푼크툼과 스투디움

"가장 재미있게 본 영화는?", "가장 감동 깊게 본 영화는?"

지인들과의 모임에서 이러한 질문을 던져 본다면, 취향에 따라 코미디, 드라마, 휴먼 감동 대작 등 아주 독특한 취향만 아니라면 납득할 만한 익숙한 영화 제목들에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이번엔 질문을 조금 달리해 보자.

"가장 눈물을 많이 흘렸던 영화는?"

의외의 현상이 벌어진다. 우리가 익히 알 만한 눈물샘 자극 최루성 영화들이 아니다. 물론 최근에도 웬만한 강심장이 아니고서야 눈물을 흘리지 않고 배길 수 없었던 폭풍 오열 영화들이 관객의 지갑을 열곤 했다. 하지만 눈물의 온도가 유독 뜨거웠던 영화를 물으면, 그런 최루성 영화에서 흘렸던 카타르시스적 눈물을 굳이 되돌아보지 않는다. 의외의 영화 의외의 장면에서 꽂힌 감성은 갈 곳을 잃고 가슴 한구석에서 서럽게 우는 법이다.

"그 영화를 보고 울었다고? 대체 어디서?" 하는 반응이 나온다.

이유를 들어 보면 영화의 맥락과는 큰 상관이 없다. 어두운 영화관 한구석에서 영화를 보다가, 감독의 의도와 무관하게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지점에서, 불현듯 아픈 기억이 소환되는 코드가 발동하여 주체할 수 없는 슬픔 보따리가 터져 나왔던 경험이 한두 번쯤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푼크툼(punctum)'이다.

필자의 경우를 보자면, 그렇게도 많이 울었던 영화로, 십수 년도 더 된 기억에 '연애의 목적'(2005)이 있다. 역시나 지인들은 생뚱맞다는 표정이다. 울었다고? 어디서? 박해일의 찌질한 연기가 코믹하고도 유쾌했던 영화 아니던가. 하지만 나의 기억은 거기에 있지 않고, 관계에서 수없이 상처받아 온 여자 홍의 감정이 터져 나오는 후반부의 한 신(scene)에 머무른다. 강혜정이 연기한 홍이 내 무엇을 건드렸는지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다만 눈이 퉁퉁 부어 영화가 끝나도록 자리에서 일어설 수 없을 정도로, 폐부가 사정없이 찔렸던 것은 기억난다.

아니나 다를까, 그래서 푼크툼은 '찌름'을 뜻하는 라틴어 'punctionem'에서 비롯된다. 송곳같이 뾰족한 것에 찔리듯, 화살처럼 날아와 박히듯, 아프게 찌르는 그 무엇 때문에 예술 작품이 나에게로 와서 명작이 되고 내 인생의 영화도 되고, 잊을 수 없는 메시지가 되는 것이다.

필자는 수년간 학생들에게 영상 제작을 지도할 때, 영상을 기획하고 메시지를 만들어 내는 데 있어서 기획 의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또 강조했다. 기획 의도와 메시지가 분명한 영상이 관객에게도 좋은 영상이라고. 감독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분명하지 않으면 관객들도 의미를 발견할 수가 없다고. 사실 그 말은 맞는 말이다.

감독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뭔지에 대해 평론가가 열심히 분석하여 전달할 때 의미가 더욱 명확하고 풍성해진다. 일반인들도 문화 평론에 대한 욕구가 높아지면서 감독의 의도, 연출자의 의도에 대해 평론가 못지않게 분석한다. 그 분석 가능한 의미가 바로 '스투디움(studium)'이다. 더 솔직히 들여다보면 그 작품이 나에게 개인적으로 말을 거는 지점은 감독의 의도와 상관없이, 때로는 맥락에도 상관없이 나를 찌르는 그 무엇 때문에 발생한다. '푼크툼'이 제3의 의미를 발생하게 한다는 것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롤랑바르트는 '사진에 관한 노트'라는 부제가 붙은 책 <밝은 방 La Chambre claire>(동문선)에서 푼크툼과 스투디움에 대해 처음 소개한다. 사회적 문화적으로 작가가 의도한 의미와 일반적으로 통하는 해석 가능한 의미가 스투디움이라면, 푼크툼은 관객 혹은 독자 개인의 의미 맥락에서 발생한다. 그래서 푼크툼은 영화 치료의 중요한 근거가 된다.

영화 치료라 하면 흔히 치료적 목적으로 쓰일 만한 감동적인 영화, 치료 효과가 있는 영화 목록이 존재할 것이라고 오해한다. 물론 영화치료사는 효과적인 목록을 리스트업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런 치료적 영화가 따로 존재하여 어떤 환부에 처방전으로 사용하는 것은 아니다. 혹은 영화를 보고 함께 눈물을 흘리고 감동을 나누며 아픔을 환기하는 치료 과정으로 인도할 수 있는 '어떤' 영화가 있을 것으로 기대하기도 한다. 그런데 치료의 키는 영화 안에 있지 않다. 유감스럽게도.

치료의 키는 영화 외적인 곳에서 발생한다. 영화의 스투디움을 특정 푼크툼으로 바꾸는 내담자 고유의 인식이 감지될 때 영화치료사는 예민한 통찰력과 섬세한 동행으로 내담자의 푼크툼의 발생 경로를 탐색해야 한다. 그 길에서 뜻하지 않게 내면의 균열을 발견한다. 그 틈에서부터 푼크툼이 발생하고 있었던 것이다.

투사와 동일시

영화는 본질적으로 은막에 자신의 이미지를 투사(projection)한다. 어둠 속에서 투사된 이미지 위에 관객은 또 다시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투사한다. 투사야말로 영화와 영혼의 단짝과 같은 관계이다. 나에게 머무르는 것을 원하지 않는 어떤 감정도 저기 저 스크린 안으로 휙 던져 버릴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을 제공하는 것이 영화이다. 내면의 균열에서 뿜어져 나오던 왜곡된 감정과 금지된 생각을 때로는 자석같이 끌어당기고, 때로는 거울같이 비춰 보여 준다.

프로이트 이론에 의하면, 투사는 자신이 원하지 않는 감정으로 인한 불안과 억압의 긴장을 남에게 귀인하게 하는 것으로 나를 보호하는 방어기제다. 영화 안에서는 선인도 있고 악인도 있다. 갈등 유발자도 있고 민폐 캐릭터도 있다. 마음껏 미워하고 분노해도 될 대상에게 나의 분노를 투사할 수 있다. 나를 억압하는 누군가를 향해 비난하고 싶은 마음을 숨겨 두었다가, 비난받을 만한 명분이 있는 캐릭터에게 마음껏 비난을 퍼부을 수 있다.

우리가 어떤 캐릭터를 아주 싫어한다면 사실은 그 자신이 의식하지 못한 단점을 특정 캐릭터에게 투사한 것일 가능성이 크다. 이전에 한 내담자는 영화 속 어떤 인물이 상황 판단을 하지 못하고 '질질 짜는' 모습이 못마땅해서 싫다고 했다. 알고 보니 그 내담자는 어릴 때 부모님의 강요로 타국으로 유학 보내져서 말도 통하지 않는 낯선 환경에서 룸메이트와 함께 지내던 시절, 밤마다 외로워서 울곤 했다고 한다. 그때 룸메이트가 질질 짜지 좀 말라고 구박했던 말을 기억했다.

그 말로 스스로를 억압하며 이를 악물고 적응하여 타국에서 성공하기까지 내담자는 다시는 누구 앞에서도 울지 않았다. 이 내담자에게 질질 짜는 모습이야말로 자기가 가장 혐오하고 수치스러워했던 자기 자신을 닮아 있었던 것이다. 자기는 그 자아를 극복했다고 생각했으나, 철없이 질질 짜는 그 캐릭터를 보면 짜증이 나 견딜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극한의 미움은 애정과도 통한다고 했던가. 괜한 말이 아닌 셈이다. 가장 싫어하는 것은 곧 가장 자기를 닮은 것일 수 있다.

이런 투사가 부정적 투사라면, 긍정적 투사도 있다. 특정 캐릭터에 호감을 갖고 동경할 수 있다. 한 내담자는 영화 '로맨틱 홀리데이 The Holiday'(2006)에서 아만다의 즉흥적이고 솔직한 면, 자기주장이 뚜렷한 점이 좋다고 말하였다. 내담자는 규율과 의무에 충실해야 하는 성격으로 자신에게 없는 그런 면을 가진 아만다에게 자신을 동일시(identification)하였다. 하지만 알고 보니 내담자는 엄한 부모님 밑에서 자라 어쩔 수 없이 도덕적인 방향을 따라 살았으나, 사실 즉흥적인 생각과 자유분방한 사고방식이 솟구치는 것을 순간순간 억눌렀을 뿐이지 항상 자기 저변에 존재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기에게 숨겨져 있는 가능성을 남의 장점에 확대하여 투사하는 긍정적 투사, 즉 '동일시'라고 할 수 있다.

동일시 역시 프로이트가 언급한 방어기제다. 자기의 부족한 면을 먼저 발현한 사람을 동경하고 롤모델로 삼아 그 사람의 후광을 자신의 것으로 삼아 내면화하는 것이다. 흔히 부모가 못 이룬 꿈을 자녀에게 투사하여 자녀의 직업적 성공에 부모가 성취감과 우월감을 얻는 경우를 들 수 있다.

동일시를 통해 발견한 자신의 숨겨진 장점은 잘 개발하여 내면의 지혜를 끌어내는 방향으로 독려할 수 있다. 부정적 투사를 통해 드러나 지각하게 된 자신의 단점이 있다면, 누구의 평가 때문에 그것을 단점이라고 생각하는지 살펴보아 부정적으로 고착된 신념을 해소하도록 도울 수 있다. (<Emotion Picture-Magic Healing Cinema Workbook> 참고, 상담센터 사이 발행)

수건을 벗고

필자로 하여금 인간의 내면의 진실에 다가가는 길로 처음 인도한 영적 안내자는 저자 스캇 펙이다. 정신과 의사이자 신학자이기도 한 그의 책 <거짓의 사람들 The People of The Lie>(비전과리더십)을 읽었던 20대의 충격과 통찰이 지금까지도 나의 무의식에서 가끔씩 쿵쿵거리고 있다. 우리는 누구라고 할 것 없이 다 거짓의 가면을 쓰고 거짓에 기대어 산다. 거짓은 때로 든든한 피난처고 안전한 방패이다. 진실을 마주하는 불편을 굳이 감수하길 권하지 않는 사회에서 약간의 거짓은 필수품이자 나만의 작은 사치로 둔갑하기도 한다. 누구나 행복하길 바라는 인간이기에 보호막으로 감싼 행복에 몸을 숨긴다.

하지만 스캇 펙 박사는 <아직도 가야할 길 The People of The Lie>(열음사)에서 인생의 목적이 행복이 아니라고 말한다. 인생은 원래 고통스러운 것이라고, 여러 정신과적 문제는 인생의 정당한 고통을 피하려는 데서 나온다고 말한다. 고통에 직면하여 용기를 가지고 고통을 마다하지 않는 것을 통해 인간은 배우고 성장한다고 한다. 인생의 목적은 행복이 아니라 성숙인 것이다.

고통을 피하려고 눈에 보이지 않는 곳으로 밀어 넣은 나의 문제가 내면의 두께를 뚫고 균열을 일으키고 틈으로 나오는 순간을 마주할 때, 성장과 성숙을 선택하는 용기를 가지는 것은 쉽지 않지만, 한 번 선택하면 두 번 선택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선택은 온전히 인간의 의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성령님과 더불어 나의 온 내면과 영혼과 삶이 온전함을 향해 몸부림치는 성장통이 곧 균열과 찔림과 내던짐을 직면하는 과정이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고후 3:18 전, 개역개정)."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 들어오시고 우리가 그분을 닮아 갈 때, 우리는 메시아를 꼭 닮은 형상으로 변화되고 우리 삶은 점점 더 밝아져서 보다 아름다워질 것입니다(고후 3:18절 후, <메시지성경>)."

'빅퍼즐문화연구소'가 격주 간격으로 기독 인문학 칼럼을 연재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인터뷰 기사(바로 가기)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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