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문제의식: '동성애에 대한 불편함'과
'동성애 반대 운동에 대한 불편함'

기독교계 일각의 동성애 반대 운동이 뜨겁다. 이 반대 운동은 '성적 지향으로 인한 차별을 금지'하는 각 지방자치단체 인권조례로 모아지고 있다. 급기야 2018년 5월 28일, 충청남도 여러 기독교 단체는 충남 인권조례를 반대한다는 이유로 지방선거에서 자유한국당 이인제 도지사 후보를 지지한다는 정치적 선언까지 하기에 이른다.

기독교 동성애 반대 운동 진영의 법률적 논리는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인권조례에 관한 입법 기술적인 측면에서 지방자치단체에는 인권 사무에 관한 조례 제정권이 없다는 것이고, 둘째는 인권조례의 실체적 내용 중 '성적 지향으로 인한 차별을 금지'하는 규정이 헌법에 위반하여 부당하다는 주장이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동성애를 불편하게 느끼는 편이다. 그러나 내가 믿는 기독교가 '동성애에 반대하는 종교'로 협소하고 완고하게 인식되는 것은 더욱 불편하고 싫다. 동성애에 대한 적극적인 반대파와 적극적인 찬성파가 논쟁을 벌일 때 나처럼 그 중간에 낀 사람들은 약간 바보처럼 말문이 막혀 침묵을 강요당한다. 이것은 더더욱 답답한 일이다.

필자는 변호사로서, 지난 5월 말 기독교학문연구회가 주최한 춘계 학술 대회에 참가해서 '기독교 동성애 반대 운동'에 대한 찬반 토론을 벌일 기회가 있었다. 그때의 토론 내용을 기초로, 필자와 같이 동성애도 불편하지만 기독교 동성애 반대 운동도 불편한, 중간에 낀 사람들의 솔직한 고민을 토론하면서 이 문제를 함께 풀어 보고자 한다. 첫 번째 문제는 동성애 논란에 대한 '법률적 고찰'이고, 두 번째 문제는 동성애 논란에 대한 '신학적 질문'이다.

2. 동성애 논란에 대한 법률적 고찰

가. 지방자치단체에 인권조례 제정권이 있는지 여부

동성애 반대 진영에서는 '인권 업무는 국가의 사무'라서 지방자치단체에는 인권에 관련한 조례 제정권이 없다는 소수설적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근대 민주주의 헌법 국가의 출발인 프랑스 인권선언에서 보듯이 자연법 및 근대 민주주의 헌법상 인권은 오히려 실정법의 세세한 규정 이상으로 근본적인 민주주의 원리 및 실천의 기본 지침이라 할 것이므로, 국가와 함께 그에 버금가게 중요한 주권적 공동체인 지방자치단체에 소속 주민들의 인권을 신장하고 구체적으로 보호하기 위한 인권조례 제정권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견해는, 지방자치정부의 주민들을 위한 입법권을 지나치게 제한하는 것으로 동의하기 어렵다. 오히려 지방자치단체 조례의 구체적인 내용을 놓고 토론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나. 인권조례의 실체적 내용에 대한 논란 – 결국에는 동성애 문제

(1) '성적 지향으로 인한 차별 금지'가 위헌인가

동성애 반대 진영은 지방 인권조례의 실체적 내용 중 '성적 지향으로 인한 차별 금지' 조항이 헌법 제36조의 '양성평등 조항'과 충돌하여 허용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생각건대 현재의 대한민국 헌법상 ①헌법 제10조의 행복추구권과 제11조의 평등권 일반 조항에 따라 동성애 성향인 국민에 대한 차별이 금지되어야 한다는 해석론과 ②동성애 반대 진영의 주장처럼 그 경우 이성애 성향인 국민들의 헌법상 행복추구권이 거꾸로 침해된다는 반대의 해석론이 모두 제기될 수 있고, 이처럼 충돌하는 의견과 이해관계의 대립은 민주주의 삼권분립 제도의 원리와 절차에 따라 해결되는 수밖에 없다.

첫째로는 사법절차에 의한 해결로서, 현재의 대한민국 헌법 및 법률상 동성애자에 대한 차별금지가 합헌적인지 또는 합법적인지 여부에 대한 헌법재판소 결정이나 대법원 판결을 통해 사법적인 답을 얻는 것이다. 둘째로는 입법 절차를 통한 변동으로, 동성애 차별 금지 여부에 관한 법률의 제·개정 또는 헌법의 개정을 통해서 이 문제에 대한 사회적 정치적 규범을 정립하거나 변경하는 것이다.

민주주의 제도하에서 선거제도를 통해서 서로 다른 의견과 이익을 가지는 정치적 세력들이 권력을 취득하고 교체하는 것이 불가피한 것처럼, 사법절차 및 입법 절차를 통한 사회적 규범의 정립 및 제·개정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 그에 찬성하는 국민과 반대하는 국민들 모두에게 이를 참고 수인할 의무와 그 변경을 위해서 노력할 권리가 존재한다. 민주주의에서는 나의 의견을 포기할 필요가 없지만, 민주주의에서는 나의 의견만 관철할 수도 없다.

(2) 기독교계의 일부가 동성애 반대 운동과 인권조례 반대 운동을 주도하는 현상

현실적으로 미국에서는 물론 한국에서도 동성애 반대 운동 및 이에 결부된 인권조례 반대 운동을 주도하는 것은 동성애 반대 운동을 벌이는 기독교계의 일부一部 진영으로 나타나고 있다. 기독교계의 전부全部라고 할 수 없는 것은 '기독교 동성애 반대 운동' 자체에 반대하거나 회의적이거나 중립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는 기독교인들도 상당수 존재하기 때문이다.

다만, 일반 국민들 시각에서는 기독교인들이 가장 적극적으로 동성애를 반대하는 주도 세력인 것으로 인식되는 것이 사실이고, 관련하여 기독교계의 차별금지법 반대 운동 또한 기독교가 인권 전반에 대해서 부정적이거나 반대하는 입장의 종교라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

사상과 양심의 자유상(헌법 제19조), 모든 국민은 자기의 양심에 따라 사회 현안에 대한 주장을 하고 찬성 또는 반대의 운동을 할 권리가 있다. 따라서 '동성애에 반대'하는 국민이나 기독교인들은 반대 주장을 하고 반대 운동을 할 권리가 있고, '동성애 반대 운동에 반대'하는 국민이나 기독교인들도 그 취지의 의사 표시와 사회적 태도를 피력할 자유가 있다. 서로 다른 의견과 주장 수준을 넘어 현실적 권리와 제도의 변화에 관한 부분은 입법, 사법의 민주주의 절차에 따라 조정하는 수밖에 없다.

3. 신학적 질문:
"기독교인들은 국가와 사회의 문제 중에서
왜 동성애 문제에만 분노하는가"

가. 두 가지 질문

미국의 경우 1990년대 이래 기독교 우파 진영의 문화 전쟁(culture war)은 동성애 반대, 낙태 반대라는 주된 슬로건하에 보수 정당인 공화당과 밀접한 정치적 동맹 관계를 가지게 되고, 그 결과 미국의 이른바 백인 복음주의자(white evangelical)들은 동성애에 반대 입장을 취하는 공화당을 하나님 뜻에 합하는 정당, 그 반대로 동성애자들에 허용적 입장을 취하는 민주당을 하나님 뜻에 반하는 반기독교 정당으로 비난 내지 증오하는 경향이 강하다. 최근 한국 교계 일각의 반동성애 운동, 반차별금지법 운동에도 미국의 위 흐름을 쫓아가는 경향이 보인다.

여기서 발생하는 질문은 두 가지다. 첫째, 기독교 내지 기독교인의 사회와 국가에 대한 태도를 결정짓는 데 '동성애' 문제가 가장 중심적이고 결정적인 기준을 차지하는 것이 기독교의 본질상 타당한가. 둘째, 이러한 경향은 교회와 국가 또는 기독교와 사회의 관계에 대한 근본적 오해에 기인한 것이 아닌가.

나. 첫 번째 질문: 동성애 찬반은 기독교의 신앙의 본질적本質的 문제인가

'동성애'에 대한 찬성·반대는 역사적으로 기독교 내부와 외부 모두에 있어 왔고 결코 새로운 문제가 아니다(플라톤의 <향연> 참조, 이 책에서 소크라테스와 제자들은 성인 남성과 소년의 사랑을 소재로 에로스를 논하고 있다.). 성경에 동성애 처벌(구약의 레위기 20장 13절 등)과 규탄 구절(신약의 로마서 1장 27절 등)이 있다고 하여, 기독교가 다른 종교, 다른 시대에 비해 '동성애 반대'에 특별하거나 고유한 강조점을 두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므로 성경 자체의 전체적 내용을 볼 때, 그리고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복음을 생각해 볼 때, '동성애 반대' 문제가 기독교의 본질적, 중심적 내용이라고 볼 수는 없다. 첫째, 구약의 율법이 동성애를 사형으로 처벌했다고 해도 신약 이후의 기독교는 구약의 율법이 정한 범죄와 처벌 조항을 절대적으로 승계한 것이 아니다. 둘째, 신약의 복음서에는 예수님이 직접 동성애 문제를 언급한 내용이 없다. 이는 예수님과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동성애 문제를 기독교 신앙의 본질적인 문제나 사활적 쟁점으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점을 보여 준다.

셋째, 신약의 서신서에는 로마서를 비롯해서 여러 편지에 동성애를 인간의 죄악상으로 언급하고 비난한 구절이 많다. 이는 구약의 십계명 및 율법을 위반하는 인간 실상을 한탄하고 규탄하는 맥락에서 존재하는 것으로, 서신서의 사도적 복음관은 '율법에 의한 구원이 아닌, 믿음에 의한 구원'을 강조하고 있으므로 '동성애에 관한 율법의 준수'가 기독교 구원의 핵심적, 본질적 계기를 차지한다고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일반인 사이에서도 동성애 찬반 의견이 있고, 동성애 반대자들에게 동성애를 불편하고 꺼리는 감정이 있는 것처럼, 기독교인들 가운데도 동성애 찬반 의견이 있고, 동성애 반대 교인들에게 동성애 혐오 감정이 강하게 존재하는 것은 이해가 되기도 하고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왜 사회의 일반적 동성애 혐오 감정은 크게 부각되거나 세력화하지 않는 반면, 기독교계의 동성애 혐오 감정은 마치 기독교의 사회 정치적 견해를 상징하고 대표하는 것처럼 부각되고 있는가.

또한 실제로도 기독교가 사회 전체의 동성애 반대 운동의 선봉 내지 주력을 차지하고, 사회에서는 기독교를 '동성애 반대 운동의 종교'라고 인식하게 된 것은 과연 무슨 이유일까. 2000년 전 세상에 맞서 처형을 당한 '예수'는 동성애 문제에 신앙과 목숨을 걸지 않았는데, 2000년 후 세상 문제에 별 관심이 없는 '기독교'는 왜 동성애 문제에 신앙과 목숨을 거는 것일까. 동성애가 기독교 사회관의 핵심을 차지하게 된 것은 '기독교 신앙의 발전적 전개'인가 아니면 '기독교 신앙의 탈선과 방황'인가.

다. 두 번째 질문: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대한 수수께끼 – 혼합과 혼동의 양상

'교회와 국가의 관계'라는 문제(question)는 기독교 2000년 역사의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riddle) 중 하나다. "너희는 세상의 빛과 소금"(마태복음 5장 13-14절)이라는 예수의 권면은 교회에 국가를 지배하거나 국가의 도덕 교사 노릇을 하려는 신정국가적 야망 내지 도덕주의적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반면, "너희는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골로새서 3장 2절)는 서신서의 권면은 교회가 국가에 대한 관심을 버리거나 회피하려 하는 경건주의적, 정숙주의적, 분리주의적 태도를 팽배하게 한다.

'교회가 세상의 위에 있다는 태도'와 '교회와 세상을 분리하려는 태도', 역사 속에서는 기독교의 신학도, 교회의 실천도, 기독교인 개개인의 생각과 행동도, 이 두 가지의 상반되거나 모순된 견해 사이를 왕래하거나 또는 두 가지 태도를 적당히 혼합하여 가지고 있다. 신앙적으로 보수적인 기독교 진영이 ①다른 사회문제들에는 대부분 오불관언吾不關焉(우리는 상관하지 않는다)의 태도를 보이면서도 ②동성애라는 사회문제에는 결사반대의 태도를 나타내는 것은, 위 두 가지 태도가 혼합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정치적 억압이나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 문제에는 기독교와 무관한 것이라는 분리주의적 태도를 취하는 것이고, 동성애 문제라는 주관적이고 도덕적인 영역의 문제에는 기독교가 세상의 교사 노릇을 하려는 개입주의적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세상에 무관심한 / 세상의 교사"라는 이율배반적이거나 모순적 태도가 발생한다.

일반적으로 교회는 개인적 주관성主觀性의 세계에 있고, 국가는 사회적 객관성客觀性의 세계에 있다. 특히 종교개혁 이후의 개신교는 인간의 개인적이고 주관적이고 내면적인 신앙에 집중을 하면서, '사회의 객관적' 문제들에 관심을 갖거나 개입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이것이 일반적으로 개신교 교회가 국가 이슈 중 정치적 억압의 문제나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의 문제를 회피하는 이유이다.

국가에는 정치적 억압의 폐지와 민주주의적 기본권의 보장, 사회경제적 평등과 복지의 문제 등 많은 집단적, 객관적客觀的 문제가 존재한다. 동성애는 개인의 주관적이고 도덕적인 결정이 사회화하고 국가 제도의 문제로 전개된 것이므로, 많은 국가 사회적 문제 중 '개인적이고 주관적主觀的인 영역의 사회문제'에 해당한다. 따라서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시민들에게 동성애 문제는 허다한 정치·경제·사회의 객관적·주관적 문제 중 일부에 국한되고, 일반 시민은 국가의 문제 중 주관적인 동성애 문제에만 몰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국가와 사회문제에 전반적으로 무관심한 기독교가 동성애라는 특정 사회문제에만 집중하는 이유는, '주관성'이라는 공통의 키워드를 통한 일관성, 즉 '(객관적인) 세상에 무관심한 / (주관적인) 세상의 교사'라는 통일적 현상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런데 문제는 과연 '기독교의 정당한 해석과 전개에, 국가와 사회문제를 주관성의 영역을 통해서만 접근하려는 교회의 태도가 과연 합당한 것인가'라는 점이다. 즉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대한 본격적인 질문과 고민의 필요성이다.

4. 결론과 제안:
(주관성의) 교회와 (객관성의) 국가 간의 합당한 관계 설정
- 기독교 동성애 반대 운동의 문제점
(주관성에만 치중한 사회참여의 객관적 위험성)

가. 교회와 국가 – 칭의와 정의

21세 초 독일 신학자 칼 바르트는 1938년 논문 'Church and State(일명 Justification and Justice)'를 통해서 '칭의稱義의 교회'와 '정의正義의 국가'라는 두 가지 상이한 개념과 기능으로 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해명한 바 있다(Karl Barth, "Church and State" in Karl Barth, Community, State and Church: Three Essays, Eugene, Oregon: Wipf and Stock Publishers, 2004, 101~148쪽).

칼 바르트에 의하면 교회의 기능과 국가의 기능은 명백히 다르다. 교회의 기능은 불의한 인간을 의롭다 하는 신적인 '칭의(Justification)'를 선포하는 것이고, 국가의 기능은 인간 사이의 '정의(Justice)'를 관리하는 것이다. 교회와 국가 모두가 하나님의 일을 땅에서 행하는 거룩한 기관(instrument)이지만, 교회와 국가의 차이가 결코 무시되거나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그 이유는, 신적 칭의(Divine Justification)와 인간적 정의(Human Justice)가 명백히 서로 다른 평면과 내용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위 논문 102쪽).

칼 바르트에 의하면 또한 "교회는 자발적으로 모인 신자들로 이루어진 (주관적) 기관이어서 기독교인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즉 칭의(Justification)가 주된 작동 원리"이지만, "국가는 한 지역의 국민이면 신자와 비신자를 물론하고 모두 강제적으로 포함해 작용하는(객관적) 기관이므로 모든 사람에 대한 정의(Justice)의 요구가 주된 작동 원리"로 된다(위 논문 122~135쪽).

그러므로 칭의를 담당하는 교회가 국가의 기능까지 차지하려는 신정국가(Church-State)가 되면 중세 교황 국가나 이슬람 국가에서 보듯이 사회의 정의 기능이 무시되거나 무너질 가능성이 크고, 인간 사이의 정의를 담당하는 국가가 국가에 대한 신적 존경과 숭배를 요구하는 유사 교회적 국가(State as quasi-Church)로 나아가면 히틀러의 독일 나치즘, 천황 숭배의 일본 제국주의, 스탈린의 공산주의 체제처럼 악마적 국가(Demonic State)로 나타나게 된다(위 논문 143쪽).

나.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대한 오해와 혼동: 주관적 사회참여로 인한 객관적 사회정의 왜곡

일반적으로 보수적인 기독교 신앙의 입장은 '주관적' 교회의 세계에만 집중하고 '객관적' 국가(사회)의 세계를 외면하려는 태도를 보인다(주관적 칭의에 몰두한 객관적 정의의 방기). 반면 일반적으로 진보적인 기독교 신앙의 입장은 '객관적' 국가·사회의 부정의不正義 문제를 고민하면서 '주관적' 교회와 신앙의 문제에 느슨해지는 위험에 처한다(객관적 정의에 치중한 주관적 칭의의 이완).

그런데 미국에서 시작되어 한국에서 전개되는 동성애 반대의 기독교 정치행동주의는 (주관적) 교회의 윤리를 가지고, 이를 (객관적) 국가의 제도로 관철하려고 하면서, 국가의 (객관적) 정의와 교회의 (주관적) 칭의 양자에 모두 피해를 주게 되는 위험성과 문제점이 있다.

첫째, 기독교 동성애 반대 운동은 국가의 객관적 정의 문제를 외면하면서 국가의 주관적 윤리문제만을 기준으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여, 국가의 객관적 '정의' 기능을 왜곡하고 무너뜨리게 될 위험성이 크다(주관적 정의에 치중한 객관적 정의의 침해).

이것은 현재 미국에서 백인 복음주의자(white evangelicals)라는 사회 정치적 블록으로 나타나고 있는 '어느 정당이 동성애만 반대한다면, 다른 사회 정치적 정책은 어떻더라도 상관없이 지지한다'는 태도이다. 한국의 경우에는 교계와 목회자들 및 일부 신도에게는 이런 태도가 일부 존재하지만, 다행히 일반 기독교인들에게는 이런 태도가 뚜렷하게 형성되거나 고착되어 있지 않다.

둘째, 기독교 동성애 반대 운동은 (스스로) 정의로운 교회와 기독교인들이 국가와 사회의 주관적 불의를 규탄하고 정죄하는 입장을 취하는 것으로 기독교인(신자)들 스스로의 (주관적) 불의에 대한 고백을 출발점과 도착점으로 하는 교회의 칭의(Justification) 기능에도 치명적인 위해를 줄 수 있다.

'스스로의 불의함을 고백하는' 기독교인들은 겸손하게 하나님의 칭의를 얻으면서 조심스럽게 사회의 (객관적) 정의에 참여할 수 있으나, '스스로의 정의로움을 확신하면서' 사회에 (주관적) 정의를 가르치는 기독교인들에게는 겸손하게 하나님의 칭의를 구할 동기와 태도가 약해지기 때문이다(주관적 정의의 과잉으로 인한 주관적 칭의의 장애).

필자는 개인적으로는 동성애를 불편하게 생각하지만, 시민으로서는 동성애에 대한 사회제도가 민주주의 질서에 따라 결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교인으로서는 기독교가 동성애 반대에 너무 많은 역량을 소진하고 필자가 전심으로 믿는 기독교를 '동성애에 반대하는 종교'로 축소하거나 왜곡하는 것에 반대한다.

필자는 동성애를 반대하는 기독교인들에게 자신의 민주주의적 자유와 종교적 양심에 따라 동성애에 반대하는 사회적 의사 표현을 하고 국가와 지방단체의 입법적, 사법적 운동을 할 권리가 있다는 점을 인정하며 존중한다. 그러나 기독교 동성애 반대 운동은 '동성애라는 사회의 (주관적) 정의만을 위해서 그보다 더 보편적이고 광범위한 사회의 (객관적) 정의들을 외면하고 억압하게 되는 위험성과 현실성'을 심각하게 반성하고 고민할 필요가 있다. 주관적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위한 것이라고 믿고 하는 행동이 객관적으로는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결과를 나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이 모든 문제의 혼란과 오해와 혼동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한국교회와 기독교인들 모두가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대해 더 정확한 인식과 이해를 찾고 행하기 위한 이론적, 실천적 노력을 본격적으로 전개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글은 필자 개인의 입장을 표명한 것으로, 2018년 5월 26일 천안에서 열린 기독교학문연구회 춘계 학술 대회의 법률 분과 토론에서 발표한 토론문을 수정, 보충한 내용입니다.

이병주 / 변호사, 전 대한변호사협회 기획이사, <박근혜 사태와 기독교의 문제>(대장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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