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든 싸움을 이어 가고 계신 쌍용자동차 노동자 여러분, 또한 연대라는 아름다운 이름으로 함께 모인 여러분 가운데 우리 주님의 평화가 임하기를 빕니다. 김주중 동지의 죽음 앞에서 도저히 평화를 빌 수 없지만, 그럼에도 꾸역꾸역 평화의 인사를 전합니다.

신자유주의 체제는 자꾸 사람들을 변두리로 밀어냅니다. 국가 기업은 민영화로, 정규직은 비정규직으로, 원청은 아웃소싱으로, 임차인들은 젠트리피케이션으로, 경영자의 잘못을 노동자의 해고로 해결하는 방식입니다. 사람을 고귀한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삼는 사회는 몰락의 벼랑 끝에 선 위험한 사회입니다. 저에게 '쌍용자동차' 하면 떠오르는 단어들은 렉스턴, 코란도, 티볼리가 아니라 '의자 놀이', '희망 고문'인데, 오늘 말씀과 절묘하게 교차합니다.

'베데스다 연못의 그리스도(Christ at the Pool of Bethesda)', 아르투스 올포트(Artus Wolffort) 작.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하루는 예수께서 '양의 문'이라 불리는 예루살렘 성문 옆에 위치한 베데스다라는 연못을 찾아가셨습니다. 거기에는 행각, 즉 임시로 지은 집 같은 구조물이 다섯 개가 있었고 시각장애인, 지체장애인, 뇌졸중 환자 등 많은 병자가 누워 있었습니다. 그들이 그곳에 누워 있는 이유는 내려오는 전설 때문이었습니다. 베데스다라는 연못에 가끔 천사들이 찾아와 물을 휘저어 놓는데, 누구든지 맨 먼저 들어가는 사람은 그 병이 어떤 병이어도 낫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믿기 힘든 황당한 얘기였지만 절박한 삶의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은 썩은 동아줄이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그 가운데 한 사람을 주목하셨습니다. 38년 된 병자입니다. 아마 거의 일생을 병마와 싸워야 했을 것이며, 이제 희망이라는 것을 찾아보기 힘든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묻습니다. "낫고 싶으냐", "예 물론이죠. 그렇지만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들어다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서 남들보다 먼저 못에 들어가기란 불가능합니다." 자신의 삶이 나아지기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일어나서 네 자리를 가지고 걸어가라." 그 사람은 곧 나아서 자리를 걷어 가지고 걸어갔습니다. 이것이 오늘 말씀입니다.

베데스다. 많은 중병에 걸린 사람이 모여 있는 이곳의 이름입니다. '베데스다'라는 지명의 뜻은 '자비의 집', '은혜의 집'입니다. 아마 그곳에서 병 고침이 일어나니까 자비의 집이며 은혜의 집이겠지요. 그렇지만 38년 된 병자를 비롯한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자비의 집'이 아니라 '절망의 집'이었고, '은혜의 집'이 아니라 '저주의 집'이었을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물이 동할 때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뿐이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물이 동한다면 누가 가장 먼저 들어갔을까요? 걷지 못하는 사람이나 몸을 추스를 수 없는 사람은 꿈도 못 꾸었을 것이고, 그나마 달릴 수 있는 사람이 가장 먼저 들어갔겠지요. 38년 동안 누워 지내야 했던 오늘 말씀의 주인공은 평생 가도 병을 고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베데스다는 대부분의 사람에게 자비의 집이 아니라 절망의 집이 되었습니다. 완전하게 희망 고문의 모습을 보여 주는 장소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베데스다는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과 같은 모습입니다. 물이 동할 때 가장 먼저 들어가는 것. 이것올 군대용어로 뭐라고 합니까? 선착순입니다. 선착순이 지배하는 사회가 자본주의 사회입니다. 남보다 먼저 가기 위해 스펙을 쌓고 경쟁해야 하고 때론 다른 사람을 짓밟으면서 앞서 나가야 합니다. 갑과 을의 관계도 모자라 을과 을이 서로 경쟁하게 만드는 것, 정규직과 정규직의 격차를 벌이는 것, 또 가진 사람과 못 가진 사람 간 양극화가 심해지는 것, 바로 선착순의 사회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아예 금수저와 흙수저로 나뉘어 출발선이 다른 것, 이것이 선착순이 지배하는 자본주의의 민낯입니다.

선착순의 질서가 지배하는 사회의 특징은 다른 사람과 공감하지 못하고 그들을 돌아볼 마음의 여유마저 앗아 가 버린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말씀처럼 38년 된 병자의 가장 큰 절망 중 하나는, 물이 동하더라도 누가 도와주기만 하면 경쟁에 참여하기라도 할 텐데 도와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아예 시도조차 하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선착순의 사회는 사람과 사람을 단절시킵니다. 다른 이들의 아픔에 공감하지 못하도록 만듭니다. '나만 잘살면 돼', '나만 아니면 돼' 식의 각자도생, 무한경쟁, 승자독식의 삭막한 세상을 만듭니다. 천사가 와서 가끔 물이 동하게 한다는 갓을 요즘말로 하면 이런 뜻 정도 되지 않을까요? "회사가 경영 정상화하면 복직시켜 줄게, 조금만 참아", "너희들도 열심히 하면 잘살 수 있다. 주어진 상황에서 참고 견디면 무기 계약직으로 전환해 줄게. 또 알아 정규직이 될 수도 있을지?", "청년들도 열정을 가지고 최저시급을 받고 참다 보면 좋은 날이 올 거야".

당시 예수께서 지금과 똑같은 질서로 유지되었던 베데스다 연못에서 38년 된, 도저히 가망 없고 도전도 할 수 없는 사람을 고쳐 주셨다는 것은, 지금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질서에 순응하지 말고 깨뜨리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38년 아파 온 사람을 고치시면서 "네 병이 나았다" 말씀하지 않으시고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이렇게 표현하셨을까요. 이 사람에게 이제 베데스다 연못가는 생활 터전이 되었습니다. 이미 자기 병이 고쳐질 것이라는 희망을 버린 지 오래지만 그곳을 떠날 수는 없었던 것은, 그곳이 익숙해졌고 다른 곳으로 가 봐야 별 볼 일 없다고 생각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신 의미는 무엇입니까. 예수께서는 그 사람의 병을 고쳐 주시기도 하지만, 그 사람에게 다른 세상을 꿈꾸도록 하신 것입니다. "다른 세상은 가능하다!"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예수님의 가르침 아닐까요.

전남병 목사가 7월 18일 대한문 앞에서 열린 고 김주중 씨 추모 기도회에서 설교하고 있다. 뉴스앤조이 최승현

선배 목사님 중 예전에 난지도에서 목회하시던 분이 계십니다. 난지도는 지금 월드컵 경기장이 들어선 장소가 되었지만 예전에는 서울의 모든 쓰레기가 모이는 장소였습니다. 그곳에서 쓰레기를 주워 연명하는 사람들과 함께 먹고 자고 생활하면서 목회하신 분이었습니다. 그분 말씀 가운데 인상적인 내용이 있습니다. 난지도에는 구로구의 쓰레기가 모이는 구역이 있는가 하면 압구정의 쓰레기가 모이는 구역이 있답니다. 압구정 쓰레기 더미에 사는 사람들은 행복해한답니다. 반면 구로구 쓰레기 더미에 사는 사람들은 불행해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압구정 쓰레기 더미에서는 아직 쓸 만한 물건이 나오기도 하고 재수 좋은 날에는 먹다 남은 고기도 나오고 그것을 구워서 먹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끔은 더 좋은 쓰레기 더미로 가려고 싸움도 일어난답니다.

여러분, 근본적인 해결책은 무엇입니까. 그 쓰레기 더미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다른 세상을 꿈꾸는 것입니다. 돈이 최고인 자본주의는 이 세상을 냄새나는 쓰레기 더미처럼 만들어 버립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압구정의 쓰레기 더미에서 사는 것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벗어나야 하고 치워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부디 하나님께서 함께하셔서 언제 끝날 지 모른다는 생각과, 과연 이길 수 있을까 밀려드는 회의에 맞서 서로 격려하면서 끝까지 나가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정의로운 평화를 드러내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다른 세상은 가능합니다.

전남병 / 선한이웃교회 담임목사, 평화교회연구소장

위 설교문은 7월 18일 대한문에서 열린 '고 김주중 조합원 추모 기도회'에서 전남병 목사가 요한복음 5장 2-9절을 본문 삼아 설교한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전문입니다. -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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