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관이 영성이다 - 영성 형성에 미치는 습관의 힘> / 제임스 K. A. 스미스 지음 / 박세혁 옮김 / 비아토르 펴냄 / 329쪽 / 1만 5000원

[본 서평은 "인문학&신학연구소 에라스무스"의 수요 독서회 <습관이 영성이다>(비아토르) 토론 시간에 발표한 글입니다.]

제임스 스미스는 도발적이고 도전적이다. 그는 안전한 정통의 길을 손쉽게 따르기보다 대체로 기존 고정관념의 뿌리를 캐내어 쥐고 흔들고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려 한다. 많은 기독교인이 세속화를 염려하고 있을 때, 그는 <급진 정통주의 신학>(기독교문서선교회)을 통해 근대성과 세속화에 대한 근본적 방향 전환을 탐구했다. 많은 사람이 포스트모더니즘을 상대주의와 단순하게 동일시하여 거부할 때, 그의 책 <누가 포스트모더니즘을 두려워하는가?>(살림)는 데리다, 리오타르, 푸코를 통해 새로운 제자도의 가능성을 주장했다.

스미스가 속한 진영이 주로 보수적 칼빈주의나 복음주의라는 점을 고려할 때, 급진 정통주의는 상당히 낯선 신학 운동이었고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긍정은 꽤나 의심스러운 주장일 수 있었다. 그러나 스미스는 개의치 않았다. 그는 열린 태도와 과감한 탐구로 기존의 보수적 기독교 진영이 직면한 문제를 새로운 각도에서 조명하고자 했다. (적어도 내가 그동안 접했던 제임스 스미스는 그랬다.)

그런 제임스 스미스가 이번에는 기독교 제자도에 관한 과감하고 근본적인 주장을 내놓았다. <습관이 영성이다>는 단지 예배학이나 예전에 관한 책이 아니다. 기독교 제자도의 총체적이고 근본적인 전환을 요구하는 책이다. 물론 세부적으로 이견이나 비판의 여지가 있겠지만, 전체적으로 그의 주장은 상당히 전복적이고 급진적이며 우리의 제자도에 대한 이해를 뿌리부터 재고하게 만든다. 어쩌면 제임스 스미스의 작업은 미로 속에서 길을 잃어버린 복음주의 기독교를 위한 하나의 이정표가 될지도 모르겠다.

1. 새로운 인간론

행동은 생각이 아니라 욕망에서 나온다

제임스 스미스의 작업은 제자도 방법론이 아니라 인간론에 대한 재고에서 시작된다. 기존 복음주의/칼빈주의 진영의 제자도가 삶의 변화로 이어지지 못한 원인은 주지주의적 인간론 모델에 근거했기 때문이다. 주지주의적 인간론 모델은 인간의 의식이 사상과 신념에 따라 특정한 행동을 선택한다고 전제한다. 이 모델에 따르면, 제자도의 변화는 일차적으로 사상과 신념, 즉 생각의 변화를 통해 이루어진다. 그러나 스미스는 이 전제를 정면으로 반박한다. 인간의 행동을 결정하는 근본 요인은 지성이 아니라 욕망이다.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향해서 나아가는 그곳을 고대 철학자들은 '텔로스' 곧 우리의 목표, 우리의 목적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우리가 살면서 지향하는 '텔로스'는 일차적으로 우리가 알거나 믿거나 생각하는 무언가가 아니다. 오히려 '텔로스'는 우리가 원하는 바, 갈망하는 바, 욕망하는 바다. 그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관념적 이상이라기보다 우리가 욕망하는 '좋은 삶'에 대한 전망에 가깝다." (28쪽)

인간은 누구나 좋은 삶을 욕망한다. 그리고 인간은 좋은 삶을 제공해 주는 것처럼 보이는 것을 원한다. 인간의 행동은 거리 두기의 이성을 통한 합리적 선택의 결과가 아니라, 좋은 삶(텔로스)을 향한 욕망의 결과인 것이다.

제임스 스미스는 기존 복음주의/칼빈주의 진영의 제자도를 대체로 주지주의에 근거한 행동주의로 규정하는 것 같다. 이강일의 연구에 따르면, 한국 복음주의 운동은 전통적 형태를 지나 1980년대 중반에 실용적 복음주의로, 1980년대 후반에 사회참여적 복음주의로 분화했다. 실용적 복음주의는 빌 하이벨스(Bill Hybels)나 릭 워렌(Rick Warren) 등을 대표로 하여 복음주의 교회의 성장과 선교를 효율적으로 추구했고, 참여적 복음주의는 총체적 복음을 주장하면서 기독교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했다.

미국 복음주의와 한국 복음주의가 대체로 유사한 경로를 거친다는 점을 감안할 때, 제임스 스미스 비판의 범위는 전통적 복음주의만이 아니라 실용적 복음주의와 참여적 복음주의 모두를 포괄하는 것으로 보인다. 즉, 교회 성장과 선교에 집중했던 복음주의 진영과 사회참여 및 문화변혁을 추구했던 복음주의 진영은 둘 다 일종의 (소박한) 주지주의 모델을 전제했다는 것이다.

교회와 성장과 선교에 몰두했던 실용적 복음주의의 경우 일종의 반지성주의로 간주되기도 한다. 즉, 복음주의를 십자가 중심주의, 성경주의, 회심주의, 행동주의로 분석했던 베빙턴 사각형의 관점에서 보면, 행동주의와 반지성주의가 결합하여 복음 전도와 교회성장주의로 귀결되고 복음의 지성적이고 총체적인 성격을 외면한 흐름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제임스 스미스는 이들도 여전히 주지주의적 인간론 모델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평가한다. 인문학, 사회과학, 자연과학과 같은 일반 학문이나 복음의 총체성 등을 외면한다는 점에서는 반지성적이지만, 여전히 성경 지식을 잘 가르치면(성구 암송 등) 생각의 변화를 통해 존재가 변화된다고 본다.

"아이로니컬하게도 이런 모습은 '반지성주의'라는 평가를 받는 기독교 신앙의 다양한 형식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중략) 우리가 생각을 통해 거룩함의 길로 나아갈 수 있다고―정보 전달을 통한 성화―확신한다는 점에서 '주지주의적'이다." (18쪽)

이에 비해 참여적 복음주의 진영은 복음의 총체성을 인정하고 일반 학문과의 연결성을 강조한다. 이에 따라 일정한 사회적 실천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참여적 복음주의도 여전히 주지주의적 인간론 모델 속에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기독교 세계관 운동'이다. 1970년대 중반 이후 복음주의 진영의 사회참여를 견인한 이론적 근거는 기독교 세계관이었다. 그러나 기독교 세계관 운동은 1990년대 중반 이후에 정체되기 시작하면서 운동의 동력을 상실하기 시작했고, 2000년대 이후로 더 이상 삶의 변화로 연결되지 않는 일종의 지성주의 운동으로 귀결되고 말았다. 현재 포스트복음주의로 불릴 수 있는 젊은 복음주의자들의 경우, 기존 기독교 세계관 틀에 매이지 않고 인문학, 사회과학, 자연과학의 지식을 직접적으로 전유하여 기독교의 담론과 실천을 더 적극적이고 다양한 각도에서 반성하고 성찰하려는 태도를 보인다.

제임스 스미스의 논의는 이보다 더 근본적인 것으로 보인다. 스미스는 고도의 지성 활동이 제자도에 불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가장 발전적인 지적 성찰조차도 여전히 주지주의적 모델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즉, 계몽이 아니라 욕망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제임스 스미스에 따르면, 우리의 행동은 의식적 사고가 아니라 욕망의 방향을 따라 결정된다. 그렇다면 일차적으로 의식적 사고를 변화시켜 행동의 변화를 일으키려는 접근 방식은 결코 목표를 달성할 수 없을 것이다. 결국 우리 제자도의 실패는 지성의 실패 때문이 아니다. 지성의 계몽을 통해서는 제자를 길러낼 수 없다. 제자가 되려면, 욕망이 변해야 한다.

욕망은 생각이 아니라 습관에서 나온다

제임스 스미스는 이제 주지주의에 대한 비판에서 욕망에 대한 분석으로 넘어간다. 인간의 욕망은 어떻게 형성되는가. 이미 형성된 욕망은 어떻게 재형성될 수 있는가. 여기서 스미스는 습관의 힘에 주목한다. 여기서 습관은 우리가 생각하는 단순한 반복적 행동이 아니다. 습관은 법을 내면화하여 의식적 선택과 무관하게 무의식의 차원에서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행동이다. 이는 실제로 사람 됨의 일부가 된 것이고, 덕 또는 성품이라 부를 수 있다. 욕망을 우리에게 내재하는 근원적 성향이라고 한다면, 이 근원적 성향은 덕의 형성을 통해 정향되는 것이다.

여기서 덕의 습득이 지성의 길을 따르지 않는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첫째, 덕은 무의식 속에 내면화한 사람 됨의 일부이기 때문에 의식적 사고와 무관하게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 둘째, 덕은 지적 학습이 아니라 정서적으로 습득된다. 셋째, 덕은 모방과 반복적 실천을 통해 무의식에 새겨진다. 이는 선천적 본능이 아니지만, 후천적으로 습득된 제2의 천성과 같다.

습관은 생각이 아니라 예전을 통해 형성된다

이와 같은 덕의 특징은 이 책에서 상세하게 분석하는 예전(의례)과의 접촉점을 만들어 낸다. 예전은 특정한 서사의 내면화를 위해 주기에 따라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실천들이다. 즉, 예전은 지식 또는 정보의 전달을 목표로 삼지 않고, 우리의 무의식에 형성되는 욕망을 형성하거나 재형성하려 한다. 무의식 속에 있는 성향은 의식적 사고가 아니라 반복적 실천, 즉 예전의 경험을 통해 형성되거나 재형성된다. 이렇게 형성된 성향은 우리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 '실천(예전)→형성(덕)→실천(행동)'이라는 순환적 관계에서 예전은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우리가 믿는 대로 살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본래 우리는 믿는 대로 사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믿는 바 또는 생각하는 바는 우리 행동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오히려 우리가 믿지 않고 의식하지 않고 있지만, 우리 삶에서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실천을 구성하고 있는 다양한 문화적 의례들이 우리를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쇼핑몰에 대한 스미스의 예전적 해석은 아주 재미있다. 쇼핑몰 입구에는 구도자를 위한 완화의 공간이 있고 대형 지도(일종의 예배 순서지)가 제시된다. 쇼핑몰의 수직적 구조는 초월적 개방성을 느끼게 하고 수평적이고 일상적인 산만함에서 벗어나는 느낌을 받게 한다. 일상의 시간은 멈춘다. 쇼핑몰 공간 내부에 배치된 예전과 축제의 달력, 휴일과 축제를 나타내는 색, 상징, 이미지, 그리고 우리에게 모방 욕구를 일으키는 마네킹(성상)이 순례자들의 의례를 구성한다. 계산대에는 거래를 주관하는 제사장이 서 있고 순례자는 구매를 통해 제사와 봉헌에 참여한다. 그 대가는 제사장의 축복 기도와 좋은 삶을 구현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대다.

이렇게 예전의 관점에서 쇼핑몰을 분석해 보면, 소비주의 서사가 쇼핑몰의 물질적 형식을 통해 구현되고 우리의 실천을 통해 욕망으로 연결되는 과정을 이해할 수 있다. 이 과정은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더욱 강력한 영향을 발휘한다. 우리가 믿는 대로 살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의 서사가 예전을 통해 우리를 형성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우리 삶은 방금 언급한 소비의 예전과 같은 다양한 세속 예전들이 점령한 상태다.

2. 새로운 예배론

성령이 우리를 변화시키는 방법은 예전을 통한 성품의 형성이다

제임스 스미스는 이렇게 예전 또는 예배에 대한 우리의 관점을 형성적 측면, 즉 교육적 기능에서 출발하여 새롭게 만들고 있다. 첫째, 예전의 일차적 기능은 우리 생각의 표현이 아니라 우리 성품의 형성이다. 우리는 보통 예배를 '드리러' 교회에 간다. 즉, 예배는 일차적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우리의 신앙고백 또는 찬양의 행위로 이해된다.

스미스에 따르면, 종교개혁적 전통에서 예배는 일차적으로 '위에서 아래로의 관점'으로 이해된다. 예배는 우리가 하나님께 무언가를 드리거나 바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언가를 베푸시는 자리인 것이다. 예배는 땅에 있는 우리가 하늘의 신비와 대면하는 시간이고, 이 만남은 예전의 성례전적 기능 속에서 이루어진다. 예전은 성경의 서사를 물질적 형태로 구현한 형식에서(예를 들어, 세례와 성찬 등) 우리의 무의식적 성향이 하늘과 만나게 한다.

여기서 제임스 스미스는 근대성의 핵심인 세속화 또는 탈주술화를 극복하려 한다. 근대성은 물질세계에서 신비와 초월을 걷어 내는 과정으로 정의할 수 있다. 물질세계를 중립화 또는 대상화하고, 주체가 된 도구적 이성이 세계를 조작의 대상으로 바라본다. 데카르트적 관점에서 정신과 물질은 철저하게 이원화하고, 물질은 더 이상 본질적으로 어떤 의미도 담거나 전달하지 않는다. 오직 사유하는 이성만이 의미를 구성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스미스는 바로 이와 같은 데카르트적 관점이 지금까지의 복음주의/칼빈주의 제자도의 근간을 이루어 왔다고 비판한다.

예전은 성경의 지식 전달을 위한 도구이자 우리의 사상과 신념의 표현 수단으로 전락했다. 예전의 형식은 초월이나 신비와 무관한 것으로 이해되었다. 찰스 테일러가 말한 '진정성의 시대' 속에서 예전은 우리의 표현을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인식되었고, 전통적 형식과 반복은 지루하고 참신하지 못한 것으로, 진정성이 부족한 것으로 생각되기에 이르렀다. 이와 같은 과정은 예전을 사실상 무가치한 것으로, 의미 없는 반복으로 간주하게 했다.

결과적으로 우리의 성품과 삶을 형성하는 예전의 역할은 급격히 축소되었다. 스미스는 이와 같은 탈주술화 또는 탈육신화를 근본적으로 전복해야 한다고 말한다. 예전이 지닌 형성적 기능을 현대 철학과 심리학의 성과를 통해 복원해 낸다. 본질적으로 인간은 생각이 아니라 욕망에 좌우되는 존재이며, 욕망의 방향은 예전적 실천을 통해 결정된다. 이 책의 원제목처럼 "당신이 사랑(욕망)하는 바가 당신이다." 그리고 "당신이 예배하는 바가 바로 당신이다."

둘째, 스미스는 예전이 교회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 속에도 있다고 말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예전은 쇼핑몰에도, 대학에도, 회사에도, 군대에도, 국가에도 있다. 우리는 알지 못하는 사이에 일상 속 수많은 세속 예전에 참여하고 그것을 반복적으로 수행하면서 무의식 속 욕망을 형성하고 있다.

따라서 교회의 예전의 강력한 회복 없이 성경 지식의 전달만으로 우리 삶이 쉽게 바뀐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스미스는 먼저 우리가 세속 예전에 담긴 서사를 읽어낼 수 있어야 하며, 교회의 예배만이 아니라 가정이나 기독교 고등교육이 의례를 통한 형성적 차원의 교육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스미스의 공공신학(public theology) 또는 문화 비평이 가능해진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정치적 자유주의의 영향 속에서 공적 영역과 종교가 산뜻하게 분리될 수 있고 분리되어 있다는 가정 속에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 이런 분리는 불가능하다. 우리의 일상은 계몽된 이성이 충분하고 적절한 지식에 근거하여 합리적으로 선택한 결과로 구성되지 않는다. 우리의 일상은 우선적으로 다양한 의례와 실천의 반복으로 구성되어 있다. 거시적인 차원에서 미시적인 영역까지 우리의 일상은 실천으로 구성되어 있고 우리는 의식하지 못한 채로 다양한 실천에 참여하면서 우리의 욕망을 형성하고 또 재형성한다.

가정에서 국가에 이르기까지 이미 구조화된 다양한 의례적 실천들을 분석하고 해석해 내는 작업은 그 자체로 일종의 기독교적 문화 비평일 수 있다. 중립화한 영역들이 사실상 다양한 서사들의 치열한 경쟁의 장이라는 점을 드러내는 것은 곧 탈주술화 또는 세속화라는 일종의 오해를 걷어 내는 작업일 수도 있다.

제임스 스미스의 공공신학은 교회를 대항적 서사의 공간, 대항 공동체로 인식하는 데서 절정에 달한다. 세상을 변화시키겠다는 복음주의의 야심찬 기획은 한때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지만, 역설적으로 복음주의가 세상에 동화(assimilation)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실용적 복음주의는 교회 성장과 선교를 통해 세상을 복음화하겠다고 했지만, 결과적으로 근대성의 서사를 무분별하게 수용한 채로 표류하는 중이다. 참여적 복음주의는 사회참여를 통해 문화 변혁을 이루어 내겠다고 했지만, 오히려 세상으로부터 변화와 개혁을 요구받는 처지에 내몰리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제임스 스미스는 서사의 복원을 예전의 회복을 통해 추구하여 세속 서사에 맞서는 대항적 서사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대항적 정치 공동체(폴리스)로서의 교회를 꿈꾼다. 그의 기획이 성공할 수 있을지는 아직 모르지만, 막다른 골목에 처한 복음주의/칼빈주의 진영을 향해 새로운 길을 열어 주는 제안인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3. 결론적 평가

제임스 스미스의 주장에 대한 몇 가지 간단한 의견을 밝히는 것으로 평가 및 결론을 대신하고자 한다.

(1) 제임스 스미스의 분석과 주장은 미국과 한국을 중심으로 한 복음주의/칼빈주의 진영에 매우 의미 있는 제안이 될 것이다. 앞서 언급한 대로 태생부터 근대적이었던 종교개혁의 지류인 복음주의와 칼빈주의는 실제로 근대성의 한계에 봉착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데카르트적 이성, 계몽주의적 주지주의가 현대 철학과 학문의 비판 속에서 그 한계를 드러내고 있고, 어떤 방식으로든 근대성을 넘어서는 포스트적 기획을 요구하는 것이 오늘날의 상황이다.

근대성에 기생하며 그 성장과 발전을 추구해 왔던 현대 복음주의 운동은 이제 근대성에 대한 성찰과 심도 있게 대면해야 한다. 제임스 스미스는 복음주의 진영에서 이와 같은 과제를 가장 앞서서 수행하고 있는 학자 중 한 사람이다. 그의 주장은 때로 제기되는 비판적 평가를 고려하더라도 우리의 관심과 숙고의 대상이 될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

(2) 제임스 스미스를 통해 인문학적 성찰이 우리의 기독교 신앙과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 그 가능성을 확인해 볼 수 있다. 신앙주의 관점에서 철학과 학문을 무가치한 부정적 대상으로 바라보거나, 세속화 이후의 현대 철학과 학문이 '무신론적 전제'에 의해 추동되어 반기독교적으로 경도되어 있다고 의심하거나, 현대 철학과 학문의 긍정적 의미를 복음 전도를 위한 변증적 용도에 한정하는 시선에서 벗어나는 것이 필요하다. 제임스 스미스는 이 점에서 매우 적절한 모범적 사례를 보여 주는 사람 중 하나다.

기독교는 분명 공적 담론이나 실천에 기여할 점을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현대 철학과 학문이 기독교의 사고와 실천을 반성하는 데 기여할 수도 있다. 일종의 승리주의적 관점이나 철저한 의심과 회의의 태도로 현대 철학과 학문을 대하기보다, 우선적으로 귀를 기울이고 경청하면서 우리의 생각과 실천을 반성하려는 태도로 인문학에 접근해 보는 것이 유익하다.

(3) 스미스의 주장이 일종의 반지성주의가 아닌지 의심해 볼 수도 있다. 실제로 대중서로 쓰인 <습관이 영성이다>를 읽다 보면, 지성과 삶의 연관성을 끊임없이 비판하고 삶은 오히려 무의식이나 실천과 관련되어 있다는 진술과 만나게 된다. 하지만 반지성주의를 주지주의에 대한 비판을 넘어 모든 지성적 활동의 무가치함이나 의미 없음을 뜻하는 것이라고 본다면, 스미스는 반지성주의자가 아니다. 실제로 스미스는 그 자신이 지적 연구를 업으로 삼는 전문철학자이다. 게다가 문화적 예전 시리즈 2권인 <하나님나라를 상상하라>(IVP)에서 이 문제를 좀 더 진지하게 다루는데, 결코 반지성주의를 옹호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314~320쪽 참고).

제임스 스미스에게 지성은 여전히 중요하다. 첫째, 실천의 '논리'를 이해하기 위한 성찰 과정에 지성이 활용될 수 있다. 둘째, 단지 "정해진 동작을 그대로 다 따르는" 것이 아니라 예배에 대한 "완전하고 적극적이며 의식적인" 참여를 통해 진정한 실천에 더 가깝게 나갈 수 있다. 설교와 (교리) 교육은 이 점에서 예배 실천의 의미를 설명하고 해명하는 기능을 담당한다. 이렇게 지성은 스미스에게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4) 하지만 스미스에게 여전히 질문을 던져 볼 수 있을 것 같다. '예전으로 충분할까?'라는 질문이다. 사실 나는 주지주의에 대한 스미스의 비판과 물질성 및 인간의 욕망에 대한 현대 철학적 성찰을 제자도에 연결한 점은 크게 환영한다. 그러나 동시에 예전의 회복만으로 삶이 정말 변할까라는 의구심도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다. 예컨대, 예전의 의미가 회복된 주일예배를 반복적으로 드리면, 교회에서 기독교인들끼리 모여 부동산 투기와 관련한 정보를 교환하고 명품 소유를 자랑하며 자녀의 경쟁적 사교육을 위해 협력(?)하는 교회 내 문화가 정말 변화될까.

나에게 지성적 접근 방식은 서양의학의 외과적 치료나 수술에 해당한다면, 스미스의 형성적 접근 방식은 우리의 체질을 근본적으로 변화하게 하려는 한의학적 치료에 가까워 보인다. 둘은 배타적 관계가 아닐 수 있다는 뜻이다. 일종의 다양한 세속주의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있는 한국교회 상황을 고려하면, 주지주의라는 이름으로 비판적 접근을 약화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철저한 이데올로기 비판이 필요하지 않을까.

여기서 예전적 접근, 형성적 제자도는 복음적 서사의 내면화, 우리의 근본적인 체질 전환을 위한 처방으로 유효하고 강력한 수단 중 하나가 될 것이다. 비판적 접근과 형성적 접근이 반드시 양자택일의 관계로 이해될 필요는 없어 보인다.

수요 독서회 현장. 사진 제공 이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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