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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과 그리스도인] 30년 전 4·3에 새 이름 새긴 정치학자

박명림 교수 인터뷰① 석사 논문에 "폭동" 아닌 "민중 항쟁"으로 표현…"공산 세력 진압할 군경이 멀쩡한 국민 학살"

김은석   기사승인 2018.04.09  19: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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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 사건이 70주년을 맞았습니다. <뉴스앤조이>는 올 한 해 이 비극적인 사건을 구체적으로 돌아보며, 특별히 한국교회와 그리스도인이 4·3 사건과 어떻게 관련돼 있는지 정리해 보려고 합니다. 많은 이가 제주 4·3 사건을 어렴풋이 알고 있을 뿐, 구체적으로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 잘 모릅니다. 

한국교회는 이 사건과 깊이 연루돼 있는데도 그동안 4·3의 진실을 규명하거나 아픔을 어루만지는 데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했습니다. 외면해 온 역사를 직면하면서 지금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며, 우리 신앙을 어떻게 재정비할지 함께 성찰하고자 '4·3과 그리스도인' 프로젝트를 시작합니다. - 4·3특별취재팀


[뉴스앤조이-김은석 콘텐츠팀장] 폭동. 지금은 이름 짓지 못한 역사라고들 하지만, 사실 대한민국 역사에서 오랫동안 제주 4·3 사건의 이름은 폭동이었다. 4·3 70주년 희생자 추념식에서 대통령은 "무고한 양민들이 이념의 이름으로 희생당했다"며 국가 폭력을 사과했다. 그러나 같은 자리에 참석한 보수 정당 대표는 4·3 추념식을 "건국 과정에서 좌익 폭동에 희생된 양민들의 넋을 기리는 행사"라고 단정했다. 폭동이란 이름, 4·3 사건을 바라보는 이념적 시각은 여전히 살아 있다.

4·3 사건에 대한 학술 연구가 전무하던 1988년, 두 개의 정치학 석사 학위 논문이 나온다. '제주도 4·3 폭동의 배경에 관한 연구'(양한권)와 '제주도 4·3 민중 항쟁에 관한 연구'(박명림)다. 특히 박명림 교수(연세대 국제대학원)는 학술 연구로서는 최초로 4·3 사건에 "민중 항쟁"이라는 이름을 부여하며 그간 드리웠던 이념적 시각, "폭동"과 "반란"의 그늘을 한 꺼풀 벗겨 내는 데 일조했다.

그의 논문은 국내외 자료를 근거로 제주의 평등하고 자율적이었던 사회구조,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후까지 활발했던 민족운동과 통일 운동, 미군정·경찰·민간 청년 단체의 제주 탄압, 좌우 이념 갈등보다 강했던 공동체성, 무장봉기의 독자적·제한적 성격, 군경 토벌대의 민간인 학살 등을 치밀하게 논증한다. 왜곡된 군경 자료에 기초해 형성된 폭동 혹은 반란이라는 규정을 뒤집고 저항과 학살의 실체를 학문적으로 증명한 것이다.

박명림 교수(연세대 국제대학원)는 1988년 석사 학위 논문으로 '제주도 4·3 민중 항쟁에 관한 연구'를 쓴 이래 30년간 4·3을 연구해 왔다. 뉴스앤조이 유영

민주화의 꽃이 피어올랐다지만 아직 군사정권이 집권하던 때, 평생 자신을 따라다닐 학위 논문에 제주 4·3 사건을 민중 항쟁이라고 명토 박은 이유는 무엇일까.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우격다짐하듯 4·3은 폭동이라고 말하는 사람들 시각을 그는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그는 "고통의 현장을 계속 다녀도 영적 핍진함을 채우는 자양분을 공급받는 근원은 성서"라고 "인간과 세계의 문제들에 대한 정답과 정도는 성서에 있다"(<복음과상황> 314호, '사람과 상황')고 고백하는 신앙인이다. 그리스도인 학자로서 4·3 70주년을 보내는 지금,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무엇을 해야 한다고 생각할까. 어렵사리 성사되어 세 시간 가까이 진행한 인터뷰를 2부로 나눠 정리했다. 

- 제주 4·3 사건을 석사 학위 논문 주제로 삼은 배경이나 계기가 있나.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처음에 논문 주제로 잡은 것은 한국전쟁 전후 즉 1950년대의 노동운동이었다. 그런데 논문을 쓰다 보니 1950년대 노동문제는 아직 사회의 중심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연구도 어느 정도 되어 있었다.

그런데 제주 4·3은 두 가지 측면에서 놀라웠다. 먼저 너무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점이다. 몹시 충격적이었다. 어떻게 이렇게나 많은 사람이 죽었을까 싶었다. 그럼에도 학술 연구가 전무했다는 점에 또 놀랐다. 국내에는 단 하나의 학술 논문도 없었다. 외국 논문도 미국 학자 존 메릴의 '제주도 반란'뿐이었다.

논문 주제를 바꾸는 건 상당히 부담이 큰 문제였다. 더군다나 군사정부 시절이었다. 과연 쓸 수 있을까 고민스러웠다. 그러나 누군가는 써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특히 제주 분들, 그렇게 이념적으로 오해받고 학살당한 분들의 후손들이 당분간 스스로 쓸 수 있을까 싶었다. 여전히 그분들은 가위 눌리고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제주 출신이 아닌 나라도 써야 하지 않을까 싶어 긴 고민 끝에 결심을 굳혔다. 돌아보니 그것은 육지 출신으로서 일종의 속죄 의식이었다.

지도 교수이셨던 최장집 교수님이 학문적으로 워낙 엄격한 분이어서 나름대로 준비를 갖춘 뒤 4·3으로 논문을 써도 되겠는지 여쭈었다. 초조한 마음으로 여쭸는데, 흔쾌히 수용해 주셨다. 그뿐 아니라 "묻힌 역사를 발굴하고 진실을 드러내 바로잡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느냐"며 크게 격려해 주셨다. 정말 큰 힘이 되었다. 그 다음 하신 말씀은 학문적으로 무겁게 다가왔다. 이념적으로 편향되지 않도록, 객관적으로 쓰라는 당부였다. 당시 제주 4·3을 다룬 자료와 시각이 극좌/극우로 치우쳐 있었기 때문이다.

- 그럼 4·3 사건은 어떻게 처음으로 접하게 되었나.

내가 대학을 다니던 시점에는 학교와 사회 분위기가 억압받는 사람들, 고통받는 사람들에 대한 애정과 열정이 충만하던 시기였다. 광주 항쟁 직후 대학에 들어갔다. 정치학, 역사학, 사회학을 포함해 교내외 여러 학술 단체에서 세미나를 하며 광주 항쟁부터 거꾸로 우리 역사를 다시 공부하기 시작했다. 청년 학생들이 권력의 시각이 아닌 민중의 시각, 국가의 시각이 아닌 시민의 시각으로 과거를 재해석하기 시작했다. 동학농민운동부터 3·1운동, 제주 4·3, 한국전쟁, 4·19, 광주 항쟁, 부마 항쟁을 다시 공부했다. 여러 학술 모임에 속해 그런 것들을 쭉 읽어 오다가 제주 4·3이 가장 안 알려졌다는 점이 계속 가슴에 남았다.

문학을 굉장히 좋아한다. 무슨 사건에 대해 공부할 때 사회과학적 분석 못지않게 문학적·인문학적 성찰을 같이 하려고 한다. 그래서 당시 현기영 선생님의 <순이삼촌>(창비), 김석범 선생님의 <화산도>(보고사), <까마귀의 죽음>(각)을 읽었고, 이산하 시인의 '한라산'이라는 시를 읽었다. 오성찬, 현길언 선생님의 4·3 관련 작품들도 읽었다. 이산하 시인을 빼고는 모두 제주 출신들일 만큼 4·3의 상처는 정말 깊었다. 그런데 정작 4·3에 대한 학술 연구는 없었다. 그래서 당시 청년 학생들이 가지고 있던 문제의식, 즉 역사를 민중과 시민의 시각으로 다시 보려는 의식을 저변에 깔고, 지도 교수님께 배운 사회과학 이론을 접목하여 학문적으로 분석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이념적으로 편향되게 쓰지 말라고 강조하신 말씀을 늘 염두에 두려고 노력했다. 한국전쟁이든, 박정희·김대중이든, 헌법이든, 남북 관계든 어떤 연구를 할 때 자료를 철저하게 조사하고 집중하는 습성이 있는데, 그것은 객관적 사실이 스스로 말하게 해야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당시에도 한국 자료를 다 구해 놓았음에도 뭔가 좀 부족했다. 미국은 어떻게 기록했을까 궁금하여 자료 조사를 시작했다. 그렇게 모은 미국 자료를 우리의 자료, 일본의 자료, 북한의 왜곡된 극좌적 시각 등과 종합해 균형을 잡을 수 있었다.

박 교수가 30년 전 제주 현지 취재 당시 메모한 기록을 설명하고 있다. 그는 참혹한 학살 당시 증언에 충격을 받아 취재 초반부터 무너진 기억을 떠올렸다. 뉴스앤조이 유영

고통스러웠던 증언 채록 작업
절대 비극 앞에서 언어 상실 경험
일상적 해원 필요한 제주도민들

- 논문 서문을 보면, 비록 논문 안에 인용을 하지 않았지만 제주 현지 취재와 증언 채록이 역사와 사회에 대한 연구 열정을 자극하고 시각을 정립하는 데 어떤 연구나 자료보다 결정적이었다고 밝히셨다. 1980년대 후반 대학원생 청년 박명림은 4·3의 현장 어디를 돌아보고, 어떤 분들을 만나 어떤 생각을 하게 된 건가.

당시는 아직 4·3과 관련해 직접 답사하고 취재한다는 것은 생각조차 하기 어렵던 시절이다. 그러나 현지를 답사하고 증언을 듣지 않고는 도저히 논문을 쓸 수 없다고 생각했다. 4·3은 제게 처음으로 바다를 건너는 체험을 하게 만들었다. 그동안 여러 언론에서 1980년대 상황에서 어떻게 현지 인터뷰를 하여 4·3에 대한 논문을 썼느냐고 수차례 물어도 잘 말하지 못했다. 아마도 내 내면 어딘가에 당시 그분들의 아픔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는 게 죄송하고 고통스러웠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번에는, 당시에 제주 취재를 다니며 메모를 남긴 게 생각나서 자료를 뒤져 보았다. 적지 않게 남아 있어서 깜짝 놀랐다.

가장 많은 희생자가 나온 북촌, 조천, 함덕, 신촌 등부터 시작하여 여러 곳을 다녔다. 너무나 참혹했던 학살 당시 증언에 큰 충격을 받아 처음부터 무너졌다. 마음이 쿵쾅거리고 도무지 정리가 안 되어 술에 취해 한밤중에 무작정 걷기도 하였다.

인터뷰를 하는데 상대방이 말씀을 잇지 못하시는 경우가 여러 차례 있었다. 말씀을 다 못하시고 나중에 하자고 하시는 분들도 적지 않았다. 어떤 분들과는 필담을 나누기도 했다. 처음에는 사투리와 언어의 문제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돌아보니, 이분들이 자기 음성으로 그 기억을 말하는 게 감당이 안 되셨던 것 같다.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즉 저항이나 투쟁, 도망, 중산간 마을에서 겪은 고통스러운 시간들, 그 뒤 이어진 연좌제 등에 대해서는 이분들이 말씀을 하시는데, 자기가 당하고 목격한 이야기, 특히 가족이 당한 일을 이야기를 할 때는 언어로 표현을 못 하시는 것을 느꼈다.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아무런 이유를 모르고 죽어 갈 때 느낀 공포와 무력감에 다시 사로잡히는 것 같았다. 어느 정도 말씀하시다가 내일 오라고 하시는데, 내일도 못 하고 결국 끝까지 말씀하지 못하는 분들도 있었다.

인간의 일상 언어로는 절대 슬픔, 절대 비극을 나타낼 수 없다는 걸 그때 느꼈다. 내가 수차 "이게 과연 나라인가"라고 물었던 세월호의 통곡 현장에서도 깨달은 바다. 인간이 절대 절망이나 절대 비극 앞에 놓였을 때는 하나님의 절대 언어만 남는다.

제주도민들은 근대적 의미의 종교가 아니더라도 종교적 영성을 가졌다는 사실을 여러 차례 발견했다. 특별히 1980~1990년대에 가서 보면 무속 신앙이 강했는데, 그것은 그분들이 일상적인 종교 행위, 간구 행위, 해원 행위가 없이는 일상을 사는 게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거 제주도의 샤머니즘을 단순히 전통 종교로 여길 게 아니라 고통받은 분들이 일상적으로 해 온 해원이나 간구의 몸부림, 이른바 재기齋祈 행위로 보아야 한다고 이해했다.

산 경험과 산 역사 즉, 활자로 기록된 것이 아니라 육성을 직접 듣는 것은 역사 연구에서 굉장히 중요한 접근 방법이다. 그때 절감했다. 제주 4·3은 단순히 연구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 내가 이분들의 고통을 공감하고 이해하며 함께 가려 하기 전에는 한 줄도 쓸 수 없겠다는 것을. 지금도 세계의 여러 학살 현장을 많이 다니는 편인데 당시 4·3을 연구하며 받은 영향과 충격 때문이 아닌가 싶다. 직접 보고 듣고 산 역사를 확인하기 전에 추상적인 관념과 이론으로 인간의 비극에 대해 쓰는 것은 인간 생명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박 교수는 4·3 생존 희생자들을 인터뷰하면서 인간의 일상 언어로는 절대 슬픔, 절대 비극을 나타낼 수 없다는 걸 느꼈다고 했다. 뉴스앤조이 자료 사진

- 저희도 취재를 하면서 4·3을 몸소 경험하신 분들의 육성을 듣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다. 그런데 현지 취재라는 게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제주 분들의 도움 없이는 일이 잘 진행되지 않았다. 당시에는 더욱 어려웠을 것 같다.

그 당시 제주도 안에서는 이미 진상 규명 열망이 거세게 솟아오르고 있었다. 서울에도 제주 출신 분들이 만든 제주사회문제협의회(제사협)라는 모임이 있었다. 그분들 모임에 종종 참석해서 4·3과 관련한 말씀을 들었다. 어둡고 암울했던 시대, 그분들의 울분과 정의감은 4·3 담론의 중심이었다. 제사협에서 고 정하은(전 베를린기독교한인교회 목사), 고 정윤형(전 홍익대 교수), 김명식(시인), 현기영(소설가), 고희범(언론인), 양한권(4‧3 연구가), 김광식·허상수(현대사 연구가) 선생님의 격려와 도움을 많이 받았다. 제사협의 모든 분들은 저를 빼고는 전부 제주 출신이었다. 제주 현지에서는 고 오성찬(소설가), 고창훈(전 제주대 교수), 문무병(제주신화연구소 소장) 선생님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특히 정하은 목사님은 기독교적‧영적 비판 의식이 높으셨다. 당시 나는 신앙을 갖기 전이었지만 정 목사님께서 제 연구가 단순한 학술 행위가 아니라 사람들의 죽음과 생명에 대한 연구이자 목숨을 살려 내는 작업이라며 격려해 주신 게 기억난다. 김명식 선생님은 아라리(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연구원을 설립하여 4·3에 관한 각종 자료를 모으고 열정적으로 이끌어 주셨다. 양한권 선생님은 제주와 4·3 관련 각종 자료를 소개해 주셨고, 고 오성찬 선생님은 4·3 피해 마을을 선구적이고도 철저히 답사하신 경험을 바탕으로 여러 마을들을 저와 함께 걸으며 답사해 주셨다.

논문을 쓴 이후로는 당시 <제주신문>과 <제민일보>에서 4·3 특별 취재와 연재를 맡았던 양조훈, 김종민 두 분과 교류하며 큰 가르침을 얻었다. 두 분은 훗날 4·3위원회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4·3 운동과 담론을 이끌어 온 4·3연구소 분들도 잊을 수가 없다.

오랫동안 4·3 운동과 담론을 이끌어 온 위의 모든 분이 제주 출신일 만큼 한국 사회의 제주 4·3에 대한 무지와 외면은 또 하나의 범죄가 아니었나 싶을 만큼 심각했다. 나는 오랜 시간 그분들 곁에서 그분들이 주도한 4·3 운동과 4·3 정신을 배울 수 있어서, 깊이 감사할 따름이다.

- 논문 제목에서도 그렇고 4·3을 "민중 항쟁"이라고 표현한 점이 흥미롭다. 시대적 배경을 감안하면 매우 큰 용기가 필요했을 것 같은데, 그렇게 표현한 이유가 있나. 오늘날에도 4·3을 민중 항쟁이라고 부르는 데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들이 있다. 여전히 4·3 사건을 민중 항쟁으로 보는지.

언어는 시대의 산물이다.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내가 민중 항쟁이라고 쓴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동안 국가에 의해 4·3이 폭동 혹은 반란이라고 불리면서 제주는 빨갱이 섬으로, 제주 인들은 빨갱이로 완전히 오해·오인되었기 때문이다. 이것만은 반드시 바로 잡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무장봉기 세력 지도부 일부에 그런 측면이 전연 없는 것은 아니다. 즉 일부 좌익의 이념성, 북한 수립에 참여한 좌익 지도부는 엄정하게 비판받아야 한다. 그러나 무고하게 학살된 민간인들, 그렇게 죽어 간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모두 빨갱이요, 공산 폭도라는 것은 전혀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래서 4·3을 폭동이라고 부르는 것만은 철저한 자료를 바탕으로 교정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다만 이 작업이 객관적으로 이해되려면 북한과 좌파의 시각도 비판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당시 북한은 4·3을 인민 봉기, 인민 무장투쟁이라고 표현했다. 그래서 폭동과 인민 무장투쟁 사이에서, 북한 시각도 아니고 극우 진영의 시각도 아닌 중용과 객관의 시각을 담으려고 고민했다.

폭동은 국가가 4·3에 덧씌운 이름
논문에서 북한과 좌파 시각도 비판
민중 항쟁, 당시 언어로 적절

항쟁은 우리 사회에서 쭉 써 온 표현이다. 광주 항쟁, 6월 항쟁처럼 민, 민중, 백성, 시민, 국민이 정치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불의한 상황에서 정의감을 갖고 저항한 것을 우리가 항쟁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면, 굉장한 억압, 탄압, 학살에 대해 저항한 제주인들의 4·3을 "민중 항쟁"으로 표현해 그들의 명예를 회복해 드려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당시 모든 석사·박사 학위 논문은 문교부에 등재가 되었다. 논문을 초고를 발표했을 때 이 표현을 받아들일 수 없다던 학과 교수님도 있었다. 하지만 지도 교수님이 잘 설명해 주시고, 나도 자료를 통해 방어하는 과정을 거쳐 논문 심사를 통과했다. 당시로서는 부족한 대로 처음으로 주요 마을별 희생자 수를 드러냈다. 좌익 자료나 국내 자료를 제시하면 이념 논쟁으로 불거지니까 전부 미군 자료를 인용해서 그렇게나 많은 사람이 군경 토벌대에 희생되었다는 점을 밝혔다. 미군 자료에 바탕하여 학살 주체가 군경이라는 객관적 사실을 밝혀 내니까 반박이 불가능하였다.

그렇게 '제주도 4·3 민중 항쟁에 관한 연구'라는 제목으로 부족한 논문을 내놓게 되었다. 당시 언어로는 적절한 표현이지 않았나 생각한다. 나는 지금도 4·3은 민중 항쟁의 측면을 분명히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공교롭게도 논문을 제출했을 때가 4·3 40주년이었다. 4·3 40주년에 나는 세 가지 일을 연속으로 치렀는데, 돌아보니 일종의 운명적인 과정이 아니었나 싶다. 하나는 4월 3일 40주년 당일에 제사협 주최로 서울에서 처음 개최된, 제법 크고 공개적인 4·3 학술 행사에서 '제주도 4·3 민중 항쟁의 전개 과정에 대한 약술'이라는 논문을 발표한 것이다. 당시에도 나는 "항쟁"이라는 표현을 의식적으로, 정면 돌파한다는 심정으로 사용했다, 두 번째는 석사 논문 제출이었다. 끝으로 그해 11월 <화산도>의 작가 김석범 선생님의 최초 귀국을 환영하는 행사에서 4·3에 대해 함께 강연한 것이었다. 두 공개 행사 모두 공안 세력을 의식하여 매우 조심스러웠지만 제주 분들의 충만한 정의감과 열기만은 정말로 대단하고 존경스러웠다. 갖은 고난 끝에 처음으로 귀국한 김석범 선생님이 뒤풀이에서 흘린 뜨거운 눈물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몇몇 제주 어른들께 논문을 드렸을 때, 굉장히 고마워하셨다. 거꾸로 정말 감사해야 할 사람은 나였는데도 말이다. 국가기관에 공식적으로 등재되는 학위 논문에 4·3이 폭동이나 반란이 아닌 "민중 항쟁"이란 표현으로 기록되는 것은 당시 그분들에게 작은 문제가 아니었던 것 같다. 제주인들이 좌익 세력이 아니라는 것, 불의한 폭력에 희생된 바른 국민이었다는 함의가 담긴 규정이었기 때문이다. "이 단어 하나 나오는 데 40년이 걸렸다"며 따듯하게 손잡아 주시고, 국밥 한 그릇 사 주시면서 함께 눈물 흘리던 기억이 난다.

박명림 교수는 논문에서 미군 자료에 바탕하여 학살 주체가 군경이라는 객관적 사실을 밝혀 냈다. 그는 제주 4·3을 "민중 항쟁"이라고 쓴 가장 중요한 이유를 국가에 의해 4·3이 폭동 혹은 반란이라고 불리면서 제주는 빨갱이 섬으로, 제주인들은 빨갱이로 오해·오인된 것을 바로잡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뉴스앤조이 유영

- 호남 사람들에게만 그런 한이 있는 줄 알았는데, 제주도 사람들도 오랜 기간 그런 아픔을 지니고 있었나보다.

당시에 그분들이 저에게 종종 하시던 말씀이 있다. 호남은 인구도 많고, 큰 지도자도 있지 않느냐고. 광주 항쟁은 국회의원들이 나서서 중앙정부 차원의 진상 규명도 해 주는데, 그에 비해 100배가 넘는 규모의 학살, 훨씬 긴 세월의 억압, 국가 공직조차 진출 못하게 한 연좌제, 빨갱이 섬이라는 오해 등 더 혹독한 세월을 보낸 우리는, 사람이 적고 힘이 없다 보니 진상 규명도 못하고 있다며 한숨 짓고 안타까워하셨다. 제주의 상처는 실로 너무도 길고 컸다.

- 4·3 사건의 원인은 단순하지 않은 것 같다. 냉전 체제가 시작되던 당시 국내외 정세와 제주도가 지닌 특수한 상황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듯하다. 한국전쟁을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으셨기에, 한국전쟁 발발 이전부터 이후까지 국내외 정세에 대해 누구보다 깊고 넓게 연구하신 것으로 안다. 당시 급변하던 국내외 정세에 제주도는 어떻게 연결되어 있었던 것인가.

복잡한 문제다. 2차 대전 이후 냉전 체제라는 게 우리가 이해하는 것과 다른 면이 있다. 한반도의 좌우파가 아직 토착적 이념 대결을 하기 전에 시작된다. 이른바 세계 내전이라고 부른다. 세계의 이념 전쟁, 즉 워싱턴과 모스크바를 축으로 세계가 두 진영으로 나뉜 것이다. 워낙 압도적인 규정이었기 때문에 그 위험을 감지한 세계의 많은 지도자는 그 세계 이념 전쟁이 국내화하여 서로 갈라지고 대결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런데 한반도 지도자들은 달랐다. 세계에서 가장 이념 대결에 앞장서 나갔다. 1945년 38선이 그어지고 민족이 분열을 앞둔 상황에서 이승만, 김구는 무조건 평양에 갔어야 했다. 이승만은 공산주의자들이 나쁘다고만 했지 만나려 하지 않았다. 김구도 마찬가지다. 그는 공산주의자를 죽이려고까지 했다. 더구나 둘은 크리스천이다. 김일성, 박헌영도 서울에 와서 이승만, 김구를 만나 타협했어야 했다. 다른 세계 지도자들이 그랬듯이 서로 만나서 세계 이념 전쟁하에 민족이 분열되었을 때 초래할 대비극과 대전쟁을 막기 위해 논의했어야 했다. 전후 11개 연합 점령, 또는 분할 점령국 중 어느 곳도 우리처럼 되지 않았다. 우리보다 훨씬 나쁜 상황에서도 분단으로 가지 않고 통일된 나라가 한둘이 아니다.

특히 이승만은 국제 정세에 가장 눈이 밝은 지도자였다. 그가 쓴 글을 보면 역사적으로 한국 문제의 국제적 성격에 대해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런 그가 공산주의자와 대화‧타협‧공존을 모색하지 않고 민족의 절반을 원수로, 사탄으로 이해했다.

자세히 설명하자면 오래 걸리는 내용이지만, 집단이나 종족이 오래되고 가까울수록 사랑과 증오는 같이 간다는 중요한 이론이 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이렇게 많이 싸우는 것은 이삭과 이스마엘이 형제였기 때문이고, 참혹했던 삼십년전쟁도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한 형제 사이에서 일어났으며, 시아파와 수니파가 저렇게 증오하고 적대하는 것도 한 형제이기 때문이다. 우리 민족도 너무 오래 한 민족이었기 때문에, 갈려져 나간 절반은 정통 단일민족을 파괴한 이단이 되고 원수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세계가 대결하고 분할되던 시대에 남북의 좌우파가 그 선두에 선 것이다. 세계 최악의 바보들이었다. 미국과 소련, 세계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진영 사이의 증오보다 한반도 내 남과 북, 좌파와 우파 사이의 갈등이 훨씬 격심했다. 독일, 일본, 이탈리아도 좌우 분열되지 않았을 때, 우리 민족 내 이념 갈등은 전 세계에서 가장 심했다. 전 세계에서, 가장! 그러나 아직도 거기에 대해 아무도 반성하거나 회개하지 않는다.

세계 이념 대결의 선두에 섰던 한반도
좌우 갈등보다 공동체성 강했던 제주
이념 갈등을 비극으로 몰고 간 지도자들

그런데 제주는 달랐다. 오랫동안 빈부 격차가 크지 않았고, 지리적으로 섬이라는 특성도 있었다. 작은 공동체였지만 교육 수준은 상당히 높았다. 그래서 제주 안의 좌우 갈등은 상당히 약했다. 해방 후에도 온건 좌파와 온건 우파가 오랫동안 공존했다. 만약 세계 이념 대결이 한반도화, 국내화, 지방화하는 과정에서 제주 안에 일찍 좌우 분열이나 대결이 일어났더라면 외려 피해가 적었을 것이다.

제주 공동체는 육지의, 중앙의 좌우 대결 상황과 함께 가지 않았다. 이념 대결이 굉장히 약했다. 공동체의 단일성·통합성이 오래 유지되었기 때문에 육지에서 군대와 경찰, 청년단 즉 외부의 폭력과 억압의 요인이 들어왔을 때 제주 공동체는 더 위축되고 더 단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강한 이념을 가지고 들어온 외부인들은 좌우 대결이 약한 하나의 공동체 제주를 더욱더 이념적으로 보게 된 것이다.

가인과 아벨은 아무 차이가 없다. 형제다. 모든 게 같다. 가까울수록 이념이나 국가, 권력, 생각, 종교(교파)가 갈라지면 더욱 증오하게 된다.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가 인류 최악의 살육전을 벌인 것도 이삭의 자녀들끼리 죽인 거다. 육지와 제주는 같은 민족으로서 큰 차이가 없다. 다 같다. 그런데 인간은 모든 게 같으면 말이나 생각 등 작은 차이를 키워서 서로 죽이게 된다. '저들은 우리와 다르다. 그럼 우리의 원수인 북한과 이념이 같은 것 아닌가'라는 말도 안 되는 의심에 최악의 살육을 벌인 것이다. 세계의 이념 대결이 남과 북, 평양과 서울을 거쳐 제주에서 학살극으로 이어진 것이다. 1945년부터 이어진 최악의 이념 대결은 훗날 한국전쟁이라는 세계 최악의 가해 전쟁을 야기한다. 분열된 우리 민족은 각자 이념에 따라 통일하겠다며 세계의 청년 수십만을 불러다가 죽였다.

아직 이념 대결이 없던 제주에 워싱턴과 모스크바의 세계 분할, 세계 이념 대결을 한반도로 가져온 지도자들, 남한 내부에서 통합하지 못하고 좌우 분열로 몰고 간 지도자들 전체의 맹성과 참회가 필요하다. 우리 공동체는 제주인들에게 사과해야 한다. 내가 처음 제주에 내려가서 느낀 감정은 부끄러움이었다. 육지인으로서의 혹독한 부끄러움.

박 교수는 처음 제주에 내려갔을 때 육지인으로서의 혹독한 부끄러움을 느꼈다고 했다. 뉴스앤조이 유영

4·3은 몇 단계를 거친다. 1945년 8월부터 1947년 3월 1일까지는 순수 공동체가 아직 살아 있었다. 그러나 1947년 삼일절 시위 사건과 총파업 전후 육지에서 진압 세력이 많이 들어온다. 그때부터 억압을 피해 입산하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이념 대립도 심해진다. 일부 이념에 경도된 지도부를 중심으로 소수 좌익 세력이 조직적 침투를 시도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극소수의 좌익 이념 세력과 일부 이념 요소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제주인이 이념에 따라 움직이지 않았다는 점은 분명하다. 입산자들은 대부분 낮과 밤에 치안 유지 세력이 바뀌는 데서 오는 공포와 불안에 따라 움직인 것이었다.

제주 특유의 강한 인간적 유대에가, 인간적 정리를 역이용한 진압 작전으로 인해 역설적으로 피해를 키웠다. 제주가 고립된 섬이라는 지리적 문제도 있었다. 초기에 학살이 빠르게 알려지고 외부 도움을 받거나, 피할 수 있는 다른 지역이 가까이에 있었다면 제주인들은 도망쳤을 것이다. 그런데 도망갈 곳은 한라산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렇게 상상할 수도 없는 피해로 이어진 것이다.

입산자들 대부분은 평범한 사람들
북 정부 수립 참여한 좌익 지도부는 큰 잘못
미국도 희생 조장하고 방치한 책임 있어

제주인들이 이념을 따라 움직였다면 상황은 오히려 빨리 종식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결코 좌익 세력이 아니었다. 북한이 아닌 대한민국 쪽이라는 것은 그들에게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4·3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계속 증명되었다. 4·3 이후에는 빨갱이로 몰린 트라우마, 연좌제를 씻기 위해 전쟁 과정에서 수많은 제주 젊은이가 귀신 잡는 해병대에 입대한다. 그런 점에서 사태 도중 비밀리에 제주를 빠져나와 북한 정권 수립에 참여한 일부 좌익 지도부의 무책임성은 가장 크게 비판받아야 한다.

인터뷰를 할 때마다 강한 확신이 생겼다. 그들은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혹시나 하고 이념적인 질문을 던져보곤 했다. 입산해서 중간 지도부 역할을 했던 분에게도 물었다. 그러나 친북적인 요인을 발견하지 못했다. 북한 정부 수립에 참여한 극소수 좌익 지도부를 제외하면 무장대 내에서도 이념적으로 움직인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고 본다. 탄압에 대한 반발로서의 저항이 주요 원인이었다. 한 분 한 분 절대 언어를 통해 전해지는 그분들의 순정한 이야기가 4·3을 이념적으로 해석해 온 게 얼마나 큰 오류인지 금방 깨닫게 했다.

- 세계 이념 대결 속에서 당시 한반도 분열을 막지 못하고 제주 4·3과 한국전쟁이란 비극을 초래한 책임을 당시 국내 지도자들에게 묻는 지점이 새삼스럽게 다가온다. 그렇다면 미군정의 책임은 어떤가? 제주4·3 희생자유족회, 제주4·3 70주년범국민위원회 등은 미국의 책임 있는 조치를 촉구하는 서명운동을 벌이고 있다.

미군정의 책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군경이 이념 대결로 가도록 이끈 공동 책임이 미군정에도 있다. 제주에 군대와 경찰을 파견하고 지휘한 것도 초기에는 미군정이었다. 또한 제주 4·3은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군 점령 지역에서 일어난 최초이자 최대의 민중 저항이자 민간인 학살이었다. 이를 저지하기 위한 어떤 적극적 노력도 기울이지 않았다. 당시 대한민국은 북한과 정통성 경쟁을 하는 국가였고, 미국은 자기 점령지에서 소련 점령지보다 더 많은 좌파가 나올 경우 체제 경쟁에서 패배를 인정해야 하는 처지였다. 즉 세계 체제 경쟁과 세계 이념 대결에서 승리하기 위해 변경의 토착인들인 제주인들의 희생을 조장하고 방치한 것이다. 그런 면에서 미국은 깊은 정치적·도덕적 책임을 져야 한다. 다만 법적 책임을 묻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

- 한국 사회 우익 진영에는 4·3 사건을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저지하고 제주도를 빨갱이 섬으로 만들기 위해 남로당 무장대가 일으킨 폭동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꽤 있다. 그들은 4·3 사건으로 인한 참혹한 희생의 책임을 미군정과 군경이 아니라 남로당 무장대와 좌익 세력에게 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시각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나는 보수적인 시각을 가진 분들이 대한민국의 건국 정신을 함양하고 계승하는 일은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제주 4·3을 바라보는 군경의 시각도 부분적으로 인정할 수 있다고 본다. 좌익 지도부의 급진 노선이 끼친 영향이 분명히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4·3이 발발한 원인, 즉 폭력적 탄압과 책임 행위에 대해 전혀 반성하지 않고, 4월 3일에 일어난 저항 행위를 이념적 시각으로만 볼 경우 너무도 위험하다.

앞으로도 우리가 어떤 문제에 대해 서로 시각이 다를 때, 사람들을 극단적으로 억압하고 진압하며 폭력을 행사할 가능성을 내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는 결코 안 된다. 당시의 사태를 그렇게 해석하는 이유는 이해할 수 있지만, 지금조차 4·3을 그렇게 규정한다면 최악의 저항으로 치닫게 된 앞선 폭력을 참회·반성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정말 위험하다고 본다.

군경은 국가기관으로서 진압을 수행할 의무가 있다. 그 정당성 자체를 문제 삼을 순 없다. 더구나 4·3 과정에는 군대와 무장대 사이의 평화 회담도 있었다. 무장대 최고 지도부가 북한 정부 수립에 참여해서 학살의 명분을 제공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에 우리가 주목해야 한다고 본다. 남로당 무장대 지도부의 책임을 묻지 말자는 것이 아니다. 나도 1980년대부터 그 지점은 계속 비판했다. 특히 4·3에 대한 북한의 시각을 여러 차례 비판해 왔다.

4‧3을 기존의 이념 대결, 남북 대결, 좌우 대결 관점으로 보면 안 된다. 공산 세력을 진압하라고 국민이 세금을 내서 만든 군경이 멀쩡한 대한민국 국민을 공산 세력이라고 왜곡하여, 한두 명도 아닌 수없이 많은 사람을 학살했다. 공산 세력으로부터 국민을 지켜 준 게 아니라, 공산 세력이 아님에도 무차별 학살을 자행했다. 그것도 반복적으로. 또한 민간인을 학살해 놓고 수십 년간 그들을 공산 세력이라고 이념적으로 왜곡해 왔다. 이것이 과연 국가가 국민에게 할 짓이었는가!

박 교수는 4·3을 이념 대결 관점으로 보면 안 된다고 했다. 공산 세력으로부터 국민을 지켜야 할 군경이 공산 세력이 아닌 국민을 무차별 학살한 점을 반성해야 한다고 했다. 사진은 남원읍 의귀리 복지 회관에 전시된 학살 증언 내용. 뉴스앤조이 자료 사진

4‧3 발발 원인 "폭력적 탄압" 성찰해야
"공산 세력 진압할 군경이 멀쩡한 국민 학살"
"우리 스스로 이념의 포로 된 상황에서 벗어나야"

- 민간인이 희생된 것은 제주도 공산화를 저지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치른 비극이라고 얘기한다. 반면 정부의 왜곡된 진상 규명으로 민간인 학살만 부각되어 공산 세력을 막다 희생된 군경의 명예가 훼손되었다는 주장도 한다.

군경의 명예가 훼손된 것은 일반 민간인을 학살할 때부터다. 그때 이미 본령을 이탈한 것이다. 국민을 상대로 무고한 학살을 자행한 군경은 명백히 처벌의 대상이다.

이것을 구별하여 이해하고 성찰하지 못한다면 굉장히 두렵다. 왜 두려운가. 과거 저지른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과거의 잘못된 행동을 회개하지 않기 위해 오늘날 과거 행위가 정당하다고 주장하면, 똑같은 상황이 다가왔을 때 우리 안에 그런 폭력성이 다시 드러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수용할 수 없다.

발표 현장이나 토론 현장에서 이런 문제로 곤혹스런 상황도 여러 번 당면해 보았다. 그럴 때마다 말씀드리는 것은 우리 스스로 이념의 포로 된 상황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대한민국의 정당한 국가 수호 행위조차도 오해받을 수 있다. 외부 위협으로부터 국민의 안녕, 생명, 재산을 지키는 것은 군경의 근본 의무이자 존재 이유다. 그것을 문제 삼는 게 아니다. 누가 그것을 문제 삼겠는가.

일부 보수 세력이 4·3 학살에 대해 아직도 부당하게 문제를 제기하는 것에 대해 나는 그동안 강하게 질문해 왔다. 대한민국을 수호한 참전 군인에 누가 처음으로 '참전 유공자'로 규정하고 '참전 명예 수당'을 지급했나. 부끄럽게도 어떤 보수 정부도 참전 수당을 지급하지 않다가, 오히려 진보 정부인 김대중·노무현 정부가 지급하기 시작했다. 외환 위기에 직면한 김대중 정부가 한국전쟁 참전자 수당을 처음으로 만들었다. 국가를 지킨 군인들에게 참전 수당을 주지 않는 게 말이 되는가.

두 번째로, 한국전쟁 때 국가를 위해 희생한 많은 분이 유해 발굴조차 안 돼 가족에게 돌아가지 못했다. 그 유해 발굴단을 만든 것도 김대중 정부다. 보수파가 항상 좌경, 친북이라고 공격한 김대중 정부 들어서 한국전쟁 참전 수당이 지급되고 유해 발굴 사업이 시작됐다. 이러한 것이 '국가를 위한 충성'에 대한 진정한 보상이라고 생각한다.

반대로 국가에 의한 희생도 마찬가지다. 나는 20여 년 전부터 보상과 포용은 같이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가를 위한 충성'을 보상하지 않아 온 보수 세력이 '국가에 의한 희생'도 포용하지 않으려 하며 "반국가 세력이다. 좌익이다"라고 공격한다면, 대한민국에 대한 그들의 이념과 가치의 준거점을 묻고 싶다. 박정희 정부부터 김영삼 정부까지, 대한민국 경제가 가장 발전하던 그 시기에 국가유공자들 뭘 해 주었나. 반공 시위의 현장에 동원만 했지 참전자들에게 어떤 혜택을 주었나. 이념의 포로가 된 분들을 보면 정말 안타깝다.

2부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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