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들어가는 말,
1세기를 사는 21세기 그리스도인들

근현대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사회학자 울리히 벡(Ulich Beck)은 "산업적 봉건사회"라고 비판한다. 반만 근현대화 과정을 거쳤다는 말이다. 즉, 공적 영역은 합리적 이성에 근거하여 개인 대 개인의 자유 경쟁과 성취를 보장하는 방향으로 '근현대화(modernization)'되었는데, 사적 영역은 여전히 전근대 사회의 봉건적 관계 방식을 유지하는 방식으로 기획되었다는 것이다.1)

그러나 후기-근대라는 새로운 외부 환경은 산업화 이후 만들어진 핵가족 체제를 기반으로 하는 삶과 맞지 않는다. '전적'으로 집안에 머물며 가사와 육아 노동만을 삶의 주요한 업무로 여기며 살던 여성들(전업주부)이 더 이상 주류가 아닌 세상이다. 남편은 생산노동을, 아내는 가사와 육아 노동을 하던 시절에 만들어진 성 역할 담론이 힘을 발휘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경우는 문제가 심각하다. 사회의 변화에 따라 공동체의 사는 원리가 자연스럽게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가부장적 성 질서를 거룩한 신적 질서로 고착화시켜 놓은 탓에 성별 구분과 기능적 위계는 교회나 그리스도인의 관계망에서 여전히 힘을 가지고 작동되고 있다. 만약, 한 전문가 여성이 보수적 기독 신앙을 가진 상황이라면 그녀의 삶은 양분될 수밖에 없다. 사회에서는 21세기 탈성적 전문가 개인의 덕목을 수행하며 살고, 개인적 관계에서는 전근대적, 아니 성서가 그리는 1세기적 여성의 모습을 천직으로 여기면서 살아야 한다.

실제로 그렇게 사는 기독 여성들이 많다. 여대에서 가르치고, 여성들을 만나는 나로서는, 이런 분열적 상황에 놓인 젊은 기독 여성들을 수시로 접한다. 도대체 개인의 잘못이 아님에도 '나 되기'와 '여자 되기'가 충돌하는 그녀들의 삶의 정황을 보면 안타깝기 그지없다.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이중 업무를 수행하다 몸과 마음의 병을 얻기도 한다. 이는 개인의 성실성이 나 능력의 문제가 결코 아닌데, 근현대 초·중기에 형성된 개신교 여성관과 가정관을 그대로 유지하자니 그야말로 '미칠 노릇'이고, 하여 하나를 접자 하니 '아플 노릇'이다.2)

이는 결코 '슈퍼우먼'이 되거나 '독수리처럼 날아오르는 힘을 주시는 여호와를 의지하여' 해결될 일이 아니다. '여성의 소명'에 대한 성차별적(적어도 성 구별적) 인식은 신앙적으로 포장된 개신교 윤리 담론이기에, 그 담론의 시대적 한계를 비판적으로 살펴보는 일과 더불어 신앙적, 윤리적 차원에서 이 문제를 다시 점검해 보아야 할 시급성을 느끼게 된다. 이를 위한 한 시도로서, 근현대 초기에 형성되었던 개신교 가정/여성 담론의 전개 과정과 그 모순점을 지적하고, 기독 신앙인으로서 성서를 다시 붙잡아 오늘에 적합한 가정/여성 담론을 재구성해 보려고 한다.

6월 5일 진행한 한국교회탐구센터 '페미니즘 시대의 그리스도인' 포럼에서 발표하고 있는 백소영 교수(이화여대 기독교학과). 뉴스앤조이 최승현

II. 개신교의 기독교 여성/가정 담론의 형성과 한계

1. 존재론적으로는 평등하나 기능적으로는 위계적인?

"남편이 머리라면 아내는 머리 다음으로 신체에서 중요한 기관인 심장에 해당한다. 심장은 머리의 지배를 받는 다른 어떤 기관보다 탁월하다. 그리고 여러 면에서 머리와 거의 동등하고 머리만큼이나 소중하다."3) 청교도 목회자요 신학자였던 윌리엄 구지(William Gouge, 1575~1653)의 말이다. 아내를 '심장'으로 여겨 주다니 분명 전근대적 시절보다 진일보한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연인과 아내를 "영혼의 파트너", "하나님의 선물", "신실한 친구"라 칭송했음에도, 개신교 지도자들은 결코 여성을 남자와 동등한 권위를 가지는 존재로 인정하지는 않았다. 세세한 신학적 불일치로 인해 하나의 교단을 이룰 수 없었던 개신교 지도자들이었지만, 그들이 '여성'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믿음과 이해는 거의 일치했다. 남녀는 기능적 위계를 가지며 이는 신적 질서라는 것이다.

2. 근현대 '부르주아' 사회의 기획과 맞물린 개신교 여성 담론

할 수만 있었다면 개신교 남성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은 전근대적 여성관을 그대로 유지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다만 그들이 직면한 근현대 사회가 다른 종류의 가부장제를 요구했을 뿐이다. 전근대 사회와 달리 핵가족화한 도시 환경에서 가장은 생산노동을 위해 출퇴근을 할 수밖에 없었다. 즉 '자신의 집안에 머무를 수 없는 가장'의 탄생이다. 그 해결책은 '전업주부'였다. 내가 집을 비운 '나의 영토(가정)'에서 내 아이들을 건강하고 현명하게 길러내며 가정을 유지할 수 있는 권위와 능력을 가진 존재, 부르주아 핵가족은 그런 여성을 필요로 했다.

그리고 그런 상황은, 마침 성서를 기초로 여성에게 인간의 존재론적 권위를 부여하던 개신교 여성 담론에서 적합한 이론적 근거를 찾게 되었던 거다. 더구나 사도 바울의 '부드러운 가부장제'적 발언은 개신교 지도자들에게 정당성을 주는 탄탄한 토대가 되었다. 교회에서 그 권위를 확고히 한 채 "남편에게 순종하라"는 사도 바울의 권고는 21세기까지도 울려 퍼진다. 근현대 여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여성"이 되기 위하여, '나로 사는 길'을 접는 선택을 하도록 만들며 말이다. 그러나 성서는 과연 여성의 천직을 이렇게 말하고 있나. 여성을 살리려면, 여성이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자신의 삶을 풍성하게 누리도록 하기 위해서는, 후기-근대적 상황에서 성서를 다시 읽어 보아야 한다.

III. 성서를 읽는 방식,
하나님의 계시와 인간의 해석 사이에서

성경은 '경줄과 위줄로 짜여진 옷감'과도 같다. 성경의 '경'자는 '실을 세로로 고정해놓고 하는 작업'을 의미한다. 전근대 시절 베틀 짜는 여인들의 작업이 그러했다. 먼저 경줄 즉 날줄을 단단하게 고정해 놓아야, 위줄, 즉 씨줄 작업을 할 수 있다. 왔다 갔다 위줄(씨줄)을 움직이는 것은 사람의 노동이다. 무슨 무늬를 만들지, 어떤 색깔로 짤지는 사람의 선택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형상대로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다는 태초의 그 말씀이 경줄이라면, 가부장제를 정당화하는 모든 성서의 구절들은 위줄이다. 가부장제는 하나님의 창조질서가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성서를 읽으며 어떤 말씀은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어떤 말씀은 시대적 한계로 받아야 하는 것일까. 나의 경우는 '경줄'을 찾는 기준으로 '초월성'과 '보편성'을 제안한다. 초월성이란 그 메시지가 당대 시대와 문화를 '초월'해 있는 가르침인가 하는 물음으로 텍스트를 점검하는 것이다. 우리 공동체의 의미를 나누고 제도를 만드는 일에 배제된 사람이 있다면 마지막 한 사람까지도 포함해야 비로소 그게 '하나님의 공동체'이다. 시대의 편견에 갇히지 않고 어느 누구도 배제하지 않는 복음, 복음의 초월성과 보편성을 기준으로 성서를 다시 읽어 보자. 오늘을 살아가는 여성들을 배제하거나 제한하지 않는 보석 같은 경줄을 찾아내려는 시도로.

IV. 성서가 증거하는 관계적 혁명

1. '에제르 케네그도': '다름'으로 서로를 건설하는 짝-공동체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시며 특별한 임무를 맡기신다. 그리고 그 사람은 '남자'와 '여자'로 이루어져있다고 명백히 밝힌다. 이건 정말이지 계시다. 이를 '태초의 질서'라고 고백하면서도, 그동안 여자를 사람 취급 안 한 가부장적 역사가 오히려 반하나님이요 불신앙이었던 거다.

남자만이 아니라 여자도 사람이다. 둘은 모두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고 다른 피조물과는 구별되는 하나의 명령을 부여받는다. "다스리라!" 하나님의 다스림 같은 다스림이다. 이것이 설마 군림하고 짓밟고 착취하는 다스림이겠나. 다른 피조물과는 달리 '자유의지'를 부여받아 선택 능력이 있고 하나님을 닮아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은, 그냥 두면 살 수 없는 연약한 생명들을 챙기고 돌보고 살리라는 '청지기적 사명'이다. 살려라! 구원 명령이다.

이렇게 본다면 하나님께서 왜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다'고 하셨는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해석의 실마리는 '사람의 능력'에 있다고 본다. 다른 동식물들은 창조질서대로 산다. 폴 틸리히의 표현대로라면 "유한한 운명(finite destiny)"이다.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며 살 능력이 아예 없다. 그런 존재들은 처음부터 암수 한 쌍으로 만들어졌으며 그들의 임무는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을 닮아 자유와 창조력을 가졌다. 그렇지만 몸을 입어 그 능력이 유한하다. 그런 존재가 '단 하나의 답'만을 가지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다른 피조물들에게 행사한다면, 그야말로 하나님의 창조 세계는 엉망이 될 거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구원할 수도 망칠 수도 있는 존재가 '사람'이라는 말이다.

하여 하나님은 사람을 '다른 존재들'로 나누셨다. 둘 다 똑같이 하나님의 창조 능력과 자유 의 지를 가졌으나, 이를 해석하거나 행사하는 방식이 다른 두 존재로. 그리하여 서로 견제하거나 북돋는 '도움(에제르)'를 주고받으며 서로를 건설하고 피조물을 살리는 데 그 힘을 사용하라고. 둘이 협력하여야만 비로소 영이신 하나님은 그 형상을 이 땅에 드러내실 수 있다. 창조 내러티브에서 내가 잡은 하나님의 계시(경줄)는 남녀의 지배/종속 관계가 아니라 '다름'이다. 서로 그 '다름'을 진정성 있게, 사랑스럽게 바라볼 때, 사람은 서로를 도우며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건설하고 보존할 수 있다. 그것이 '에제르 케네그도'(그의 마주 봄 같은 도움)의 본뜻이라고 믿는다.

그렇다면 페미니스트적 시각을 적용하여 가정과 교회에서 여성의 역할을 재배치하는 제도는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어떤 방향으로 진행되어야 할까. 그건 '미리' 정할 부분이 아니라, 편견과 제한을 그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바야흐로 세상은 '재능 사회(Meritocracy)'로 진입하고 있다. 신분도, 성별도 아니고, 개인이 가진 재능이 평가받고 통치권을 갖게 되는 사회를 의미한다. 이러한 때에 교회가 여성의 도움을 제한하는 것은 그야말로 반시대적일 뿐만 아니라 반성서적인 행태가 아닐 수 없다.

2. 미리암과 드보라의 카리스마적 리더십

성서 편집사를 배우다 보면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유대인들의 공동체든 기독교 교회 공동체든 언제나 그 시작은 참으로 '양성평등적'이라는 사실이다. 그런데 후대에 저술, 편집된 본문을 읽으면 여지없이 남녀의 성차에 입각한 제한을 신적 규율로 정당화하는 본문이 대거 등장한다. 결국 하나님의 계시 사건으로부터 멀수록 인간은 자신의 이익을 위한 편견어린 입장을 취하게 된다고 볼 수 있다. <기독교 교회의 사회적 교훈들 The Social Teaching of the Christian Churches>에서 에른스트 트뢸치(Ernst Troeltsch)가 밝힌 '사회학적 법칙'에 따르면 이는 '제도화(institutionalization)'의 결과이다.4)

제도화가 진행되다 보면 그 말미에는 '꼭' 살아 있는 신앙을 외면하고 화석처럼 딱딱해진 율법과 조직을 자기 편의대로 사용하는 기득권이 발생한다. 교회 조직에서는 사제 집단일 것이고, 가부장제 사회에서 진행되었으니 성별로는 '남자'가 기득권자가 될 것이다. 당연 배제되는 자는 평신도요, 그리고 여자이다.

해방의 하나님, 유리방황하며 종살이하던 히브리인들을 구원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새로운 삶을 살고자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공동체 역시 처음엔 여성 리더십을 제한하지 않았다. 모세와 아론의 누이 '미리암'도 리더십을 가진 여성 중 하나였다. 그녀는 구약성서에서 '여선지자'라는 타이틀을 제일 먼저 받았던 여인이다. 사사 드보라 역시 이스라엘 공동체의 리더였다. 공동체의 송사 문제를 치리했다 하니 그녀는 필시 지혜와 판단력을 가진 '하나님의 사람'이었을 거다.

하나님의 카리스마는 남녀를 가리지 않고 부여된다. 이것이 '성경적'인 실재다. 그리고 오늘날이야말로 그 카리스마를 공적으로 발현하며 능력을 키운 여성들이 참으로 많다. "여자들이 오히려 여성 리더를 더 안 뽑아요." 이런 말로 여자들을 편 가르기 하지 말라. 이는 일시적인 문제요, 무엇보다 현재 교회 구성원 다수가 기존의 여성 담론을 깊이 내면화하고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일이다. 이들은 "거세된 여성"이다. 이러한 여성들이 교회 안에 많다는 것은 가부장적 인식을 바꿀 문제이지 여자에게 리더십을 거둘 이유가 될 수 없다.

3. 슬로브핫의 다섯 딸들: 여성의 목소리가 반영되는 공동체

그럼 무엇부터 할까. 우선 여성들의 목소리가 공적 장에서 들려야 한다. 여자에 ‘대한’ 남자들의 이야기는 이미 충분하다. 그리고 부적절하다. 여자에 의한 자기 의미 추구가 들려야한다. "거세된 여성"은 가부장제 아래서 형성된 의미만을 반복할 것이므로 그녀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교회 안에 새로움을 가져오지 못한다.

페미니스트들이 "명예 남성"이라고 부르는 여자들의 의미 추구 역시 우리가 공적인 장에서 들어야 하는 목소리가 아니다. 그녀들은 생물학적으로만 여성일 뿐, 가부장제적 시스템에서 언제나 '남자'의 역할과 의미를 추구해 왔기 때문이다. 우리가 들어야 하는 목소리는 그동안 가부장제 아래서 오랫동안 '침묵'하는 위치에 강제로 배치된 여성들, 그러나 자기 정체성과 목소리를 스스로 찾고자 시도하는 여성들의 것이다. 그래서 나는 페미니즘이 긍정하는 '여성'에 대해 이렇게 정의한 바 있다.

"페미니즘이란, 현 체제 밖의 시선이고 사유이고 언어이다. 5000년 가부장 역사 가운데 가장 대규 모로, 가장 지속적으로 시스템 안에 있었으나 현재의 시스템을 만드는 데 참여한 바 없고, 이 시스템 안에서 자기 위치 역시 스스로 결정한 바 없었던 여성들이 대표성을 가질 수 있는 '주의'이다. 그러나 가부장적 시스템을 옹호하며 개인으로서 '명예 남성'의 삶을 선택한 생물학적 여성들의 의미 추구는 '체제 안'의 사유와 행동이기에 페미니즘이 아니다. 또한 생물학적 남성(그리 고 그 어떤 자기 정체성을 가지든)이라 해도, 주체로서의 자기주장이 현재의 시스템을 만드는 데 반영되지 못했던 사람이라면 그 역시 은유로서는 '여성'이기에 그의 자기 해석은 페미니스트 적 성찰에 포함되어야 한다."5)

이러한 정의로 볼 때, 성서에 등장하는 슬로브핫의 다섯 딸들은 '페미니스트'이다. 비록 제한된 형태이긴 하지만, 여성들의 의미 추구가 현행법에 반영되게 만든 첫 여성들이었기 때문이다. 회막 앞이란 공간은 그야말로 '공적'인 장이다. 더구나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드리는 청원이니 현재의 신법에 대한 반기 혹은 도전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슬로브핫의 다섯 딸들은 서로 연대하여 당당하게 그 앞에 섰다.

슬로브핫의 다섯 딸들이 이 공동체를 향하여 공적으로 발화한 사건은 매우 중요하다. 그녀들은 자본주의적 이윤 추구의 의미에서 자신들의 분깃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축복에 대한 자신들의 권리를 찾고자 함이었다. "분명히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에서 하나님의 임재와 더불어 살아가는 축복된 삶의 징표로 땅을 분배해 주신다고 했는데, 아들이 없다는 이유로 '우리 아버지의 분깃'이 사라져야 한다는 말인가. 딸들은 '사람'이 아닌가. 우리는 '우리 가문에 내리는 하나님의 축복'을 승계할 권한이 없나." 이런 질문이었다. 하나님의 축복을 사모한 것이었다.

물론 신율이 확장되는 데 있어 '원칙'은 있다고 본다. 다른 목소리라고 무조건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원칙은 '보편성'이다. 그 의미가 공동체 안에 반영되었을 때에 배제하는 자가 없나? 하나님의 창조물인 만물이 다 그 법의 효력 안에서 생명을 누리고 자유를 만끽하며 살아갈 힘을 부여받는가? 만약 이러한 물음에 "예"하고 답할 수 '없는' 법령이라면, 여전히 그 법은 '하나님의 법'이란 이름으로 공포되었을지라도 수정되어야 한다.

그리고 수정을 위한 가장 중요한 선행조건은 현재의 법을 만드는 데 참여한 적이 없는 이들의 '자기 해석'이다. 그래서 어쩌면 하나님나라는 자꾸 뒤로 물러나고 종말은 자꾸 지연되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배제된 마지막 한 사람, 한 생명의 의미를 공동체 안으로 불러오기 위하여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마음이라고 믿는다.

4. 마음으로 음욕을 품은 자도 간음한 자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응시의 혁명

그러니까 '여자를 온전한 사람'으로 전제하지 않은 상태에서, 여자들의 의미 추구가 반영된 적이 없는 방식으로 성립된 교리요 윤리라면, 이는 재고되어야 한다. 여자도 사람이니까. 태초부터 선포된 이 '페미니스트적 선언'이 가부장적 유대교 공동체에서 지켜지지 않은 것은 결코 하나님의 잘못이 아니다. 보편적 계시를 자기들 입맛에 맞게 제한하고 뒤튼 남자들의 잘못이다. 하여,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받으신 예수께서는 '남자'임에도 세상 전제들을 초월하여 그리 경고하신 것이 아니겠나.

"또 [모세의 법으로부터]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제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마 5:27-30)."

예수께서 이 교훈을 통해 말씀하시는 바는 그야말로 당대의 '간음'에 대한 통념과 정의를 넘어선다. '내 소유가 아닌 여자'라는 규정도 없다. 성행위에 집중된 간음 규정도 없다. 이 메시지의 혁명성은 여성 응시의 방식을 바꾸라는 데 있다. 여자는 '성적 대상'이 아니다. 사람이다. 그러니 여자를 오직 사람으로, 주체로 대하라. 그리 아니하면 천국엔 들어가지 못한다. 아니, 오히려 여자를 성적 대상으로만 생각하는 '놈들'은 다 지옥에 던져진다. 얼마나 명료한 말씀인가!

근현대적 법 제도에 익숙한 남성 기독교인들은, 예수께서 경고하신 '남성적 응시'를 혼외 관계에 있는 여성에 대해서만 적용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에게 아내는 '허가받은 성적 대상'이다. 아내를 응시하는 시선은 물론 성적 행동마저도 '의무요 권리'라고 말이다. 하지만, 예수의 교훈을 다시 읽어 보라. 예수께서 어디 혼외 관계에 대해서만 말하는 것이라고 규정하셨나.

성서의 구절을 더하거나 빼지 말라고 핏대를 높이는 사람들이 왜 정작 더하거나 빼지도 말고 마음에 새겨야 할 이 구절에 대해서는 멋대로의 해석이나 편리한 면죄부를 더하는지 모르겠다. 예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다. 여자를 성적 대상으로 응시하는 자는 이미 간음한 자이 되, 그런 응시를 하는 눈, 이를 행동으로 옮기는 손은 차라리 빼고 자르는 것이 영혼의 구원을 위해 나은 선택이라고.

오늘날 '미투(MeToo)' 운동이 주목할 점인 까닭은, 예수의 교훈 이후 무려 20세기나 지나서야 이런 여성 응시와 행동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지하는 정서가 '사회적으로 합의'되었음을 반영한다. 물론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응시하고 추행하는 사람들이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것이 옳지 못하며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지속될 수 없다는 것에 대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의하는 시절이 되었기 때문에 '미투'도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시절에 '카리스마'를 지닌 교계 지도자라는 미명 아래 목회자나 간사, 리더들의 성추행과 성폭력을 덮는 행위, 교회 공동체의 미덕을 앞세워 피해자의 감정은 아랑곳 않고 무조건적으로 용서하라는 폭력적 행동은 그쳐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어떤 제도적 장치를 구상 해야 할까. 개교회적 치리로 결정짓겠다는 것이 대부분 어떤 결과로 귀결되는지 다 아는 마당에, 그렇다고 세상 법정으로 가자니 교회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이 된다는 말들을 많이 듣는다.

국민국가들(nation-states)의 이익이 충돌하고 결국에는 세계대전이라는 비극적 대가를 치른 경험으로 초국가적 국제기구들을 만들었듯이, 개교회나 교단 이기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일종의 '초교회적, 초교단적 판결 위원회 제도'가 필요한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도 해본다. 물론 그 단체마저 또 하나의 권력기관이 될 가능성도 있겠지만, 자본이나 권력이 아닌 소명 직분으로서 감당할 수 있도록 구성하되 각 분야 전문가 기독인들로 모은다면, 세상 법정으로 나가기 전에 적어도 '기독교적 조정과 해결의 중재 기관'으로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물론 쉬운 시도는 아닐 것이다. 구성도 발족도 진행도 고민해야 할 지점이 많다. 하지만 이런 방식의 제도적 해결책은 모색되어야 한다. 아울러 병행되어야하는 것은 '성 인식'에 대한 재교육이다. 성경에는 남성들의 '위줄'적 여성 응시만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너무 오랫동안 남성 종교 지도자들이 이 위줄'만'을 강조하고 이를 경줄처럼 가르쳤을 뿐이다. 그러나 성서에는 '페미니스트' 예수의 언행을 비롯하여 가부장적 문화의 전제들을 초월하고 하나님나라의 보편성을 담은 여성 응시들이 많다. 이를 살뜰하게 찾아내고 공적으로 담론화할 필요성이 있다.

5. 베다니의 마리아, 사마리아 여인의 '좋은' 선택: 말씀 전도자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말씀'의 해석과 적용에 있어 여성들의 기회와 자리가 많아져야 한다. 여성이 읽는 성서, 교리, 전통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들려야 그 이야기들이 공동체 안에서 권위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자리'가 통치하는 사회라는 현대 관료제(Bureaucracy) 사회에서 그 자리의 성비가 극단적으로 불균형한 사례로 가장 대표적인 직업군이 목회자이다. 만약 여성에게는 '말씀을 해석하는 은사'가 주어지지 않는다고 말하려 한다면 분명하게 말하겠다. 그건 남성중심주의적 편협함이지 결코 예수를 따르는 사람의 언사가 아니다.

말씀을 사모하였던 베다니의 마리아를 향해 예수께서는 분명 "그녀가 좋은 것을 택하였다"고 하셨다(누가복음 10장 42절). 그녀는 예수의 메시아 됨을 가장 정확하게 이해했다. 다른 제자들이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하나님나라'를 마치 세상의 정치체로 오해하고 그 나라가 성립되면 한자리하려 자리 다툼을 하는 와중에, 베다니의 마리아는 정확하게 그 나라의 통치 질서를 이해했고, 그 나라를 외치시는 예수의 메시지가 누구에게 위협이 될 줄을 알았다. 그리고 예수께서 타협하지 않으실 것도, 하여 결국 은 어떤 방식으로 메시아직을 수행하실 지를 이해했다. 그랬기에, 다른 제자들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귀한 향유 옥합을 깨서 예수의 죽음을 예비했을 것이다.

사마리아 우물가의 여인도, 그녀가 전한 예수에 대한 증언들로 인해 그 지역이 모두 예수를 따랐다고 되어 있지 않나(요한복음 4장 5-42절 참조). 이 여인은 필시 사마리아 지역 복음화에 앞장선 말씀 선포자였을 것이다. 그녀는 이미 예수와의 논쟁에서 그 능력과 열정을 입증했다. 사마리아의 여인은 영적 목마름에 갈급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요 4:20)." 대뜸 이렇게 도전적인 질문을 던지기까지 그녀가 마음에 품고 있던 의문과 영적 갈급함이 얼마나 컸을지 상상해 보라. 예루살렘 성전으로 예배드리러 갈 형편이 못되는 여인이었을 수도 있다. 아니, 평소 사마리아인들을 멸시하는 유대인들의 독선과 편견이 싫어 예루살렘'행'을 거부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는 동안, 내면에서 드는 영적 질문으로 인해 그녀는 얼마나 갈급했을까.

"도대체 하나님이 창조주요 우리 모두의 주인이시라면, 어찌 예루살렘 성전에만 갇혀 계시겠나. 거기서 드리는 예배만 받으시겠나. 사마리아인은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배제되었단 말인가?" 이런 질문들로 괴로웠던 시절이 길었으니 예수의 말씀을 듣고 뛸 듯이 기뻐했을 일이다. 성스러운 산이나 예루살렘 성전의 문제가 아니라 영과 진리로 드리는 마음 자세가 중요하다는 말씀이 시원한 생수와 같았을 거다. 더구나 그녀는 자신의 오랜 고민과 영적 갈증을 해결해준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부른다.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요 4:29)." 예수 메시지의 핵심을 깨달아 알고, 영혼의 구원을 얻은 사마리아 여인은 필시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주요한 복음 전도자였을 것이다.

6. 교회의 이름 "서로가 함께": 바울이 받은 교회 공동체의 원리

교회는 권위를 나누는 공동체이다. 초대교회의 큰 원칙이었던 '소유 나눔'은 지금까지도 일정 정도는 교회의 전통으로 자리 잡으며 실천되고 있다. 초대교회 시절만큼 전격적으로 전 재산을 함께 모으고 필요에 따라 쓰는 정도는 아니지만, 절제하고 아끼면서 자신의 소유 일부를 떼어내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 구제와 봉사에 소유를 나누려 애쓰는 신도들이 많다. 그런데 유독 권위만큼은 사제나 목사에게 일임하려 한다. 루터의 '만인제사장' 선포가 중심이 되어야 할 개신교조차 그러하다.

아니, 오히려 개신교의 경우는, 가톨릭 교황의 권위를 개교회 담임목회자가 모두 독점하고 있는 형국이다. 이것은 '성경적'인가? 천만의 말씀이다. 여성 응시에 있어서는 시대적 제약을 초월하지 못했던 바울이, 교회로 살아가는 신앙인들의 모습에 대해서는 놀라운 계시를 받았다. 바울이 교회의 원리를 설명하며 가장 많이 쓴 표현이 "서로가 함께(kai allelon)"라고 한다. 신약성서신학자 게르하르트 로핑크가 이 표현들을 모아 놓았다.

"서로 앞장서서 남을 존경하고(롬 12:10), 서로 합심하고(롬 12:16), 서로 받아들이고(롬 15:7), 서로 충고하고(롬 15:14), 서로 기다리고(고전 11:33), 서로를 위하여 같이 걱정하고(고전 12:25), 서로 화목하고(살전 5:13), 서로 선을 행하고(살전 5:15), 서로 사랑으로 섬기고(갈 5:13), 서로 남의 짐을 져주고(갈 6:2), 서로 위로하고(살전 5:11), 서로 사랑으로 참아주고(엡 5:21), 서로 죄를 고백하고(약 5:16), 서로 용서하며(골 3:13),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약 5:16), 서로 친교를 나누며(요일 1:7), 서로를 건설하는(살전 5:11) 사람들"6)

이게 교회다. 처음의 교회는 이랬다. 항상 그러하지는 못했을지언정 그러려고 노력했다. 산 신앙을 가 진 구성원들이 성령 안에서 서로를 마주 보면 이렇게 지낼 수 있다. 이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성령을 모독하는 것이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의 능력을 믿지 아니하는 것이다.

V. 나가는 말,
하나님나라의 관계적 혁명을 교회에 적용하는 과제

"너무 원론이다. 좋은 말이야 누구인들 못하나. 문제는 제도를 바꿀 힘을 가진 사람들은 제도를 바꿀 의사가 없다는 것이지." 이런 회의주의가 교회 안팎으로 존재함을 안다. 사실 많은 재야의 기독인들이 "이미 교회는 복원력을 잃었다"고 판단하는 시점이기도 하다. 구원의 방주는커녕, 제대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 내려면 오히려 제도 교회 밖으로 '나와야' 한다고 말이다.

물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사람들'이 교회일진대, 건물 안이든 밖이든 무슨 큰 차이가 있으랴. 그러나 나는 사회윤리학자로서 아직까지는 '제도'의 힘을 믿는다. 제도란 "한 사회의 구성원이 합의한 같이 살기의 방식"이다. 따라서 그 안의 구성원들이 지금까지의 "같이 살기 방식"에 합의하지 않는다면, 이 제도에 문제를 제기하고 묻는다면, 결국 제도는 다시 새로운 합의를 향하여 재구성되는 법이다. 이러한 제도적 결실을 얻기 위한 출발점으로서 몇 가지 제언을 해 본다.

1. 자매들에 의한, 자매들만의 소그룹 모임을 시작하라

자매들은 더 이상 '남성'에게 해석권을 넘기지 말았으면 한다. '어이없게도' 페미니즘조차 남성 목회자들이 가르치는 교회들을 보았다. 그분들의 진심을 의심치 않으나, 그건 페미니즘의 제1원칙을 위배하는 행위다. "하지만, 우리 교회 자매들은 페미니즘에 아예 관심도 없고, 너무 무지해서요." 신학교에서 페미니즘을 배우고 자매들을 '교화'하려는 열정을 담은 젊은 목회자들의 변이다. 십분 이해도 되며, 초기 상황에서 그들이 가진 역할과 힘 역시 인정하는 바이다. 하지만 모임의 필요성을 인식시키고 문제의식을 가질 수 있는 정도의 특강이나 입문서 읽기와 같은 준비 작업까지가 '남성' 목회자들의 역할이 아닐까 싶다. 권위를 부여받아 본 적이 없는 여성들이기에, 교회 안에서 스스로의 말하기 방식을 찾고 자기 의미를 발화하기까지, 시간이 걸리고 여러 시행착오를 겪을 것은 자명한 일이기에, 그녀들에게 그렇게 '헤매 볼' 권리와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본다.

2. 공동체의 전제를 바꾸는 '사건'을 만들어라

자매들끼리의 모임을 통해 어느 정도 공부가 되고 용기가 생긴다면, 공동체 내에서 그간 축적한 내용들을 발표하거나 소통할 수 있는 시도를 모색해 보는 것도 좋은 '전략'이라는 생각이 든다. 청년부나 장년부 모임에서 여성 발제자와 여성 패널, 그리고 여성 사회자로 구성된 프로그램을 통해 여성의 의미 추구와 권위 나눔의 현장을 교회 공동체 모두가 경험해보는 일들이 잦았으면 한다. 그래야, 그간 '남성 중심'으로 포진되었던 강단이나 공적 공간의 권위가 서서히 나누어질 수 있다.

만약 교회에서 제도적 힘을 가진 남성들이 이런 기회를 허락지 않는다면, 다른 방식의 시도들도 얼마든지 있다. 이런 제안을 듣고 한 교회의 자매들은 당장 청년부 목사님의 설교를 가지고 자매들끼리 토의하는 모임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동안 '선포하는 자'와 '듣는 자'의 구조로 지어진 교회 예배당의 배치도 바꾸어 보면 어떻겠느냐는 제안도 해 본다.

매주는 어려워도 특별한 주일에는 "2분 설교"와 같은 메시지 전달 방식도 시도해 보면 좋겠다. 공동 본문은 목회자가 선정하더라도, 각 교인들이 그 말씀을 묵상하며 일주일 동안 기도와 공부를 하고, 주일예배 시간에는 조용하게 한 사람씩 나와서 자신이 그 말씀에서 받은 은혜를 딱 '2분씩'만 나누는 방식이다. 조금은 민망하고 유치한 방식이기도 하지만, 교회 큰 행사가 있는 날에는 남자들만 한복을 입고 양쪽으로 도열을 해 봐도 좋겠다. '도발적'인 시도로 이런 '미러링'도 일회적으로는 유의미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3. "서로가 함께"라는 원칙을 명심하라

그러나 이 생각이 좋다고 하여, 그럴 의도가 없는 남자 청년들에게 '강압적'으로 한복을 입힌다면 그 역시 성차별적 행동이다. 가부장적 공동체의 전제를 바꾸는 일은, 공동체가 함께 공부하고 논의하고 합의하는 과정들을 통해, 그리고 유쾌하고 재기 발랄하게 진행되어야 한다. 공동체의 전제를 바꾸는 이 싸움은 매우 긴 싸움이 될 것이기 때문에, 지치면 안 된다. 무엇보다 나를 부양할 힘을 남겨 두어야 한다. 작은 사건이 하나씩 함께 논의되고 실천될 때마다 우리가 속한 공동체는 '달리' 생각할 기회를 얻을 거다.

이건 우리만 해방되는 사건이 아니다. 답을 가졌다고 생각하면서 가장 '비성경적'으로 살고 있는 가부장적 기독교인들도 해방하는 사건이다. 그러니 이제 시작하자. 교회 안에서 '다름'이 들리도록, 보이도록 만드는 사건들을.

백소영 / 이화여자대학교 기독교학과 교수

*위 글은 6월 5일 한국교회탐구센터가 진행한 '페미니즘 시대의 그리스도인' 포럼에서 백소영 교수가 "페미니스트 성서 해석으로 제안하는 교회 '제도' 개혁"이라는 주제로 발표한 내용입니다. 허락을 받아 전문 게재합니다. - 편집자 주

각주

1) 울리히 벡, 엘리자베트 벡-게른샤임 지음, 강수·권기돈·배은경 옮김, 『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새물결, 1 1999;2006), 63.
2) 이러한 현대 개신교 여성들의 실존을 질적 연구와 더불어 조사한 결과물이 『엄마 되기, 아프거나 미치거나: 21세기 한국 개신교 기혼 여성의 모성 경험』(대한기독교서회, 2009)이었다. 공적 역의 작동 방식과 사적 역의 작동 방식이 모순된 가운데, 사적 영역의 담당자로 가르침 받는 개신교 여성들의 경우, 자기를 포기한 여성(아프거나)과 양자 사이에서 갈등하는 여성(미치거나)으로 양분되고 있음을 발견한 연구다.
3) 리랜드 라이큰 지음, 김성웅 옮김, 『청교도-이 세상의 성자들』(생명의말씀사, 1995; 2003). 126쪽에서 재인용.
4) Ernst Troeltsch, The Social Teaching of the Christian Churches, vol. II (Westminster/John Knox Press, 1912; 어판 4 1992)의 주된 논지를 요약했다. 기독교 2000년 역사를 세세하게 분석하면서 트뢸치가 마지막 결론으로 제시한 교회 공동체의 유형은 제도화한 '교회' 유형, 카리스마적 공동체인 '종파' 유형, 그리고 이 둘과는 다른 범주로서 율법이나 규율보다는 신비주의적 체험을 강조하는 '신비주의' 유형이다. 교회 유형과 종파 유형 사이에서는 일종의 변증법적 리듬을 갖는다는 사회학적 법칙을 정립하다.
5) 백소영, 『페미니즘과 기독교의 맥락들』 (뉴스앤조이, 2018), 20-21쪽.
6) 게르하르트 로핑크 지음, 정한교 옮김,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분도출판사, 2004), 61-65, 79-81, 85-87, 92, 170-1716 쪽에서 발췌,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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