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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표절, 그 뻔뻔한 종교개혁 뒤집기에 대하여

"책 읽고 은혜 받아 설교한 것"이라 변명하는 대형 교회 목사에게

장효진   기사승인 2018.07.24  17: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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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착된 기독교 정신
묵인하는 사람들

경기도 화성시 동탄 신도시 ㄷ교회 담임목사 ㅎ은 올해 초 지구촌교회 이동원 목사의 설교집 5권을 베껴 설교하면서 이렇게 대답한다. "책을 읽어서 은혜 받은 내용을 전한 것뿐이다. 다른 목사가 전한 설교도 내용이 좋으면 똑같이 전한다." 그리고 적반하장으로 이렇게 반문한다. "다른 사람의 설교나 책을 전하는 것이 왜 문제가 되느냐?" 한술 더 떠서, 좋은 취지로 봐 달라며, 설교 전 "출처를 밝혔다"고 말했단다. 다시 말해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한 셈이다.

"좋은 말씀 잘 골라서, 회중들에게 전하는 것인데, 이게 큰 잘못인가. 어차피 목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직접 말씀을 구성해서 전할 수도 있고, 나보다 더 좋은 말씀을 전하는 사람의 것이 있다면, 그것을 가져다 전달해 주는 것도 나쁜 것만은 아니지 않은가."

아무런 문제의식이 없는 것이 가장 심각한 문제인 경우가 많다. 이 경우가 딱 그렇다. 자신이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 모른다면, 이 사람은 상식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셈이다. 목회를 하면 안 될 것이라 판단된다. 이렇게 교양에 무지한 이가 사람들을 어디로 몰고 갈 것인가. 맹인이 인도할 길은 사망의 길밖에 없다. 오늘날 기독교가 세상에서 외면받는 것은 도착된 기독교인들을 비판적으로 걸러 내는 자정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예언(prophesy)의 한자어 번역은 預言이다. 예 자는 '미리'라는 뜻도 함의하고 있지만, 예금預金이라는 말로 활용되기도 한다. 따라서 '예언'이란, 미리 알려 준다는 뜻도 있지만, '맡겨진 말씀'을 전달한다는 뜻도 분명히 갖는다. 그런 의미에서 맡겨진 말씀을 전하는 존재로 하나님의 예언자를 이해하는 것에 큰 무리가 없어 보일지도 모른다. 맡겨진 말씀을 그냥 전달하기만 하고, 전달자가 사라진다는 것을 전제로 말이다. 하지만 말씀 전달자가 말씀을 전달한 이후 사라지지 않고 교회 회중의 인도자로 머무른다면 어떨까. 그는 말씀 전달자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말씀 전달자라는 지위를 남용해, 있어서는 안 되는 자리를 갈취한 것이다.

바로 거기에 가장 큰 도착이 존재한다. 그것은 하나님이 말씀을 맡겨 주셨는가의 문제이다. 여기저기 인터넷에 나와 있거나 설교집에 나와 있는 설교를 자기식으로 회중을 위해서 소화하지 못한 채 고스란히 반복해서 전하는 설교라면, 우리가 굳이 설교자를 필요로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냥 좋은 말씀을 전하는 목회자의 설교를 대형 스크린으로 전체 교회에 반복적으로 상영하면 되지 않을까.

하나님은 분명 동탄의 그 교회 교인들을 위해 맡겨 놓으신 말씀이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영이 그들을 향해 하시고 싶었던 말씀을 그 베낀 설교문은 담고 있을까. ㅎ 목사는 정말 그 회중들 각자를 위해 자신에게 맡겨진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고 있는 것인가. 그것이 아니면, 설교 준비조차 못할 자신의 게으름 때문에 그들이 기다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길거리에 버려 버리고, 자신이 전달하기 좋은 말씀을 베껴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속이는 것인가.

ㅎ 목사 대답이 파렴치한 것은, 자신이 다른 목사의 말씀을 대신 전하여 그저 말씀 전달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이 가져다주는 여러 힘들을 마치 자기 자신의 것인 양 사취했기 때문이다. 그 말씀에 감동받은 교인이 있다 치자. 그 사람에게 ㅎ 목사는 피자 배달부와 같이 말씀 배달부에 불과한 것일까. 말씀의 감동을 통해 그 교인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 교인은 그 은혜의 통로로서 설교를 베낀 목회자를 하나님의 종으로 더 잘 섬기려고 노력하지 않을까.

그런데 한번 묻자. 이 은혜 받은 교인은 당신이 남의 설교를 그저 베껴 설교한 것을 정말 알고 있는가. 알고 있는데도 당신을 그 교회 담임목사로 모시고 있는 것인가. 설교 표절이 상습적으로 이루어지는 교회의 평신도 지도력은 이런 부도덕한 목회자의 행위를 용인하는가, 아니면 비판적으로 걸러 내는가. 목회자의 아전인수격 변명을 정당화해 주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런 부도덕한 부정의에 침묵하는 일이 한국교회를 침몰하게 하고 있으며, 그 침몰 속도를 가속화하고 있다. 부정의에 침묵하는 평신도 지도력은 한국교회 침몰과 부패의 공범이 아니라 동일한 주범이다. 당신들의 협조가 없다면, 이런 일은 불가능하다.

'오직 성서', '오직 은혜'라는
종교개혁 원리의 도착

한국교회에 지속돼 온 망령적 도착이 있다. '오직 성서로만'이라는 루터의 종교개혁 원리를 도착적으로 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도착된 응용이 '오직 한 책의 사람'이라든지 하는 신학적으로 우려스러운 구호와 운동 속에 울려 퍼진다. '오직 성서로만'은 성서만을 읽으라는 뜻이 전혀 아니다. 또한 성서는 한 권의 책도 아니다. 은유적으로 한 권으로 표현할 수 있다. 하지만 '한 책의 사람'이라는 식의 표현은 성서의 다양한 은혜와 다양한 표현과 다양한 형식을 자신이 이해하는 획일적 말씀과 은혜로 강제 통폐합하겠다는 신앙적 독재자의 발상이다.

일부 수준 미달의 목사들 중 하나님이 독재하셨다고까지 말하는 경우도 있다. '하나님의 정치'는 우리가 하나님의 통치를 표현할 방법이 없어서 사용하는 말이다. 하나님이 독재 혹은 민주 등 인간적 정치 수단을 사용하신다는 뜻이 아니다. 그런데도 인간의 부족한 정치 형식으로 환원한다는 점에서 '신성모독죄'를 범한다. 그 파렴치한 목사는 자신이 신성모독죄를 범한다는 의식조차 없다.

그렇다면 그는 더 이상 목사가 되어서는 안 되지 않는가. 성적으로 일반적 행위 양식을 따르지 못하는 이들을 정죄하고 마귀 삼는 데는 그렇게 열을 내는 교회의 지도력이, 정작 하나님의 말씀을 능멸하고 자신의 게으름과 사리사욕에 대해 신앙적 열정으로 궤변을 늘어놓는 부도덕함에 침묵하는 모순을 더 이상 반복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오직 성서로만'의 원리는 성서에 담긴 하나님 말씀의 지혜를 라틴어 성서를 고수하여 독점하던 중세의 성직자/평신도 위계질서에 금을 냈다. 성직자의 말씀 배달이라는 매개를 거치지 않고 교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읽으면 하나님의 은혜가 그 교인에게 직접 임할 수 있다는 혁명의 원리였다. 그래서 종교개혁 운동은 다른 한편으로 '교육개혁 운동'이었다.

당시 전체 독일 인구 중 독일어로 번역된 성서를 읽을 수 있는 사람들은 전체의 5% 미만이었다. 공립학교가 있어서 글을 가르치던 시절이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성서는 라틴어로 써 있었다. 심지어 루터가 비텐베르크성당 문에 걸었다는 종교개혁 95개조 반박문조차 라틴어로 써 있었다. 그걸 읽을 수 있는 사람은 전체 독일 인구 중 1% 미만의 신학자와 지성인뿐이었다. 그것을 종교개혁 운동으로 전개해 낼 수 있었던 것은 신학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들도 성서를 읽을 수 있도록 라틴어 성서를 독일어 성서로 번역해 낸 일과, 이렇게 번역된 성서를 읽을 수 있도록 교육개혁을 병행한 덕분이다.

즉 '오직 성서로만'이라는 종교개혁 원리는, 세상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말씀의 은혜를 범인들이 공감하고 체험할 수 있게 만든 것이었다. '오직 성서로만' 구호를 특정 말씀 배달부의 신비적 능력으로 포장하고, 그것을 하나님 은혜로 악용하는 사례와 정반대였던 것이다. 성서는 성서 스스로 하나님의 은혜를 읽는 자들에게 전할 능력이 있다. 그것은 성직자의 권위를 신성불가침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성직자가 말씀을 독점하는 권력이 되지 못하게 하는 원리이다.

'오직 은혜로만'이라는 종교개혁 원리는 다른 한편으로 '만인사제설'로 번역되기도 한다. 하나님의 은혜는 오직 성령의 은혜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지, 결코 사제의 매개를 통해 평신도들에게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따라서 평신도가 평범한 독일어로 성서를 신학적 설명 없이 읽더라도, 하나님의 은혜는 그 성서 독자에게 임하며, 그렇게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책을 읽고 은혜 받은 내용을 전한 것뿐"이라는 ㅎ 목사의 삐뚤어진 양심은 이 종교개혁 원리를 정반대로 뒤집고 있는 셈이다. 만일 본인이 받은 은혜가 있어서 그걸 전한다면, 그는 목회자로서의 지위와 힘을 사용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종교개혁 원리는 결코 남의 설교를 베껴서 전하는 행위를 용인하거나 묵인하지 않는다. 종교개혁 원리는 도리어 그러한 비리를 범하는 목회자에게 묻는다.

"네가 목사인 것은 무엇을 통해서인가. 하나님의 은혜가 하나님 말씀을 통해서 직접 작용한다면, 성서를 자국어로 읽는 것으로 하나님 말씀의 힘이 주체적으로 신자에게 작용한다면, 개신교회 목사는 무슨 일을 위해 존재하는 것인가."

즉 '개신교회의 설교는 무엇을 위한 것인가' 묻지 않을 수 없다. 목회자는 은혜를 선별해서, 교인들에게 나누어 줄 '능력'을 갖고 있지 않다. 하나님 은혜는 오직 하나님의 성령이 직접 임하셔서 교인들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다. 그렇다면 목회자의 설교는 무엇을 위한 것인가.

종교개혁 이후,
설교는 무엇을 위한 것인가

설교는 당연히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모인 회중들의 그리스도 사건을 위한 것이다. 설교가 긴 예전의 일부로 들어가 있는 가톨릭교회와 달리 개신교회는 설교를 예배의 중심에 놓는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이 수행하는 예전보다 중심에 놓으려는 종교개혁가들의 의도를 담고 있다. 그만큼 종교개혁가들에게 설교는 중요한 것이었다.

그런데 거기서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은 중세 신부들이 미사에서 선포하던 은혜의 전달 그 이상의 의미가 있어야만 했다. 만일 중세 미사를 생략한 축약 버전이 개신교 예배였다면, 종교개혁은 큰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라틴어로 말씀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회중이 알아듣고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하나님 말씀을 풀어서 설명하고 전달하면서, 개신교 예배의 설교는 하나님 말씀이 예배를 통해 '사건화'하는 것이다. 그들의 인생을 바꾸는 사건 말이다.

이러한 말씀의 사건화를 맡은 이들은 결코 무지하고 맹목적인 이들이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 말씀을 끊임없이 성찰하고 묵상할 능력을 갖춘 동시에, 회중들이 살아가는 세계의 일들을 말씀과 견주어 사건 속에 엮어 내면서, 시대를 향한 그리고 회중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을 풀어 줄 수 있는 최소한의 지적 훈련을 거친 사람이어야 하는 것이다. 오늘날 목회자를 신학 교육을 통해서 훈련하는 이유이다. 성경 암송과 신학 교육을 혼동하는 작금의 한국교회 현실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것이다.

오늘날 신학교를 다니는 신학생들의 목회 훈련은 총체적으로 잘못되어 있다. 그들은 이 개신교적 말씀의 사건화를 위한 기초 소양과 지적 훈련을 받는 대신 교회 프로그램과 교회학교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행사 진행자로 전락했다. 교회학교 운영자와 교회 특별 행사 진행자로서의 훈련만을 집중적으로 받은 이들이 후일 목회자가 되었을 때 겪는 가장 곤혹스런 일이 바로 설교를 만들어 내는 일이다.

설교란 무엇인가. 그들은 여기에 대하여 고민이 없다. 교회학교 일을 할 때 프로그램을 만들 듯이, 인터넷 여기저기에서 참고해 짜깁기하거나(사실 짜깁기를 하는 경우는 그래도 양심적이다) 그마저 귀찮으면 베끼는 것이다. 그러면서 "좋은 말씀을 은혜롭게 나눈다"는 말을 철면피처럼 내뱉는다. 그렇게 여기저기 널린 말씀들을 짜깁기하거나 베끼는 것이 설교인가. 그렇다면 특별히 인터넷 시대, 이렇게 정보를 다양하고 자유롭게 찾고 공유하는 것이 쉬운 시대에 예배 시간을 통해 설교를 나눌 이유가 없다. 그냥 유튜브 설교 영상을 찾아 공유를 걸면 그만이다. 담임목사직을 그 설교 영상 속 설교자에게 넘겨준다는 것을 전제로 말이다.

시대를 교육하는 '설교'

설교자에게 지적 소양이 요구되는 것은, 설교자의 말씀은 그냥 전달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설교자의 말씀에 시대를 교육하고 변혁해 나가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종교개혁기가 시작될 무렵, 유럽은 공립학교 시스템이 갖추지 못한 상황이었다. 가톨릭교회는 라틴어로 미사를 집전하고 있었다. 하나님 말씀을 듣고 이해할 기회가 회중에게는 직접적으로 주어져 있지 않았던 것이다. 속된 말로 평신도 우민화 정책을 가톨릭교회가 시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말씀을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을 사제들이 독점하여 사제의 권위에 복종하도록 강요한 셈이다.

종교개혁 500주년이 지난 오늘날 한국교회는 가톨릭교회의 부끄러운 역사를 반복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목회자가 하는 일에 질문하거나 토를 달면 안 된다는 권위의 남용을 자행하면서 말이다. 종교개혁기 말씀은 가톨릭교회의 평신도 우민화 정책에 정면으로 맞서,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수준으로 하나님 말씀과 목회자 설교를 전하면서, 사람들의 생각을 열어 나갔다. 이 설교는 당시 사람들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교육이었고, 이를 통해 사람들은 생각과 교양을 넓혀 나갈 수 있었다.

이미 언급했던 것처럼, 공교육 제도가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모국어인 독일어 성서조차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전체 독일 인구의 5% 정도였다. 그런데 독일어 성서는 불티나게 팔려 나갔다. 대부분 읽지도 못하면서 사 간 것이다. 왜? 집 안 책장 장식용으로? 아니다. 사람들은 그 성서를 들고 마을 광장으로 나아갔다. 거기서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에게 부탁해 성서를 낭독하도록 하였다. 유럽 낭독 문화의 시작이자, 유럽이 문맹 사회를 벗어나기 시작하고 민주주의의 대한 배아적인 의식을 싹 틔우는 계기가 되었다. 따라서 개신교 설교와 성서 번역은 가톨릭교회와 사제들에게는 가장 위험한 행위였던 것이다.

이 점에서 당시 개신교회와 가톨릭교회는 절대로 화목할 수 없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들의 설교는 마치 하나님 말씀이 오직 목사를 통해서만 나누어질 수 있다는 듯이, 좋은 말씀을 선별하는 능력이 목사에게 있어서 그 좋은 말씀을 가져다 쓰는 일은 잘못이 아니라는 식의 궤변이 난무한다. 종교개혁자들이 가슴을 칠 일이다.

지금 우리 시대 대한민국은 대학진학률이 85%를 왔다 갔다 한다. 100%가 아닌 것은 자발적으로 대학을 안 가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을 제외하면, 거의 모두가 대학을 진학한다. 즉 대한민국 일반 사람들은 이제 거의 모두가 지성인이라는 것이다. 1980년대 중반만 하더라도 고등학교 졸업생의 30% 정도가 대학을 진학하는 수준이었다면, 21세기 젊은이들은 거의 모두 대학을 간다. 교회의 설교가 사람들의 교양 교육을 감당하던 시절은 지나갔다. 교회 교육이 일반 교육의 일부를 맡아 담당하던 시절도 공교육 체제가 자리 잡으면서 지나갔다.

그렇다면 교육받은 지성인들이 맡은 시대에 설교는 무엇인가. 지식 전달은 아닐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일부 개신교 목회자들의 아전인수격 도착이 또 시작된다. 그렇기 때문에 지식이 아니라 말씀이라는 식의 아전인수격 주장 말이다. 이렇게 교양 수준이 높아진 시대에 사람들의 지적 수준을 망각하고, 그들이 납득할 수 없는 수준 이하의 설교로 말씀을 전달할 수 있을까. 오늘날 교회가 왜 사회로부터 외면을 받고, 노령화가 진행되어 한국교회 안에 젊은 세대가 없다는 한탄을 하게 된 것일까. 우리가 전하는 설교의 말씀이 젊은 세대와 한국 사회에 더 이상 사건적으로 울려지는 힘을 상실했기 때문이 아닐까.

설교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참석한 회중들에게 사건화하는 것이다. 사건을 일으키시는 분은 성령이시지만, 목회자의 설교는 회중들에게 향한 하나님 말씀을 분별하는 일을 포함한다. 이는 현재 회중들이 처한 삶의 위기와 좌절과 방황을 읽고 하나님 말씀을 통해 대안과 희망을 말씀 속에서 선포하는 일을 포함한다. 설교란 고정불변의 텍스트가 아니라는 말이다. 고정불변 텍스트는 적어도 성서의 말씀으로 충분하다. 그 쓰인 말씀이 회중들의 삶과 세계에 적합할 수 있도록 성령의 해석을 시도하는 설교자들은 어느 철학자의 표현대로 '해석자들의 공동체'를 구성한다.

초대교회, 그러니까 바울의 공동체는 바로 그런 해석자들의 공동체를 구성하고 있었고, 그를 통해 황제를 정점으로 신분제가 공고히 자리 잡고 있던 위계질서의 제국 사회에 '하나님의 가족 안에서 (귀족과 자유인과 노예가 따로 없고, 남녀가 따로 없는) 한 형제 자매의 공동체'를 실현해 나갔다. 그들은 이 평등한 공동체의 실현을 위해 교회 바깥으로 나갔던 것이 아니라, 예배 안에서 끊임없이 그 평등 공동체를 실현했다.

남녀가 평등하다는 생각이 정치적으로 본격적으로 표현되기 시작한 것이 19세기 말일 것이다. 초대교회의 생각이 구체적으로 실현되기 시작하는 데까지 거의 1900년이 걸린 것이다. 그렇게 긴 시간 동안 교회 공동체는 예배를 했다. 서로를 형제와 자매로 부르면서 말이다. 그것은 시대에 순응하는 정신이 아니었고, 시대를 변혁하고 진보시키겠다는 발상도 아니었다.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을 어떻게 해석하여 회중들에게 전하고 표현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었다.

내가 말씀을 전할 회중들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인가. 사족을 한마디 달자. 공공장소에서 남이 전한 말씀을 그대로 베껴 전하는 것은 우리 시대의 상식으로 '지적재산권 침해'이다. 말씀은 누군가의 지적재산이 아니라고? 그럼 당신이 베껴서 전한 말씀이 주는 감동과 은혜를 당신은 어떻게 악용하고 있는가. 그 은혜와 감동을 가로채서 자신의 것으로 삼아, 자신이 갖는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지위를 정당화하고 강화하는 데 남용하고 있지 않은가. 이 시대 상식에도 미치지 못하는 당신의 윤리 의식이 바로 당신이 이 시대에 부적합한 목회자임을 증명하는 것 아닌가.

그래도 교회는 부흥한다고? 그런 당신을 정당하게 비판해 내지 못하는 평신도 지도력이 오늘날 한국교회 추락을 가중하고 있음을 외면하는가. 21세기 대한민국 사회에서 개신교회가 우물 안 개구리로 추락하고 있는 것은 소위 말해서 동성애자들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 자신 안의 부도덕과 부패에 침묵하고 외면하는 우리 교회 내 기독교인들의 동조 때문이다. 예에는 예하고, 아니오에는 아니오라고 말하는 것이 상식이자 은혜이다. 아닐 것을 '예'라고 해 주는 동지 의식이 우리를 '부패한 개신교 공동체'라는 오명으로 물귀신처럼 잡아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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