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앤조이-강동석 기자] 일본에서 기독교대한감리회 파송 선교사로 목회와 연구 활동을 병행해 온 홍이표 목사가 7월부터 <뉴스앤조이>에서 연재를 시작한다. 홍이표 목사는 일본인을 대상으로 10년 가까이 목회를 해 왔다. 이번 연재에서는, 일본 신앙인들과 만나면서 얻게 된 성찰들을 에세이 형식으로 풀어낼 계획이다. 일본 기독교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깨고 한국교회를 돌아보는 내용으로 꾸려진다.

홍이표 목사는 연세대학교에서 신학과 법학을 전공했고, 동 대학원에서 신학 석사와 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교토대학교에서 문학 석사 학위를 받고 사상문화학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일본기독교단 효고교구兵庫教区 고요엔교회甲陽園教会에서 일본인 목사인 아내와 7년간 공동 목회를 했고, 교토교구京都教区 탄고미야즈교회丹後宮津教会에서 2년간 주임목사로 사역했다. 번역서로는 <사상으로서의 편집자>(한울), <신학을 다시 묻다>(비아), <가가와 도요히코 평전>(신앙과지성사, 공역) 등이 있다.

<뉴스앤조이>는 일본에 있는 홍이표 목사와 서면으로 인터뷰를 진행했다. 일본에서 어떤 활동을 하고 있는지, 일본 기독교 상황은 어떤지, 한국교회가 왜 일본 기독교에 주목해야 하는지 등을 들었다. 홍 목사는 일본 교회를 오해하는 한국 기독교인이 적지 않다고 했다. 그는 신교와 구교를 합쳐도 전체 인구의 1%가 안 되지만, 기독교인이 희귀한 일본 사회에서 꿋꿋하게 믿음을 지키는 교인들 모습을 통해 옹골차고 진지한 신앙인의 자세를 배울 수 있었다고 했다.

홍이표 목사는 올해 3월 <신학을 다시 묻다> 저자 후카이 토모아키 교수 통역자로 한국을 방문했다. 뉴스앤조이 이용필

- 일본 선교사로 활동한 지 10년이 됐다. 어떤 계기로 일본에 선교를 가게 됐나.

20년 전인 1998년, 한국에 교환학생으로 방문한 지금의 일본인 아내를 처음 만났다. 일본의 미국 남감리회 계통 미션스쿨 간세이가쿠인대학關西學院大學 신학부에 다녔던 아내는, 이후 일본기독교단 목사가 됐다(일본기독교단은 1941년 모든 개신교 교파가 하나로 통합돼 만들어진 교단이다. 패전 이후 장로교, 감리회, 회중교회, 침례교회 일부 등이 합쳐져 그대로 유지해 온 연합 단일 교단이다). 한일 목사 부부로서 처음에는 한국에서 생활했지만, 목회자가 부족한 일본에서 함께 활동하기로 의견을 모아 감리회 선교사로 일본에 파송받아 활동해 왔다.

개인적으로는 대학원에서 '교회사'를 전공했다. 세부적으로 '한국 및 아시아 교회사', 특히 '한일 기독교 관계사'를 연구해 왔다. 한국 기독교 역사를 보면, 한발 앞선 일본의 근대화 및 기독교 선교 역사가 중요한 기반 혹은 모델이 됐다. 1894년 청일전쟁 이후 1945년 해방될 때까지 일본 제국주의 침탈의 역사는 한국 기독교사의 핵심적인 배경이기도 하다.

일본에서 직접 일본 그리스도인들과 만나고 호흡하면서, 그 현장을 직접 경험해야 할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부부의 인연은 물론이고, 학문적 측면에서도 일본은 내가 피해 갈 수 없는 숙명적인 공간이 아니었나 싶다. 2008년부터 일본 생활을 시작해 어느덧 10년이 됐다. 앞으로의 시간이 어떻게 채워져 갈지 나 자신도 궁금하다.

- 현재 일본에서 어떤 활동을 하고 있나.

일본에 있는 많은 한국인 선교사는 '한인 교회'에서 활동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경우, '일본'이라는 공간에 놓여 있지만 일본인 크리스천과의 만남은 제한적인 측면이 있다. 나는 아내가 일본 개신교회를 대표하는 일본기독교단 목사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일본인으로만 구성된 교회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처음 7년은 일본기독교단 효고교구 고요엔교회에서 부부가 공동 목회를 했고, 지난해까지 2년간은 교토교구 탄고미야즈교회라는 시골 교회에서 주임목사로 활동했다. 교인 대부분이 나를 통해 처음으로 한국인을 구체적으로 접했다고 고백했다. 최근까지 몸담았던 교토 북부에 있는 교회는 부임 당시 유지가 힘들 정도로 교세가 기울어져 있었다. 하지만 새로 부임한 한국인 교역자와 교우들이 의기투합한 결과, 꺼져 가던 불빛을 되살려 밝고 건강한 교회로 회복됐다. 2년 만에 사임하게 됐지만, 후임자도 한국인 목회자가 부임했고 성실히 신앙생활을 이어 가고 있다.

아내가 작년부터 감리회 계통 미션스쿨 나고야가쿠인대학名古屋學院大學 교목으로 부임하면서 분주해진 탓에, 아직 어린 두 아이와 가사를 챙겨 가며 미뤄 왔던 번역 작업과 연구 활동에 집중하고 있다. 올해 2월에는 출판사 비아에서 후카이 토모아키의 <신학을 다시 묻다 – 사회사를 통해 본 신학의 기능과 의미>를, 신앙과지성사에서 로버트 실젠의 <가가와 도요히코 평전 - 사랑과 사회정의의 사도>를 번역 출판하기도 했다.

앞으로도 일본에서 발표된 귀중한 기독교 관련 서적을 한국에 소개하는 일을 꾸준히 이어 가려 한다. 일본 기독교와 일본 신학 사상에 거의 관심이 없고 이해가 부족한 한국 교계에, 일본 기독교 관련 서적을 번역 소개하는 것도 내가 일본으로 보냄 받은 중요한 사명이라고 여기고 있다.

홍이표 목사. 그가 최근까지 목회했던 탄고미야즈교회 앞바다에 있는 아마노하시다테가 보인다. 사진 제공 홍이표

- 한국 기독교는 일본 기독교와 비교했을 때 어떤가. 특별히 차이를 느끼는 부분이 있나.

일본의 기독교 교세는 신교와 구교를 합쳐서 보통 1% 정도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최근 10년간 급속한 고령화와 함께 교세가 현저히 감소해 0.7~0.8%라고 말하는 분이 많다. 지난봄 서울을 방문한 토요에이와조가쿠인대학교東洋英和女学院大学 후카이 토모아키深井智朗 교수는 정확히 말하면 '0.4%'라고 단언해 어려운 상황을 재확인해 줬다.

일본 기독교계의 외형적·양적 측면만 바라보며, 한국 크리스천들은 일본 기독교를 그저 측은하게 바라볼 뿐 그들에게서 배울 점은 없을 것이라고 쉬이 단정 짓고는 한다. 심지어 한심스럽다는 표정을 짓는 분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런 시선은 일본의 신학으로까지 이어지기 십상이다. 기독교 불모지에서 어떤 제대로 된 신학이 나올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종교개혁 500년을 맞이한 지난해, 한국에서는 유독 마르틴 루터의 책이 많이 나왔다고 한다. 또 한 가지 눈에 띈 현상은 칼 바르트 책도 많이 소개됐다는 점이다. 마르틴 루터는 시기적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한국 그리스도인은 어째서 칼 바르트 책을 다시 읽게 된 것일까. 다시 읽는 것이 아니라 비로소 처음 제대로 읽어 보는 것일지도 모른다.

불과 수십 년 전 상황을 상기해 보면, 해방 이전 일본에서 칼 바르트 책이 20~30권 번역 출판되는 동안 한국에서는 단 한 권도 소개되지 않았다. 1950년대에만 일본에서 30여 권의 바르트 책이 출판됐다. 한국은 4권에 불과했다. 그마저도 일본에 번역된 것을 한글로 옮긴 수준이었다. 이 사례만 비교해도 반세기 이전 일본 신학과 한국 신학은 그 비교가 성립되지 않을 만큼 저변의 격차가 드러난다.

일본 그리스도인은 이미 오래전부터 마음만 먹으면 바르트의 어려운 사상을 편안한 모국어로 대부분 찾아 읽을 수 있었다. 신학은 사람이 하는 지적 행위이므로 그렇게 축적된 문헌 양에 비례해 일본 그리스도인의 신학적 사색도 깊어지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그런 의미에서 일본 그리스도교의 '양적' 측면은 무시될지 몰라도, 그들 신학의 '질적' 측면은 간과할 대상이 아니라는 인상을 많이 받는다.

물론 지금의 일본 기독교회가 약세를 면치 못하는 이유 중 하나로, 지나친 지성주의 혹은 현학적 분위기(엘리트주의)를 언급하는 분도 있다. 하지만 내가 목회 현장에서 만난 교우들은, 비록 소수지만 매우 야무지고 진지한 신앙인의 자세를 보여 줬다. 크리스천을 신기하게 쳐다보는 일본 사회에서 꿋꿋이 자신의 믿음을 지켜 가기 위한 일당백의 옹골찬 모습은 오히려 나를 부끄럽게 하기도 했다.

소돔 땅에 의인 열 명이 있다면 멸하지 말아 달라고 읍소한 아브라함의 외침(창 18:32)을 오늘날 한국교회에 적용하면 과연 얼마나 당당할 수 있을까. 나는 일본 기독교회가 비록 소수에 불과하지만, 그 안에는 분명 오히려 우리가 배워야 할 수많은 의인이 숨어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미야즈항의 등대. 사진 제공 홍이표

- 이번에 <뉴스앤조이>에서 격주 간격으로 6회 연재하기로 했다. 어떤 내용을 다룰 예정인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는 성경 말씀에서, 과연 '땅끝'은 어디일까. 많은 사람이 아프리카나 남미, 시베리아 같은 먼 곳을 떠올릴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중세 이전, 이 세상의 끝에 깊은 절벽이 나타나 나이아가라폭포처럼 바닷물이 깊은 수렁으로 쏟아질 것이라고 상상했던 것과 비슷한 발상일지 모른다. 지구地球는 말 그대로 끝없이 돌고 도는 둥근 세계인데 말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가 서 있는 한반도 이 세계의 출발점이라고 생각하면, 지구를 한 바퀴 돌고 마지막 순간 다다르게 되는 곳이 '땅끝'일 것이다. 그곳이 어딘가. 바로 '일본'이다.

내가 목회했던 탄고미야즈교회는 '동해'(일본에서는 '일본해'라 부른다)의 작은 항구도시 미야즈宮津에 있다. 교회 앞 부두에 나가면 예쁜 등대가 세워져 있어 종종 산책을 가곤 했다. 어두운 밤에 그곳에서 '등하불명燈下不明'이라는 사자성어를 떠올려 본 적 있다. 한국은 '등잔燈盞 밑이 어둡다'고 해석하지만, 일본 속담은 '등대燈臺 밑은 어둡다灯台下暗し'라고 표현한다. 우리는 저 먼 바다의 만선滿船이라는 '땅끝' 신기루에만 집착하다가, 정작 소중하게 챙기고 섬겨야 할 등대 밑 그늘의 '땅끝'은 간과하고 있는 게 아닐까.

웅장한 교회 건물만큼 깊어진 그늘 아래 신음하는 이웃들에 대해 한국교회는 과연 얼마나 관심을 갖고 있었을까. 나는 교회 앞바다에 갈 때마다, '저 너머 내 고향이 있건만 왜 이토록 한일을 가르는 바다는 깊기만 할까' 하는 안타까움을 느꼈다. 그리고 무너져 가는 일본의 동해 근처 시골 교회들을 보며 "이곳이야말로 옛 사도들이 말한 '땅끝'이 아닌가"라고 읊조렸다.

나는 이번 연재를 통해, 일본이라는 땅끝에서 신앙인들과 만나며 얻게 된 몇 가지 성찰을 나눠 보려 한다. 그것은 일본 혹은 일본 기독교에 대해 우리가 갖고 있던 오해와 편견을 깨는 내용일 수도 있다. 혹은 일본인이 갖고 있는 한계를 통해 우리의 자화상을 발견하는 거울로 삼을 수도 있을 것이다. 딱딱한 학술적 접근이 아니라, 선교사로서 낯선 '땅끝'에서 새롭게 눈뜬 소박한 일상을 나누는 에세이가 될 것이다. 나와 함께 미지의 일본 선교 현장을 잠시 답사해 본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읽어 주시면 감사하겠다.

- 연재를 통해 기대하는 바가 있다면.

작금의 한국교회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기는커녕 사회에 민폐를 끼치고 있지는 않나 자문해 본다. 그러다 보니 소위 '가나안 신자'가 급증하는 현상도 벌어졌다. 이 와중에도 세습에 골몰하는 대형 교회 지도자들은 스스로에게 한없이 관대한 반면, 북한의 세습 정치는 격렬히 비난하는 자기모순에 빠져 있다.

얼마 전 유명한 원로 정치인이 92세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전직 국무총리가 기독교방송 인터뷰에서, 고인과 더불어 "일본의 장인 정치를 배워야 한다"고 발언했다. 그 '장인 정치'라는 것은 자세히 들여다보면 뿌리 깊은 세습 정치다. 몇 대째 할아버지, 아버지 지역구를 상속받아 국회의원을 하는 정치인이 수두룩하다. 현재 일본 총리도 예외가 아니다. 그처럼 세습을 당연시하는 일본 정치인들도 북한 세습을 비난하는 데 열을 올린다. 그런 면에서 비대해진 한국교회가 견제 세력이 없어 폭주하는 일본 정치계와 많이 닮아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아내가 공부한 미션스쿨의 교훈이 'Mastery for Service'다. '봉사의 장인이 되라'는 말이다. '욕위대자 당위인역欲爲大者 當爲人役', 즉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막 10:43-44)는 성경 말씀이야말로 '장인'의 참뜻을 잘 설명한다고 본다.

이런 관점에서 한국교회는 일본 기독교에 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실은 일본 기독교도 패전 직전까지는 일본 정부와 긴밀하게 협력했고, 그 결과 권력과 명예를 누렸다. 하지만 일본 제국 패망과 함께 그 죄악이 여실히 드러났을 때, 일본 기독교회는 통회 자복하며 참회의 길을 걷기로 작정했다. 이 세상의 권력과 부와 명예라는 '비본질'을 쫓았던 모습을 버리고 '기독교'의 본질, 혹은 기본에 충실하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그 결과가 바로 1% 미만의 마이너리티 기독교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의 길처럼, 일본 사회에서 가시밭길을 걸어가기로 작정한 결과였다.

하지만 그들이 기독교주의 교육, 사회복지 사업, 생활협동조합 운동, 병원 사업, 문화 예술 활동 등을 통해 일본 사회를 섬기며 미쳐 온 보이지 않는 영향력은 결코 작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일본 기독교는 소수이긴 하지만, 여전히 일본이라는 거대한 호수에서 의미 있는 '울림'을 일으키는 작은 돌멩이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에서 내가 얻은 나름의 성찰을 한국 독자들과 나눌 때, 그런 작지만 의미 있는 '울림'을 던져 줄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그리고 '땅끝의 등대 밑 그늘'인 이곳 일본 땅의 마이너리티 크리스천의 삶을 조금이라도 더 이해해 주실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쁠 것 같다.

- 앞으로의 계획은.

수년 전 한국에서 '일제하 한국 기독교인의 일본 인식'이라는 박사 논문을 제출한 적 있다. 하지만 아직도 추가 연구와 가필 수정 작업이 더디어 책으로 발표하지 못하고 있다. 해방 이후의 인식 변화까지 보충해서 조만간 한 권의 책으로 소개할 수 있도록 정리해 볼 계획이다. '일본'을 어떻게 바라보고 생각하는지는 '한국인' 전체에도 매우 중요한 이슈이지만, '한국의 기독교인'이 '일본'을 어떻게 생각해 왔는지, 그 변천 과정을 살피고 오늘의 우리 모습에는 문제가 없는지 성찰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작업이다.

지금의 우리 교회, 우리 신앙이 어찌 보면 일제강점기에 그토록 한국 기독교인이 타파하려 애썼던 '우상숭배'에 깊숙이 오염돼 있는 모습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 '우상숭배'와의 철저한 결별을 선언한 뒤, 가시밭길을 걷기로 작정해 온 70년의 일본 기독교가 겉으로는 매우 초라해 보일지 모르지만, 신께서는 그들을 팔짱 끼고 바라보며 무시하는 우리 모습보다 그들을 더 미쁘다 하실지 모르기 때문이다.

내 연구의 후속 작업은 바로 그러한 점을 학술적으로 뒷받침하는 성과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어쩌면 일본 기독교 현장은 "너는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면서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형제여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할 수 있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라"(눅 6:42)는 성경 말씀을 새롭게 깨닫게 해 주는 타산지석이 될지 모른다.

그밖에도 일본의 메이지 그리스도인이 일본의 전통 종교 '신도'를 어떻게 이해했는지, 그러한 사상이 이후의 '사회사상'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규명하는 연구도 진행 중이다. 이는 1930~1940년대의 단편적 사건으로서만 주로 연구된 한국교회사 속 '신사참배' 문제를 더욱 근원적으로 파헤쳐 보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이런 연구 활동과 더불어 일본에서 나를 필요로 하는 목회 현장에서의 협력도 꾸준히 병행해 나갈 계획이다.

최근까지 목회했던 교회 앞바다에는 '일본 3대 절경' 중 하나인 '아마노하시다테天橋立'라는 곳이 있다. 바다와 바다 사이 마치 홍해가 갈려 육지가 됐던 것처럼, 가늘고 긴 육지가 이어져 있고 그 위에 소나무 숲이 우거져 있다. 머리를 아래로 해서 거꾸로 보면 하늘로 올라가는 다리처럼 느껴진다고 한다.

나도 그렇게 해 본 적이 있는데, 마치 광야에서 헤매던 야곱의 꿈에 나타난 '하늘 사닥다리'가 연상됐다. 동시에 애증으로 가득 찬 한국과 일본의 복잡한 역사의 바다도 언젠가 저 아마노하시타테처럼 화해와 용서로 이어질 날이 오리라 상상해 본다. 그 일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은, 단절됐던 하늘과 땅을 이으셨던 인자人子 예수 그리스도의 참제자들이 아닐까.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창 28:12)."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요 1:51)."

머리를 아래로 해서 아마노하시다테를 향했을 때 보이는 풍경은 야곱의 꿈에 나타난 '하늘 사닥다리'를 연상하게 한다. 메이지 시대 당시 사진(위)과 홍이표 목사의 두 딸의 모습(아래). 사진 제공 홍이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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