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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료 부패와 경제 불평등, 이 땅의 사회적 연대를 허물다

[평화가 살길이다] 불의한 토지 특권이 일제 강점과 분단에 영향…희년의 부활 모색해야

조성찬   기사승인 2018.04.13  18:2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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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면 1. 모세, 히브리 공동체의 기초를 세우다

B.C. 1446년 고대 히브리 민족이 이집트로부터 탈출하여 원래 거주하던 가나안 땅에 돌아왔다. 유명한 유태계 역사가인 요세푸스(Flavius Josephus, A.D. 37?~100?)가 쓴 <유대 고대사 Antiquitates Judaicae>와 구약성서가 이를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히브리 민족의 위대한 지도자 모세가 등장한다. 하나님은 그에게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행할 여러 규칙들을 주셨다. 여기에는 토지를 중심으로 하는 경제법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규칙들을 잘 지켜 행하면 땅에서 많은 열매가 나와 배불리 먹고 그 땅에 안전히 거할 수 있다는 약속을 주셨다(레 25:18-19).

이때 땅은 생산지와 영토의 의미를 동시에 갖는다. <진보와 빈곤>(비봉출판사)을 쓴 헨리 조지(Henry George, 1839~1897)도 성서가 말하는 경제법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히브리 청년들에게 행한 연설문 '모세'를 보면 이러한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연설에서 그는 모세가 꿈꾼 이상향을 다음과 같이 그렸다.

"모세가 세우고자 했던 것은 제국이 아니었습니다. (중략) 그것은 개인에 기반을 두는 공동체였습니다. 공동체의 이상은 모든 사람이 학대받지 않고 두려움에서 벗어나 각각이 자기 포도나무 아래와 자기 무화과나무 아래에 앉는 것입니다. (중략) 모든 국민이 서로를 가족처럼 사랑하고 사회의 각 부분이 강철보다 강한 관계로 연결되어 생동하는 전체를 이룹니다. (중략) 모세율법의 목적은 재산 보호가 아니라 인간성 보호에 있으며, 강자가 부를 축적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약자가 궁지에 몰리지 않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모세율법은 모든 면에서 이기적 욕심을 제어할 장치를 만들어 놓고 있습니다. 인간의 이기적 욕심이 제어되지 않으면 반드시 지주와 소작인, 자본가와 노동자, 백만장자와 부랑자, 지배자와 피지배자로 갈라지게 됩니다." (김윤상 역, 13~14쪽)

히브리 민족이 가나안 땅에 거주하고 있던 부족들을 몰아낸 이후 모세를 이은 여호수아가 B.C. 1405부터 이스라엘의 지파들에게 토지를 분배하기 시작했다. 토지 분배 및 토지 사용의 기본 원칙은 토지 신유, 토지 공유, 평등 지권의 3가지였다. 이 3가지를 한마디로 풀어서 요약하면, 토지는 하나님의 것으로, 하나님은 모든 토지를 민족 전체를 위해 공유물로 주었으며, 따라서 태어나는 모든 개인은 토지에 대한 평등한 권리를 갖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모세는 평등 지권을 실현, 보호 및 회복하기 위해 더 세밀한 제도를 마련했다. 먼저 평등 지권을 실현하기 위한 제도로, 토지의 평등한 분배, 토지 사용료(십일조) 납부가 있다. 평등 지권을 보호하기 위한 제도로, 50년 기한의 토지 사용권 매매 제도, 땅의 경계를 표시하는 지계표의 설정이 있다. 마지막으로 평등 지권을 회복하기 위한 제도로, 토지 무르기 및 희년 제도가 있다. 50년마다 희년의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지면 노예는 해방되고, 갚을 수 없는 채무는 탕감되며, 토지는 원래의 주인에게로 돌아가게 되어, 토지를 잃어 가난해진 사람들이 공유 토지에 대한 자신의 정당한 몫을 되찾게 된다.

모세율법의 핵심을 헨리 조지의 언어를 사용하여 요약하면, 경제적 불평등의 발생을 최소화하여 한 사회가 생동감 있게 연결되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하나님이 명한 경제법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정치 지도자와 지주들의 불의한 특권 때문이었다. 그 결과 히브리 민족이 가나안 땅에서 쫓겨나게 되었으며, 나중에는 로마제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 장면 2. 초기 로마제국하의 예수와 교부들, 토지 공의를 외치다

1세기 말엽, 로마제국에 속한 동방 식민지의 변방 갈릴리에서 한 청년이 다음과 같이 외치며 자신의 공적인 삶을 시작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였다.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희년)를 전파하게 하려는 것이다(눅 4:18-19절)."

예수는 모세의 율법이 여전히 유효함을 십자가에서의 죽음으로 증명했다. 필리핀의 정치가요 운동가인 찰스 아빌라(Charles Avila)는 "예수 운동은 근본적으로 갈릴리 농민운동이었고, 갈릴리 농민들의 착취와 그들의 잉여 노동의 착복은 제사장들에 의해 성전의 거래와 세금을 통해 자행되었다"고 피력했다(<소유권>, 김유주 역, 183~184쪽).

이후 예수의 메시지는 로마 식민지하에 있던 초대 기독교 교부들에게로 이어졌다. 교부(Patēr)라는 뜻은 고대 및 중세 초기의 유력한 그리스도교 저작가 중 교회에 의해서 정통 신앙의 전승자로 인정된 사람들을 총칭하는 말이다. 고대 교회에서는 주교의 경칭이었다. 그중에서 요한 크리소스톰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너는 누구에게서 대토지를 받았으며, 너에게 그것을 물려준 사람은 누구한테 받은 것인가? 그것의 뿌리와 기원은 틀림없이 불의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태초에 한 사람은 부유하게, 다른 사람은 가난하게 만들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분은 모두에게 동일하게 자유로운 땅을 주셨다. 그런데 왜, 그것이 공동의 것이라면 너는 그렇게 많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고, 네 이웃은 한 평의 땅도 소유하지 못하고 있는가? 공동의 것을 너 혼자 즐기고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악하지 않은가?" (In Epistolam ad Timotheum, 12, 4 PG 62: 562~563; 아빌라: 188~189쪽에서 재인용)

우리에게 잘 알려진 또 다른 교부인 성 어거스틴도 동일한 주장을 펼쳤다. 여기서 교부들이 언급하는 토지는 하나님이 만든 자연물 전체를 상징한다. 이렇게 공유의 대상인 자연물을 특권층이 독점하면서 사회적 연대는 철저하게 깨지고, 한 사회 공동체는 특권층과 소외된 계층의 두 세계로 나뉘게 되었다. 이는 히브리 민족이 가나안 땅에서 자유를 향유하던 시절뿐만 아니라 식민지 시절에도 이어서 진행된 일이다. 이쯤 되면 조선 말기와, 일제강점기의 조선이 떠오른다.

# 장면 3. 푸른 눈의 여행자, 망해 가는 조선을 말하다

우연찮게도 거의 동시대에 조선의 마지막 모습을 관찰한 푸른 눈의 여행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여행기를 남겼다. 프랑스 군인으로 병인양요 참전 경험을 기록으로 남긴 앙리 쥐베르(Henri Zuber, 1844~1909)가 쓴 <조선 원정기>(1873)가 있다. 시기상 다음으로 동학 농민 전쟁이 일어난 당시 조선을 방문한 오스트리아 여행가 헤세 바르텍(Ernst von Hesse-Wartegg)이 쓴 <조선, 1894년 여름>(책과함께)이 있다. 그리고 역시 같은 해에 방문한 영국의 여행가 이사벨라 버드 비숍(Isabella Bird Bishop)이 쓴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1897)이 있다.

이들이 바라본 조선 사회는 참으로 가슴이 아프고 답답함이 몰려온다. 이 여행기들은 우리 민족과 사회가 왜 지금의 상황에 처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앞으로 어떤 원칙하에 건강한 사회를 만들어가야 하는지에 대한 열쇠를 제공한다. 잠시 푸른 눈의 여행자들이 객관적으로 바라본 조선말의 풍경으로 돌아가 보자.

헤세 바르텍이 그의 책을 통해 가장 통렬하게 비판하는 대상은 정부 관료였다. 그의 책에 이런 장면이 나온다. 일본의 군대가 무기 소리를 내며 수도를 향해 행군하고 있다. 이때 조선의 농부들은 오래된 숙적을 신경 쓰지 않고 평화롭게 일한다. 너무 역설적인 상황이다. 그 이유를 여행가는 이렇게 서술한다. "하긴 왜 그런 걱정을 하겠는가? 일본 천황의 군대가 이들에게 조선 정부보다 더 심각한 위해를 끼칠 수 있을까? 조선 정부는 마지막 푼돈까지 쥐어짜고, 쌀과 곡물을 마지막 한 톨까지 빼앗아가지 않았는가?"(75쪽)

정부의 부패가 이렇다 보니 자기의 영토를 지킬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백성들은 적극적으로 노동을 하지 않았다. 만일 그들이 필요한 생계비보다 더 많이 번다면 관리들에게 빼앗길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르텍은 관리들이 조선의 몰락과 이곳에 만연한 비참함의 가장 주요한 원인이라고 보았다. 관리들의 탐욕이 백성들의 이윤 획득 및 소유에 대한 모든 욕구와 노동 의지 그리고 모든 산업을 질식시켰다고 강하게 비판했다(87~88쪽).

영국의 여성 여행가인 비숍도 그녀의 여행기에서 비슷한 관점을 보였다. 그녀는 성공회 사제의 딸로 50년 동안 해외를 돌아다닌 여행광이었다. 1894년 환갑이 넘은 나이에 조선을 방문한 그녀는 3년간 조선과 중국을 오가며 동학 농민 전쟁과 청일전쟁을 겪었다. 그녀 역시 조선이 망해 가는 가장 중요한 원인으로 관리들의 부정부패에 주목했다. 민중이 게을러 보인 이유는 정말로 게을러서가 아니라 조금이라도 돈을 벌게 되면 여러 가지 이유로 관료들에게 빼앗기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노동으로 획득한 재산이 전혀 보호되지 않는 체제였던 것이다.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가난이 그들의 최고의 방어막이었다.

그리고 관리들의 수탈이 아주 견딜 수 없게 되고, 생존할 수 있는 최소한의 수입마저도 빼앗겼을 때 조선 농민들이 마지막으로 선택한 것이 폭력이었다. 그녀는 동학 농민 전쟁이 발발한 이유를 설명한 것이다. 이렇게 진단한 그녀는 공평성과 사회적 정의가 존중되어, 관료들의 악행이 강력한 정부에 의해 줄어들고, 소작료가 적정히 책정되면 조선은 번영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면서도, 조선이 스스로 개혁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일본의 보호국이나 식민지가 될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이러한 관점은 그 유명한 식민지 근대화론과 연결되는 지점이다.

실제로 농민들이 마지막 수단으로 폭력적인 방법에 의존하게 되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1894년(고종 31)에 동학 농민 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동학 농민 전쟁은 전라도 고부군수 조병갑의 횡포에 맞서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킨 것이다. 이 운동은 새로 부임한 조병갑이 농민들의 노동력을 동원하여 동진강東津江에 만든 만석보(수리 시설의 일종)를 이용하는 농민들에게 너무 과중한 수세水稅를 받은 것이 발단이 되었다. 큰돈을 주고 관직을 산 조병갑은 그 이상의 '수익'을 창출해야 했던 것이다.

그 당시 전국의 농민들은 이미 3정 문란으로 탐관오리로부터 지나칠 정도의 수탈을 당하고 있었다. 이 운동이 전라북도에서 시작되었지만 전국적으로 확산된 것을 보면 전국 농촌 곳곳에 조병갑이 득세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말 동학 농민 전쟁은 관리들의 부패와 토지 문제의 심각성을 함께 보여 주었다.

동학 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당시 무력했던 조정이 청나라를 불러들이고 이를 이유로 일본 역시 한반도에 들어오면서 결과적으로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위한 발판이 마련되었다. 조선말 정부가 강력하게 부패를 시정하고 농민들의 요구를 들어주었다면 역사는 어떻게 재편되었을까. 비현실적인 가정이지만, 일본이 들어올 근거가 없었을 것이며, 설령 들어왔다 하더라도 농민들이 자기 땅을 지키기 위해 목숨 걸고 싸웠을 것이다. 이 지점이 필자가 남북 분단의 원인을 외부의 거시적인 국제정치 맥락에서 찾는 시각에 큰 불편함을 느끼는 이유다.

# 장면 4. 해방 전후, 지주 소작제로 사회적 연대가 깨지다

1910년 일제 강점 이후, 관리의 부패 문제 및 토지 독점 문제는 새로운 방식으로 전개된다. 식민지 지배를 구축하기 위해 일본은 동양척식주식회사를 중심으로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하고, 근대법에 기초하여 지주 소작제를 제도화하였다. 그로 인해 농민들은 식민지 국가에서 지주에 수탈당하는 이중의 고통을 겪어야 했다. 일제강점기 시대 조선의 농지 중 86%가 지주 소유였으며 농민의 60% 정도가 소작농이었다고 한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자 3·8선 북측은 1946년 3월 '토지개혁에 관한 법령'을 공표하고 3월 8일부터 3월 31일 사이에 토지개혁을 실시해 버렸다. 북조선 노동당은 신속하게 권력 기반을 다치기 위해서라도 농민의 숙원인 토지를 무상몰수 무상분배 방식으로 해결한 것이다. 그리고 각종 토지 문서를 소각해 버렸다.

반면 3·8선 이남의 이승만 정부에서는 법 제정이 지지부진해지면서 농지개혁을 바라던 소작인들의 분노는 끓어올랐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가 남측에서 남조선 노동당 등 좌파가 강력하게 활동하게 된 요인이 되었다. 그리고 공산주의자 세력의 확대를 두려워한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은 가혹하게 이들을 탄압하면서 한편으로는 조봉암 농림부장관을 중심으로 농지개혁을 준비했다. 그나마 1950년 3월에 '농지개혁법'이 집행되고 1950년 6·25 전쟁 발발 직전에 유상몰수 유상분배 방식으로 농지개혁이 진행되었다.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이유는 조선말 조정의 부패와 무능, 그리고 특권층의 토지 독점에 따른 농민 수탈이었다. 해방 후 분단에는 구조적으로 미국과 러시아를 중심으로 하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이데올로기 대립이 중요하게 작용했고, 내부적으로 일제가 제도화한 지주 소작제로 사회 갈등이 최고조였다는 점이 중요하게 작용했다. 이러한 결과를 히브리 민족의 지도자인 모세는 수천 년 전에 이미 내다보고 있었다.

# 장면 5. 부활하신 예수, 다시 갈릴리로 가다

이젠 4월의 봄이 되면 정신이 아득해진다. 1894년 4월, 한 해 농사를 준비해야 했을 동학농민들은 바쁜 일손을 내려놓은 채 전봉준 등과 함께 '무장 동학 포고문'을 발표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전쟁이 시작되었다. 1948년 4월, 마지막까지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한 제주에서 4·3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6·25로 이어진다.

2014년 4월 16일, 한 나라의 대통령과 그 측근 및 정부 관료의 무능과 부패로 304명이 죽는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다. 슬픈 일이 있으면 기쁜 일도 있는 것인가? 매년 4월이 되면 예수의 부활을 맞이하고 축하하는 부활절 주기가 돌아온다. 누군가는 사회적 불의와 불평등한 구조 속에서 죽어 가는데, 누군가는 끊임없이 부활을 꿈꾼다. 시대의 아이러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것은 역사에 있어서도 진리다. 이 진리는 심지어 위대한 히브리 민족의 지도자인 모세마저 비껴가지 않았다. 그는 가나안 땅을 눈앞에 두고 이름 없는 무덤에 묻혔다. 그가 남긴 것은 새로운 정신과 제도, 그리고 부패에 오염되지 않은 새로운 지도자들이었다. 백성들마저 새로운 사람들로 교체되었다.

예수의 부활은 희년의 부활을 상징한다. 부활하신 예수가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그의 운동의 거점이었던 갈릴리였다. 소외되고 버려진 땅 갈릴리, 희년이 선포되어야 할 곳이었다. 복잡한 4월을 맞이하는 우리의 마음과 정신은 어디로 가야 할까. 남북 간에 새로운 시대를 모색하고 있는 이때에, 개인의 부활만을 꿈꿀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는 새로운 정신과 제도, 그리고 새로운 사람들로 부활해야 하지 않을까.

토지+자유연구소 조성찬 통일북한센터장이 '평화가 살길이다'라는 제목으로 칼럼을 연재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인터뷰 기사(바로 가기)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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