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북청년회(서청)는 1946년 11월 발족해 1948년 12월 해산했다. 활동 기간이 2년 1개월밖에 되지 않는다. 해방정국 당시 우익 청년 단체 수는 40여 개. 청년 단체 수십 곳 중 하나였던 서청이 70년이 지난 지금까지 사람들에게 잊히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

서청은 한국 개신교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로 알려져 있다. 월남 세력이 조직한 서청 대다수가 공산당 탄압을 피하기 위해 내려온 기독교인이고, 이름만 대면 알 만한 대형 교회들이 이들을 지원했다는 증언·기록이 이를 뒷받침한다. 과거 서청이 저지른 잘못을 오늘날 한국교회가 대신 사죄하고 회개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뉴스앤조이>는 연중 기획 '4·3과 그리스도인'의 일환으로 서청과 한국 개신교의 관계를 살펴보려 한다. ①서청이 어떤 이들로 구성됐고 어떤 활동을 했는지 ②4·3 사건 당시 얼마나 많은 만행을 저질렀는지 ③서북 기독교 민족주의를 계승했다는 서청이 당시 한국교회와 어떤 관계였는지 ④반공주의가 낳은 서청을 통해 오늘날 한국교회가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 돌아보려 한다. - 기자 주

[뉴스앤조이-박요셉 기자]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영락교회는 지금까지 사람들에게 서북청년회(서청) 본거지로 인식되어 왔다. 영락교회가 주축이 되어 서청을 만들었고, 제주 4·3 사건에 토벌대로 참가해 무고한 양민을 학살했다는 설이 기정사실로 여겨졌다. 서청 단가團歌를 한경직 목사가 지어 줬다는 말까지 돌고 있다.

기록과 증언에 따르면, 영락교회 일부 청년이 서청 단원이었던 건 사실이다. 서청에서 감찰부장을 지낸 '시라소니' 이성순이 영락교회 집사였고 나중에 장로가 된 일화는 유명하다. 얼마나 많은 영락교회 청년이 서청에서 활동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서청과 영락교회가 정확히 어떤 관계였는지 확인할 수 있는 자료도 현재로서는 충분하지 않다. 서청과 영락교회 관계를 오랫동안 조사해 온 전문가들 역시 하나같이 연구가 더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이번 기사에서는 서청과 영락교회 관계를 살펴보려 한다. 앞서 밝힌 것처럼 둘의 관계를 명확히 알 수 있는 기록은 아직까지 드러난 게 없다. 당시 서청 단원으로 반공 활동을 주도했던 교인들은 세월이 지나면서 이미 사망했거나 소재지를 파악할 수 없었다. <뉴스앤조이>는 한경직 목사 회고록과 설교문, 교회 사료, 월남 교인 및 전문가 인터뷰 등을 통해 영락교회와 서청의 관계를 조사했다.

한경직 목사의 회고
"우리 교회 청년들, 서청 조직"
<영락교회 50년사>에도 서청 등장

한경직 목사. 한 목사는 회고록에서 영락교회 청년들이 중심이 되어 서청을 만들었다고 밝혔다. 뉴스앤조이 박요셉

영락교회가 서청과 밀접한 관계였다는 사실을 알려 주는 대표적인 기록으로는 한경직 목사 회고록이 있다. 김병희 목사가 1982년 발간한 <한경직 목사>(규장문화사)에서, 한경직 목사는 영락교회 청년들이 중심이 되어 서청을 조직했다고 말한다.

"그때 공산당이 많아서 지방도 혼란하지 않았갔시요. 그때 '서북청년회'라고 우리 영락교회 청년들이 중심 되어 조직을 했시요. 그 청년들이 제주도 반란 사건을 평정하기도 하고 그랬시요. 그러니까니 우리 영락교회 청년들이 미움도 많이 사게 됐지요."

같은 책에서 영락교회 청년들이 기독교민주동맹 창립총회를 습격한 일도 등장한다. 기독교민주동맹은 3·1 운동 당시 민족 대표 33인 중 한 사람이었던 김창준 목사가 좌익 기독교인을 결집해 만든 조직이다. 영락교회 청년들을 포함한 우익 단체들은 1947년 2월, 창립총회가 열리는 서울 종로구 소재 시천교당을 습격해 난투극을 벌였다.

한경직 목사는 "우리 교회 청년들이 열렬한 반공 청년들이라 (기독교민주동맹 창립총회에) 가서 쳐부수고 해산시켰거든. 지금은 그 청년들이 다 장로 됐수다"라며, 영락교회 청년들이 반탁·반공 운동에 앞장섰다고 말했다.

영락교회가 발간한 사료집에도 서청이 등장한다. <영락교회 50년사: 1945~1995)>(영락교회)에는 "영락교회 청년을 비롯한 우익 측 청년 진영, 특히 월남 청년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서북청년단은 격렬한 반탁 운동을 전개하였고, 이 과정에서 심한 충돌도 야기됐다"고 기술되어 있다. 짧은 기록이지만 당시 영락교회 청년들이 서청과 함께 활동했다는 이력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영락교회는 해방 정국 당시 교회가 "반공 운동의 보루"였다고 자평한다. 책에는 "청년회 성향은 공산당의 만행을 목도하고 그들의 학정을 피해 정든 고향과 부모 형제를 떠나온 이들이었기 때문에 남달리 반공주의에 투철하였다. 따라서 언제라도 반공 전선에 몸을 던질 각오가 되어 있었다"고 나와 있다.

영락교회 교인, 서청과의 관계 연구
사망·이민 등으로 조사에 한계
"서청 출신 교인들 확인 어려워
사무실 있었다는 말은 거짓"

1949년에 발간한 영락교회 요람. 영락교회 청년들이 서청으로 활동했던 것은 사실이다. 김섭태 집사는 서청에 주도적 역할을 했던 인물로 알려졌다.  뉴스앤조이 박요셉

영락교회 내부에서도 서청 출신 교인이 얼마나 있는지 조사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영락교회 50년사 편집위원이었던 김성보 집사(77)는 50년사를 쓰면서 교회 초창기 모습과 당시 서청에서 활동한 청년들을 조사했다. 교회가 맡긴 공식 임무는 아니었다. 동료 교인들이 편집위원인 그에게 하도 서청과 교회의 관계를 묻기에 개인적으로 연구에 나선 것이었다.

김 집사는 서청에서 주도적으로 활동했던 김섭태·계인집을 알아냈다. 김섭태는 평북 선천군 사람으로 성격이 강하고 리더십이 뛰어났던 인물이다. 영락교회 봉사부원, 주일학교 교사를 지냈고 나중에 장로가 되었다. 김섭태와 함께 활동했던 계인집은 나라와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이 투철했던 인물이었다. 대다수 서청 단원이 군경이 되었던 것처럼, 그는 서청이 해체된 뒤 경찰이 됐다.

영락교회 초창기부터 출석했던 두 사람은 교인들에게 끼치는 영향력이 상당했다고 김성보 집사는 말했다. 김 집사는 <뉴스앤조이>와의 인터뷰에서 "두 사람이 교회에서 반공 활동을 독려하면 여러 그룹이 동참할 정도로 리더십이 강했다"고 했다.

김성보 집사는 제주 4·3 사건 토벌대로 참여했던 영락교회 교인들을 직접 만나기도 했다. 서청에서 활동하다 나중에 제주 경찰이 된 박용범·홍형길이다. 박용범은 월남하고 난 뒤 무직자로 지내다 토벌대 모집 공고를 보고 제주로 갔다. 홍형길은 용산역에 있는 하숙집에서 지냈는데, 제주 출신인 집주인에게 제주 방언을 배웠다. 그는 제주 방언 통역가로 토벌대에 동원됐다. (최태육 목사가 쓴 논문 <남북 분단과 육이오전쟁 시기(1945~1953) 민간인 집단 희생과 한국 기독교의 관계 연구>에 '홍형균'이 등장하는데, 이는 김성보 집사가 기억 착오로 최 목사에게 '홍형길'을 '홍형균'으로 잘못 말한 것이다. - 기자 주)

서청 출신 교인 일부를 확인할 수 있었지만, 영락교회 안에 서청과 관계한 교인이 총 몇 명인지는 파악하지 못했다. 김 집사는 "서청 단원이 대부분 10대 후반에서 20대 초중반의 젊은이였다. 50년이 지난 뒤에 이들을 조사하려고 보니까, 절반은 세상을 떠났고 해외로 떠난 이도 많았다. 개인 차원에서 진행한 조사라 제약이 많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김 집사는 '영락교회가 서청을 주도했다'는 시각에는 무리가 있다고 봤다. 그는 "어떤 이는 교회 안에 서청 사무실이 있었다며 교회가 물적 지원을 했다고 하지만, 이는 근거 없는 소리다. 당시 교회는 월남민들을 돕기에도 빠듯했다"고 말했다.

한국전쟁 피해 제주 온 영락교회 교인들,
군경 정보원으로 활동
"토벌대는 아니고 후방 지원 역할"

신의주제2교회 교인들. 이들이 세운 영락교회는 월남한 서북 기독교인들을 대표하는 교회였다. 뉴스앤조이 박요셉

서청은 제주 4·3 사건에서 토벌대로 참여한 일을 '하이라이트'로 여긴다. 다른 의미지만, 희생자들 역시 서청의 만행을 빼놓고서는 4·3을 논할 수 없다고 말한다. 한경직 목사는 회고록에서 영락교회 청년들이 무장대 진압에 가담했다고 밝힌다. 그렇다면 이 질문을 피해 갈 수 없다. 영락교회 교인들은 양민 학살에 가담했는가.

제주 토벌대에 참여했던 영락교회 교인 박용범·홍형길을 인터뷰한 김성보 집사는, 토벌에 직접 가담한 교인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고 했다. 그는 "두 사람에게 토벌대로 참가한 영락교회 교인 수를 물어 보니 50명 내외라고 하더라. 하지만 이는 토벌대로 활동하면서 관청이나 경찰지서 등에서 만난 교인 수를 말하는 것이지, 토벌대로 참여한 영락교회 교인 전체라고 보기에는 어렵다"고 했다.

4·3 사건은 1947년부터 1954년까지 일어났다. <영락교회 50년사>에 따르면, 한경직 목사는 1951년 전쟁을 피해 영락교회 교인 350여 명과 부산에서 미군 상륙함을 타고 제주로 갔다. 노정선 교수(연세대 명예·77)는 당시 영락교회를 다녔던 가족과 함께 이때 제주로 내려갔다. 그는 피난 온 교인들이 군경을 도왔다고 했다. 토벌에 직접 나선 건 아니었고 후방 지원 임무만 맡았다고 했다.

노정선 교수는 <뉴스앤조이>와의 인터뷰에서 "미군정이 군사작전 일환으로 제주에 피난 온 영락교회 교인을 활용했다. 무장대와 도민들이 서로 연락을 주고받아도 이를 알 수 없으니, 미군정과 가까운 한경직 목사를 통해 영락교회 교인들을 정보원으로 이용했다"고 말했다. 그는 미군정 시각으로 4·3 사건을 다룬 논문 <제주도의 반란 The Cheju-do Rebellion> 저자 존 메릴(John Merrill) 전 미 국무부 국장을 미국에서 직접 만나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됐다고 했다.

노 교수는 1944년 태어나 이듬해 가족들을 따라 신의주에서 월남했다. 그의 부친은 노재헌 장로로, 한경직 목사가 시무했던 신의주제2교회 장로이자 영락교회 현판을 직접 쓴 인물이다. 1945년 12월 2일, 영락교회 창립 예배에 참여했던 교인 27명 중 한 사람이기도 하다.

제주에 피난 온 영락교회 교인들은 제주읍에 조성된 피난민 마을에서 3년 반을 천막 생활했다. 노 교수는 "제주에서 국민학교를 다녔는데 어느 정도 사리 분별할 수 있는 나이였다. 내 기억으로는 교인들이 직접 무장대를 진압하러 다니지는 않았다. 도민들 동정과 여론을 군경에 전하는 정도였다. 그것이 한경직 목사의 발언으로 일부 과장된 것 같다"고 말했다.

1970년대 중반 미국 유학을 가기 전까지 노정선 교수는 영락교회에 출석했다. 그는 서청과 영락교회와 관계를 밝히는 것을 개인 연구 과제로 삼았다. 교회에서 청년회장을 지내고 각종 위원회·부서에서 활동하는 등 교회 속사정에 밝았지만, 서청 출신 교인이 얼마나 되는지, 서청과 영락교회가 어떤 관계였는지 아직까지 밝히지 못했다고 했다.

반공·반탁 활동에 앞장선 영락교회
사상·지역·구성원 등 서청과 거의 일치
"그 시절, 서북 기독교인은 다 그랬다"

채명신 장군(맨 오른쪽)과 식사를 하고 있는 한경직 목사(오른쪽에서 두 번째). 한 목사는 평소 군경과 가까웠다. 뉴스앤조이 박요셉

김성보 집사는, 어떻게 보면 서청과 영락교회와의 관계를 따지는 것이 무의미한 일일 수 있다고 말했다. 영락교회를 비롯해 해방 이후 만들어진 교회는 대부분 반공 의식이 강하고 반공·반탁 활동에 앞장섰기 때문이다. 매일같이 수십 명씩 피켓을 들고 신탁 혹은 반탁을 외치다 양측이 거리에서 난투극을 벌이는 시대였다.

특히 영락교회와 서청은 지역 기반부터 같다. 둘 다 '서북'이라고 불리는 평안북도에서 월남한 이들이 중심이 되어 만든 조직이다. 서청은 평안도 동향민 모임 평안청년회를 주축으로 만들어졌고, 영락교회는 평북 신의주에서 월남한 교인들이 세운 교회다. 노정선 교수가 1967년, 영락교회 교인들의 출신 지역을 조사한 결과, 전체 교인 중 87.5%가 평북 출신이었다.

서북 출신 기독교인들은 이북에서 이미 잘 알려져 있던 한경직 목사를 따라 영락교회로 모여들었다. 이들은 교회에서 고향 사람을 만나거나 일자리나 임시 처소, 정보 등을 얻을 수 있었다. 평북 구성시 출신 김성보 집사는 당시 영락교회를 두고 "서북 사람 신앙 공동체"라고 했다.

그는 "서북 기독교인들은 불같은 신앙을 갖고 있는 이들이었다. 자유를 찾아 내려온 남한에서 좌익이 활개 치는 것을 보고 이들은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서청을 포함한 우익 청년 단체와 함께 반공 운동에 나섰다. 남쪽을 평정하고 나면 다시 북에 올라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이는 시대 상황에 따른 당연한 모습이었다"고 말했다.

한경직 목사, 공산주의를 적으로 간주
'기독교 건국론' 설파하며
교인들에게 사회참여 강조

여기에 한경직 목사의 사상이 기름을 부었다. 그는 교인들의 반공 활동을 기독교 신앙으로 받쳐 줬다. 서청이 발족하고 반공 활동이 한창 격렬했던 1946년과 1947년 사이, 한경직 목사는 교인들이 반공 활동에 나서도록 적극 부추기는 듯한 설교를 전했다. 그는 올바른 기독교 국가를 세우기 위해서는 교인들이 정치 운동, 사회운동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개인은 신자인 동시에 또한 국민인고로 서로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경건한 명령에 순복하는 나라를 만들 의무가 있으며, 공의에 기초해 기독교의 국가적 이상인 자유, 평등, 박애가 실행되는 국가를 만들 의무가 있다. (중략) 기독교 이상에 의해 건국케 할 의무가 있다. 유물론적 독재국이 되면 어찌하나? 지금은 참으로 천재일우의 기회다. 우리의 행동 여하가 자손만대에 큰 관계가 있다는 것을 분명히 자각해 우리의 의무를 수행해야 한다.

오늘의 기독교인은 잠잠하다. 최선의 정치 이념이 우리에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이리 퇴영적인가? 좀 더 주도성을 가지자. 십자가를 가지고 노동운동과 정치 운동을 하자. (중략) 대한에는 윌리엄과 워싱턴과 같은 기독교 애국자가 없는가? 참신앙을 가지고 정치 운동, 사회운동을 일으켜야 한다." (1946년 설교 '기독교와 정치' 중)

김성보 집사는 한경직 목사의 설교를 들은 청년들이 크게 둘로 나뉘었다고 했다. "한쪽은 서북청년회 등 우익 단체에 가입해 반공 활동에 뛰어들었고, 또 다른 한쪽은 지방에 내려가 사람들을 전도하기 시작했다"고 했다.

한경직 목사는 설교에서 여러 차례 공산주의를 비판했다. 그는 1947년 4월 20일 '청교도의 신앙'이라는 제목의 설교에서, 당시 세계 기독교가 직면하고 있는 강적으로 공산주의 유물주의 사상을 꼽았다. 공산주의가 소련을 통해 기독교를 멸하려 한다면서 한국교회가 대동단결해 '십자군'을 조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공산주의이야말로 일대 괴물이다. 이 괴물이 지금 삼천리강산에 횡행하며 삼킬 자를 찾고 있다. 이 괴물을 벨 자 누구인가? 이 사상이야말로 묵시록에 있는 붉은 용이다. 이 용을 멸할 자 누구인가? 사람은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것이다." (1947년 설교 '기독교와 공산주의' 중)

반공 신앙에 불 지핀 한경직 목사
월남 기독교인 대다수가 반공주의자
'태극기 부대'로 이어진 한국교회 반공주의

반공주의는 오늘날까지 한국교회에 영향을 주고 있다. 뉴스앤조이 이용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한국전쟁 전후로 발생한 민간인 학살을 조사해 온 최태육 목사(한반도통일역사연구소)는, 기득권과 재산을 모두 빼앗긴 월남 기독교인들에게 한경직 목사의 설교는 이들의 분노를 더욱 증폭하고 폭력을 정당화하는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최 목사는 "일대일로 만났을 때 굉장히 온순하고 합리적인 사람이 공산당 얘기만 나오면 이성을 잃는 모습을 여러 차례 봤다. 월남 기독교인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들에게 반공은 마치 신앙과 같다. 반공 신앙으로 무장한 청년들은 좌익들을 제거해야 할 적으로 간주했을 것이다"고 했다.

해방 이후 서북 출신 기독교인들이 남한에서 성장한 과정을 분석한 <한국전쟁과 기독교>(한울아카데미) 저자 윤정란 교수는, 한경직 목사를 포함해 대다수 월남 기독교인들이 반공주의자였다며 당시 이들이 서청과 함께 활동했다고 봤다.

윤정란 교수는 <뉴스앤조이>와의 인터뷰에서 "월남 기독교인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서북 개신교인은 좌익 단체 적위대赤衛隊와 싸우면서 남으로 내려온 이들이다. 한경직 목사의 설교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전통적으로 민족주의가 강했던 이들은 대한민국을 기독교 국가로 세우려 했다. 그러기 위해 공산당을 모두 격퇴한다는 사명을 가졌던 것이다"고 말했다.

그는 서청의 폭력성과 잔혹 무도함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월남 기독교인들이 갖고 있었던 사상과 그 배경을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반공주의는 오늘날까지도 보수 개신교를 잠식하고 있다. 다음 기사에서는 월남 개신교인이 가졌던 극단적 반공주의가 어떻게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지 살펴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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