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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일가와 손정도 목사, 정동제일교회

[그림으로 만나는 한국교회] 정동제일교회

이근복   기사승인 2018.04.20  14:2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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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사한 봄과 더불어 한반도에 평화의 기운이 움트고 있습니다. 남북 정상회담 등 극적인 정세 변화에 전 세계가 놀라면서 북조선 김정은 국무위원장에 대한 관심이 날로 커집니다. 3대 세습한 김일성 주석 가문은 한국교회와 관계가 깊지만 그 전통이 이어지지 않고 북한에 신앙의자유가 없어서 참 아쉽습니다.

"나는 김형직이라는 친구를 그들의 소개로 알게 되었다. 형직은 만주에서 왔는데 조국 재건을 향한 일념이 누구보다도 강했다. (중략) 그와 더불어 우리는 모두 기독교인이었으므로 모임이 끝날 때마다 늘 기도를 했다. (중략) 1913년 어느 여름 주일날, 나는 형직과 덕순과 함께 숲으로 기도를 하러 갔다. 그때 형직이 한 가지 제안을 했다. 혈서를 쓰자는 것이었다. (중략) 천 위에는 커다랗게 '대한 독립'이라는 글과 '김형직'이라는 이름이 붉게 아로새겨졌다. 그가 서명을 마치자 덕순과 나도 이어서 칼을 잡았다. 그리고 그와 똑같이 손가락을 베었다. (중략) 우리는 기도를 하면서 우리의 인생 전부를 하나님과 조국에게 바치겠다고 약속했다." (<배민수 자서전>, 연세대학교출판부 1999, 81~83쪽)

삼애 정신(하나님 사랑, 농촌 사랑, 일 사랑)으로 독립운동과 농촌 개발 운동, 교육 운동을 전개하였던 배민수 목사(1896~1968)는 일제강점기 '조선국민회'에서 김일성 주석 아버지 김형직과 같이 활동하였습니다. 김형직은 "어머니를 모시고 손정도 목사를 찾아가라"고 유언을 남겼고, 1926년 김일성은 길림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그를 찾아갑니다.

정동제일교회 제6대 담임 손정도 목사는 교회를 크게 부흥하게 했는데도 민족운동을 하려고 3년 만에 담임목사직을 사임합니다. 상해로 가서 임시정부 의정원 의장을 지낸 후, 만주 길림성에서 교회를 세우고 동포들을 돌볼 때, 숭실학교 2년 선배였던 김형직의 아들 김일성이 찾아오자 세례를 베풀고 친자식처럼 돌보았습니다. 더구나 김일성이 만주 군벌에 의해 감옥에 갇혔을 때 힘써 석방시킨 까닭에 김일성은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 손정도 목사를 "민족을 위해 헌신한 애국가, 생명의 은인"이라고 적었습니다.

손 목사 자녀들과 김일성은 형제처럼 지냈는데 둘째 아들 재미 의사 손원태 박사의 팔순 잔치를 평양에서 치러 주었고, 2005년 국립묘지인 애국열사릉에 안장하였습니다. 2003년 10월에는 평양에서 '손정도목사기념사업회', 감리교신학대학교와 독립기념관의 학자들이 북조선 학자들과 손정도 목사를 기념하는 학술 대회가 열리기도 하였습니다. 김일성 외할아버지 강돈욱은 목사로 평양 칠골교회와 창덕교회에서 시무하였습니다. 김일성 어머니 강반석의 오빠 강진석도 장로교 목사였는데, 독립운동을 인정하여 2012년 광복 67주년 기념식에서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하였지만, 나중에 김일성 외삼촌인 것을 알고 명단에서 삭제하고 은폐합니다. 또 김일성의 친척(외삼종조부) 강량욱 목사는 조선그리스도교연맹 위원장을 지냈고 대를 이어 이 조직을 이끌고 있습니다.

정동제일교회 예배당. 이근복 그림

격랑의 민족사와 동행한 정동제일교회

서울 정동은 우리나라 정치·문화·종교·교육·예술의 근대화가 열린 곳입니다. 정동은 태조 이성계의 계비 신덕 왕후 강 씨의 묘지 '정릉'에서 유래하였습니다. 정동은 구한말 한양 도성의 진입로로 서양 문물 전파의 전진기지가 되었고, 미국을 비롯하여 영국·독일·프랑스·러시아 등 여러 나라의 공사관들이 이곳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더구나 덕수궁에 고종이 머물면서 대한제국을 선포한 까닭에 조선 정치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중명전은 을사늑약과 정미칠조약을 체결한 수치스런 현장입니다. 선교사들이 이화학당·배재학당·경신학교와 정동제일교회를 세워 교육과 종교, 여성운동의 발상지가 되었고, 병원(시병원, 하워드병원)도 건립하였으니 정동은 가난한 조선인들이 몸과 마음을 치유받던 성지였습니다.

덕수궁 대한문에서 경향신문사까지 2km 정동길 중간의 분수대가 있는 너른 광장 앞, 이화여고와 배재역사박물관으로 갈라지는 중앙에 1887년 10월에 설립된 정동제일교회가 운치 있게 서 있습니다. 1979년 선교 100주년 기념으로 건축한 교회와 어우러진 벧엘예배당이 압권입니다. 벧엘예배당은 1897년에 건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고딕 양식 예배당으로, 아담하고 고풍스러워 방문자가 많았습니다. 예배당에 들어가니 우리나라 첫 파이프오르간의 파이프가 아직도 빛나는데, 지하의 파이프 송풍구에서 3·1 운동 때는 비밀리에 독립선언서를 등사하였다고 합니다.

교회 뜰에 아펜젤러 선교사와 최병헌 목사의 흉상이 있습니다. 아펜젤러 선교사는 1885년 4월 5일, 부활절에 인천에 도착하여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하며 1885년 배재학당을 설립한 후 1887년에 정동제일교회를 세웠고, 성경 번역 사업을 주도하였으며 우리 독립에도 관심이 많았습니다. 1902년 6월, 인천 제물포에서 출발하여 목포로 타고 가던 배가 어청도에서 다른 배와 충돌하여 침몰할 때, 조선인 여학생을 구하려다 44세로 익사했으니 인간 사랑이 대단합니다.

제4대 담임이었던 최병헌 목사는 최초의 한국인 담임목사였고, 열린 마음으로 이웃 종교를 연구하고 대화를 시도한 최초의 신학자로서 토착화신학을 통해 한국 감리회 신학의 기초를 놓은 분입니다. 이상재·윤치호와 함께 YMCA를 지도하며 애국 계몽 운동에 힘쓰고 자주 강연했는데, 민주 사회와 평등·인권에 대한 연설은 큰 인기였다고 합니다. 제5대 담임 현순 목사는 3·1 운동 이후 중국으로 망명하여 상해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였고 하와이로 가서 동포들을 돌보았습니다.

1919년 이필주 담임목사와 박동완 장로도 3·1 혁명의 33인으로서 옥고를 치렀고, 많은 교인들이 만세 운동에 참여하여 핍박을 받았습니다. 유관순 열사도 손정도 목사 시절 정동제일교회에 출석하여 감화를 받아 민족운동에 나섰습니다. 해방 후 11월, 여기서 애국지사 환영회를 열었는데 김규식·김구·이승만 등이 참석하였습니다. 격랑의 민족사와 동행한 정동제일교회는 나라와 교회를 바로 세워야 할 우리 시대에 참 소중한 나침판입니다.

*'그림으로 만나는 한국교회'는 매월 2차례 업데이트됩니다.

이근복 / 목사, 성균관대학교와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을 졸업했다. 영등포산업선교회 총무, 새민족교회 담임목사,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교육훈련원장을 거쳐 현재 크리스챤아카데미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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