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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와 평화는 서로 입을 맞춘다

[희년함께 기획 인터뷰①] 밝은누리 대표 최철호 목사

희년함께   기사승인 2018.05.04  14:4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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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에 정의와 평화의 훈풍이 불고 있습니다. 남북 정상회담, 북미 정상회담이 개최되고, 대통령 발의 개헌안에 토지 공개념이 담겼습니다. 불어오는 희년의 바람이 정의와 평화의 열매를 맺을 수 있길 기도합니다. 통일에 대해 오랫동안 기도하고 연구하며, 정의와 평화를 한국교회에 외쳐 오신 분들이 계십니다. 생명과 평화의 영이 일으키는 바람 앞에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배워 보려 합니다.

1. 최철호 목사(밝은누리 대표): 대한 조선 영세 중립 생명 평화의 땅을 향한 기도와 삶
2. 방인성 목사(하나누리 대표): 통일과 평화의 초석, 희년
3. 강경민 목사(남북나눔 이사): 평화통일을 위한 한국교회의 역할
4. 최광열 목사(나팔소리선교회 대표): 신철, 한반도의 기구한 역사를 몸에 안은 우리 시대의 호세아
5. 이문식 목사(한반도평화연구원 이사): 하나님나라와 한반도 평화

2017년 6월 제8회 목회자·신학생 멘토링 컨퍼런스에서 교회와 사역에 대해 발표하고 있는 최철호 목사. 뉴스앤조이 박요셉

1부 평화

- 어떤 사역을 하고 계신가요.

하나님나라를 증언하는 삶, 말씀과 성령으로 더불어 사는 삶을 어떻게 만들어 갈 것인가. 이것이 시종일관한 관심이고 사역입니다. 그 구체적인 형태가 '밝은누리'입니다, 밝은누리 신앙을 토대로 마을 공동체를 일구고, 더불어 사는 삶을 통해 하나님나라를 증언합니다.

성경의 일관한 명령은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 예수를 주로 고백하고 살아가는 것, 제자 삼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제자 삼는 삶이라는 게 결국은 말씀을 따라 함께 살며 배우고 가르치는 삶이죠. 청년이나 성인뿐 아니라 어릴 때부터, 태중에서, 임신과 결혼하기 전부터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자녀를 키울 것인가, 이 모든 게 결국 신앙고백과 교육의 문제라고 생각해요. 이 맥락에서 공동육아 어린이집, 마을 초등학교, 생동중학교, 고등 대학 통합 과정 삼일학림, 젊은 목회자들과 청년들이 함께 공부하는 기독청년아카데미, 공동체지도력훈련원 등을 중요한 사역으로 하고 있어요.

성경은 영의 생각이 생명 평화라고 하죠. 하나님나라가 우리 사회에 구체화하는 주제가 생명 평화라고 생각해요. 생명 평화는 관념적으로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몸과 마음이 하나 되는 것에서 시작해요. 생활 영성 수련을 통해 몸과 마음이 성령으로 하나 되고, 이를 토대로 나와 네가 더불어 사는 생명 살림터가 마을입니다. 나아가 농촌과 도시, 남과 북, 사람과 자연이 더불어 사는 삶이 생명 평화라는 주제에 담겨 있어요. 생명 평화를 주제로 기도 순례를 하고, 농촌과 도시가 더불어 사는 마을 공동체를 일구는 일을 마음 모아 하고 있습니다.

- 한반도 정세가 급변하고 있습니다. 마침 밝은누리에서는 2017년 가을부터 '대한 조선 영세 중립 생명 평화의 땅 기도 순례'를 시작했습니다. 2012년 '희년이란 무엇인가' 인터뷰에서도 '한반도 생명 평화 공동체 운동'에 대해 기도하는 중이라고 했는데 6년이 지나 한반도 생명 평화 공동체 운동을 구체화하신 것 같습니다. 오랫동안 기도로 묵힌 이유가 있으신지요.

통일에 대한 관심은 오래전부터 있었는데, '영세 중립화 통일을 토대로 한 동북아 평화 체제'라는 주제로 기도를 시작한 것은 2007년 농촌으로 분립을 준비할 때였어요. 농촌과 도시가 상생하는 마을 공동체를 일구는 것이 남과 북이 하나 되는 삶을 선취하고 훈련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10년이 지나 2017년 가을 밝은누리 한마당 잔치를 하면서 우리의 소명과 기도로 나누는 시간을 가졌어요.

왜 묵혔나? 어떤 비전을 받을 때는 그 비전을 점검하고 조용하게 기도하는 시간을 갖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개인의 취향이나 자기 관심사를 하나님 뜻과 혼동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죠. 동북아 생명 평화 공동체의 도전과 소명을 받고 개인적으로 기도하면서 이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도인지를 묻고 질문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또 하나, 생명 평화, 통일, 희년이라는 주제는 매우 큰 담론이기 때문에 자칫 관념화할 수 있어요. 그래서 품고 있는 기도의 내용을 실제 내 삶의 현장에서 증언할 수 있는 틀을 만들어 가는 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거나 운동을 할 때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하나님나라 생명 평화라는 큰 담론이 관념화하지 않고 실제화하도록 해 주는 것이 마을 운동입니다. 지극히 일상적인 삶에서 자기가 품고 있는 관념을 구체화하고 검증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남북이 하나 되는 것에 대한 기도와 훈련으로서 농촌과 도시가 더불어 사는 삶을 우리가 먼저 경험하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농촌과 도시가 더불어 사는 마을 공동체 삶을 실제로 살아가면서, 소외되고 단절된 농촌과 도시가 더불어 사는 새로운 삶이 가능하구나, 사람과 자연이 더불어 사는 삶의 양식이 가능하다는 것을 경험했어요. 2017년 가을, 곧 전쟁 날 것처럼 위기가 심화하였을 때, 전혀 새로운 하나님 평화가 시작 될 때를 보여 주신 것이라 생각해요.

- '대한 조선 영세 중립 생명 평화의 땅 기도 순례'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 부탁드립니다.

제국주의와 식민 지배, 전쟁과 생태계 파괴라는 20세기 비극을 아직도 우리는 짊어지고 살고 있어요. 우리 통일이 20세기 끝자락을 잡는 통일이 된다면 너무 서글픈 일입니다. 잃어버린 100년이 되는 거죠. 하나님께서 그러지는 않으실 것 같아요.

이 땅에 주신 하나님의 큰 뜻은, 20세기 인류의 죄를 짊어진 이 땅이 하나님의 생명 평화를 증언하는 땅으로 부활하는 것이라 생각해요. 20세기까지 인류를 지배했던 '강력한 군사력을 통한 평화'라는 것은 제국의 평화이고, 인류가 오랫동안 속고 있는 거짓 평화입니다. '칼을 쳐서 보습을, 창을 쳐서 낫을 만들고, 나라가 서로 전쟁하거나 전쟁 연습을 하지 않는 하나님의 평화'를 참되게 믿고 기도하길 원합니다.

이것이 21세기 새로운 생명 평화 문명의 씨알이 되는 통일이라고 생각해요. 남북이 정치사회적으로 하나 되는 것을 넘어, 사람과 사람이 더불어 사는 '마을', 자연과 사람이 더불어 사는 '생태'라는 주제가 맞물리는 통일이 될 때, 21세기 새로운 문명을 잉태하는 씨알이 될 거라 생각해요.

우리 근현대사 100년을 돌아보면 가슴 아프고 해결되지 못한 원통함이 너무 많아요. 그래서 생명 평화의 땅 기도 순례는 한라에서 백두 넘어 만주와 연해주, 중앙아시아 곳곳 원통함이 서려 있는 현장을 순례하며 기도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그 원통함을 풀어 주시고, 치유하셔서 하나 된 대한민국과 조선이 하나님 생명 평화를 전하는 땅으로 다시 살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함께하는 길벗들이 각 지역에서 개인 순례 일정을 정해 기도하고, 지역의 큰 아픔과 원통함과 한이 서려 있는 묘지들과 그 땅 생명들의 꿈과 한이 서려 있는 산과 바다와 강에서 모두 모여 기도해요. '생명 평화를 구하는 기도'를 읽고, 기도문으로 만든 노래를 부르며 기도해요. 현장에 함께하지 못하는 분들도 같은 시간에 공지된 기도회 순서를 따라 함께할 수 있어요.

안산 세월호 합동 분향소에서 2월에 진행한 '생명 평화 고운 울림 기도 순례'. 사진 제공 밝은누리

- 영세 중립국이라는 말이 낯선 사람이 많을 것 같은데요.

'중립'이란, 주변 국가들 이해관계 충돌과 분쟁이 생길 때, 어느 한편에 서서 분쟁이나 전쟁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이를 영구적으로 지키겠다고 선언하고 약속하는 것이 '영세 중립'인 거죠.

중립국들 중에는 군대를 갖는 나라도 있고, 상비군을 없애고 중립을 지키는 나라도 있습니다. 스위스나 오스트리아 같은 나라는 군대가 있는 중립국입니다. 스위스는 200년 이상 중립을 지키고 있는 영세 중립국의 전형적 모델입니다. 오스트리아는 2차 세계 대전 직전에 나치에게 식민 지배를 당하면서 나치가 망하자 전범 국가 중 하나가 돼 버립니다.

2차 대전 승전 국가인 소련, 미국, 영국, 프랑스가 오스트리아를 독일처럼 분단시키려 할 때, 오스트리아 국민들은 마음을 모아 중립을 선언하고 4개 국가가 인준하는 방식을 취하는 나라가 됐습니다. 2차 대전이 끝나고 전범 국가인 일본이 아니라 우리가 분단된 것은 철저하게 주변 제국들의 이해관계 때문입니다. 독일에 합병되었던 오스트리아가 분단의 위기를 영세 중립으로 넘어섰던 것은 우리가 참조할 만한 중요하고 의미 있는 선례입니다.

또 주목해야 할 나라는 코스타리카입니다. 300년 이상 식민 지배를 받았고 독립이 되고 나서도 수차례 내전이 벌어지다가 내전에서 승리한 집권 세력이 군대를 해산하겠다고 선언하고 그걸 의회가 인준했어요. 내전에서 승리한 세력이 군대를 해산하겠다고 선언하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죠. 그들의 고백을 들어 보면, "우리는 나라를 다시 세우고 제대로 된 독립을 하기 위해 사람을 키워야 하고 복지와 교육에 돈을 써야 하기 때문에 국방비에 지출할 여력이 없다"는 거예요.

중남미 주변 국가들 내전도 많았고, 미국의 이해관계와 충돌하는 일도 있었어요. 그럼에도 비무장이라는 도덕적 힘을 토대로 영세 중립을 선언했기 때문에 이후 벌어진 중남미 분쟁들에서 코스타리카는 도덕적 권위를 가지고 평화를 이끌고 노벨평화상을 받기도 해요. 강력한 군사력이 있어야 평화를 지킬 수 있다는, 거의 대부분 나라가 전제하는 안보 논리와 생태와 평화라는 다른 형태의 주제로 새로운 안보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매우 중요한 사례입니다.

- 갑작스레 훈풍이 불고 있지만, 영세 중립국 운동에 대해 '무모하다', '이상적이다'라는 말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런 말들에 대해 들려주시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한 개인이 어려움에 빠졌을 때, 자기 문제에서 벗어나는 출발점은 자기를 너무 특수화하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겪는 아픔은 누구와도 달라', '내 아픔은 누구도 이해 못 할 거야'라고 생각하면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국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겪는 어려움은 더 특별하다는 생각을 벗어나는 게 중요합니다. 스위스, 오스트리아, 코스타리카 모두 고유하고 복잡한 상황을 가지고 있었어요. 우리가 식민 지배를 몇백 년 받은 것도 아니고, 내전을 많이 겪은 것도 아니잖아요. 각 나라마다 고유한 어려움이 있습니다. 우리가 특별히 복잡하다는 생각에서 벗어나는 게 중요해요.

또 하나는, 미국과 중국을 비롯한 주변 국가들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얽혀 있어서 영세 중립이 과연 가능하겠느냐는 생각을 많이 하는데 저는 전혀 다르게 봐요.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영세 중립 외에 길이 없다고 생각해요. 이상적인 게 아니고, 가장 현실적인 겁니다.

남북통일이라는 과제를 풀어 갈 때 우리가 견지할 명확한 원칙이 있어요. '자주', '평화'라는 원칙입니다. 박정희와 김일성이 합의한 7·4 남북공동성명, 노태우의 7·7 선언과 남북 기본 합의서, 김대중과 김정일이 합의한 6·15 남북 공동 선언, 노무현과 김정일이 합의한 10·4 선언까지 일관하게 '자주', '평화'라는 원칙을 견지하고 있어요.

'군사 대립을 종식하자', '상호 체제를 인정하자', '자주적으로 평화롭게 통일하자'는 원칙은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통일을 책임 있게 고민했던 사람들이 모두 합의했던 내용입니다. 극단적 대립을 이끌었던 박정희, 노태우, 김일성, 김정일도 같이 합의한 통일 원칙이죠. 우리가 견지해야 할 것은 '자주와 평화'가 명확한데, 분단 체제는 이미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라 주변국들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문제이죠.

그러면 '자주', '평화' 통일 원칙과 주변국 이해관계를 어떻게 동시에 해결할 수 있을까요. 중국과 미국의 이해관계가 너무 첨예하기에 어느 한편에 서는 건 불가능합니다. 이해관계가 있는 나라들과의 관계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우리는 우리 미래를 자주적으로 풀어 가는 것이 가장 현실적인 방안입니다. 종전 선언을 하고, 북미 수교를 하고 나면, 미국이 동북아에 있을 명분이 없어요. 중국은 바로 옆에 있으니 조급할 게 없어요. 미국이 분단 체제 극복에 매우 예민할 수밖에 없는 이유죠.

미국 입장에서는 명분 있게 지속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어떤 평화 체제'가 필요해요. 대립과 갈등 당사자로서가 아니라 평화를 위한 역할로서 '주변국들이 함께 지켜 갈 어떤 평화 체제'가 필요한 겁니다. 물론 우리의 자주성과 미국, 중국의 이해관계, 일본의 불안을 동시에 만족하는 것이 되겠죠. 그 '평화 체제'가 결국 '영세 중립화 통일을 토대로 한 동북아 평화 체제'인 겁니다. 가장 현실적이고 어찌 보면 유일한 길입니다.

거기에다 '비무장'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기도하는 중요한 이유는 미국과 중국 등 제국들이 모두 공범이 되어 있는 '강력한 군사력을 통한 평화'라는 제국의 거짓 평화에 대해 도덕적 압력을 행사하기 위해서입니다. 정치 현실을 지배하는 부당한 힘을 전제하고, 그 속에서 선택 가능한 것을 체념적으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 현실을 하나님 말씀으로 이끌고 도덕적으로 압박하는 기도입니다.

"사람의 능이나 힘으로 되지 않고, 하나님의 영으로 된다"는 말씀을 참으로 믿고 기도하는 겁니다. 하나님 영으로 하나님 평화가 이루어지는 놀라운 사건을 보려는 기도입니다. '영세 중립화 통일을 토대로 한 동북아 평화 체제'가 전 지구적 반핵, 반전, 군대 감축을 추동하도록 하는 겁니다. 핵무기와 대량 살상 무기를 수천, 수만 발씩 가지고 곳곳에서 전쟁하는 제국들이 회개하고, 하나님 평화가 넘쳐 나길 구하는 기도입니다.

- 기독교 신앙에 기초해 통일 운동을 펼쳤던 여운형, 함석헌, 문익환의 기도와 고민이 기도 순례에 담겨 있는 듯합니다.

여운형, 함석헌, 문익환뿐 아니라 유영모, 이승훈, 안창호, 김용기, 이런 분들을 함께 거론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분들이 꿈꿨던 것은 정치로만 이해할 수 없습니다. 성경에 성령을 받으면 꿈과 예언과 환상을 본다고 했어요. 현실의 강고한 제약을 넘어서는 힘이 성령을 받은 자들에게서 나타나는데, 이분들이 그런 삶을 사셨죠.

당시 관습화하고 익숙해진 부당한 체제들, 그런 체제들이 강요하는 구조나 권세를 꿈으로 돌파한 분들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좋은 스승이라고 생각해요. 이분들은 자주, 평화를 명확하게 인식하셨죠. 해방을 준비하고 맞이하는 과정에서의 자주 문제, 평화 문제를 늘 견지했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여운형을 김용기와 연관해서 이해하는 겁니다. 김용기는 여운형이 세운 학교에서 어린 시절 민족에 대한 꿈을 키웠고, 하나님이 이 땅 역사에 어떻게 개입하시는지를 배웠습니다. 한편 여운형은 김용기가 세운 가나안농군학교의 모태인 봉안 이상촌을 자기 안식처, 피난처, 기도처로 삼고 해방을 맞이했습니다.

안창호는 모범 마을을 세우려는 뜻과 나라를 새롭게 하는 꿈을 함께 품고 있었습니다. 여운형이 <조선중앙일보> 사장으로 있을 때 알리게 된 사람이 농촌을 통해 나라를 살리는 운동을 한 상록수 최용신입니다. 심훈이 이때 취재한 것을 토대로 <상록수>라는 소설을 쓴 겁니다. 마을을 토대로 농촌과 생명을 살리고 자주적 삶을 사는 것, 그 중심에 농, 농사, 농촌이 있다는 것을 명확하게 견지하고 있었습니다.

문익환도 명동마을, 명동학교에서 평화와 독립의 꿈을 키웠습니다. 용동마을에서 오산학교를 세운 이승훈, 유영모, 함석헌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을과 교육과 평화라는 주제가 이분들에게 공통 주제였습니다. 이걸 토대로 자주적 삶이 가능하고, 나라를 살릴 수 있고, 새로운 문명이 가능하다는 생각을 명확하게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제가 중요하게 주목하는 부분이에요. 결국은 신앙을 토대로 스스로 주인 되어 자립할 수 있는 마을 공동체가 모든 운동의 토대라는 사실을 명확히 깨닫고 있었던 겁니다.

마을은 생명 살림이 이뤄지는 가장 근본이 되는 터전입니다. 그분들에게 마을, 교육, 평화를 실현하는 삶이 나라를 세우는 독립이었다면, 우리에게는 통일이라는 주제가 주어져 있습니다. 새로운 문명의 씨알들이 거기 있어요. 마을과 생태와 통일이 곱게 어울리는 생명 평화입니다.

- 청년 대학생들이 통일 운동, 민주화 운동의 최전선에 있던 예전과 달리, 2018년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청년들은 불평등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만큼 박탈감이 심하다는 방증이 아닌가 싶은데요. 그러다 보니 남북 아이스하키 단일팀 문제처럼 통일이라는 거대한 주제에 그리 관심을 가지고 있고 않습니다. '굳이 통일을 해야 하나'라는 생각도 있고요. 2018년을 살아가는 청년들에게 해 주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다면.

과거에는 민주화 통일 문제에 관심이 많았는데, 지금은 불평등에 관심이 많다는 상황 자체는 긍정적으로 봅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통일, 민주화 문제나 불평등 문제를 다르게 보지 않아요. 그 시대의 가장 뚜렷한 모순이 분출되는 현장과 주제에 책임 있게 직면하면 거기서 새로운 주체가 생성됩니다. 그러면 문제들이 다 연결되어 있다는 걸 자연스럽게 깨달아 갈 거라 생각해요.

교육과 현장을 통해 현실 문제들을 깨달은 후 '어떻게 새로운 삶을 만들어 갈 것인가'라는 지점에서 개혁과 진보 의제를 생산하는 이들의 책임이 크다고 생각해요. 근본적 삶의 전환이 가능하도록 돕는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 단편적으로 도움을 받는 처지가 되게 하는 것은 자기 주체성을 키워 가는 데 오히려 위험합니다.

어떤 모순과 소외 상황에 있는지를 깨달은 이들이 그 원인을 알아 가고 공부하는 과정을 진지하게 하다 보면 분단 체제를 전제하고는 현 상황을 극복하기 어렵다는 것을 자각하게 될 겁니다. 분단 자체에 너무 많은 거짓과 왜곡이 있는데, 그 체제 안에서는 건강해질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될 거에요. 자기 현장에서의 문제들을 깊이 인식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통일 문제까지 확장되리라 봅니다.

또 하나, 분단 체제는 길이 막힌 체제입니다. 한라에서 백두를 넘어 중국, 러시아, 몽골로 유럽까지 쭉 이어져야 하는데 길이 막혔어요. 길이 막히니 당연히 우리 삶이 고단하고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길을 여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군사 비용, 분단 비용을 교육·문화·복지 비용으로 전환해야 합니다. 청년들이 취업과 창업을 한다고 했을 때, 길이 막힌 상태의 선택지와 길이 열렸을 때의 선택지는 그 규모와 가능성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문제들을 차츰 인식해 갈 거라 생각합니다. 한동안은 이런 문제와 필요들을 충분히 공유하고 나눌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이 아니었어요. 오히려 국가 차원에서 여론을 조작하고 극단적 대립을 조장하고 상대방을 극단적으로 모함하는 구조에서 10년을 보냈기 때문에, 지난 10년 동안 자란 청년들이 그렇다는 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하지만 점점 희석되면서 통일에 대한 필요와 공감대가 금방 다시 회복될 거라고 생각해요.

밝은누리 홍천 마을 공동체 마을 밥상. 사진 제공 밝은누리

2부 정의

- 대통령 발의 개헌안에 토지 공개념이 들어갔습니다. 고 대천덕 신부님은 '토지 공개념'의 정신이 "토지는 하나님의 것이라"는 희년의 토지법과 닿아 있다고 설파하셨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국가조찬기도회에서도 '희년'을 소개해서 조금 더 알려지긴 했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이 희년이 무엇인지 잘 모릅니다. 목사님께서는 공동체 개척 초기부터 중요한 주제로 '희년'을 많이 강조하신 것으로 아는데요. 목사님께서 이해하고 정리하신 '희년'은 무엇입니까.

시내산 언약, 구약 언약법의 핵심이 희년이죠. 안식일·안식년·희년이라는 구조는 구약성경의 시내산 언약이 희년이라는 주제를 얼마나 강조하고 있는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첫 설교 주제도 역시 주의 은혜의 해, 희년입니다. 희년이 구약의 국가법으로 끝나지 않고 예수의 하나님나라 운동의 토대라는 선언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성령'입니다. 우리 시대 희년 운동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중요한 것이 '성령 운동'으로서의 희년입니다. 그리고 희년의 구체적 조항들 중에 중요한 것이 '토지'입니다. 어찌 보면 매우 이질적인 '성령'과 '토지'라는 주제를 동시에 생각하다 보면, 희년을 '제도' 이전에 '생명 살림'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생명을 살리는 데 주시는 원리. 이 원리의 제도적 양식이 희년입니다. 희년 제도에 담긴 하나님의 생명 살림 원리를 주목하는 게 본질이라고 생각해요.

희년은 성경에 잘 나와 있는 것처럼 부와 불평등의 세대 간 이전을 구조적으로 방지하는 제도입니다. 더불어 사는 삶의 가장 근본적 토대가 토지입니다. 토지 불평등을 그대로 둔 채로 다른 불평등을 치유하기 어렵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지만 특별히 토지는 하나님의 것이며 지계표를 옮기지 말라는 명확한 얘기를 하고 계시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 문재인 대통령이 침착하면서도 과감하게 한국 사회의 중요한 개혁 과제를 풀어 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토지문제는 기득권층에게 역린이라 할 정도로 격렬한 반발이 있기에 개헌과 구체적인 입법이 만만치 않습니다. 이럴 때 교회가 힘이 되었으면 하지만 재를 뿌릴까 우려되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교회가 '토지 공개념'을 지지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성경은 토지를 공유해야 한다는 것을 명확하게 가르칩니다. "토지는 하나님의 것이다"(레 25:23)는 말씀은 사람들 입장에서 토지는 누구의 것도 아니라는 거죠. 토지는 내 것, 네 것이 있을 수 없다는 얘기입니다.

교회는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며 더불어 살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누군가가 굶주리고 있으면 먹이고, 헐벗고 있으면 입히고, 갇혀 있으면 돌아보라고 합니다. 그런데 굶주리고 헐벗고 갇히는 원인이 소외와 불평등이고, 소외와 불평등의 원천이 되는 게 토지 독점입니다. 토지를 불평등의 도구로 계속 활용하도록 내버려 둔 채 복지를 한다고 해서 온전한 것이 될 수 있을까요.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양산하는 흐름을 막을 수 있을까요.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은 이웃을 사랑하라고 했는데, 정말 사랑하려면 근원적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토지 공개념 운동은 경제적 불평등을 만들어 내는 뿌리를 성경의 원리로 되돌리도록 하는 운동입니다. 토지 공개념 운동은 그 어떤 사상이나 철학을 가진 정치단체보다 교회가 잘할 수 있는 운동이고 세상에 대해 명확한 원칙과 담대함을 갖고 얘기할 수 있는 주제라고 생각해요.

홍천 마을 공동체 밭농사. 사진 제공 밝은누리

- 토지 공개념은 통일 문제에서도 매우 중요한 주제입니다. 남한의 체제 그대로 통일이 된다면 북한은 세계적인 부동산 투기판이 될 것이라는 우려가 많습니다. 토지 공개념과 통일이 긴밀하게 닿아 있는데, 토지 정의 운동과 생명 평화 운동이 어우러질 수 있는 방식이 있을까요.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정의와 평화의 주제를 아우르며 살아갈 수 있을까요.

토지 공개념이 되었든 희년이 되었든 통일이 되었든, 결국 하나님을 우리 삶의 주인으로 고백하고, 하나님의 권속으로,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몸 된 지체로 '더불어 살아가는 삶'을 만들어 가는 것이 중요한 출발점입니다. 더불어 사는 삶이 확장되면 남과 북이 더불어 사는 통일이 될 수 있고요. 사람과 자연이 더불어 사는 생태적 삶이 되고, 땅과 사람이 더불어 사는 토지 공개념, 희년이라는 주제와 맞물리는 거죠.

더불어 사는 삶, 생태, 통일을 실제적으로 경험하는 터전이 무엇일까요. 바로 '마을'입니다. 마을이라는 삶의 근본적 관계망이 없으면 통일과 희년은 추상적이고 이념적이고 제도적인 것으로만 남게 됩니다. 통일이든 토지 공개념이든 생명 평화든 그것을 현실화하고 검증할 수 있는 기본적 생명 살림터인 마을을 회복하는 게 중요합니다.

20세기 사단이 썼던 가장 효과적인 전략이 마을을 깨는 것입니다. 가장 기본적인 삶의 관계망을 깨 버린 것이라고 생각해요. 기본적인 삶의 관계망이 깨지니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의 관계가 구조적으로 단절됩니다. 이런 단절로 '조작된 욕망', '조장된 불안' 통해 작동하는 시대 우상들에 취약해지고, 마음의 병, 고독과 우울, 불안이 구조적으로 심화됩니다.

서로 돕고 더불어 사는 삶의 토대가 토지입니다. 흙에서 괴리되면 사람은 건강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흙으로 창조되었고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셨는데 흙과 나누어지고, 배제되고, 흙에서 불평등이 발생했어요. 흙과의 관계를 잃어버리고 생기만 생각했기 때문에 자꾸 종교적 관념에 빠져 겉도는 겁니다. 흙과의 관계성을 회복하고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회복하는 것이 때로는 통일운동, 때로는 토지 공개념 운동으로 나타납니다.

땅에 대한 새로운 이해는 21세기 새로운 생명 평화 문명을 만들어 가는 통일 겨레의 구체적 과제들을 풀어갈 때에 매우 중요한 부분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땅'은 생태 문제와 경제문제를 함께 아우르는 주제입니다. 마을이라는 삶의 양식으로 들어오면 일상 속에서 생명을 살리는 터전이 되는 거죠. 땅에 대한 이런 생각들을 공유하고 확산해 나갈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더불어 사는 삶을 몸으로 배우고 깨닫게 하는 마을이 많이 생기는 겁니다.

생명의 문제는 관념보다 몸의 경험이 중요합니다. 어린아이가 엄마를 인식해 가는 것과 비슷해요. 아기는 이성적인 판단보다 엄마의 냄새를 맡고 소리를 듣는 몸의 구체적인 경험이 축적되면서 엄마를 인식하고 삶의 근본적 안정성을 확보합니다.

흙과 괴리되어 토지로 온갖 불평등을 야기하는 구조를 바꾸고 땅과 생태계를 함부로 유린하는 구조를 바꿔 가는 가장 중요한 경험은 생명 살림의 토대로서의 마을을 회복해 가는 삶을 통해 얻을 수 있습니다. 도시에서 시작하든 농촌에서 시작하든 마을 공동체의 경험들이 농촌과 도시가 서로 살릴 수 있는 구조를 만들고 그 경험으로 토지문제, 통일 문제 등을 같이 만들어 가는 게 우리에게 중요한 과제로 남아 있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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