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투 운동, 하나님이 주신 기회'라는 제목은 피해자의 말을 인용한 것입니다. 피해자는 "하나님이 주신 마지막 기회"라고 말했습니다. 성폭력에 희생당한 뒤, 가해자의 성범죄를 폭로했다가 명예훼손으로 고소당하고 돈과 권력에 의해 법정에서도 패배한 피해자는 미투(#MeToo) 운동을 "하나님이 주신 마지막 기회"라고 고백하고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그는 "가해자는 남성 중심 사법 체계에서는 자유로울 수 있지만 미투 운동으로부터는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라고 말했습니다. 미투 운동이 세상 법의 불의한 판정을 뛰어넘을 수 있도록 하나님이 어느 피해자에게 주신 마지막 기회라면 우리는 도와 달라는 절박한 호소에 귀 기울이는 것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교회 성폭력의 문제점들

교회 성폭력의 가장 큰 문제는, 신앙인으로서의 '나'의 정체성이 침범당하고 산산조각 나면서 하나님과의 관계, 사람과의 관계가 파괴되는 것입니다. 가해자와 교회가 피해자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었기 때문에 사랑과 정의, 그리고 구원에 대한 감각들이 송두리째 흔들리게 됩니다.

피해에 굴복하지 않고 신앙을 저버리지 않으면서 꿋꿋하게 살아온 피해자 중 한 분은 "폭력을 행하고 폭력에 공모하는 불건강한 사람들 가운데서 혼자만 건강하게 사는 게 힘겹다"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교회 성폭력은 일부 목회자의 개인적 성 문제가 아니라 관계를 파괴하는 '폭력'과 무죄한 피해자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는 '불의'의 문제로 교회 됨의 본질을 재고하게 하는 중대한 사안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미투 운동은 교회의 회개와 영적 쇄신을 가능케 하는 운동이 될 수 있습니다. 마땅히 수치스러워해야 할 가해자 대신 수치심으로 가득 찬 '피해자 정체성'을 강요받고 좋게는 보호 대상으로, 나쁘게는 차별과 혐오의 대상으로 전락해 버린 피해자들이 '나의 잘못이 아니다'라는 진리를 깨닫고 개혁의 주체로 나섰기 때문입니다.

그전에는 피해를 설명하고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언어를 갖지 못했던 피해자들은 미투 이후 다양한 목소리로 말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동시에 권력형 성범죄의 구조적 악순환을 통찰하여 자신이 말하지 않는다면 성폭력은 계속 이어진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제자까지도 동일한 목사에게 성폭력을 당한 것을 알게 된 피해자가 미투에 참여하면서 "또 피해자가 생긴다면 저는 정말 못 살 것 같아요"라는 고백을 했습니다. 교계 미투는 또 다른 피해자가 없기를 바라는 마음, 교회가 건강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진 피해자들의 용기 있는 선택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미투 이후가 정말 쉽지 않습니다. 교회는 아직 미투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고 가해자는 여전히 '전면 부인' 내지는 '합의에 의한 성관계'라는 카드를 내밀고 있습니다. 미투를 통해 드러난 사건 대부분이 공소시효가 지난 사건이고 성폭력의 직접적인 증거가 없다는 점에서 가해자가 발뺌할 수 있는 여건이 되기 때문입니다.

20여 년 전, 여신도를 수년간 지속적으로 성폭행한 사실이 언론에 드러나고 노회에서 면직 처리까지 된 가해자는 아직도 피해자를 '이단', '꽃뱀'으로 몰며 자신의 죄를 철저히 부인하고 있습니다. 가해자는 피해자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하고 피해자가 사선 변호사를 선임하지 못하는 딱한 사정을 이용하여 재판에서 이겼습니다. 그리고 피해자가 더 이상 성폭력 피해를 주장할 수 없도록 '언론 및 인터넷 유포 금지 가처분'으로 피해자를 압박했습니다.

명예훼손 역고소의 또 다른 사례도 있습니다. 담임목사의 성추행에 대한 사과를 받으러 주일날 당회에 찾아간 피해자와 그 측근을, 그 다음 날 담임목사가 바로 명예훼손으로 고소한 케이스였습니다. 일단 고소를 당하면 모든 말과 행동이 법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에, 피해자는 억울해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 사이, 가해자는 부교역자를 이용하여 교회에 피해자를 '신천지', '이단'이라고 소문내고 그 거짓 소문이 진실처럼 굳어지게 했습니다. 이처럼 가해자는 자신의 죄를 부인하기 위해 피해자를 사회적으로 매장시킵니다.

가해자의 또 다른 반응은 '합의에 의한 성관계'라는 주장을 하는 것입니다. 한 가해자가 언론에서 "강제성은 없었다"며 '합의에 의한 성관계'라고 말한 것이 피해자를 무너지게 만들었습니다. 그 가해자가 처벌을 면하기 위해 그런 거짓말을 한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지만 그런 거짓말을 받아주는 강간 문화, 끊임없이 성폭력을 성관계로, 폭력을 사랑으로 합리화하는 '강간 신화'라고 불리는 집단 망상이 문제입니다.

한 피해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랑한다면 죽여도 되나요? 기독교의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용서한다는데 여기서 굉장한 혼돈이 일어납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성폭력을 당했기에 피해자가 더 자신을 자책하게 되는 교회 내 그루밍 성범죄에 대해서도 교회는 '너의 잘못이 아니다'라고 피해자의 무죄를 선언해 주어야 합니다. 교회 성폭력 대부분이 그루밍 성범죄인데, 그로 인한 피해자들은 미투에 참여하지 못하고 숨죽여 있으면서 고통당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절대 간과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이제 미투에 대한 교회와 노회의 대응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피해자의 미투 기사가 언론에 나가기 전, 가해자가 속해 있던 교회의 담임목사는 절대적으로 교회가 알려지면 안 된다고 강조했습니다. "교회에 또 다른 피해자가 있을 수 있지 않겠냐"라는 물음에는 그런 것은 생각하고 싶지 않다고도 했습니다. 피해자에게 미안하다며 가해자가 진정으로 사과할 수 있도록 돕겠다는 목사는 가해자를 신속하게 교회에서 내보낸 후, 문제를 은폐하고 말았습니다.

최근에 성폭력 사실이 언론에 알려진 한 목사는 노회에 사직서를 제출했고 노회 임원회에서는 재빨리 목사를 사직 처리해 주었습니다. 피해자가 노회의 권유에 따라 고소장이 아닌 고발장을 쓰고 기다리던 중, 노회로부터 가해 목사가 더 이상 노회원이 아니라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알아보고 최선을 다하겠다"라며 피해자에게 믿음을 주었던 노회는 이제 "언론에 가시든지 알아서 하시라"라는 태도로 돌변했습니다. 피해자는 다시 한 번 목사들에게 기만당하는 경험을 하였으며 성폭력 사건보다 더 큰 충격과 상처를 받았습니다. 교회와 노회의 재빠른 가해자 사직 처리는 '신속하고 단호한 태도'가 아니라 문제를 은폐하는 또 하나의 방식입니다.

미투 이후, 교계 여성 단체 중심으로 위드유(#WithYou)를 선언하고 있지만 위드유가 피해자들에게 실질적 지원이 되기 위해서는 교계 및 교단 정서를 크게 좌우하고 있는 남성 목회자들의 의식 변화와 피해자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제대로 듣고 반응하려는 성도들의 태도가 우선되어야 합니다. 이제 교회 성폭력 근절을 위한 위드유의 지향점을 세 가지로 말씀드리려 합니다.

교회 성폭력 근절 위한 위드유의 지향점

첫째, 교회 성폭력 근절 운동은 사건 처리보다는 관계 회복을 목적으로 삼아야 합니다. 신속한 사건처리와 가해자 처벌에 초점을 맞추다 보면 시간을 두고 공동체 내에서 문제를 공론화하고 토론하는 과정을 생략하게 됩니다. 목회자에게 높은 윤리적 기준이 적용된다는 명분으로 행해지는 가해자 처벌 위주의 사건 처리는 공동체의 인식 변화로만 이를 수 있는 근본적 문제 해결에는 도달하지 못합니다. 진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면 공동체가 피해자의 목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피해자들이 정말 원하는 것은 가해자가 자신의 잘못을 정확히 깨닫고 진정성 있는 사과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피해자 지원, 가해자 징계 절차와 공적 회개의 과정, 공론화와 토론의 과정을 통해 궁극적으로 피해자 치유와 공동체에서의 관계 회복이 일어나야 합니다. 교회 공동체는 피해자의 관점에서 듣고 피해자 편에서 공정하게 일이 처리되도록 노력해야 하며, 오랫동안 성폭력이라는 공동의 적과 맞서 싸웠던 경험과 기억을 공유하여야 함께 반성폭력 문화와 제도를 만들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 성폭력 예방 행동 지침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공감 능력입니다. 요즘 펜스룰과 관련해서 "이제 무서워서 악수도 못 하겠다"는 분위기가 교계의 남성 목회자들 사이에서도 조성되고 있습니다. 그 전까지는 교제, 격려, 스킨십이라는 명분으로 신체 접촉이 원활했는데 미투로 인해 목회자들이 불안해서 몸을 사리게 된 것이 목회에 제한과 어려움을 초래하게 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옵니다. 다른 사람의 몸에 함부로 손을 대는 것이 그 사람을 침해하는 폭력일 수도 있으므로 서로 간에 경계를 지키자는 태도는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경계가 차이와 다양성을 존중하며 권력 남용을 방지하는 건강한 경계가 아니라 성차별과 배제, 혐오로 이어지는 경계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 성폭력 예방을 위한 행동 지침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반성폭력 감수성, 젠더 감수성, 인권 감수성 등 다른 사람에 대한 공감 능력이 커지는 것입니다. 가장 비폭력적이며 건강한 관계 맺기는 신체 접촉이 아니라 공감의 형태로 이루어집니다. 교회는 미투를 통해 진통을 겪으며 더 공감적으로 사람들과 소통하는 것을 연습해야 합니다.

셋째, 위드유는 피해자를 지원하고 돌보는 네트워크 형식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아직까지 위드유가 피해자들에게 실질적 지원이 되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피해자들은 여전히 외롭고 힘든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미투 참여자들은 가해자 측의 조직적 2차 가해에 시달리면서 먹지도 자지도 못한 채 이전보다 더 고통받고 있습니다.

한편 미투에서도 소외된 이들이 있습니다. 미투 역시 언론과 사회가 규정지어 놓은 범위가 있기에, 상대적으로 고통이 너무 커서 참여하지 못한 이들이 있고, 때로는 고통이 너무 사소하게 치부되어 참여할 수 없었던 이들도 있습니다. 중요한 건 피해자들 모두에게 성폭력의 고통은 삶을 심각하게 훼손해 놓았고 피해자들은 성폭력으로 파편화하고 찢긴 삶이 회복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는 것입니다.

피해자들이 보다 안전하게 미투를 할 수 있도록 다양한 경로를 열어 주고 각각의 피해자에게 필요한 도움을 적시에 제공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일원화한 도움이 아니라 다각도의 지원 체계가 필요합니다. 법률․집회․언론․의료․심리적 지원과 함께 다양한 문예 창작 활동 및 교육․자활 지원에 이르기까지, 피해자들이 다시 일어나도록 도와야 합니다.

이제 위드유 운동은 "무엇이든 기꺼이 돕겠다"라고 자원하는 선한 사마리아인들이 서로 연결되고 함께 하는 네트워크 형식으로 이루어질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함께 피해자를 위해서 마음을 모으고 서로 하나가 된다면 약자와 피해자의 편에 서서 폭력과 맞서 싸우는 생명 문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미투, 위드유를 통해 한국교회는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 상호 관계성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며, 성폭력이라는 '죽임의 문화'에 대항하여 서로를 살리는 '돌봄 네트워크'라는 새로운 교회의 형태를 향하여 도약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미투가 하나님이 주신 기회가 될 수 있고, 그 기회를 붙잡느냐는 부르심에 응답하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글은 4월 20일 진행한 한국여신학자협의회 창립 38주년 기념 후원 행사 '미투 토론회'에서 발표한 내용입니다.
채수지 / 한국여신학자협의회 기독교여성상담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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