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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의 종묘' 교회협의 신실한 동행자

[그림으로 만나는 한국교회] 서울복음교회

이근복   기사승인 2018.06.22  17:4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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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5일 방영한 tvN '알쓸신잡2' 8회에서 유시민 작가가 이렇게 말합니다.

"1980년대에는 여기가 어마어마한 핫 플레이스였어요. 말도 못 하는 핫 플레이스."

"언제 와도 그때의 기억을 되살려 주는 공간들 중에서 건축적으로 다른 데와 조금 뚜렷이 구분되는 그런 공간들이 21세기 대한민국의 종묘다."

'알쓸신잡2' 일행은 서울 종로4가 종묘를 찾은 후에 "현대에 대한민국을 하나로 묶는 이념과 생각으로 에너지를 낼 수 있는 21세기의 종묘는 어디인가"라고 운을 떼고, 종로5가 한국기독교회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교회협)로 갑니다. 문이 모두 닫혀 있는 것을 아쉽게 여기는 유시민 작가를 중심으로 진행된 대화는 교회의 역사적 가치를 깊이 성찰하게 합니다.

"우리가 맨날 여기 와서 시위 계획을 세우고 유인물을 만들고 다 했지. 경찰이 바로 여기 문 앞까지 왔어. 근데 들어오지는 못해. 교회협 총무님이 나가셔서 잘 이야기해서. '여기서 소리 지르고 안 그럴 테니까 너희들도 가라.' 이래 가지고 타협해서 귀가 신변 안전을 보장받았어. 그러면 지하철역까지 배웅해 주시던 총무님. 지금 생각해 보면 너무 고맙지.

(중략) 그때 일을 생각하면 이 집에 들어오면 벌써 마음이 막 따뜻해져. 그게 묘하게 다 종교 기관인데, 왜 그러냐면 종교 기관들은 국제적인 조직망을 갖고 있고 정부에서 함부로 하기 어려운 데 있어요. 그래서 그 기관들이 민주공화국을 제대로 만들려고 노력하는 사람을 많이 보호해 줬어. (중략) (유현준 교수: 소도蘇塗 같은 데네요?) 그런데 사람들이 잘 몰라요. 종로5가 기독교회관이 그런 역할을 했다는 걸."

인기 있는 TV 프로에서 교회협을 21세기의 종묘宗廟이고 소도蘇塗로 인정한 것은 참 의미심장합니다. 현재 9개 회원 교회(교단)와 CBS 등 5개 단체로 구성된 교회협은 1924년 설립한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가 모체입니다. 군사독재 정권 시절에 민주화 운동과 민중 선교, 인권 신장과 평화통일 운동으로 한국교회 위상을 세계적으로 드높였습니다.

특히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자가 속출하자 1974년 7월 18일 시작한 '고난받는 이들과 함께하는 목요 기도회'는 독재 권력에 쫒기고 고문당하고 투옥당한 이들을 위한 인권의 보루였습니다. 정권에 희생당한 유가족 등 억울한 이들이 하소연하고 공감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고 정세 분석과 민주 시민교육의 장이었습니다. 이 기도회를 통하여 얼마나 많은 이가 보호받고 한을 풀고 용기를 얻고 신앙 양심을 회복하였는지 헤아릴 수 없습니다. 지금은 이홍정 총무가 근래에 심각하게 무너진 교회협의 위상을 회복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한국기독교회관에서 멀지 않은 종로6가에 1992년 건축한 소박한 벽돌 교회당이 있습니다. 서울복음교회는 두드러지지 않았지만 교회협 활동의 든든한 동행자였습니다. 조용술 목사와 오충일 목사가 기독교대한복음교회(복음교회)를 대표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서울복음교회 예배당. 이근복 그림

조 목사는 온화하고 조용했지만 민주화 운동과 통일 운동 분야에서 치열하게 활동하였습니다. 전북의 여러 교회에서 목회했으며, 교회협 회장과 기독교농민회 이사장으로 수고하였습니다. 1990년 범민족 대회 공동본부장으로서 베를린에서 북쪽 대표들과 접촉한 뒤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되는 등 노구를 이끌고 앞장섰습니다.

오충일 목사는 열정이 넘치는 분으로, 서울복음교회 담임목사와 교회협 회장을 역임하였는데 1987년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집행위원장으로서 6월 민주 항쟁을 실질적으로 이끌었습니다. 2007년에는 대통합민주신당 대표최고위원을 맡아 민주개혁 중도 세력을 통합하는 일을 감당하였습니다.

이분들의 뿌리는 복음교회를 세운 최태용 목사로, 그는 적극적인 사회참여 신학을 지향했습니다. 1897년 함경남도 영흥군에서 출생하여 수원농림학교(현 서울대 농과대학)에서 국비생으로 공부하던 시절, 친구의 인도로 신앙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연희전문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다가 1919년부터 2년간 연희전문학교 농과에서 선생으로 근무합니다.

1921년 일본 동경영어학교에서 유학할 때 무교회주의자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를 만나 제자가 되어 김교신 선생, 함석헌 선생 등과 교제합니다. 1925년 잡지 <천래지성>을 발간하여 교회 개혁과 신앙 쇄신을 주창하고, 이듬해 11월 YMCA 대강당에서 '신앙 혁명 선언'을 발표하여, 교회의 외세 의존성을 비판하며 재정적인 자립과 신학적 독자성을 추구하는 자생적인 조선적 교회 설립을 주장합니다.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자유로운 학풍의 도시샤대학과 청산학원에서 공부한 후 귀국하여 “신앙은 복음적이고 생명적이어라. 신학은 충분히 학문적이어라. 교회는 조선인 자신의 교회이어라"고 3대 표어를 주창하며, 무교회주의와 결별하고 뜻을 같이하는 이들과 1935년 12월 22일 기독교조선복음교회(현 기독교대한복음교회)를 창립하였습니다. 한국 선교사 대부분이 갖고 있던 근본주의 내세적 신앙 성향과 3·1 혁명 이후 선교사들의 비정치화에 대한 비판적 입장으로 조선 교회를 독립하고자 하는 열망이 담겨 있습니다. 조선을 위한 조선의 신학으로, 조선인들의 고백에 의해, 조선을 구원할 조선의 교회로서 출발한 것입니다.

그는 신앙을 바탕으로 개인과 사회의 변화와 적극적인 사회 개혁을 주장했습니다. 8·15 광복 후에는 기독교 신앙으로 새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총무부장, 국민훈련원 원장 등으로 농촌 운동에 헌신하다가 한국전쟁 때 북한 공산군에 의해 순교합니다.

서울복음교회 뒷마당에는 최태용 목사 동상과 기념비가 있습니다. '조선인 자신의 교회를 창립한 시남 최태용 목사'라고 적힌 흉상에는 약력과 함께 본인이 주창한 삼대 표어가 새겨져 있습니다. 옆에는 '岩上小松'(암상소송)이 적힌 시비가 있습니다.

"거대한 바위/ 한 모퉁이에/ 한 움큼 되는/ 모래 위에 서 있는 너 작은 솔아/ (중략)/ 네가 가진 생명/ 네가 받은 권능/ 바위틈에 내리는/ 신비한 너의 뿌리/ 점점 깊어지고/ 차차 굵어져서/ 마침내 거암을/ 무너뜨리고 말/ 정명定命을 가졌도다/ 아/ 위대할 거나/ 너 작은 솔아."

시비 아래 새긴 문장처럼 적지만(少) 순수한(純) 복음교회을 향한 간절한 소망이 담겨 있습니다. 이분이 1935년 12월 설립하여 1945년까지 섬긴 서울복음교회는 복음 선교와 더불어 에큐메니컬 운동과 생명·환경 운동에 진력해 왔습니다. 박선진 담임목사의 담담하고 깊이 있는 신학적 설교는 복음교회에 면면히 흐르는 신학과 맞닿아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그림으로 만나는 한국교회'는 매월 2차례 업데이트됩니다.

이근복 / 목사, 성균관대학교와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을 졸업했다. 영등포산업선교회 총무, 새민족교회 담임목사,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교육훈련원장을 거쳐 현재 크리스챤아카데미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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