왠지 말의 앞뒤가 안 맞는 듯한, 뚜렷한 논리도 논지도 없지만 뭔가 매력적인, 그래서 묘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유명한 문단 한 조각이 있다.

"이윽고 우충충한 오늘 하루와 음산한 내일의 예측에 풀죽은 나는, 마들렌의 한 조각이 부드럽게 되어 가고 있는 차를 한 숟가락 기계적으로 입술로 가져갔다. 그런데 과자 부스러기가 섞여 있는 한 모금의 차가 입천장에 닿는 순간 나는 소스라쳤다. 나의 몸 안에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깨닫고, 뭐라고 형용키 어려운 감미로운 쾌감이, 외따로, 어디에서인지 모르게 솟아나 나를 휩쓸었다."1)

조개 모양의 작은 케이크인 마들렌이 입안의 미각세포와 만나자, 작중 화가는 오랫동안 전혀 찾지 않던 어린 시절의 기억 속으로 불현듯 불려 들어갔다. 휴일 오전이 선사하는 평안한 노곤함, 이모가 만들어 준 부드러운 마들렌, 연약한 피부를 어루만지던 콩브레 지역의 햇살, 낡은 회색 집과 시골길의 모습 등이 따뜻한 차에 서서히 녹아 들어가는 마들렌 조각과 함께 의식 위로 떠올랐다. 이렇게 프랑스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 1871~1922)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À la recherche du temps perdu>에서 '마들렌 순간'이라는 감미롭고 인상적인 이미지를 창조해 냈다.2)

이 짧은 몽환적 장면은 딱딱 잘 맞아떨어지는 추상적 논리보다 감각적 이미지에 우리의 인식이 더 크게 영향받을 수도 있음을 보여 준다.3) 생생하고 풍성한 과거 기억은 의도적 노력이 아니라 '성찰 이전의 지각'(pre-reflexive perception), 즉 마들렌과의 접촉을 통해 되살아났다. 희미해졌던 기억이 저장된 곳은 정신이 아니라 '몸'이었고, 이 신비한 저장고를 여는 마법은 몹시도 감각적이고 (최소한 프랑스에서는) 일상적인 마들렌이었다. 이처럼 인간의 의식보다 더 근원적인 무엇이 몸과 감각과 얽혀 있음을 인정한다면, 기독교적 진리와 교회에서의 실천 역시 새로운 방식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

잊어버린 '몸'을 찾아서

몸, 그것은 단지 단백질과 지방 덩어리, 혹은 정신의 명령을 받아 움직이는 객체가 아니다. 1세기부터 기독교가 고대 그리스 철학의 실체론적 언어를 빌려 와 육체와 영혼의 관계를 설명해 혼동이 생겼지만, 사실 성서가 보여 주는 인간은 본성상 영육 통합체이다. 인간이 영육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인간의 영과 육 모두를 통해서 자신을 알리기로 결정하셨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는 너무나 당연하지만 오래도록 무시당해 온 진리다.

영육 통합체로서 인간은 '명석판명' 혹은 '보편타당'한 교리적 지식만이 아니라, 몸의 지각을 통해서도 하나님을 알아 가는 존재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신앙에 대한 지적 앎보다 훨씬 복잡하고 풍성한 그 무언가를 우리는 몸을 통해서 얻어 왔고, 얻고 있으며, 얻을 것이다. 그렇기에 하나님을 알아 가는 가장 중요하고 근원적 매개는 신학책이나 강의가 아니라, 세속적 삶에 파묻혀 있던 오감을 하나님을 향해 열도록 욕망을 교육하고 존재의 근원에 대한 잃어버린 기억을 찾도록 우리의 몸과 마음을 형성해 가는 '예배'다.

이 같은 '몸'과 '지각' 중심적 사유는 교회와 신학교에서 일어나는 여러 '신실한 현상'을 흥미롭게 재평가하게 해 준다. 오늘날 많은 목회자나 신학자가 세속화의 위험에 노출된 교회를 지키려면 기독교 세계관을 정립하고 교육해야 한다고 열정적으로 외친다. 그리스도의 팬이 아니라(not a fan) 제자를 만들어야 한다며, 잘 짜인 제자 교육 세미나와 커리큘럼을 기획하고 사람들을 모은다. 스마트폰 사용이 일반화한 만큼, 이에 맞게 기독교적 컨텐츠를 만들어 보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어린아이부터 교리 교육을 해야 한다며, 16~17세기 당시 개신교 교리 교육 텍스트를 현대어로 재번역한다.

이 모든 문제의식과 노력이 큰 의미가 있지만, 우리는 조금 더 큰 틀 속에서 이러한 현상의 의미를 질문해 봐야 한다. 현대사회의 도전에 대응하고자 교회와 신학이 택하는 많은 접근법이 사실상 계몽주의 이후 인류 문명과 의식 속에 깊게 뿌리박힌 주지주의 틀 속에 들어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근대 합리주의 패러다임 속에 있는 우리가 놓치고 있는 소중한 무엇이 있지 않을까.

이 같은 질문에 대해 창조적이고 심각한 신학적 응답을 내어놓고 있는 이들 중 미국 칼빈칼리지에서 철학을 가르치는 제임스 스미스(James K. A. Smith, 1970~) 만큼 국내에 잘 알려진 사람도 없는 듯하다. 그는 이미 <칼빈주의와 사랑에 빠진 젊은이에게 보내는 편지>(새물결플러스), <급진 정통주의 신학>(CLC), <해석의 타락>(대장간), <누가 포스트모더니즘을 두려워하는가?>(살림), <신학 공부를 위해 필요한 101가지 철학 개념>(공저, 도서출판100) 등을 통해 포스트모던적 상황 속에서 기독교 전통과 신앙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호소력 있게 제시해 왔다.

특히 재작년부터 IVP를 통해 소개되고 있는 제임스 스미스의 문화적 예전(Cultural Liturgies) 3부작 프로젝트는 기독교 전통에 대한 깊은 이해와 현대 철학에 대한 창조적 통찰이 어우러진 주목할 만한 수작이다. 그는 오늘날 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세속적 예전'을 예리하고 비판적으로 분석할 뿐만 아니라, 세속적 예전에 대항하여 그리스도의 제자를 전인적으로 형성하는 예배의 중요성과 그 작동 방식을 정교하면서도 흥미롭게 보여 준다.

<하나님나라를 상상하라 - 사회적 몸과 예배의 작동 방식> / 제임스 스미스 지음 / 박세혁 옮김 / 332쪽 / 1만 6000원. 사진 출처 IVP

"니가 알던 예배가 아냐"
(feat. 메를로퐁티 & 부르디외)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그야말로 방대하고 복잡하고 난해한 문학의 대명사다. 하지만 그 내용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하더라도 그 작품을 '사랑'하는 이라면 왠지 마들렌은 차와 함께 먹어야 한다는 싫지 않은 (오히려 매력적인) 압박감을 느껴 봤을 것이다. 그리고 한번쯤은 마들렌이 입 안으로 들어갈 때 옛 기억이 되살아나는 묘한 체험을 살짝은 기대했을지도 모른다. 이처럼 인간의 욕망은 상징을 듬뿍 담은 예전적 지평을 전제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예전의 반복되는 상징적 행동은 모호하고 길들지 않았던 욕망을 특정 방향으로 강화하고 교육한다. 국가대표 경기를 볼 때마다 치킨을 배달해 먹는다든지, 옛 친구들을 만나 노래방에 가면 이상하게도 옛날 유행가를 부른다든지, 마블 코믹스 영화가 나올 때마다 캐릭터 티셔츠를 산다든지 등등의 습관화한 행동도 일상에서 욕망과 예전이 얼마나 긴밀히 결합하여 있는지 보여 주는 사례다.

이런 시각에서 보자면, 교리나 설교, 세계관 등을 강조하며 지성에 호소하는 기존의 기독교인의 접근법은 '당신이 사랑하는 것이 바로 당신'(You are what you love)이라는 오랜 지혜를 간과한다는 데 문제가 있다. 실제로 기독교가 신앙인의 지성을 부단히 강조해 오는 사이에, 현대사회의 소비주의나 애국주의, 인본주의적 교육, 군사주의 등은 이미지, 상징, 음악, 스토리텔링, 이벤트 등의 각종 유사 예전으로 현대인의 욕망을 길들이고 사로잡아 왔다. 제임스 스미스는 교회와 신학의 합리주의적 태도가 여전히 유의미하더라도, 세속적 예전에 알게 모르게 참여하고 있는 현대인의 몸과 마음을 되찾기에는 역부족이라 판단한다. 인간은 머리보다는 오장육부가 설득되어야 움직이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문화적 예전 3부작에서 제임스 스미스는 아우구스티누스를 따라 인간을 근원적으로 몸을 가진 욕망의 존재, 더 나아가 자기가 욕망의 대상을 예배하는 예전적 존재(homo liturgicus)로 파악한다.4) 특별히 <하나님나라를 상상하라>(IVP)에서는 기독교의 존재 의미와 미래를 이러한 인식 변화에서 찾아야 한다고 보는 듯하다. "교회와 기독교 대학의 갱신―기독교 예배와 기독교 교육의 갱신―은 인간을 '예전적 동물', 즉 예배하지 않을 수 없으며 근본적으로 예배의 실천(practices)에 의해 형성된 피조물로 이해하는 데 달려 있다."5)

이쯤에서 한국의 독자들은 이런 질문을 던질 만하다. '아니, 예배를 이제껏 늘 드려 왔는데, 예배를 더 드리라는 건가', '매주 드리는 형식적 예배에서 충족되지 않은 바를 제자 양육이나 교리 교육 등으로 보충해야 하지 않을까', '각종 예배의 과잉 현상을 보이는 한국교회의 문제는 제대로 된 신학의 부재 아닌가'.

이 같은 질문을 품고 제임스 스미스의 <하나님나라를 상상하라>를 읽기 시작하면 기대했던 시원한 답변이 아니라, 모리스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 1908~1961)와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 1930~2002) 같은 프랑스 현대 학자들의 낯선 이론과 처음부터 만나게 된다. 그런데 몸의 지각과 습관의 중요성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는 이들의 설명을 찬찬히 따라가다 보면, 왜 몸을 통해 전인적으로 참여하는 예배에서 기독교적 형성이 일어나는지에 대한 소중하고 실천적인 통찰을 익히게 된다.

이전에는 예배의 '반복'이 걸림돌이었다면, 이제는 '예배'를 통한 반복이 기독교인이 되는 데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깨닫게 된다. 이전에는 예배의 '형식'이 형식주의로 흐를까 봐 거부감이 생겼다면, 이제는 '예배'의 형식이 나의 이해력을 넘어서는 하나님나라에 대한 상상력을 잉태하는 환경이 됨을 자각하게 된다.

"나는 기독교 예배에는 환원 불가능하며 심지어 명료하게 진술할 수도 없는 일종의 '예전-내적' 지혜가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 지혜가 참되다는 것을 안다. 그 진리는 상상력 안에서 공명한다. 우리의 오장육부 안에 흡수된다. 우리는 우리의 오장육부를 신뢰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예전적 형성으로부터 부풀어 오르는 '직관'을 신뢰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런 다음 이 '예전-내적' 지혜를 더불어 살아가는 우리의 삶 전반으로 '확장'할 방법에 관해 생각해야 한다."6)

이렇게 예배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알아 갈 뿐만 아니라, 세계-내-존재(being-in-the-world)로서 세상을 특별한 방식으로 지각하는 방식을 훈련받는다. 우리는 욕망의 존재이기에 바른 예전에 참여가 없다면, 우리의 상상력과 지각은 세속적 예전을 통해 뒤틀린 방식으로 길들이게 마련이다. 그렇기에 하나님에 대한 욕망을 재습관화하는 리듬, 은유, 몸동작, 이미지, 이야기로 형성된 예배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더욱 필요하다.

평범한 예배의 비범함을 찾는 질문들

예배에 반복적으로 참여하는 것으로 우리에게는 성화된 습관이 형성되고, 몸에 익은 습관은 특정한 방향으로 우리의 생각과 움직임을 유도하면서 지성만으로 파악하지 못하는 '환원 불가능한' 직관과 정취를 얻게 한다. 물론 예배에서 유명 강사가 전달해 주는 것과 같은 깔끔한 정보나 실천적 매뉴얼을 얻으리라 기대할 수는 없다. 하지만 예배는 명제적 지식으로는 결코 번역될 수 없는 풍성하고 다채로운 의미를 피부와 뼈, 근육, 신경의 움직임을 통해 선사한다. 그리고 예배는 '오장육부' 차원에서 상상력을 통해 이해된 의미를 자양분으로 삼아 기독교적 형성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공동체적 장을 마련한다.

제임스 스미스의 현란한 말솜씨와 박학다식함을 따라가다 마지막 책장을 넘기고 나서는 '결국은 예배가 중요하다는 뻔한 이야기하는 거잖아?'라고 허무해하는 독자가 있으리라 충분히 예상한다. 이러한 반응 역시 틀린 것은 아니지만, 이것은 극화하자면 톨스토이의 대작 <안나 카레니나>를 읽고 "러시아의 젊은 가정주부, 가정불화로 기차에 몸을 던져 자살하다"7)라고 깔끔히 결론 맺는 것과 비슷한 일일지도 모른다. 

실제 <하나님나라를 상상하라>는 잘 만들어진 정답을 제기하기보다는 예배, 문화, 교육 등에 대해 여러 생각 거리를 던져 준다. 예배에 참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만큼이나, 우리가 참여하는 예배가 하나님나라의 이야기를 적절히 담고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더욱 풍성하게 그 이야기를 반영할 수 있을지를 질문하게 해 준다. 명제적 지식을 전달하지 않지만 어떻게 욕망과 함께 잘 살 수 있을 것인가를 체감하게 해 준다(이러한 문제의식에 부합하고자 스미스는 소설, 영화, 시, 그림, 대중문화 등에 대한 특유의 매력적이고 세련된 해석을 곳곳에서 제시한다).

이 책은 문자로 표현된 것보다 더 풍성한 의미를 선사해 주는 작품이다. 스미스의 기획에 공감하며 책을 읽었다면, 아마도 마지막 장을 덮자마자 욕망의 존재로서 기독교인의 정치적 삶을 다루는 <왕을 기다리라 Awaiting the King>(가제)라는 문화적 예전 3부작의 마지막 작품이 한국어로 소개되길 기다리게 될지도 모른다.

김진혁 /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신학 공부>(예책) 저자

각주

1)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스완네 집 쪽으로 1』, 김창석 옮김(서울: 국일미디어, 2000), 66.
2) 일반적으로 평론가들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실재의 본성, 인간관계, 지각과 기억계에 대한 인식을 근원적으로 바꿨다고 평하곤 한다. 이에 대해 다음을 참고하라. Simon Heffer, "How Proust’s 'madeleine moment' changed the world forever", The Telegraph (27th Oct., 2015). https://www.telegraph.co.uk/books/authors/simon-heffer-proust-madeleine-wagner/(2018.04.23. 최종 접속)
3) 제임스 스미스도 그의 책 도입부에 프루스트를 끌어들인다. 그러나 그는 지성의 '상대적 열등감'을 입증하고자 지성에 의존해야 하는 곤경 내지 역설을 보여 주고자 프루스트의 『생트-뵈브에 대한 반론』을 인용한다. 제임스 스미스, 『하나님나라를 상상하라』, 박세혁 옮김(서울: IVP, 2018), 15-17.
4) 제임스 스미스, 『하나님나라를 욕망하라』, 박세혁 옮김(서울: IVP, 2016), 55-57.
5) 스미스, 『하나님나라를 상상하라』, 33.
6) 스미스, 『하나님나라를 상상하라』, 293 n. 59.
7) 알랭 드 보통, 『프루스트가 우리의 삶을 바꾸는 방법들』, 박중서 옮김(서울: 청미래, 2010), 55.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