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 켈러의 예수, 예수 - 이 시대가 잃어버린 이름> / 팀 켈러 지음 / 윤종석 옮김 / 두란노 펴냄 / 224쪽 / 1만 2000원

<팀 켈러의 예수, 예수 - 이 시대가 잃어버린 이름>(두란노)는 원제목(<Hidden Christmas>)이 말해 주듯이 크리스마스와 관련한 성경 본문 여덟 개를 설정하여 성탄의 본질적 의미를 드러내려고 한다. 각 성경 본문 해석이 중심을 향하는 바큇살처럼 성탄의 핵심 개념을 잘 묘파하고 있다.

성경의 크리스마스 본문과 캐롤에는 기독교의 전체 가르침이 훌륭하게 압축되어 있어서 "크리스마스를 바로 알면 기독교의 근간이 되는 복음을 바로 알 수 있다"(15쪽)는 것이 팀 켈러가 말하는 책의 취지이다. 그는 우리가 소홀히 여기거나 잘 알지 못하는 성탄의 숨은 의미(Hidden Christmas)를 잘 밝히고 있다. 여덟 개의 소주제와 성경 본문을 간략하게라도 써 놓아야 책 내용을 개관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 적어 본다.

눈먼 세상의 빛, 예수

1. 지금 이대로는 어둠에서 헤어날 인생이 없다(사 9:2, 5-7).

우리가 사는 세상에 아기로 태어나신 예수님은 우리의 아픔을 너무 잘 아시므로 '모사'(counselor)가 되시고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으므로 '기묘자'(wonderful)이시다. 기묘자는 놀랍고 아름답다는 뜻이다. 다른 불이 다 꺼질 때도 그분만은 우리를 위한 빛이시다(35쪽).

이 빛 되신 주님을 나의 선물로 받으려면 우리의 자존심을 내려놓고 내가 죄인임을 인정해야 한다. 주님의 놀라운 사랑을 경험하려면 내키지 않더라도 우리의 권한을 내려놓고 아주 낮은 곳으로 내려가야 한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밑바닥까지 내려와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그 사랑은 위대하다(37쪽).

울고 있는 인생의 생명줄, 예수

2. 흠투성이 인생들을 '은혜의 식탁'에 둘러앉히시다(마 1:3, 3-5, 16-17).

예수가 오신 사건은 동화나 교훈이 아니다. 우리 가운데 오신 주님은 우리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신다. 마태의 족보가 그것을 잘 말해 준다.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았다(마 1:3). 하나님의 법에 어긋난 근친상간이었다. 예수님이 조상 라합은 가나안 사람인 것도 모자라 매춘부였다(마 1:5).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았다. 밧세바라고 하지 않고 우리야의 아내라고 말한다. 마태는 밧세바를 무시해서가 아니라 다윗의 치부를 드러내려고 한 것이다.

예수는 이렇듯 치명적인 간음, 근친상간, 매춘이라는 도덕적 약점을 지닌 자들의 후손으로 태어나셨다. 이것은 하나님의 법대로라면 제외될 수밖에 없는 사람들도 예수의 가족이 될 수 있음을 말해 준다. "하나님의 맷돌은 천천히 돌지만 아주 고운 가루로 만드신다."(65쪽) 주님께서 마침내 이 땅에 오신 것처럼 하나님은 분명히 역사를 주관하고 계신다.

우리 중 하나가 되신 하나님, 예수

3. 당신을 혼자 두지 않기 위해 당신처럼 되셨다(마 1:18-23).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라는 의미를 많은 사람이 깨닫지 못한다. 그 분이 우리를 혼자 내버려 두시지 않고 내려오심으로 비로소 우리에게 희망이 있다. 내려오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이다(빌 2:5). 팀 켈러는 J. I 패커의 말을 빌린다.

"(전략)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그저 멋진 중산층 기독교 가정을 이루어 멋진 중산층 기독교식으로 자녀를 양육하고, 멋진 중산층 기독교인 친구들을 사귀는 일을 인생의 목표로 삼는 듯하다. 그러느라 주변의 소외된 사람들일랑 각자가 살아 나갈 방법을 스스로 찾도록 내버려 둔다. 속물 그리스도인에게서는 크리스마스 정신이 빛나지 않는다. 크리스마스 정신이란 삶 전체를 살아가는 원리가 주님처럼 스스로 가난해져(소비하고 소비되어) 동료 인간들을 풍요롭게 해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84쪽)

가장 낮은 데로 오신 왕, 예수

4. 내 속에 날뛰는 '헤롯 왕'이 물러나야 한다(마 2:1-3, 7-8. 13-16, 22-23).

인간의 마음의 응어리에는 '아무도 나에게 이래라저래라 할 수 없다'는 근성이 자리 잡고 있다. 문화와 교육을 통해 우리 안에 잘 감추어져 있을 뿐이다. 우리 모두는 세상이 나와 내 필요와 갈망을 중심으로 돌아가기를 원한다. 심지어 신앙생활도 신앙의 대상이신 하나님께 집중하기보다는 하나님이 주시는 사랑, 힘, 도움, 용서, 행복에 매달린다. 마치 돈 많은 친구를 돈 때문에 사귀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신앙은 자신의 뜻대로 풀리지 않으면 신앙을 포기한다. 사람들은 종교를 이용해서 하나님을 채무자로 만들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신의 삶의 왕좌를 지키려고 한다(113쪽). 이것이 내 속에서 날뛰는 '헤롯 왕'이다. 문화적 권력의 중심부에도 여전히 그리스도인이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사람들에게 매료되거나, 그들에게 유리한 편견을 품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그들을 사랑하고 섬길 뿐, 권력의 '중심부'에 들려는 욕구나 갈망일랑 버려야 한다. 크리스마스를 통해 예수는 성공의 일반적 의미를 뒤집으셨다.

예수, 받는 은혜를 주시다

5. 믿음의 여정, 그분의 이끄심이 필요하다(눅 1:27-38).

믿음의 반응은 지성까지도 포함하는 전인격적 경험이다. 마리아도 천사의 수태고지를 듣고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이까"(눅 1:34)라고 되물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라고 말씀을 단순히 수용한다. 이후 엘리사벳의 말을 통해 마리아의 믿음은 더 깊은 확신의 단계로 나간다. 결국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중략) 기뻐하였으며"(눅 1:45-47)라고 고백한다.

우리 스스로는 예수를 믿을 능력이 없다. 하나님이 우리 마음을 여시고 편견과 부정을 깨뜨려 주셔야만 한다(141쪽). 그러므로 신앙이란 경이롭고 놀라운 일이다. 우리는 내 인생을 철저히 내가 주관해야만 행복할 수 있다고 착각한다(170쪽). 신앙은 하나님과의 흥정이 아니라 순복해야 할 일이다(144쪽). 순복의 가장 큰 동기는 그분이 우리에게 해 주실 일이 아니라 그분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어야 한다. 그분이 이미 우리를 위해 다 이루셨기 때문이다(154쪽).

예수, '보는 눈'을 주시다

6. 복음을 바로 보는 만큼 두려움은 힘을 잃는다(눅 2:8-20).

오늘 우리는 '주의력 결핍'의 시대를 살고 있다. 성경은 분량도 많고 결코 읽기가 쉽지 않다. 설교자들과 교사들은 흠이 많기로 유명하다. 그중 한 명이 실족할 때마다 성경까지 싸잡아서, 심지어 기독교를 송두리째 버려야 마땅하다는 듯 몰아세운다. 메신저의 결점 때문에 귀한 보화 같은 메시지를 놓쳐서는 안 된다.

나 자신을 스스로 조정하려는 노력을 내려놓을 때 두려움이 사라지고 참된 평안이 찾아온다. '평화'는 평온한 만사형통이 아니라 적의가 사라지고 전쟁이 끝나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예수, 흔들리지 않는 평안을 주시다

7. 마음을 찌르는 칼, 참평화를 위한 불화다(눅 2:33-35).

예수님은 이 땅의 평화가 아니라 검을 주러 오셨다(마 10:34). 이 말씀은 주님이 폭력을 조장하러 오셨다는 말이 아니라, 그분이 명하신 충성 때문에 사람들 사이와 각 사람의 내면에 갈등과 불화가 생긴다는 뜻이다. 사람들이 빛보다 어둠을 사랑하는 것은 빛 앞에 자신의 정체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예수를 몸 깊이 받아들인 마리아에게, 오히려 세월호 부모들처럼 자식들의 죽음을 바라보아야 하는 참척慘慽의 고뇌와 비애가 맷돌처럼 가슴에 얹어지지 않았던가.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참된 평화를 주기도 하지만 우리 안에 갈등과 분쟁을 일으키기도 한다. 시므온은 마리아에게 말한다.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눅 2:35)

예수, '그분 자신'을 주시다

8. 되찾은 그 이름 예수, 이제 감출 수 없으리라(요일1:1-4).

"하나님이 작아져 한 뼘 인간이 되신 신비"를 세상은 이해할 수 없다. 세상은 거창한 볼거리를 원한다. 그런데 세상이 받아들이는 듯한 유일한 기독교 절기가 세상과는 정반대편에 서 있다. 세상은 예수님 같은 신을 이해할 수 없다. 크리스마스 메시지는 너무 평범하고 너무 흔한 통로를 통해 들려졌다. 세상은 이를 몹시 비위에 거슬려 한다(212쪽). 복음이 너무 평범해서 세상은 자존심 상해 한다.

팀 켈러는 성육신을 주님이 '내려오신' 사건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결국 우리가 내려가지 않고는 예수의 삶을 따를 수 없음을 단정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는 성공주의와 양립할 수 없다. 그 처음이 낮아지고, 가난해지는 데서부터 시작하기 때문이다. 내가 비워져 누군가가 채워지는 삶이야말로 크리스마스의 기본 정신이다.

팀 켈러는 권력 중심부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주님이 필요하지만 그들을 섬기면서도 그들처럼 권력 중심부에 들어서려는 욕망을 버리라고 말한다. 마리아는 수태고지를 듣고서 말씀대로 이루어지기를 고백했지만 그 결과는 사회적 냉소와 멸시였고, 고통스러운 난민 생활과 아들의 죽음을 바라봐야 하는 애절한 아픔뿐이었다.

팀 켈러는 읽는 이들에게 "크리스마스의 구유는 우리도 예수님처럼 살면 웬만한 여관에 당신의 방이 없을 거라는 뜻이다"(185쪽)라고 일침을 놓는다. 그럼에도 내 삶을 스스로 조정하려는, '내 안에 날뛰는 헤롯'을 틀어잡고 어떤 상황에서도 삶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께 순복할 때 우리는 마음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평안의 샘을 맛보게 된다. 평화는 만사형통이 보장된 삶이 아니라 전쟁이 멈추어진 상태, 인생의 주도권을 내려놓은 상태이기에.

한국어판 책 제목을 원제목과 달리 <팀 켈러의 예수, 예수>라고 잡은 것은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이 크리스마스 절기용이 아니라 과연 예수가 누구인지, 그리고 그를 따르는 우리의 신앙이 무엇인지를 궁구하기 때문이다. 끝없이 추락하는 교회가 손을 내밀어 잡아야 할 것이 한 분 예수가 아닐까 스스로를 돌아보게 한다. 이 책은 목회자들이 성탄절 메시지를 준비하는 데도 큰 도움을 줄 만하다.

*이 글은 <크리스찬북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서중한 / <크리스찬북뉴스> 편집위원, 다빈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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