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 훈련과 강남

1980년대를 대표하는 한국 기독교의 흐름에서 '제자 훈련'이란 키워드를 빼놓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고 본다.

1980년대는 교인 수의 폭발적인 성장으로 교회 조직은 양적으로 비대해졌지만 그에 비례한 영적 성숙이 부족하다는 고민과 도전이 목회자들 사이에서 발화되었던 시기였다. 또한 그 고민의 실천적 측면에서 사회참여, 제자도, 십자가 신학 등의 유행이 발발했던 것도 1980년대의 특징이다. 그중에서도 '제자 훈련'은 기독교의 외적 성장을 보완하는 내적 성숙에 기여했다는 점에서 그 영향력이 막중하다.

1978년 강남은평교회를 개척한 옥한흠 목사는 곧이어 1980년에 강남으로 교회를 이전하고 1981년엔 교회명을 '사랑의교회'로 개명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80년대 중반 건축한 사랑의교회 강남 예배당 외관. 뉴스앤조이 박요셉

옥 목사는 그리스도인의 강력한 영성 폭발을 강조함과 동시에 '사랑'이란 키워드를 추상적이거나 내재적 차원에만 머무르게 하지 않고 현실 사회를 향한 적극적 참여의 동력으로 사용했다. 당시의 한국교회를 휩쓴 주된 흐름이 급격한 보수화나 과도한 급진화가 낳은 갈등이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옥 목사의 이러한 시도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복음에 있어서는 인문학적 흐름과 타협하지 않는 순수성을 강조하면서도 주류 기독교를 공격할 때 주로 사용하는 사회참여에 대한 미온적 태도를 비판하고 적극적 사회참여를 촉구하는 옥 목사의 설교가 가져온 파급효과는 상당했다. 그 상당한 영향력은 실제 열매로 나타났는데, 사랑의교회의 폭발적 양적 성장으로 이어졌기에 결국 옥 목사는 1980년대 중반 교회 건축을 결심, 강남역 인근 서초구에 교회를 건축하기에 이른다.

옥 목사가 1980년대의 강남에 교회 건축을 시도하게 된 배경에 '강남'이란 공간이 보유한 자본주의적 특수성을 옥 목사 개인이나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사적 이익에 이용했다는 느낌을 갖기 어렵다. 박정희에 이어 전두환 군사정권으로 이어지는 1980년대에서 '강남'이 가진 천민자본주의적 기질의 태동을 옥 목사 역시 어떤 식으로든 의식했을 것이다. 오히려 옥 목사는 정면 돌파를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이른바 세속 도시를 향한 저항과 돌파, 이를 뒷받침하는 적극적인 개혁 의지로 밀어붙인 것이다. 그 개혁 의지의 키워드가 '제자 훈련'이다.

강남 예배당 정면. 뉴스앤조이 박요셉

칼빈신학교를 거쳐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서 목회학 박사를 공부한 옥 목사가 접했던 이론 중, 그의 제자 훈련의 바탕을 이루는 한 축은 한스 큉의 '교회론'이다. 신학적인 입장 차이는 존재하겠지만 옥 목사는 한스 큉의 '교회론'에서 복음·훈련·비전에 대한 필연적 동기부여를 절감했으며, 우주적 교회로서의 교회의 대사회적 역할과 선도적 역할에 대한 각성을 이뤄 냈다.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옥 목사가 이러한 교회론 적용에 있어 가장 중요하게 본 건 개인의 복음화 차원을 넘어서는 개인의 공동체화와 그 기여에 필연적으로 요청되는 예수의 제자도 구현이다. 옥 목사는 제자도 구현을 개혁의 본질로 인식했고, 프로테스탄트야말로 바로 제자 훈련의 산실이란 자긍심을 선포해야 한다고 본 것이다.

제자 훈련이 개혁이자, 개혁의 대상과 장소가 날마다의 삶에서 개혁을 요청받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자리라면, 그 삶의 중심에서 복음을 외치고 그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하는 제자 훈련 역시 삶과 동떨어진 게 아니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옥 목사는 '강남'을 선택했을 것이다.

그는 1980년대의 '강남'과 향후 '강남'이 가져올 개인을 괴물로 만드는 욕망과 그 욕망을 먹고 자라는 신자유주의의 광기에 당당히 맞서야 한다는 목표로 교회 건축을 계획한 것이다.

한 개인이 예수님의 강력하고도 철저한 복음에 충분히 녹아드는 제자인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난다면 비록 그곳이 소돔이라 하더라도 두려울 게 없다고 확신한 것이다.

예배당 문을 통과하고 난 뒤 모습. 뉴스앤조이 박요셉

카타콤과 탈욕망,
욕망의 한복판에서 복음을 부르짖다

옥 목사의 개혁 의지는 당시의 교회 예배당 건축에 어김없이 반영된다. 소음을 피한다는 표면적 이유가 있긴 하지만 옥 목사가 주장한 제자 훈련 정신의 연장선상에서 생각한다면 예배당을 지하에 내려앉히는 시도에 낮은 자의 자세로 하나님을 만나려는 겸허한 카타콤 열망이 내재되어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옥 목사는 그리스도인으로 모인 교회 속에 내재된 복음의 향기가 비그리스도인에게도 정서적 연대에 있어서만큼은 동일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진 인물이다. 그렇기에 당시 지역 주민들과의 소통, 그들의 의견을 건축 과정에 최우선으로 반영하길 주저하지 않았다. 이러한 교회 건축 과정에서 나타나는 겸손과 소통의 자세는 사랑의교회를 욕망의 급류에 휘말려 정신 못 차리는 '강남'이란 공간에서 종교와 비종교를 넘어서는 유의미한 개혁 기제로 자리 잡게 해 주었다.

옥 목사가 주장한 제자 훈련은 복음의 실천과 그 지속이 개인과 공동체, 더 나아가 시민사회와 국가로까지 확장되는 데 선한 영향력을 가져야 한다는 게 핵심이다. 여기에 옥 목사의 다소 근본적이고 보수적인 신학적 파토스가 덧붙여진다. 한 개인을 둘러싸고 파고드는 욕망의 층위를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축복과 의무의 동시 기제인 성령의 견인을 추동하는 데 쓰여야 한다는 게 제자 훈련의 모티브인 것이다.

그러한 제자 훈련은 개인 삶의 절제와 적극적인 대민 봉사, 그리스도인다운 성숙한 윤리 의식 실천으로 발전된다. 그러한 가르침의 실제적 사례를 필자는 욕망의 강남과 그 강남을 윤리적으로 정화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역동적 상호작용이라고 평하고 싶다. 강남을 둘러싼 부동산과 정치, 문화의 역학 관계가 빚어낸 욕망의 용광로 속에서 사랑의교회는 미쳐 돌아가는 세속 도시, 그 끝을 모르고 치닫는 욕망을 멈춰 세우고 세속 도시를 하나님의 도성으로 변화하게 하는 개혁의 마지막 보루여야 한다는 사실을 부르짖은 것이다.

건물 지하에 예배 공간이 있다. 뉴스앤조이 박요셉

물론 옥 목사의 제자 훈련이 결과적으로 '강남'의 욕망과 어떻게 맞섰는지, 그렇게 맞서서 유의미한 결과를 도출했는지는 미지수다. 제자 훈련이 주장하는 개인의 복음화, 이른바 성화의 추동력인 성령의 견인이 고도성장과 부의 불균형, 그 첨단에 설 수밖에 없도록 치달은 '강남'을 변화하게 했는지에 대해선 지금의 역사적 판단만으론 결론 내릴 수 없단 사실 역시 자명하다. 하지만 옥 목사의 복음을 향한 신념이 녹아든 강남역 서초동에 위치한 사랑의교회 예배당이 가리키는 밑으로의 지향이 가져온 영적 긴장만큼은 그 자체로 피할 수 없는 개혁의 역동성을 보유하고 있다.

개발 광풍이 불어 닥친 1980년대의 강남에서 당대 많은 초대형 교회 건축물들은 외연적 성장에 집중해 온 게 사실이다. 하지만 사랑의교회는 그 풍조와 맞서 싸웠다. 형식은 고대 교회 건축의 복원에 있다고 해도 지상을 향해 할 수만 있다면 위로만 오르려 하는 바벨탑을 연상하는 건축물과 그 역시 하늘 높이 치솟는 십자가 첨탑을 앞다투어 세우려 했던 유행에 정면으로 맞선 것이다.

낮은 곳을 향하는 사랑의교회 지하 예배당은 물질적 풍요에 도취되면서도 적당한 사회적 지위와 명예까지 얻을 수 있는 전형적인 기회의 땅 강남의 중심에서 탈강남, 탈욕망의 외침으로 존재해 온 것이다.

그런데, 그 탈욕망의 외침이 기괴한 종교 논리와 결탁되면서 괴물의 모습으로 변형되기 시작한 역사적 퇴행을 언급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2013년, 서초역 사거리에 들어선 오늘의 사랑의교회가 그것이다.

예배당 내부. 뉴스앤조이 박요셉

이런 식의 세속화는 재앙이다

사랑의교회 예배당이 이전 증축을 결심해야 하는 이유는 현실적으로 보면 전혀 무리가 없다. 1980년대 중반 지어진 800여 명 수용 규모의 예배당에 2000년대 이후 수만여 명 규모로 성장한 교인들을 수용하기는 구조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중고등부 예배는 물론이고 성인 교인들에게도 예배 시간을 5~8부로 확장해 분산 수용한다 해도 한계는 분명했다. 물론 분립이나 다른 방법을 생각할 수 있지 않느냐는 의견도 있겠지만 그건 개교회의 태생적 뿌리와 역사를 함께해 온 교인들의 생리와 정서에 맞지 않을 수도 있다. 교회 이전이나 증축은 사랑의교회가 당면한 당연한 고민이었을 것이다.

단순 비교는 어렵겠지만 옥 목사가 요구한 제자 훈련의 정신 계승이 적어도 그 본질의 흐름만큼은 훼손되지 않았다면 지금의 오정현 목사가 기어코 일궈 낸 서초역 사거리에 위치한 지금의 건축물은 아예 시도조차 되지 않았을 것이다. 옥 목사가 외친 제자 훈련의 본질은 세속 도시에 대한 거부가 아닌 세속 도시 한복판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예수님의 제자란 사실을 실천적으로 선포하는 개혁의 보루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사랑의교회 건축물은 세속 도시가 추구하는 소비지향주의의 첨단, 그 자체로 주저앉고 말았다.

맘몬의 광기에 휩쓸린 '강남'이란 재앙의 메타포를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인 교회는 어떻게 읽고 받아들어야 할까. 옥 목사였다면 그 메타포를 어떻게 읽었을까.

만약 오 목사가 자신은 옥 목사와 다른 노선을 걷겠다고 천명했다면 소제목의 '재앙'이란 표현을 자중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 목사는 옥 목사의 제자 훈련이 곧 자신의 목회 철학임을 공공연히, 지금도 계속해서 부르짖는 자칭 제자 훈련의 화신이 아니던가. 그런데 이게 대체 뭐하자는 건가. 지금의 사랑의교회는 신자유주의 이념을 성스러운 복음으로 받아들인 초대형 교회의 전철을 그대로 답습했을 뿐만 아니라 '강남'이란 맘몬의 메타포를 적극 활용한 나머지 수습할 길 없는 기형의 바벨탑을 세우고 말았다.

2013년 건축한 사랑의교회 서초 예배당 외관(위)과 입당 예배 당시 모습(아래). 뉴스앤조이 자료 사진

혹자들은 억울하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사랑의교회 건축물을 두고 둘러싼 일련의 충돌과 정도 이상으로 과도하게 집중된 비난은 자칭 영적 공공재를 향한 불신자들의 영적 공격이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백번 양보해 도로점용 위법성 여부와 교회 건축비 대출과 관련한 문제들을 논외로 하더라도 지금의 사랑의교회가 추구하는 외형적 과시를 위한 건축물 위용의 의지는 옥 목사가 이야기한 개혁 의지가 아닌 오히려 개혁해야 할 최악의 죄였음은 도저히 외면할 수 없다.

이젠 좀 솔직해져야 할 것 같다. 신학적 견해가 다르다 해도 우리가 정말 구원의 복음과 그 감격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진짜 영적 공공재가 무엇인지, 진짜 영적 전쟁이 무엇인지 말이다. 누군가들의 말처럼 사랑의교회가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고 '강남'의 욕망으로부터 초연함을 선포하는 영적 공공재를 지키고 싶다면, 그게 진심이라면 지금 당장 그곳을 버리고 나와야 한다. 지금 당장 말이다.

이런 식의 세속화는 제자 훈련도, 영적 공공재도, 개혁도 아무것도 아니다. 그냥 막장이고 재앙이다. 그걸 모르는 사람은 이제 아무도 없다.

소설가 주원규 목사가 '예배당 건축 기행'을 격주 간격으로 연재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인터뷰 기사(바로 가기)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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