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예장통합) 헌법이 세습을 금지하는데도 명성교회 부자간 세습을 용인한 총회 재판국의 몰상식한 판결에 온 나라가 술렁이며 지탄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총회 헌법 수호와 명성교회 세습 철회를 위한 예장 목회자 대회' 준비실무위원장을 맡아 여러 지역을 순회하는데, 일선 목회자들의 뜨거운 지지가 놀랍습니다.

"까마득한 날에 / 하늘이 처음 열리고 /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 (중략) 다시 천고의 뒤에 /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광복절이면 조국 해방의 굳은 신념이 담긴 이육사의 '광야'가 떠오릅니다. 이원록 선생은 경북 안동 출신으로 의열단 등 독립운동 단체에 가담하여 투쟁하다 수차례 구금당했고, 1944년 북경 주재 일본총영사관 감옥에서 순국하였습니다. 1927년 조선은행 대구 지점 폭파 사건으로 수감되었을 때 수인번호 '264'를 아호로 삼을 정도로 시인은 항일 정신이 투철했습니다.

함석헌 선생은 <뜻으로 본 한국 역사>(한길사)에서 8·15 해방을 "도둑같이 온 해방", "하늘이 준 떡"이라고 해석했습니다. 해방을 미리 알았다고 하면서 해방을 도둑질하려고 하거나 자기 공로로 주장하는 자들에게 경고하며 민중들만이 민족 해방을 위해 싸웠다고 언급하였습니다.

결단하여 민족 해방을 위해 목숨과 재산을 바친 이들이 있습니다. 경북 안동 지역 독립운동가들이 대표적입니다. 그중 석주 이상룡 선생은 독립운동을 위해 자기 전 재산을 처분하여 확보한 군자금으로 중국 간도로 넘어가 신흥무관학교 등을 설립하여 무장 항일 투쟁 군대를 양성합니다. 석주는 서로군정서 최고 책임자로서 상해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냈습니다.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은 관장 안동대 김희곤 교수의 끈질긴 노력 끝에 세워졌습니다. 일제강점기 독립 유공자로 추서된 1만 5056명 중 2183명이 경북 출신이고, 그중 다른 곳에 비해 독립 유공자가 월등히 많은 안동(367명)은 독립운동의 성지라고 불립니다. 생생한 성지인 독립기념관 앞 내앞마을은 고풍스런 한옥의 '김 씨 집성촌'인데, 항일운동을 위해 마을을 떠나 걸어서 중국 망명길에 오른 이들이 150여 명이 넘을 것이라고 추청합니다.

유교와 독립운동의 성지 안동에서 그리스도교가 흥왕하였던 것은 안동교회 등 여러 교회가 시대적 소명에 충실했기 때문입니다. 3·1 혁명 당시 안동교회 김영옥 목사와 김병우 장로는 3월 13일 장날 교회 종소리에 맞춰 만세 시위를 벌이기로 은밀히 계획하였으나 예비검속으로 잡혀 유치장 안에서 만세 소리 없이 종소리만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 명의 그리스도인이 안동 3·1 만세 운동에 불씨를 지폈습니다. 석주 이상룡 선생 동생인 조사(오늘날의 전도사) 이상동이 3월 18일 안동 중심에서 태극기를 모방한 연에 '대한 독립 만세'를 쓰고 혼자 만세 시위를 벌인 것입니다. 금방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지만, 모의는 계속되었습니다. 안동교회를 비롯하여 안동의 11개 교회 교인들이 만세 시위에 참여합니다.

이상동 조사가 경성감옥에서 복음을 전해 회심한 4인 중에는 나중에 목사가 되어 제39회(1954년) 총회장으로 신사참배 결의 취소 성명을 낸 이원영 목사가 있습니다. 많은 교인이 유림과 합세하여 만세 운동에 나서 시위가 격렬해지면서 투석전이 벌어졌을 때 두 교인이 총에 피살되었고, 여러 명이 임시정부로 가려다가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는 등 고초를 겪습니다.

안동교회 석조 예배당(왼쪽)과 100주년기념관. 이근복 그림

1909년 설립된 안동교회는 1911년 부임한 김영옥 초대 목사에 의해 튼실한 기초가 놓였습니다. 알고 보니 예장통합 총회장으로 존경받은 고 김형태 목사(연동교회 원로)의 조부였습니다. 그는 신실한 목회자요 민족 지도자였습니다. 교회가 예배당을 건축할 때마다 선교사가 준 노새와 가옥을 팔아 건축 헌금을 드렸고, 경북 북부 지역 교회를 섬기며 안동교회를 지역사회를 섬기는 건실한 교회로 세웠으며, 교회가 민족운동의 보루라는 믿음으로 3월 만세 운동의 주역으로 활동하였습니다. 경북의 교회 지도자들에게는 독립 공채 모집을 독려했으며 신간회를 세우기 위해 애쓰기도 했습니다.

안동교회는 자랑할 것이 많지만, 특별히 110여 년 역사 가운데 분열이 없었고 모범적으로 분립 개척을 한 점이 가장 돋보입니다. 교인들을 나누어 안동서부교회와 안동동부교회를 분립하여 개척교회를 세우는 식으로 20개 교회를 분립하거나 설립하였습니다.

또 교파를 넘어 에큐메니컬 정신을 구현하였는데, 1951년 안동에서 안동제일감리교회를 개척할 때 안동교회 남선교회와 여전도회가 감리회 목사 급여를 후원하고 건축 헌금을 보냈습니다. 당시 김광현 목사는 조상국 집사에게 안동교회를 떠나 감리교회를 섬기도록 당부하였다고 합니다. 1974년 감리교회가 예배당이 소실되었을 때 정성껏 건축 헌금을 모아 지원하기도 했습니다. 1953년 성결교회 설립을 위해 전도 집회를 적극 지원하였고, 구세군 교회가 안동에 정착하는 데 도왔습니다. 심지어 가톨릭 성당을 세울 때도 협력하였다고 하니 진정으로 '어머니 교회' 역할을 한 것입니다. 오늘날 안동교회는 지역사회의 어머니가 되고자 많은 선교 활동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담쟁이로 뒤덮인 아름다운 석조 예배당은 친근합니다. 1987년 예장통합 총회 청년회전국연합회 전국 대회 당시, 마룻바닥 예배당에서 집회하다 시내에서 전두환 대통령 사진을 불태우며 대규모 시위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민주화 운동을 하다 교직에서 해직당한 안동교회 김대성 집사의 복직을 요구하며 안동교육청을 항의 점거하기도 했고, 안동농협 점거 농성을 통해 전경상 집사의 원대 복귀를 요구해 합의를 받았습니다. 이 건물은 1937년에 준공하였는데, 설계자는 이화여대와 철원제일감리교회를 설계한 미국 평신도 선교사 윌리엄 보리스(William Merrell Vories)였습니다.

이번에 안동교회를 방문했을 때 가장 고무적이었던 사실은 저를 안내한 김대성·전경상 장로님이 담임목사를 존경하고 자랑한다는 점이었습니다. 헌신적이고 진실하며 검소하고 끊임없이 교회 발전 방안을 모색한답니다.

석조 예배당 옆 100주년기념관은 크고 어린이 도서관과 카페 등이 있었는데, 석조 예배당의 담임목사실은 비좁았습니다. 역대 담임목사들이 대대로 사용했다고 그냥 쓴다는 것입니다. 담임목사실에 걸려 있는, 총회장을 지낸 두 원로목사 김광현 목사, 김기수 목사와 현 김승학 담임목사가 함께 찍은 사진은 가족사진처럼 보였습니다. 교우들과 주민들에게서 존경을 받은 목사들이 있었기에 안동교회가 민족 역사와 지역사회에서 제 몫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요즘에는 오히려 사회가 한국교회를 염려하는 형편이고 많은 그리스도인이 교회에 절망하여 떠나는 상황인데, 안동교회는 이 시대에 보기 드문 건강한 신앙 공동체입니다. 그런데 예장통합 총회에서 교권을 장악하여 여러 문제를 일으키는 이들 중 이 지역 출신인 '안동 사단'(대표적으로 김삼환 목사)이 있다는 사실은 참 아이러니합니다.

*'그림으로 만나는 한국교회'는 매월 2차례 업데이트됩니다.

이근복 / 목사, 성균관대학교와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을 졸업했다. 영등포산업선교회 총무, 새민족교회 담임목사,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교육훈련원장을 거쳐 현재 크리스챤아카데미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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