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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과 하와의 세계', 다시 찾을 수 있을까

[서평] 존 월튼 <아담과 하와의 잃어버린 세계>(새물결플러스)

크리스찬북뉴스   기사승인 2018.05.21  15: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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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과 하와의 잃어버린 세계 - 역사적 아담의 기원과 정체에 관한 논쟁> / 존 월튼 지음 / 김광남 옮김 / 새물결플러스 펴냄 / 402쪽 / 1만 9000원

성경을 그 시대의 문화로 읽고 조명하고 해석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다. 성경에 담겨 있는 그 의미와 사상을 깊이 파악하여 하나님의 지식과 목적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교회는 하나님의 창조를 6일 창조로만 알고 젊은지구론만 고수하였는데, 이러한 사상적 배경에는 자유주의에 대항하기 위한 근본주의 성경 해석과 창조과학을 뒷받침했던 안식교의 문자적 해석이 있었다.

근본주의와 문자적 성경 해석은 학문과 과학에 대해 전반적으로 의심하고 기계적 영감설을 따른다. 또한 모든 성경 말씀에 대한 표면적 문자 해석을 지향하고 그로 인해 문화적 단절성과 분리적 교회론의 모습이 나타난다. 이에 더하여 복음에 함축된 공공성과 사회적 의미를 거부하고 세대주의 종말론을 지지한다. 이렇듯 문자적 해석은 아주 폐쇄적이고 대부분 이단들에서도 활용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개혁주의에서 지향하는 문자적 해석은 이러한 원리가 아니다. 원저자의 의도와 청중의 이해가 반영되는 해석과 적용이다. 그 말씀이 기록되었을 당시의 역사적 사회적 상황과 문화적 요소가 분석되고 문학적 구조(장르와 문법과 문체)까지 반영되는 것이다. 어휘 하나를 보더라도 그 시대 속에서 사용된 뜻을 파악해야 하고 문맥적 위치와 공동체적 배경까지 확인해야 한다.

이러한 문자적 해석은 창조와 아담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그런 면에서 존 월튼의 업적은 수준 높은 창조 해석을 도와주고 하나님 창조의 위대함과 신비함을 더 알도록 인도하는 데 있다. 근본주의에 속한 가르침을 받아 온 교회는 아마 월튼의 주장이 불편하고 창조를 부정하는 것처럼 들릴 것이다. 그러나 귀를 열고 그의 주장을 읽어 보기를 권한다. 창세기에 배경이 되는 고대 근동의 우주론과 인지 환경과 아담의 역사성을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

창조 기사

저자는 창조 기사에 대하여 이것은 물질적 창조가 아니라 기능적 창조라는 새로운 해석을 한다. 당시 고대의 우주론은 기능적 서술이였다는 것을 수메르, 아카드, 길가메쉬, 에누마 엘리쉬 등 당시 문서들을 예로 들며 종합하여 설명한다. 또한 당시 사람들은 우주의 물질적 창조보다는 우주의 각 부분들이 어떤 역할을 하고 어떤 기능을 하는지에 관심이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 창조 기사를 받는 이스라엘인들이 고대 근동 시대에 살았기에 이런 배경에서 저자의 글을 이해하였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필자는 이 부분에 대한 그의 해석에 동의한다. 오랫동안 교회가 물질적 창조라고만 굳게 믿어 왔는데 고대 근동 세계관과 당시 사람들의 우주론과 배경을 통해 기능에 초점이 맞추어진 해석이 더 타당해 보였고 성경적 의미와 하나님의 창조를 더 풍성하게 하였다. 이 창조 기사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기도 하지만 일차적으로는 이스라엘을 포함한 고대의 사람들에게 주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보수 교회와 교인들에게는 고대 근동 신화와 외부 자료를 성경과 어떻게 비교할 수 있냐는 의문이 들 수 있지만 그런 자료와 성경을 비교 대조하여 당시의 인식을 파악하는 것은 성경의 권위를 훼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잘못된 문자적 해석으로 창조를 해석하는 것이 성경의 권위를 파괴하는 것이고, 창조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을 막아 버리며 하나님을 오해하게 만든다. 또한 그때 쓰인 성경이 현대 과학 해설서처럼 여기는 것은 성경에 대한 맹신이고 우상화일 뿐이다.

저자는 이런 기능적 창조를 잘 이해하게 하기 위해 그의 다른 책 <창세기 1장의 잃어버린 세계>(그리심)에서 회사·컴퓨터·대학을 비유로 든다. 회사는 건물이 아니라 그 안에 부서가 나누어지고 사람들이 제 위치에 배치되어 고유한 업무를 할 때 회사라 부를 수 있다. 컴퓨터는 본체를 담은 케이스와 모니터와 자판이 아니라 소프트웨어가 각 기능에 맞게 작동할 때 컴퓨터라 부를 수 있다. 대학은, 강의동과 기숙사 같은 건물이 아니라 교수와 학생이 각자의 자리에 있고 커리큘럼이 작동할 때 대학이 될 수 있다.

저자는 창조 기사는 성전으로서의 창조라고 한다. 이 또한 고대 근동 자료를 비교하며, 근동에서는 우주 창조가 성전 창조의 의미였고 기능적 창조였다는 것을 증명한다. 창조 기사는 각 날에 우주의 각 부분들을 정하고 제 역할을 하도록 기능과 질서를 부여하였다는 것이다. 마지막 7일째는 성전 낙성식이라 하여 하나님께서 성소에 좌정하셔서 실제로 통치하시고 다스리시는 것이다. 필자는 이 부분에서 창조가 물질이라면 과거로 끝날 약점이 있는데, 기능이라고 해석하니 지금도 계속 창조(통치와 다스림과 안식)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지지하기에 더 풍성해진다고 생각했다.

아담과 인간

아담이 창세기에 등장하는데, 그는 히브리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즉 그의 이름은 히브리어를 사용하는 모세에 의해 지어진 것이다. 히브리어의 기원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출애굽 이후 가나안에 정착하여 발전하게 되는데, 그렇다면 아담은 역사적 인물이라기보다 만들어진 인물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아담의 허구를 거부하고 실제성을 인정한다. 월튼 또한 그의 이름은 역사적 이름은 될 수 없지만 실제 살았던 인물로 보고 있다.

책을 보면, 아담이라는 이름이 성경에 사용되는 다양한 용례가 나온다. 아담은 언약의 대표로서 그 이름이 사용된다. 아담이라는 인물이 기독교 역사, 죄와 타락, 구원, 기독론에 이르는 교리에서 너무 중요한데, 그 이름의 용례와 창조의 과정을 보면 그 의미가 더 풍성해진다. 아담을 흙으로 빚으시고 하와를 아담의 갈비뼈에서 만드시는 과정 또한 문자적 의미가 아니라 기능적이고 문학적 표현으로, 인간의 운명과 정체성을 보여 준다.

이런 아담의 원형성과 대표성, 상징성은 바울도 지지한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와 아담을 비교하는데, 비질서를 해소하고 완전한 질서를 이루시는 분으로 그리스도를 설명한다. 아담을 원형으로 본다고 해서 그리스도의 존재와 사역이 훼손되는 것도 아니고 성경의 권위가 약해지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이런 해석이 아담의 존재를 더 잘 이해하고 창조의 과정을 합리적이고 풍성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인도한다.

하나님 형상을 소유한 인간의 창조는 지위와 기능 면에서 우주 안에서의 역할에 초점을 맞춘다. 인간의 창조 역시 손에 잡히는 흙으로 만들었다는 게 아니라 죽을 수밖에 없는 연약한 운명을 지녔다는 의미다. 창조와 과학 사이에서 갈등하는 이에게 인간의 기원에 대하여 설명할 때, 흙으로 지어졌다고 문자적으로 믿을 것을 강요하기보다 우리의 운명과 정체성과, 우리를 지으시고 만드신 분이 누구시고 왜 우리를 태어나게 하셨는가를 이야기해야 한다.

결론

새로운 해석을 받아들이는 것은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려울 일이다. 오랫동안 당연하게 여겨져 온 이 물질 창조 기사를 기능 창조 기사로 바꾼다는 것에 죄짓는 느낌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신학 전통과 교단 신학은 시대와 상관없이 절대 진리가 아니다. 분명한 사실은 성경은 변하지 않으나, 해석학은 여러 도구의 발달로 발전해 왔다는 것이다. 그러니 오늘날 우리 해석이 본문에 더 근거하고 성경을 진리로 여긴다면, 전제된 편견보다 본문의 의미를 따르는 것이 더 성경적이지 않을까.

세상 창조와 인류의 기원은 늘 뜨거운 감자이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궁금증을 유발하는 중요한 주제다. 그러나 우리는 그동안 이 하나님의 목적과 선한 의미가 담겨 있는 주제에 대해 단편적으로 물질 창조로 설명하는 것이 전부였다. 교회의 전통을 이어 간다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과 언약과 하나님나라를 이어 간다는 의미일 텐데, 신학에 오류와 모순이 보여도 이미 세워진 역사와 전통을 지키는 것을 믿음처럼 생각해 온 듯하다.

이미 과학의 발달로 우주와 지구의 연대는 분명히 밝혀졌고, 젊은지구론은 설득력을 많이 잃었다. 그렇다고 젊은지구론자들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자신이 믿는 바를 지키기 위해 모든 진화를 부정하고 다른 주장하는 사람들을 이단으로까지 몰아가는 것은 비겁한 일일 것이다. 오히려 해석학의 발달로 어두운 조명 같은 창세기가 환해지는 것을 통해 그동안 벽을 쌓았던 과학과의 화해를 이루고 사역의 지경이 넓혀야 할 것이다.

교회에 다니면서 창조에 대해 질문조차도 하지 못한 사람이 많이 있다. 무엇에 묶인 듯이 물질 창조를 부정하거나 의심하면 안 되고, 무조건 믿어야 좋은 것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최근 인류 창조와 인간의 기원에 대한 질문들이 객관적으로 다루어지고 있고 월튼의 해석은 그들에게 충분한 대답이 되고 있다. 그동안 이 해석은 기독교 전통을 허무는 것처럼 공격받고 오해를 받았는데 여러 독자가 읽고 판단해 보기를 권한다.

필자가 볼 때, 그는 오랫동안 과학과 신학 사이에서 갈등하는 교회에게 '아담과 하와의 잃어버린 세계'를 회복해 주어 잃어버린 시간을 구원하는 회복자 역할을 하고 있다. 또한 현대인들을 잘 섬기기 원하는 교회들에게 전도와 사역에서 돌파구 역할도 할 것 같다. 창조와 인간에 대한 각자의 입장을 고수하는 자들이 서로의 주장을 이해하여 더 좋은 해석(창세기의 주제, 성경의 목적, 하나님의 계획)으로 나갈 수 있도록 이 책이 화해자 역할도 하기를 기대해 본다.

*이 글은 <크리스찬북뉴스>에도 실렸습니다.
방영민 / <크리스찬북뉴스> 편집위원, 서현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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