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앤조이-강동석 기자]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문제는 2001년 2월 15일 <한겨레21> 보도로 이슈화했다. 병역법 위반으로 구속된 여호와의증인 사연을 다룬 기사였다. 문제가 이슈화하자, 두 차례 기고(1999년 <복음과상황> 7월호, 2001년 7월 25일 <한겨레21>)로 이를 다뤘던 김두식 교수(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는 2002년 기독교 평화주의 관점에서 병역거부를 조명한 <칼을 쳐서 보습을>(뉴스앤조이)을 내놓았다. <칼을 쳐서 보습을>에서 상당 내용을 보강해 2007년 출간한 책이 <평화의 얼굴 – 총을 들지 않을 자유와 양심의 명령>(교양인)이다.

1950년부터 현재까지 입영 및 집총 거부로 2만 명에 이르는 사람이 처벌을 받았다. 이 중 절대다수가 주요 교단에서 이단으로 규정한 여호와의증인이었던 탓에 개신교계는 병역거부가 사회적 의제로 떠오를 때마다 반대 입장을 표명해 왔다.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논의가 이어지던 2001년 여름, 한국기독교총연합회는 "대체 복무는 이단 종교에 대한 특혜일 뿐 아니라 안보를 위협하는 요인"이라는 내용의 성명을 냈다. 병역거부를 이단 문제와 결부해서 본 것이다.

2018년에도 개신교계 입장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5월 15일 '세계병역거부자의날'에는, 6월 28일 헌법재판소 판단을 앞두고 한국기독교연합이 성명을 냈다. 성명에는 "헌법재판소가 병역거부자들의 손을 들어 준다면 대한민국 존립은 심각한 위험에 빠질 것이다"는 내용이 담겼다. 여호와의증인 이야기도 빠지지 않았다. 헌법재판소 결정 이후 <국민일보>는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를 비판하는 광고를 자사 지면에 실어 달라는 공문을 교회들에 발송하기도 했다.

헌법재판소가 6월 28일 대체복무제 없는 현행 병역법 5조 1항에 대해 '헌법 불합치'를 결정하면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문제는 사회적으로 전환점에 섰다. 헌법재판소는 2019년 12월 31일까지 대체복무제를 포함하는 내용으로 병역법을 개정해야 한다고 판시했다. 대법원은 8월 30일, 이 문제를 다루는 전원합의체 공개 변론을 진행할 예정이다.

<평화의 얼굴 - 총을 들지 않을 자유와 양심의 명령> / 김두식 지음 / 교양인 펴냄 / 356쪽 / 1만 4000원. 뉴스앤조이 경소영

이단이나 하는 일로 치부하기에는 기독교의 병역거부 역사가 짧지 않다. <평화의 얼굴>은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문제를 다루면서 평화의 길을 이야기하고 있다. 저자는 초대교회부터 현재까지 내려온 기독교 평화주의 전통의 다양한 결을 조명한다. △그럼 군 복무한 우리는 비양심적이란 말입니까 △만약 누가 네 여동생을 강간하고 죽이려 한다면 △병역거부는 이단들이나 하는 짓 아닙니까 등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를 향한 물음들에 답하는 것으로 시작해, 병역거부의 역사 및 사례를 살핀다.

군법무관으로 일하면서 마주했던 병역거부자들 이야기로 운을 뗀 저자는 용어 문제를 먼저 짚는다. 흔히 쓰는 '양심적 병역거부'라는 용어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양심적 병역거부라고 하면, 많은 이가 "병역의무를 진 사람들은 '비양심적 병역 이행'을 한 셈이냐"고 따지고 든다. 저자는 이런 반박이 정당하지 않다고 말한다. 양심적 병역거부는 'conscientious objection'이라는 영어 표현의 번역어다. 양심의 형용사형을 번역하다 보니 '양심적'이라는 표현을 쓰게 된 것이다.

저자는 대체어로 '양심에 따른 거부'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이때의 양심은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마음의 소리를 의미한다. 스스로 내면에 있는 거울에 자신을 비춰 봤을 때 떳떳한가 떳떳하지 않은가 문제다. 자기 양심에 따라 병역을 거부하는 것과 자기 양심에 따라 병역을 이행하는 것은 모순이 아니다. 양심과 크게 관련 없이 병역의무를 지는 사람들도 있다. 별다른 고민 없이 병역을 선택하는 경우다. 이 경우에는 '양심에 따른'이라는 표현이 붙을 수 없다.

초대교회부터 내려온
기독교 평화주의, 병역거부의 역사

저자는 평화를 진지하게 생각한다면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고민할 수밖에 없다고 이야기한다. 기독교인 입장에서는 더욱 그렇다. 성경에서 말하는 평화는 '샬롬'이다. 샬롬은 내면의 평안, 이웃과의 화평, 전쟁 없는 평화, 가난한 사람을 위한 사회복지 등을 포괄한다. 제국의 폭력으로 유지되는 로마의 평화와 결을 달리한다. 병역거부를 이야기할 때, 산상수훈과 살인하지 말라는 6계명 등 명백한 근거가 성경에 많이 있다.

"여러분과 저, 우리 모두는 폭력이 일상화된 사회, 전쟁이 분쟁 해결의 중요한 수단으로 받아들여지는 세계 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 사실은 앞으로도 변함이 없을 겁니다. 이런 세계에 살면서 평화를 모색하는 사람은 누구라도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고민할 수밖에 없습니다. 말뿐이 아닌 평화의 실천을 고민하다 보면, 어느새 병역거부자의 입장에서 문제를 바라보기 시작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제가 변한 것처럼 여러분도 이 변화를 피할 수 없을 겁니다. 그런 고민을 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계속 늘다 보면 언젠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드는' 그런 날도 오겠지요." (35쪽)

"평화주의자들 대부분은 복음서를 혼자 읽는 과정에서 평화주의 신념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누구의 가르침도 필요 없었습니다. 성경 그 자체로 충분했습니다. 기독교 평화주의의 기초는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자신의 가르침을 온몸으로 실천한 그의 삶 자체입니다." (110~111쪽)

기원후 170년까지, 기독교인이 로마제국 군대에 복무했다는 기록은 없다고 한다. 로마 군대는 전쟁에 나가거나 중대한 결정을 할 때 제사를 올리고 점을 쳤기 때문에, 당시 군 복무에는 우상숭배 문제도 얽혀 있었다. 우상숭배·배교·살인 등을 저지른 사람은 성찬식에 참여할 수 없었다. 테르툴리아누스, 오리게네스, 키프리아누스 등 초기 기독교 저술가들은 전쟁에서 사람을 죽이는 일을 만장일치로 비난했다. 기록에 따르면, 최초로 병역을 거부해 순교한 사람은 막시밀리아누스다. 295년의 일로, 그는 우상숭배 문제가 아닌 산상수훈을 병역거부의 이유로 들었다.

기독교 평화주의를 언급할 때 빠지지 않는 교파는 '재세례파'다. 재세례파는 교회사 골목골목에서 만날 수 있다. 모라비아교회, 후터파, 메노나이트, 아미시 등이 재세례파에 속한다. 저자에 따르면, 16세기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다른 사람을 죽일 의지'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기꺼이 죽을 의지'로 충만한 시대였다. 가톨릭교도가 개신교도를 죽이고, 개신교도가 가톨릭교도를 죽이기도 했으며, 가톨릭교도와 개신교도가 재세례파를 죽이기도 했다. 물론 초기 재세례파 중에서도 손에 피를 묻힌 이들이 있었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의 경우, 재세례파는 기독교 평화주의를 보여 줬다. 교회가 국가권력과 분리돼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교회 관습보다 성경을 우선하며 평화를 강조했던 이들이었다.

동유럽 쪽 몰로칸, 두호보르파 등의 평화주의 교파도 사례로 언급한다. 19세기 후반에 두호보르파는 사냥을 위해 갖고 있던 무기들까지 불태우며 병역을 거부해 300명 정도가 투옥됐다. 1899년 이들 중 상당수가 기독교 평화주의자 톨스토이 도움을 받아 캐나다로 이주할 수 있었다. 일본 기독교인 중에서 야베 키요시, 가가와 도요히코 같은 평화주의자도 있었다.

일본 무교회주의자 우치무라 간조도 마찬가지였는데, 그는 징병을 거부하면 겁쟁이로 보일 수 있다며 군대에 가서 자기 생명을 희생하는 것으로 모범을 보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스스로를 퀘이커 교도로 칭한 함석헌도 대표적 평화주의자로, 1957년 신학생 홍명순이 함석헌의 영향으로 병역을 거부했다. 한국교회에 잘 알려진 복음주의 거두 존 스토트와 예수원 설립자 대천덕 신부가 각각 병역거부와 대체 복무를 선택한 이야기와, 반전운동을 했던 마틴 루터 킹의 사례도 책에서 비중 있게 소개된다.

'평화주의'와 '정당한 전쟁론',
둘 사이의 벽은 두텁지 않다

초대교회가 병역을 거부했다면, 교회가 전쟁이 가능하다고 주장하기 시작한 시점은 언제일까. 4세기 콘스탄티누스의 기독교 공인 이후 교회가 국가권력의 위치에 오르면서, 정당한 전쟁도 있을 수 있으며 모든 전쟁이 악한 것은 아니라는 주장이 생겨났다. 아우구스티누스, 토마스 아퀴나스 등이 정당한 전쟁론을 주장했다. 이때의 전쟁도 불가피한 차선책으로 제시된다. 적과의 약속을 반드시 지키고 비전투원 보호가 보장되며 학살‧약탈‧방화 등이 금지된다. 성직자는 전쟁에 참여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전쟁과 개인적 폭력을 구분하면서 폭력은 정당화할 수 없다고 했다.

저자는 기독교 입장에서 전쟁을 옹호할 경우에는 '정당한 전쟁론'을 주장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러나 정당한 전쟁론에 서 있는 이들도 상당 부분 기독교 평화주의자들과 입장을 같이한다고 본다. 평화주의와 정당한 전쟁론 사이의 벽은 두텁지 않다는 것이다. 정당한 전쟁론은 무죄한 죽음을 금지하기 때문에, 무죄한 죽음이 발생하는 어떤 경우에도 전쟁을 정당화하기 어렵다고 한다. 현대전은 대량 살상 무기가 개입될 수밖에 없어서 이미 무죄한 죽음이 전제돼 있다. 저자는, 현대전에서의 정당한 전쟁론은 '평화를 위한 전쟁', '착한 살인자',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독재자'라는 표현처럼 모순적이라고 지적한다.

기독교는 역사적으로 '거룩한 전쟁'이라는 개념을 만들어 내기도 했는데, 그 결과물로 십자군 전쟁이 있었다. 기독교가 합리화한 전쟁들은 정당하지 않았다. 그 이면에는 항상 종교적 열정, 정치적·경제적 야욕이 강하게 깔려 있었다. 4세기부터 21세기까지 일어난 전쟁을 살펴보면, 양쪽 당사자가 기독교 국가인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점은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 준다.

현대전에서 무죄한 죽음을 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전쟁에 참여하지 않는 것은 평화를 실천하는 가장 유력한 방법 중 하나다.

저자가 다루는 질문 중 '만약 누가 네 여동생을 강간하고 죽이려 한다면'은 병역거부자가 실제로 군사재판을 받을 때 많이 받았던 것이다.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이야기할 때, 다른 가능성을 배제하고 강도를 죽이거나 여동생이 죽는 두 가지 가능성만 남겨 놓은 채로 질문하는 경우가 많다. 저자는 이런 질문이 대답할 필요가 없는 덫이라고 이야기한다.

이 질문은 병역을 거부하는 이들의 다양한 주장을 담아내지 못한다. 개인적 정당방위는 인정하나 사회적·국가적 폭력을 비롯해 전쟁 자체를 거부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특정한 전쟁만 거부하는 이도 있다. 경제적 효용성을 들어 전쟁에 반대하기도 한다. 이외에도 다양한 견해가 존재한다. 미국 정치가 윌리엄 J. 브라이언은 톨스토이에게 똑같은 질문을 던진 적이 있는데, 톨스토이는 이렇게 답했다.

"지난 75년을 살아오는 동안 나는 이 가정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상상 속의 강도가 아이를 죽이려고 하는 장면을 단 한 번도 직접 목격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완벽한 살인 면허를 가진 수백만 명의 강도들이 전쟁 속에서 살인하는 것은 수도 없이 보아 왔습니다." (72쪽)

미국‧독일‧프랑스‧러시아‧그리스‧쿠바‧대만 등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인정하고 대체복무제를 도입한 국가들 사례도 검토한다. 남북 분단이라는 특수 상황을 이야기하면서 병역거부자를 비판하는 이들도 있는데, 역사적으로 전쟁 중인데도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인정한 국가는 적지 않다.

남북 분단 상황이기 때문에,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인정이나 대체복무제 도입이 유의미할 수도 있다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평화 체제로 가기 위한 길일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들을 모두 감옥에 넣자고 하는 주장에 대해 "우리가 지켜야 할 가치를 지키기 위해 그 가치 자체를 포기하자고 주장하는 모순된 논리"(316쪽)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인정한 많은 나라들은 전쟁이 실제로 진행 중인 상황에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인정했습니다. 미국은 독립전쟁 때부터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인정하기 시작해서, 남북전쟁, 제1차 세계대전, 제2차 세계대전, 베트남전을 거치는 동안 그 범위를 점차 확대해 왔습니다. 영국이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인정한 1916년도 제1차 세계대전의 한복판이었습니다. 프랑스가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인정한 것은 알제리 전쟁(1954~1962) 직후의 일입니다. 이스라엘은 우리보다 훨씬 심각한 전쟁 상황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는 나라입니다. 최근에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인정한 대만도 우리보다 별로 나을 것 없는 형편입니다. 따라서 우리나라만 특별하므로, 민간 대체 복무를 도입할 수 없다는 논리는 역사적으로 이미 설득력을 잃은 것입니다." (317쪽)

어떻게 평화를 고민할 것인가

그렇다고 해서 저자가 병역을 이행하는 이들을 존중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들이 병역을 이행하는 사람보다 훨씬 길게 대체 복무를 하도록 한다든지, 가능성을 열어 놓고 여론을 설득해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병역을 이행하면서 평화에 참여하는 길도 있다고 말한다. 저자는, 병역의무를 지고 있는 청년들 앞에 놓인 길을 다섯 가지로 정리한다. △병역거부에 참여하는 평화주의자의 길 △군대에 가는 평화주의자의 길 △진짜 정당한 전쟁론자의 길 △가짜 정당한 전쟁론자의 길 △남들 사는 대로 사는 길이다.

병역을 이행하면서도 평화를 고민하는 이들이 택할 선택지는 두 번째 길과 세 번째 길이겠다. 두 번째는, 병역의무가 있기에 병역에는 참여하되 전쟁이 났을 때는 참전하지 않겠다고 각오하는 경우다. 조금 달리 볼 수도 있겠지만, 과거 역사를 보면 전쟁에 나갔지만 평화주의 신념에 따라 일부러 적을 빗맞추는 경우도 있었다.

세 번째는, 전쟁이 났을 때 '이것이 과연 정당한 전쟁인가' 먼저 고민하는 길이다. 선택적 병역거부라고 볼 수 있는데, 저자는 이 선택이 더 어려울 수도 있다고 말한다. 해당 전쟁이 정당한 것인지 검토하는 일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북한군이 쳐들어오면 방어는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반문하는 이들(혹시 있을지 모르는 일방적인 침공 대비)도 최소한은 세 번째일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평화의 얼굴>은 복잡다단한 평화의 길을 인식할 수 있도록 돕는다. 많은 경우, 죽고 죽이는 것 말고는 다른 선택지가 없다고 생각하고 자포자기한다. 저자는 이런 생각이 영화나 드라마 등에 나오는 '구원하는 폭력의 신화'의 산물이라고 지적한다. 이 신화는 절대악을 상정하고 있다. '구원하는 폭력의 신화'로 가득한 세상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같은 '사랑을 통한 구원' 이야기가 자리 잡을 수 없다.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선택하는 이들의 고민을 약자들의 자기 정당화라고 보는 경우가 적지 않다. '있을 수 없는 기적'이라고 말하면서, 평화의 가능성을 몰아내고 있지는 않은지 되돌아볼 일이다.

"추상적으로 평화를 이야기하는 것은 너무나 쉽습니다. 고상하게 평화를 이야기하면 모든 사람으로부터 존경받을 수 있습니다. 차라리 자기가 말하는 평화를 제대로 모르는 것이 속 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평화를 실천하기 시작하는 순간, 여러분은 모든 것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구체적인 전쟁을 거명하며 반대하기 시작하면 모든 사람이 여러분에게서 등을 돌릴 것입니다. 위선적인 세상은 진심으로 평화를 실천하려는 사람을 결코 용납하지 않습니다." (2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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