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정현 목사의 논문 표절과 불투명한 재정 운영을 비판하며 사랑의교회 개혁을 촉구해 온 '사랑의교회갱신위원회'(갱신위)의 마당 기도회가 4월 15일 500회를 맞습니다. 이에 갱신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신재용 집사가 지난 5년을 돌아보는 글을 <뉴스앤조이>에 보내왔습니다. 오정현 목사 개인을 향한 비판이 아닌, '강남에 사는 중산층'이라는 의식을 공유했던 지난날 자신들의 한계를 직시하고, 진짜 '갱신'이 무엇인지 고찰하는 내용입니다. -편집자 주

'우리는 옥한흠이 만든 괴물이었다. 하지만 그게 진실의 전부는 아니다.'

지난 5년을 결산하는 명제치고는 너무 가혹할지 모른다. 불쾌하다 못해 짜증이 날 수도 있다. 그러나 사실이다. 많이 양보해서 옥한흠이 만든 괴물은 오정현뿐이라 항변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괴물의 범주에는 우리도 있다. 이 진실이 모든 문제를 바라보는 시발점이어야 한다.

갱신위 교인들이 2015년 2월 사랑의교회 앞에서 피켓 시위를 하는 모습. 뉴스앤조이 구권효

1.
오정현이 사랑의교회 후임 목사로 내정된 것은 대략 2000년을 전후한 시기였던 것 같다. 그 전부터 설왕설래가 있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최소한 옥한흠 목사가 오정현이 남가주사랑의교회에서 성공적인 목회를 하고 있다고 판단한 이후, 수차례 사랑의교회 후임을 오정현에게 물려주겠다고 암시했다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그런 의중을 들으며, 오정현은 본인의 자존심과 교인들의 눈높이를 생각했을 것이다. 검정고시 출신이라는 과거를 숨기며 용하게도 타국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나름 성공했다는 목회를 하고 있었지만, 강남의 사랑의교회 자리는 한없이 허술한 본인의 학력과 허점 많은 경력을 커버할 그 이상의 것을 요구했다. 철학과 신학 박사라는 표절 학위는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오정현은 사랑의교회에 부임할 때까지 수차례 본인의 과오를 수정할 변곡점이 있었다. 죄를 돌이키고 새사람이 될 수 있는 수많은 기회 앞에서 회개하고 결단하지 못한 것은 전적으로 오정현의 과오이며 이에 대한 책임도 본인이 져야 한다. 옥한흠 목사가 지혜로웠다면, 사람을 쉽게 믿지 않았다면, 과도한 기대를 갖지 않았다면, 다른 사람들의 비판에 조금이나마 귀를 기울였다면 오정현을 한국 땅에 들이지 않았을 것이라는 '옥한흠 책임론'에도, 오정현의 과오는 결코 다른 사람에게 전가할 수 없는 개인의 과오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오늘의 이야기는 피고 오정현을 비판하고자 함이 아니다. 그보다는 원고의 위치에 있는 우리, 옥한흠의 '자녀들'인 우리에 대한 이야기다.

2.
가끔 옥한흠 목사가 오정현에게 후임 자리에 대한 언질을 주지 않았다면 결과가 어땠을까 생각해 보곤 한다. 사랑의교회 목사로 갈 수도 있다는 기대가 없는 상황에서 오정현은 과연 멀리 남아공까지 가서 박사 학위를 따겠다는 무리수를 두었을까. 학위 논문을 쓸 만한 능력도 여력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말이다(할 수 있다고 '착각'했을 수도 있지만, 그럴 능력이 없었다는 것은 표절과 대필 의혹이 반증한다).

좀 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옥한흠 목사가 자신을 주시하고 있다는 의중을 보이지 않았다면, 홍정길 목사처럼 옥한흠 목사도 오정현의 내심을 보고 거리 두기를 했다면 어땠을까. 그랬어도 오정현은 미국으로 건너가 신학을 하고 목사를 하고자 했을까. 옥한흠 목사가 웨스터민스터신학교와 칼빈신학교의 신학적 전통을 중시하고, 한국의 교계가 그 같은 신학교 배경을 정통이라고 옹호하지 않았다면, 오정현이 굳이 강도사 자격도 받을 수 없는 칼빈신학교의 Th.M 과정을 무리해서 다녔을까. 만약 옥한흠 목사가 속한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이 PCA를 협력 교단으로 인정하지 않았다면, CRC에서의 '강도권'을 '강도사 자격'이라 하며 과거 한국에서 목사 후보생이었다는 증명까지 첨부해 가면서 현재로서는 납득하기 힘든 방법으로 PCA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을까.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과연 그런 것이 없었다면 오정현은 굳이 그런 일들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 확신한다. 변칙과 편법을 동원하면서까지 얻어야만 하는 그 무엇이 없었다면 결코 쉽지 않은 일이기에 더 그렇다. 정상이라 알려진 경로보다 더 어렵기도 하지만, 문제를 삼으려 한다면 언제든 문제가 될 수 있는 일이라는 점은 바보 천치라 해도 모를 리 없기 때문이다.

시간을 건너뛰어 옥한흠 목사가 최소한 6개월만이라도 공동 목회를 하겠다며 오정현을 청빙했더라면 어땠을까. 수많은 동료 목사의 반대에도 옥한흠 목사 스스로 '내가 데리고 가르치면 나아질 수 있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만 없었더라도 지금과 같은 상황은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수많은 가정이 꼬리를 물면 물수록 '오정현은 옥한흠이 만든 괴물이구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옥한흠 목사가 조금만 일찍 멈췄다면, 주의를 줬다면, 시선을 감췄다면, 그리고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면, 오정현은 결코 괴물이 되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서다.

2015년 9월 갱신위 교인 500여 명이 가두시위를 하는 모습. 뉴스앤조이 최승현

3.
여기까지가 5년 전 우리의 출발점이었다. 담임목사의 논문 표절 사실을 알았을 때, 논문 표절 사실에 대한 거듭된 거짓말을 들었을 때 우리는 좌절했고 참담했다. 왜 옥한흠 목사는 '저급한 목사'를 후임에 앉혀 이 같은 사달을 불러왔는지 분노했다. 그럼에도 그 분노는 옥한흠 목사를 직접 향하지는 않았다. 제자 훈련이라는 옥한흠의 유산에 대한 상속자의 지위를 놓치기 싫어서였다.

담임목사의 부정과 거짓이 폭로된 이상 '사랑의교회의 정통적 계승자가 누구냐'는 앞으로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될 것임에 틀림없었다. 옥한흠 목사의 편지가 공개되면서 이 같은 논쟁은 더 뚜렷해졌다. '네 정체가 무엇이냐'는 옥한흠 목사의 물음은 오정현의 정체성을 문제 삼으며 오정현을 배신자로 낙인찍었다. 오정현은 옥한흠의 목회 철학과 그 목회 철학의 결정체인 사랑의교회 공동체에 대한 배신자가 된 것이다.

오정현은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이후 사랑의교회는 '옥한흠 정신'의 배교와 계승 사이의 대립이라는 구도가 분명해졌다. 오정현은 지속적으로 자신이 옥한흠의 정통적 계승자임을 주장하곤 했다. 여전히 오정현에게도 '옥한흠'은 붙잡아야 할 가치이자 폐기하기에는 이른 카드였기 때문이다. 강남 예배당에 모이는 성도들을 전임 목사 추종자일 뿐이라 폄하하면서도 옥한흠 목사의 추도식에서 그의 '적자'임을 자임하는 이중성은 자신을 괴물로 만든 옥한흠에 대한 오정현 나름의 기억법인 셈이다.

4.
5년 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보자. 두 가지 의문이 든다. 한 가지는 과연 오정현이 괴물이 될 때 우리는 무엇을 했을까. 우리는 그가 괴물이 되는 데 기여한 바가 없을까. 이와 함께 드는 또 한 가지 의문은, 오정현을 괴물로 만든 옥한흠의 목회 철학은 과연 우리가 계승해야만 하는 유산인가. 그의 목회 철학은 비판의 대상이어서는 안 되는가. 무엇보다 우리가 그 목회 철학의 결과물은 아니었던가. 그렇다면 우리 또한 오정현과 같은 괴물은 아니었나 하는 것이다.

오정현이 괴물이 되는 데 우리가 기여한 바는 부인할 수 없을 듯하다. 오정현이 괴물이 되도록 밀어붙였을 옥한흠 목사의 '기준'이라는 것이 결국 우리의 기준은 아니었을까. 학력과 학벌이 개인의 능력과 역량에 대한 유일무이한 지표라는 시선은 오직 옥한흠 목사만의 시선이었을까. 부임하는 목사가 서울의 명문대 출신이 아닌 이유가, 어려서부터 어렵게 목회를 했던 가정 형편 때문이었다고 굳이 해명을 하고, 그래도 지방 명문 부산중·고등학교를 나왔으니 제법 똑똑한 거 아니냐는 이야기를, 학벌이 선입견인 양 개인의 타고난 능력으로 포장하는 옥한흠 목사의 소개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던 건 다름 아닌 우리였다.

속된 말로 (우리의 천박한 시각에서) '듣보잡' 대학을 나왔어도 보수 신학을 한다는 칼빈신학교에서 공부하고, 네덜란드 개혁신학의 전통을 고수한다는 남아공의 포체프스트룸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하버드에서 박사 후 과정(포스닥)도 수료했다면(물론 포체프스트룸에서의 학위 논문은 표절임이 밝혀졌고, 칼빈에서 쓴 석사학위 논문도 표절 의혹이 짙으며, 하버드에서의 수학이라는 것도 단기간 몇 차례 청강한 정도에 불과했다는 사실이 드러났지만), '대 사랑의교회' 후임 목사로 '됐다'고 판단한 것도 우리였다.

우리 안에는 '그만하면 우리 교회 목사라고 해도 창피하지는 않겠다'는 암묵적인 동의도 있었다. 옥한흠 목사가 선택했으니 철저한 검증 없이 후임자로 받아들인 장본인도 우리였다. 정당히 거쳐야 할 청빙 절차마저 옥한흠 목사의 지시 하나에 가벼운 통과의례 정도로 취급한 것도 우리였다. 그런 우리의 시선과 방임 속에서 오정현은 괴물로 성장했다. 이쯤 되면 우리도 법률적으로는 공동정범共同正犯임을 부인할 수 없다.

2017년 강남 예배당에 걸린 갱신위 현수막. 뉴스앤조이 최승현

5.
목회적 의미에서 우리와 오정현은 샴쌍둥이다. 옥한흠 목사의 목회 철학이 낳은 샴쌍둥이 말이다. 그 이유는 옥한흠의 목회 철학이 가진 한계와 비판을 생각해 보면 당연한 결과다.

옥한흠 목사가 한국교회에 끼친 지대한 영향에도, 적지 않은 사람이 그의 목회 철학이 내포하는 한계를 지적해 왔다. 평신도를 깨운다는 슬로건은 유교 사회의 권위주의 틀 속에서 목사 중심의 교권을 강화하는 결과로 돌아왔고, 제자 훈련과 소그룹을 통한 영성 훈련도 경영학자들이 탐낼 만한 조직학적 성과를 가져왔을 뿐이라는 비판도 있다. 이 같은 비판은 조금 가혹하다. 제자 훈련과 평신도 사역이 가져온 변화가, 그것이 없던 시대에 비해 현저하고 결과 또한 수많은 사람의 삶의 변화를 통해 실제적으로 실증되었기 때문이다. 수긍 가는 면이 있다 해도 전적으로 동의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다음의 비판에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근대화를 막 지나온 중산층의 사회적 역할이나 책임과 같은 소위 '중산층의 도덕과 윤리'는 옥한흠 목사의 목회 철학에서 크게 다뤄지지 않았다. 대형 교회가 천박한 시장 자본주의 논리에 사로잡혀 있는 현실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도 제기하지 못했고, 오히려 규모의 논리와 성장의 메커니즘이 대형 교회를 지탱하는 기둥인 것처럼 옹호되기 일쑤였다. 한국 근대사회의 병폐를 교회가 고스란히 담아내는 것을 넘어 그것을 '교회식으로' 내재화하는 것에 대해서도 이렇다 할 해법을 제시하지 못했다.

한마디로 세속 세계의 도덕적 차원에 대한 폭넓은 검토와 분석, 심도 있는 전망과 해법을 실존적인 고민 속에서 다룰 여지가 옥한흠 목사의 목회 철학에는 '없었다'. 신학적인 견지에서 보자면, 옥한흠의 목회 철학에는 유력한 세상의 정치·경제·종교 제도 등과 건전한 긴장을 유지하는 방법, 곧 권력에 대해 진실을 이야기하고 그것을 견제하며 그 속에서 공존하는 '예언자적 신앙에 대한 전망'이 '없었다'.

'없었다'는 표현이 과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굳이 '없었다'는 단어를 '부족하다'는 단어로 대체하고 싶지 않다. 옥한흠 목사가 설교 시간, 우면산 자락에 건설될 '승화공원'(속칭 화장장)에 대해 님비(NIMBY)적 관점을 노골적으로 주장했던 것이나, 근대화의 그릇된 욕망이 낳은 부적합한 대통령 후보자를 장로라는 이유만으로 찍으라 권유한 일 등은 옥한흠 목사의 인식 부족 정도로 취급할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같은 말 속에는 분명 한국 사회의 근대화가 가져온 병폐에 대한 본질적인 각성과 성경적인 성찰이 결여되어 있다. 이미 적지 않은 이가 실존적으로 고민하던 문제에 대해, 그의 목회 철학은 이를 반영할 만한 여지를 갖지 못했던 것이다.

물론 옥한흠 목사는 대사회적인 메시지를 이야기했고 선지자적인 설교를 통해 성도들의 각성을 촉구했다. 하지만 내가 느끼기에 그것은 정말 몇몇 예외적 사례에 불과하다. 그의 설교가 가져다준 수많은 영적인 각성에도, 대수롭지 않게 지나치는 '세속 세계의 도덕적 차원'에 대한 그의 견해와 관점에 느꼈던 반복되는 절망은 '기준에 미달'한다거나 '충분하지 않다'는 의미에서 '부족하다'는 말로는 담아내기 어려운 점이 많다. 실상은 '결핍'이나 '결여'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따라서 감히 그의 목회 철학에는 그런 요인이 '없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6.
이런 점에서 오정현은 옥한흠의 복사판이다. 권력에 지나치게 가깝다는 비판에도, 오정현의 정치적 지향점은 옥한흠과 비슷했다. 둘 다 권력과 권위 앞에서는 저자세를 보이면서, 잘못을 비판하는 것에 인색했다. 돈 있는 사람이 존중되고 돈 앞에서 유독 겸손(?)했던 경제관은 크게 다르지 않다. 좋은 학력과 학벌을 선호하고 세상 지위를 교회에서 '더욱' 인정해 주었던 모습 또한 유사하다. 하지만 우리는 이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을 그의 설교 속에서 듣지 못했다. 대신 그 같은 문제의식 없이도 성숙한 영적 생활을 하고 있다고 호도하는 설교에 중독되어 왔다.

이쯤 되면 옥한흠과 오정현 그리고 우리는 한통속임을 부정할 수 없다. 나아가 오정현이 옥한흠에 의해 괴물로 키워졌듯이 우리도 옥한흠에 의해 괴물로 키워졌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우리 중 다수는 그와 같은 시대에 그와 비슷한 환경에서 동일한 신문과 뉴스를 보며 성장했다. 그리고 강남에 산다는 중산층 의식을 공유했다. 그 속에서 우리는 옥한흠의 설교를 들었다. 그의 목회 철학을 학습했고 반복했다.

오정현을 조련하고 키워 냈던 그의 철학이 그러했듯이, 그의 설교에는 유력한 세상의 정치·경제·종교 제도와 긴장을 유지하는 방법이 없었다. 세상의 모든 권력에 관한 진실을 그의 설교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십자가와 구원에 대한 설교에는 눈물이 있었지만, 한국 사회의 정치적 불평등과 지역 간 편견, 경제 수준에 따른 차별과 배제가 일상화한 우리 삶의 이야기에서는 눈물을 찾을 수 없었다. 그의 설교 속에서 타자는 영적인 차원에서만 가까이해야 할 이웃이었을 뿐, 생활의 영역에서는 여전히 멀리해야 하는 이방인이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런 고민 없이도 우리는 선한 그리스도인이자 성숙한 영성 생활을 하는 성도가 될 수 있다고 우리를 세뇌했을 뿐이다. 우리는 그 설교를 장기간 비판 없이 들었다. 이상하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리고 전적으로 동의했다. (물론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었을 것이다.) 그러는 사이 우리도 괴물이 되었다.

갱신위는 매주 일요일과 금요일에 마당 기도회를 연다. 1년에 약 100회씩 5년을 지속해 왔다. 사진은 2017년 4월 강남 예배당에서 열린 400회 포럼. 뉴스앤조이 최승현

7.
우리가 괴물이라는 사실을 안 것은 그리 오래지 않다. 오정현 목사의 거짓이 반복되었지만 다수의 성도가 관심도 갖지 않을 때, 진실을 호도하는 거짓말이 교회와 사회에 넘쳐 날 때에야 우리는 전단을 돌리고 구호를 외치고 피켓을 들었다. 당사자가 듣고 회개하며 돌이키기를 바라서이기도 했지만, 많은 사람이 우리의 외침을 통해 진실을 알고 우리와 같은 편에 서서 회개를 촉구하는 운동에 동참하기를 바라서이기도 했다.

그때에서야 왜 많은 사람이 피켓을 들고 행진을 하며 텐트를 치고 농성을 하고 머리띠를 두르고 구호를 외치는지 어렴풋하게나마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때에서야 단적으로 그런 사람들을 무시하는 것을 넘어 비난하기까지 했던 우리 모습이 괴물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오정현처럼 우리도 오랫동안 괴물로 키워지고 있었다는 점을 자각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나만의 자각일까.

8.
하지만 괴물인 우리는 우리 앞에 놓인 변화를 위한 변곡점을 지나치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시작된 차이가 지난 5년의 차이를 만들었다. 그 차이를 만든 것은 '예언자적(선지자적) 신앙'이다. 권력에 대해 진실을 이야기하는 것, 곧 대형 교회라는 교권의 거짓된 행태에 대해 '그것은 표절이다', '그것은 거짓이다'라고 진실을 이야기했던 것이 5년 전 이 운동의 시작이었다.

무조건적이고 무비판적이었던 종교 권력과 어떻게 건전한 긴장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지, 그런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무엇을 알아야 하고 무엇을 비판해야 하며 무엇을 희생해야 하는지를 배워 가는 과정이 그간의 5년이었다. 그리고 그런 관계는 종교를 넘어 정치와 경제 제도 전반을 넘어 미시 권력에 이르기까지, 성경적인 견지에서 건전한 긴장 관계를 찾아가는 단초를 제공했다. 그렇게 '예언자적 신앙'을 우리는 배워 가고 있다.

예수께서는 이사야의 글(이사야 61장)을 인용하시며 "곧,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시면서 '예언자적 신앙'이 이 시대에 어떠한 방식으로 나타나게 될지 친히 설명하셨다.

권력에 대해 진실을 이야기하는 것에는 용기와 각오, 희생과 헌신이 포함되어 있다. 5년간 우리가 끊임없이 경험한 바다. 종교 권력을 넘어 정치권력과 경제 권력에 대한 공의를 고민하고 실천하는 데까지 나아가는 것이 지난 5년간의 환란을 통해 예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신 '예언자적 신앙'의 가르침이라고 믿는다. 만약 그렇게까지 확장할 수 없다면 우리의 5년은 먼 훗날 '헛되다'고 평가될 수도 있을 것이다.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가난한 자', '포로 된 자', '눈먼 자'와 '눌린 자'를 위한 삶을 살기 위한 또 한 번의 변곡점을 저버리는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저 오정현과는 다른 괴물이라는 위안을 삼는 것만으로 앞으로의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은 저열하지 않을까.

밖에서는 여전히 우리를 교회 분란을 자초한 해교회 세력으로, 화해하지 못하고 형제의 허물을 감싸 안지 못하는 미성숙한 성도라고 비판한다. 대안적 교회 공동체를 마련하는 것이 진정한 복수라며 왜 아직도 따로 '교회'를 하지 않느냐고 비판한다. 하지만 '예언자적 신앙'을 고민하고 삶의 전 영역으로 확장하고 적용하려는 실존적인 고민이 있다면 다른 모든 것이 순연된다 하더라도 꼭 비난받을 일만은 아닐 것이다. 결국에는 5년에 대한 본질적인 고민 없이 그렇게 비판만 한 사람들이 먼 훗날 주의 꾸중을 듣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신재용 / 약사, 사랑의교회갱신위원회, 한국라브리선교회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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