 사법 살인 사건(1975) 등을 획책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자주국방'이란 미명하에 북한과의 군비경쟁에도 열을 올렸다. 이 순난비가 세워진 직후인 9월 26일에는 세계 7번째로 국산 장거리 유도탄 등과 다연발 로켓 시험 발사에 성공해 전쟁 분위기를 고조했고, 핵 개발 시도로 미국과는 관계가 악화하는 중에도 일본 정부와는 사이가 돈독했다.

이윽고 박정희는 1978년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한 간접선거로 제9대 대통령으로 셀프 당선되어 12월 27일에 5선 대통령 취임식을 열었는데, 축하사절단으로 전임 일본 수상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등 12명이 방한했다. 구 만주국 고위 관료로서 박정희 독재의 막후 지원을 담당했던 기시는, 작금의 일본 수상 아베 신조 외조부이다. 미국 정부는 물론 미국 기독교계 압박과 국내의 저항으로 고립된 그는, 인의 장막과 문란한 사생활에 더욱 깊이 빠져들고 있었다.

한편, 어머니 대신 영부인 노릇을 하던 장녀 박근혜는, 영세교 교주 출신의 최태민 목사가 1975년에 설립한 대한구국선교단 명예총재가 되어 그와 늘 함께하였고, 1977년부터는 '새마음갖기운동본부'를 만들어 그 명맥을 이어 갔다. '최태민·최순실' 부녀가 영애를 농단하기 시작한 것도 바로 그 시기였다. 이들 부녀가 해방 직후 억울한 죽음을 맞은 동포들의 넋을 기리는 일과 진상 규명하는 일에 관심 가질 리 만무하였다. 우키시마마루 순난비 뒤에 서 있노라면, 수년 전의 세월호 참사, 일본군 위안부 졸속 협상, 사드 배치,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 체결 강행 등의 대를 이은 그릇된 위정爲政이 결코 우연의 산물이 아니었음을 느끼게 된다.

순난비를 방문한 한국의 목사와 교우들이 기도하는 모습. 사진 제공 홍이표
순난비 방명록. 사진 제공 홍이표

매년 8월 24일이 되면, 우키시마마루 순난비 앞에서 마이즈루시민과 조총련 관계자들이 위령제를 개최하는데, 15년 전부터 대한민국민단 마이즈루 지부도 함께 참여하며 돕고 있다. 양국 정부가 진상 규명과 추모 활동에 무관심한 그 긴 세월歲月 동안, 일본의 양심적 시민들이 '세'상의 벽을 넘어서고, 허망한 죽음들을 환기하기 위해 분투해 왔다. 그 첫발을 내디딜 때 지역의 일본인 목사께서도 동참하였다는 기록은 작은 위안이 아닐 수 없다. 지난해(2017) 8월 24일 거행된 추도 행사에서 '우키시마마루순난자를추도하는모임'浮島丸殉難者を追悼する会의 요에 가츠히코余江勝彦 회장(76)은 다음과 같이 추도의 글을 낭독했다.

"꿈에서도 잊지 못한 고향 땅과 혈육을 다시 만날 날만 기다리다, 뜻하지 않은 대참사와 조우해 고귀한 생명을 잃었습니다. 우카시마마루 사건으로부터 우리는 평화의 확립을 향해 나아가야 함을 배웁니다. 앞으로도 일본인의 책임으로 이 추도식을 계속해 나갈 것입니다."

매년 추모식마다 교토京都조선중고급학교 여학생들이 치마저고리를 입고 추모의 노래 '해당화 필 언덕에'はまなすの花さきそめて를 부른다. 순난비 주변에는 해당화 대신 '무궁화'가 심겨져 있어, 남과 북이 함께 남궁억 선생의 옛 마음과 정신으로 하나 되게 이끈다.

매년 위령제를 열면 조선학교 여학생들이 추모곡을 부른다. 사진 제공 장진원
무궁화가 핀 순난비 모습. 사진 제공 홍이표

해살무늬 번지는 푸르른 물결의,
해당화 필 언덕에 잠든 우키시마浮島여!
눈물이 한주먹 쏟아지는데,
수난의 사연인들 들여다보니
아아 내 고향 그대 살기에
한 많은 발자욱 새겨지면서,
설움이 맺힐소냐 마이즈루舞鶴여!
아리랑 아라리요 아라리요

짓밟힌 저 바닷가에도
오가는 배들의 돛대에도
힘겨운 눈물의 항구
너의 외침 소리에 뒤돌아보면
아아 내 고향 그대 살기에
마음 담아 그리움의 노래 부르는 마이즈루여!
아리랑 아라리요 아라리요

언젠가는 돌아가리라,
죽더라도 혼만큼은 돌아가리라
오늘도 날아가는 흰 나비에게서
우리 동포의 모습들 보고
아아 내 고향 그대 살기에
떠나는 사람을 사모하며 기도하리! 마이즈루여!
아리랑 아라리요 아라리요 (한구용韓丘庸 작사 / 김정화金正花 작곡)

※ 1절 가사는 교토조선중고급학교의 김향미 양이 선율에 맞춰 한글로 옮긴 것(2013)이다.

얼마 전 마이즈루를 다시 찾았다. 강원영동MBC 장진원 PD가 기획 중인 다큐멘터리 '갈등과 대립의 바다를, 평화와 번영의 바다로'의 촬영을 돕기 위해서였다. 마이즈루시청 옆에는 러일전쟁 당시 군 시설로 사용한 적 벽돌 건물 일부를 지역 문화 공간과 박물관 등으로 활용하고 있다. 가운데 건물 2층에는 일본방위청 해상자위대가 조성한 '구 해군의 항구도시 마이즈루'旧海軍の港町、舞鶴라는 상설 전시실이 마련돼 있다. 그 입구에는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도고 헤이하치로東郷平八郎 동상이 세워져 있고, 일본의 옛 해군의 명예를 드높이는 전시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런데 촬영팀과 함께 그 옆 건물인 '마이즈루시정기념관'舞鶴市政記念館 1층에 들어서자 '평화를 위한 전쟁전'平和のための戦争展-舞鶴2018이라는 또 다른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해상자위대 상설 전시장(왼쪽)과 시민들의 평화 전시회에서 마련된 우키시마마루 부스(오른쪽). 사진 제공 홍이표

수많은 마이즈루시민으로 분주한 이 전시회는 2층과 정반대 내용을 다루고 있었다. 평화헌법 9조 수호, 과거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과 만행들, 대도시 공습과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폭의 참상 등을 소개하며 전쟁과 군대 부활의 반대를 호소하고 있었다. 특히 눈길을 끈 것은 '우키시마마루' 사고를 알리는 부스였다. 곧 열릴 위령제에 대해서도 열심히 알리고 있었다. 인터뷰에 응한 전시회 실행위원장은 "오직 시민들의 힘으로만 이 행사를 24년째 지켜 온 것이 참으로 자랑스럽다"고 말하면서 이 말을 덧붙였다.

"허망하게 희생된 조선인들도 모두 고향으로 돌아가던 '히키아게'(인양자)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일본인 히키아게가 처음 고국 땅을 밟던 이곳 마이즈루에서조차 조선인 히키아게들의 그 참사와 희생에 대해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키시마마루의 문제도 일본의 히키아게와 똑같이 다루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비록 소수이지만 이런 일본 시민들이 있기에, 한일의 높은 장벽이 무너지고 깊은 골은 메워질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못한다. 그 소수 안에는 더 소수인 양심적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포함돼 있을까. 우키시마마루 순난비를 찾은 한국 분들은 수년 전부터 반드시 세월호를 함께 떠올리며 참담해한다. 이런 역사조차 모르고 살아왔기에 우리가 세월호의 아이들을 저렇게 희생하게 했다는 한탄과 함께.

2018년 마이즈루 평화를 위한 마이즈루 전쟁전 포스터.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다시 생각하자! 세계에 자랑할 평화헌법 - 당신은 전쟁을 바랍니까? 마이즈루의 역사는 전쟁과의 관계를 빼놓고는 말할 수 없다. 특히 히가시마이즈루는 메이지 34년(1901)에 해군 진수부 개청과 함께 만들어진 도시이다. 전쟁이 끝나고 평화헌법하에서 진수부가 없어지고, 마이즈루는 평화 항만 도시로 새로 태어났다. 하지만 그 후 (해상)자위대 기지가 다시 들어와, 전쟁법하에서 기지 기능의 강화가 획책되고 있다. 우리는 이 도시에서 '평화를 위한 전쟁전'을 연 지 24년이 되었다. 전쟁 없는 평화로운 나라를 만들고자 일관되게 호소해 왔다. 지금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 전쟁의 진실을… 그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자! 사진 제공 홍이표
우키시마마루 위령제 직후 바다에 헌화하는 모습. 한복과 기모노를 입은 참가자 모습이 인상적이다. 사진 제공 日朝協会

이곳 일본에서도 수많은 세월호를 마주하게 된다. 하지만 양심적인 일본 시민들이 분투하는 현장과, 그들과 손잡은 소수의 그리스도인이 있기에 희망을 놓지 않는다. 일본인들이 주도하여 매년 열리는 우키시마마루 위령제에는 남북(민단, 조총련)의 관계자들이 모두 참석하여 서로를 위로한다. 한일은 물론 남북의 화해와 용서가 자연스럽게 실천되는 이 무대는 갈등과 대립의 '세'世상도 반드시 초'월'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국가와 지자체의 도움 없이 오직 시민들 힘으로만 세워진 순난비 앞에서, 민간의 협동으로 이루어지는 위령제이기에 조금은 조악하고 서툴지 모른다. 하지만 이곳이야말로 '마이즈루'의, 아니 일본의 골고다요, 배꼽 자리일지 모른다. 우키시마마루를 찾을 때면 자주 비가 왔다. 그때마다 필자는 만몽개척단의 눈물, 우키시마마루 동포들의 눈물, 세월호 아이들의 눈물로 느꼈다. 여전히 도처에 비맞고 선 이들이 많다. 그럼 우린 없는 우산을 찾아 헤매겠는가? 아니면 함께 비를 맞으며 위로할 텐가? 내 주변의 골고다, 우주 배꼽은 어디인가?

빗속의 우키시마마루 순난비(왼쪽)와 마이즈루의 조선인 모자상(오른쪽). 사진 제공 홍이표
침묵沈黙할 뿐인 침몰沈沒의 바다. 사진 제공 홍이표

장마

폐허의 담 벽 아래, 성스런 신의 병사들이
지구의 왼쪽 관자놀이를 찢는 총성이 울리고
그 피와 살을 받아 핥는
시퍼런 잡초와 갈가마귀의 혀가 비릿하다.
골고다, (우주 배꼽?), 거기, 여전히 신생아들의 울음소리도
들린다지?
안 보았어도 좋을, 흥건히 피에 뜬 조간을 보며
질긴 탯줄을 씹듯 간신히 조반을 삼켰다.
장마가 쉬 그칠 것 같지 않다.

[고진하(목사, 시인), <우주배꼽>, 세계사, 1997. 중]

홍이표 목사가 '일본 기독교 현장에서'라는 제목으로 칼럼을 연재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인터뷰 기사(바로 가기)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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