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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북청년회①] 1946년 서울, 백색테러 단체의 탄생

공산당에게 집과 토지 빼앗긴 월남 세력, 반공주의 무장한 우익 단체로

박요셉 기자   기사승인 2018.04.19  17:3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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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북청년회(서청)는 1946년 11월 발족해 1948년 12월 해산했다. 활동 기간이 2년 1개월밖에 되지 않는다. 해방정국 당시 우익 청년 단체 수는 40여 개. 청년 단체 수십 곳 중 하나였던 서청이 70년이 지난 지금까지 사람들에게 잊히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

서청은 한국 개신교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로 알려져 있다. 월남 세력이 조직한 서청 대다수가 공산당 탄압을 피하기 위해 내려온 기독교인이고, 이름만 대면 알 만한 대형 교회들이 이들을 지원했다는 증언·기록이 이를 뒷받침한다. 과거 서청이 저지른 잘못을 오늘날 한국교회가 대신 사죄하고 회개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뉴스앤조이>는 연중 기획 '4·3과 그리스도인'의 일환으로 서청과 한국 개신교의 관계를 살펴보려 한다. ①서청이 어떤 이들로 구성됐고 어떤 활동을 했는지 ②4·3 사건 당시 얼마나 많은 만행을 저질렀는지 ③서북 기독교 민족주의를 계승했다는 서청이 당시 한국교회와 어떤 관계였는지 ④반공주의가 낳은 서청을 통해 오늘날 한국교회가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 돌아보려 한다. - 기자 주

"내가 왜 용서를 빌어? 우린 십자군이댔다. 빨갱이들은 루시퍼의 자식들이야. 사탄의 무리들이다. 나는 미가엘 천사와 한편이구 놈들은 계시록의 짐승들이다. 지금이라두 우리 주께서 명하시면 나는 마귀들과 싸운다."

"저들이 맑스의 자본론을 들이댄다면 우리에게는 성경이 있었다. 이제 우리는 주님의 십자군이요. 저쪽은 사탄의 세력이 되구 말았지. 이건 우리 할아버짓적부터 조선이 개화하면서 시작되었던 거야."

[뉴스앤조이-박요셉 기자] 황석영 작가의 장편소설 <손님>(창비)에서 주인공 류요한 장로가 동생 류요섭 목사에게 말하는 장면이다. 류요섭 목사는 류 장로가 저지른 학살극에 참회를 요구하지만 류 장로는 목에 핏대를 세우며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한다. 그에게 공산당은 사단의 자식들이었고, 자신은 하나님의 십자군이었다.

소설 <손님>은 1950년 10월, 황해도 신천군에서 발생한 대학살을 다루고 있다. 한국전쟁이 한창이었던 당시, 신천군에서는 '빨갱이'로 지목된 주민 3만 5000여 명이 학살을 당했다. 그중에는 노인과 여성, 어린아이도 있었다. 좌우 이념 대립이 낳은 비극이었다. 소설은 소설 같지 않았다. 당시 반공주의를 신앙으로 삼은 기독교인들 모습 역시 류 장로와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연고 없이 남한으로 피신한 월남 세력
자구책 위한 동향민 단체로 시작
반공 단체 서북청년회로 헤쳐 모여

광복 이후, 남한에는 수많은 청년 단체가 만들어졌다.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이미지

서북청년회(서청)가 만들어진 배경도 이와 비슷하다. 8·15 광복 이후, 소련군은 38선 이북에 진주해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했다. 1946년 초,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설립해 친일파와 지주들을 숙청하고 토지개혁을 실행했다.

인민위원회에 생계 터전을 잃은 대다수 지주와 친일파는 대거 이남으로 몰려오기 시작했다. 기독교 민족주의 진영도 북에서 반공 활동을 펼치다 소련군 탄압에 못 이겨 서울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하루에 적게는 수백에서 많게는 수천 명이 줄지어 38선을 넘었다.

갑자기 고향을 떠나, 아는 이 하나 없는 땅으로 내려온 상황이었다. 월남 세력은 무직에 집도 없어 생계가 막막했다. 이들은 동향민끼리 단체를 조직해 자구책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1946년 3~6월에 평남동지회·북선청년회·함북청년회·황해회청년회 등이 만들어졌다.

월남 세력은 서울 후암동·아현동·금호동 등 야산에 돌과 나무로 대충 집을 지어 살았다. 교회, 복지 단체 등에 식량과 구호물자를 지원받고, 일거리를 구해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살았다. 가난을 감수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자유를 향한 갈망이었다. 그들에게는 이북에서 소련군에게 토지와 재산을 강탈당하고, 칼을 찬 일본 군경 대신 권총을 든 소련 군인들에게 생명을 위협당했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유의 땅이라고 생각했던 38선 이남에서도 극심한 좌우 이념 대립이 펼쳐지고 있었다. 신탁통치 찬성과 반대를 각각 외치는 무리가 종로, 시청, 남대문 일대에서 서로 충돌하는 일이 빈번했다. 이북에서 소련군이 펼쳤던 정책을 이남 청년들이 지지하고 나서는 모습에 월남 세력은 아연실색했다. 동향민 조직은 자연스레 '반공 우익' 성격을 띠기 시작했다.

월남 반공 청년 단체들은 자신들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1946년 중순부터 해체 및 통합 작업에 들어갔다. 통합 단체명은 관서 지방(평안도), 해서 지방(황해도), 관북 지방(함경도) 등에서 '서'와 '북'을 따와 '서북청년회'로 지었다. 서청은 1948년 11월 30일, 서울 YMCA 대강당에서 결성 대회를 열고 공식 발족했다. 대의원 500명이 참석한 가운데 평안북도 출신 선우기성이 초대 단장이 됐다.

서청의 궁극적인 목적은 남한에서 공산 분자를 소탕하고 북한에도 파장을 넓혀 반공 자유 체제를 확립하는 것이었다. 서청이 당시 채택한 강령으로는 △조국의 완전한 자주독립 성취 △균등 사회 건설 △세계 평화에 공헌 등이 있다. 하지만 서청은 강령이 명시하는 바와 달리 공산 분자를 소탕하는 폭력과 암살 활동에 몰두했다.

서청 단원 초기 6000명, 전국 지부
암살·점거·폭행 등 '백색테러' 자행
민족주의자·독립운동가까지 '좌익' 간주

공산당 탄압을 피해 38선 이남으로 내려온 월남 세력은 반공 단체 서북청년회를 조직했다.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이미지

미군정과 한민당 등 우익 세력은 서청의 탄생이 반가웠다. 이들은 좌익에 대적하고 자신들을 보호해 줄 청년 단체를 필요로 했다. 광복 이후, 38선 이남은 좌우 대립이 극심했다. 좌익은 박헌영의 조선노동당을 필두로 학원계(전국학생동맹)·노동계(노동조합전국평의회)·농민계·법조계·문학계 등을 손에 쥐고 있었고, 우익은 지리멸렬했다.

서청 2대 단장 문봉제는 1972년 12월 23일 <중앙일보>에 연재한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에서 "일제 때부터 지하조직을 꾸려 온 조선공산당 측과 이제 막 진용을 짜기에 바쁜 우익과의 전초전은 우열이 너무나 뚜렷했다"고 썼다.

이런 상황에서, 서청은 강력한 기동력과 동원력을 바탕으로 두각을 드러냈다. 이들은 서울역 앞에 안내소를 설치해 숙식을 제공하며 월남한 청년을 결집했다. 서울에만 11개 지부를 설치하고, 각 도·시·군에 지부 혹은 지회를 마련했다. 1946년 12월에는 설립한 지 1달 만에 회원 수가 6000명에 이르렀다. 이들은 강력한 중앙 본부의 통제 아래 합숙소 생활을 했다. 다른 청년 단체보다 기동력과 동원력이 뛰어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이승만과 미군정 경무부장 조병옥 등이 서청을 지지하면서, 서청은 적극적으로 좌익 소탕 활동을 벌일 수 있었다. 좌익 단체나 좌익으로 의심되는 세력에 테러와 폭력을 감행했다. 1947년 3·1절 기념식 직후 우익·좌익 단체 간 집단 난투극이 벌어진 남대문 충돌 사건, 부산극장에 좌익 문화계 인사가 모였다는 이유로 폭탄을 투척한 사건, 좌경 사상에 물들었다며 부산지방검찰청 정수복 검사와 민주주의민족전선 박경영 의장을 권총으로 암살한 사건, 좌익 단체 조선민주애국청년동맹 사무실을 점령한 사건 등 백색테러를 자행했다. 여운형·김구 피살 당시, 서청이 암살 배후라는 의혹이 지금도 잔존하고 있다.

서북청년회는 폭력과 살인도 서슴지 않았다. 김구(사진 속 인물) 피살 당시에도 서청이 배후라는 의혹이 돌았다.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이미지

경찰을 대신해 월남한 사람들의 신분을 검사하는 일을 맡기도 했다. 북한에서 소련군이나 공산당에서 활동했던 사람을 색출하는 작업이었다. 서청은 누가 좌익인지 우익인지 가려 낼 수 없어, 일단 실컷 두들겨 패고 봤다. 나중에 의심이 풀리면 놓아 주고 가릴 수 없으면 경찰에 넘기는 식이었다(<서북청년회와 해방 정국의 암살자들>, 이상기).

문봉제 단장은 회고록에서 "서청은 처절한 극우였다. 우익의 최선봉에 서서 닥치는 대로 좌익 세력을 쳐부수는 거친 전위 행동 부대였다. 피비린내 나는 살상, 바로 그 연속이 서청의 역사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 일부에서 서청을 백색테러단으로 규정 지은 까닭도 여기에 있다"고 밝혔다.

한국전쟁을 전후로 발생한 집단 학살을 수년간 연구해 온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조사관 최태육 목사는 "서청은 사람 목숨을 아주 우습게 여겼다. 공장 파업 노동자들을 폭력으로 진압했을 때는, 살해 방식이 악랄했다. 사람을 드럼통에 집어넣어 시멘트를 부은 뒤 한강에 빠뜨리는 방식이었다"고 말했다.

서청을 다룬 논문 <서북청년단의 결성과 활동> 저자 정종식 씨(건국대 석사)는 서청이 적으로 노린 대상은 좌익 인사만이 아니었다고 했다. 그는 "일제 시절 민족주의자·항일운동가·독립운동가도 좌익으로 몰았다. 상당수 처녀가 서청 단원에게 겁간당하고 일부는 자살했다. 아녀자 중에는 서청의 아내가 되어 일가의 안위를 도모하는 경우도 있었다. 때로는 마을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공비의 가족으로 지목된 양민을 공개 총살하기도 했다"고 썼다.

이승만 정권 개국공신이었지만
토사구팽 당하는 서북청년회
군에 입대해 명맥을 잇다 
5·16 군사 정변으로 부활

서청은 이승만에게 토사구팽 당한다. 하지만 5·16 군사정변으로 부활한다.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이미지

서청은 1948년 12월 공식 해산했다. 좌익이 우세했던 정국 판도를 뒤집고 단독정부 수립과 이승만 대통령 당선에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이승만 정부는 서청에 해산명령을 내렸다. 당시 우익 단체 40여 곳을 '대한청년단'으로 통합하기 위해서였다. 서청의 이름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대다수 단원은 군에 입대해 반공 활동을 이어 나갔다.

월남 세력으로 구성된 서청은 누구보다 이북에 대한 이해와 배경지식이 높았다. 군은 이들을 중용했다. 한국전쟁 전후로, 서청 단원들은 육군정보국, UN군 유격대 KLO부대, 한국군 유격대 호림부대 등에서 크게 활약했다. 일부는 조선경비사관학교(육군사관학교 전신) 5기와 8기로 입학했는데, 이들은 나중에 5·16 군사 정변의 주역이 되고, 일부는 중앙정보부(국가정보원 전신) 창립 구성원이 됐다(<서북청년회 출신들의 정치적 배제와 부활>, 윤정란).

2년 1개월간 서울을 주 무대로 활동했던 서청이지만, 이들을 논할 때 빠질 수 없는 사건이 바로 제주 4·3이다. 이승만 정부와 조병옥 경무부장은 당시 무장대를 진압하기 위해 서청 단원들을 대거 제주에 내려보냈고, 많은 제주도민이 이들에게 학살당했다. 기독교와 서청의 관계를 본격적으로 알아보기 전, 서청이 제주에서 얼마나 가혹하게 제주도민을 유린하고 무고한 양민을 학살했는지 다음 기사에서 소개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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