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 사건이 70주년을 맞습니다. <뉴스앤조이>는 올 한 해 이 비극적인 사건을 구체적으로 돌아보며, 특별히 한국교회와 그리스도인이 4·3 사건과 어떻게 관련돼 있는지 정리해 보려고 합니다. 많은 이가 제주 4·3 사건을 어렴풋이 알고 있을 뿐, 구체적으로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 잘 모릅니다.

한국교회는 이 사건과 깊이 연루돼 있는데도 그동안 4·3의 진실을 규명하거나 아픔을 어루만지는 데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했습니다. 외면해 온 역사를 직면하면서 지금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며, 우리 신앙을 어떻게 재정비할지 함께 성찰하고자 '4·3과 그리스도인' 프로젝트를 시작합니다. - 4·3특별취재팀

[뉴스앤조이-박요셉 기자] 자정이 조금 지난 시각. 수상한 무리가 집 밖을 서성거렸다. 잠에서 깬 조남수 목사는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하룻밤이 지나면 거리에 시체가 나뒹굴고 누가 살해되거나 납치됐다는 소문이 돌던 때였다. '공비들이 아닐까.' 조 목사는 골방으로 피신했다. 비상시를 대비해 마련해 둔 죽창 하나와 고춧가루가 담긴 깡통이 있었다. 공비가 나타나면 깡통을 얼굴에 던지고 죽창을 가슴팍에 꽂으리라고 조 목사는 생각했다.

시간이 흘러 시침은 새벽 5시를 넘기고 있었다. 소란스럽던 동네도 조용해졌다. 멀리서 경찰의 호각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아! 내가 살았구나.' 다행이라는 생각과 함께 조 목사는 하나님을 원망했다.

"하나님이시여 내가 이렇게 공비들에게 개죽음을 해야 합니까? 그렇다면 왜 나를 목사가 되게 하셨습니까? 저 공비 악당의 눈을 어둡게 하던지 복통이라도 일어나게 해서 나를 구해 주십시오."1)

4·3 사건 당시 자수 선무 활동을 벌여 수많은 양민을 살린 조남수 목사(1914~1997). 그는 "한국의 쉰들러"2)로 불리기도 한다. 1988년에 쓴 회고록 <4·3 진상>(월간관광제주)에서 그는 1948년 11월경 무장대에 습격당한 일을 회상한다. 두 번의 습격이 있었지만 다행히 조 목사는 목숨을 부지한다. 하지만 그가 목회하던 교인 중에는 살인의 광기를 피하지 못한 이들도 있었다.

4·3을 보는 오래된 시각

조남수 목사(맨 오른쪽 아래)는 자수 선무 활동으로 3000명의 도민을 구해냈다. 뉴스앤조이 박요셉

1948년 일어난 4·3 사건은 제주도 전역에 불어닥친 광풍狂風이었다. 이 사건으로 제주도민 2만 5000명에서 3만 명이 희생됐다고 추정된다.3) 당시 제주도 전체 도민 수가 30만 명이었으니, 약 1/10이 광풍에 스러진 것이다. 수많은 양민이 희생됐지만 4·3은 '이름'을 갖지 못한 채 '사건'으로만 불리고 있다. 4·3을 보는 시각이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미군정 아래서 단독정부 수립과 단독선거를 반대하기 위해 남로당 무장대와 제주도민이 봉기한 '항쟁'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지만, 그보다 오랜 시간 4·3은 남로당 '폭도'들이 제주도와 남한을 공산화하려고 일으킨 폭동이라고 인식되었다.

기독교 내 우익 진영에는 여전히 이런 시각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있다. 특히 제주 교계는 이런 시각이 오랜 세월을 거쳐 지금까지도 힘을 발휘하고 있다. 4·3 사건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들이 어떤 배경에서 이런 시각을 갖게 되었는지 살펴보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조남수 목사의 회고록 <4‧3 진상>에 담긴 그의 생각을 정리하고, 제주 출신 1호 목사이자 순교자로 알려진 이도종 목사의 손자 이동해 장로의 목소리를 들었다.

제주 교회, 무장대에 피해를 입다

모슬포교회 구예배당. 뉴스앤조이 박요셉

조남수 목사는 1944년 목사 안수를 받고, 1947년 모슬포교회 4대 담임으로 부임한다. 1948년 3월 28일에는 조 목사의 위임 예배가 열리는데, 이때가 4·3 사건이 일어나기 일주일 전이다.4)

4·3 사건이 발발하자, 제주 교회들도 피해를 입기 시작했다. 1949년 4월 새문안교회에서 열린 대한예수교장로회 35회 총회에서 당시 제주노회장 강문호 목사(1899~1986)는 4·3 사건 피해 상황을 보고하며 다음과 같이 호소한다.

"제주도는 개벽 이래 처음 보는 민족 항쟁의 처참한 사태에 빠져 사상자가 양민 1512명, 반도가 수만 명, 가옥 소실은 3만 4611동, 이재자는 8만 6757명, 학교 소실은 초등학교 175학교, 중등학교 11개교, 교회 관계 피해는 피살자가 15명인데, 이도종 목사는 작년 6월 16일 교회로 가던 도중에 납치된 후 종적이 없사오며, 허성재 장로는 중학생에게 살해를 당하였고, 서귀포교회 임 씨는 예배당 소재를 하던 중 폭도에게 피해를 당하였고, 교회 건물 피해는 서귀포, 협재, 삼양, 조수 등 4처 예배당이 소실되고, 서귀포, 세화 등 2처의 목사 댁이 소실되었고, (중략) 총성이 그칠 사이가 없으므로 민중은 공포에 싸여 실로 생지옥을 이루고 있습니다. (후략)"5)

당시 조남수 목사가 시무했던 모슬포교회에서 가장 많은 희생자(4명)가 발생했다. 노회장을 역임하고 동네에서 성자라고 불린 허성재 장로는 야밤에 들이닥친 무장대에 처참하게 목숨을 잃었다. 우익계 청년단장을 맡은 둘째 아들 허운동을 내놓으라는 무장대의 요구를 거부하다 변을 당한 것이다. 이백년 집사는 무장대 습격을 받아 부인을 잃고 집이 모두 불탔다. 이때 조 목사는 가까스로 화를 피했다.

제주도민들의 고통은 갈수록 심각해졌다. 낮에는 토벌대에, 밤에는 무장대에 목숨을 잃거나 재산을 빼앗겼다. 조 목사는 "밤과 낮으로 인명 피해가 그칠 줄 모르고 계속되는데 좌익이냐, 양민이냐, 폭도냐를 분간할 수 없이 마구 죽어 갔다. 밤에는 폭도들에 의해서 양민이 피살되고 낮에는 폭도의 연락자라며 양민이 총살되고 있으니 도민들은 앉아서 모두 죽고 있다"6)고 했다.

양민 학살 막기 위해
자수 선무 활동에 나선 조남수 목사

그는 학살극을 막아야 한다고 결심한다. 새벽에 무장대 습격을 피한 직후, 서귀포경찰서 문형순 서장을 찾아갔다. 그는 문 서장에게 무장대 세력은 거의 숙청됐으니 무의미한 학살극을 멈춰야 한다고 강변한다. 밤중에 살기 위해 무장대에 물건을 내어 준 것은 죄로 성립하지 않는다는 인식을 심어 주어 군경이 국민의 보호자이자 민중의 친구라는 점을 각인해야 한다고 말한다.

문 서장은 조 목사 의견을 흔쾌히 받아들인다. 이어, 조 목사의 자수 선무 활동이 시작된다. 그는 곳곳을 돌아다니며 자수 선무 강연을 150회가량 펼쳐 도민 약 3000명을 자수시킨다.7) 즉결 처형을 앞둔 300명을 구하기도 한다. 훗날 도민들은 조남수 목사, 문형순 서장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모슬포 진개동산에 공덕비를 세웠다.

"그날 오후 3시께 하모리장 겸 민보단장이던 김남원 씨와 조남수 목사는 주민들을 급히 모아 놓고 자수를 권유했습니다. 자수하지 않은 채 명단이 드러나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니 끌려간 사람들이 자백을 하기 전에 서둘러 자수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이미 모슬포경찰서장 문형순으로부터 '자수자의 생명을 보장한다'는 약속도 받았다는 겁니다. 처음엔 머뭇거리던 주민들이 하나둘씩 손을 들더니 100여 명이나 되는 사람이 자수했습니다. 문형순 서장은 자술서를 직접 받지 않고 민보단에게 맡겼습니다. 이 덕분에 주민들은 비교적 '큰 죄'는 빼고 주로 식량 제공 등으로 입을 맞춰 가며 자수할 수 있었습니다. 문 서장이 일부러 그런 기회를 준 것으로 봐야 합니다." - 대정읍 하모리 고춘언 씨(4·3 사건 생존자)8)

모슬포교회에 있는 사료관. 뉴스앤조이 박요셉

도민들을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애썼지만, 그는 4·3 사건을 공산 세력이 저지른 '폭동'으로 단정한다. <4·3 진상>에서 그는 "4·3 사건은 결코 독자적으로 계획하거나 도발한 것이 아니다. 남로당 중앙본부에서 찬탁 지령, 3·1절 지령, 2·7 사건 지령과 함께 중앙 지령임을 알아야 한다"9)고 강조한다. 남로당 중앙당의 지령을 받은 남로당 제주도당이 제주도를 점령하기 위해 사전에 계획하고 일으킨 폭동이라는 것이다.

희생자를 추모하는 문제도 군경과 사회단체 희생자를 우선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공산 마수가 덮쳐 왔는데 대한민국 영토인 제주도를 사수한 영령들에 대하여 정부 차원에서 추모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도민들도 거도적으로 그 영령들의 영웅적인 희생을 추모하는 것이 도리가 아닐까 생각하는 바이다"고 밝혔다.

조남수 목사가 회고록을 쓴 1988년에는 학생운동 진영과 문화계를 중심으로 4·3 사건 진상 규명 운동이 확산하고 있었다. 토벌대가 일으킨 학살의 진상을 밝히고 책임자를 처벌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었다. 조 목사는 시민사회에서 대두되는 이러한 목소리를 우려했다.

"민중 봉기니 민중 항쟁이니 하고 젊은 세대를 현혹하는 이들이 있다. 이는 분명히 40년 전 우리 조상들에게 공산주의 그물을 씌우는 행동이며, 무장 폭동으로 국제 공산당에 예속시키려는 이 땅을 사수하다가 희생된 반공 선배들을 모독하는 행위가 아닐 수 없다."10)

모든 문제의 원인은 사건을 일으킨 무장대에게 있다고 조 목사는 말한다. 토벌대가 일으킨 학살도 4·3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에 발생했다는 논리다. 그는 책 말미에 이렇게 썼다.

"이게 다 4·3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에 수반된 지엽적 현상이다. 진압 군경 그 자체가 아니었던 것이다. 4·3 사건이 없었더라면 이런 행패도 있을 수 없었다. 서로 죽이고 죽는 판에 도덕성을 찾고 성현 군자들만이기를 요구하는 것은 탁상공론이고 한갓 공상에 지나지 않는다."11)

보수 단체 대표가 된
순교자 이도종 목사의 손자 이동해 장로

이도종 목사가 순교하기 직전까지 시무했던 대정교회. 뉴스앤조이 박요셉

제주 4·3 사건 70주년을 맞은 올해 초 제주 지역 신문인 <제민일보>에 한 성명서 광고가 실린다. 제주4·3정립연구유족회가 발표한 이 성명서는 지난해 말 오영훈 국회의원이 발의한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4·3특별법) 개정안에 대해 우려를 나타냈다.

4·3특별법 개정안은 4·3 사건을 "미군정기인 1947년 3·1절 기념행사에서 발생한 경찰의 발포 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경찰과 서북청년회의 탄압에 대한 제주도민의 저항과 단독선거, 단독정부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을 중심으로 한 무장대가 봉기한 이래,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통행금지가 전면 해제될 때까지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 충돌과 토벌대의 진압 과정에서 수많은 제주도민이 희생당한 사건’으로 정의하고 있다. 제주4·3정립연구유족회는 이에 대해 "제주4·3에 대한 역사적 정의에서 대한민국 건국을 반대하여 일으킨 남로당 공산주의자들의 폭동이라는 진실을 묻어서는 안 된다"며 반대하는 것이다.

제주4·3정립연구유족회는 보수 인사와 일부 유족이 제주 4·3 사건을 재정립하자는 취지로 2013년에 발족한 단체다. 이들은 4·3사건을 공산당이 일으킨 반란 사건으로 단정하고, 정부가 펴낸 <제주 4·3 사건 진상 보고서>(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가 왜곡·날조됐다고 주장해 왔다. 이 단체의 공동대표를 제주 출신 1호 목사이자 순교자로 알려진 이도종 목사(1892~1948)의 손자 이동해 장로(제광교회)가 맡고 있다.

고산교회를 담임하던 이도종 목사는 1948년 6월 13일 자전거를 타고 인성교회(현 대정교회) 주일예배 설교를 하러 가는 길에 무장대에 붙잡혔다. 무장대는 이 목사를 몇 차례 심문한 뒤 6월 19일 생매장했다. 제주 시내 한 카페에서 만난 이동해 장로는 어릴 때부터 전해 들은 할아버지 이도종 목사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이도종 목사 희생된 후
교회 떠난 가족들

이동해 장로는 제주4·3정립연구유족회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뉴스앤조이 박요셉

"당시 제주도는 교회 지도자가 부족했어요. 목사 한 사람이 하루에 여러 교회를 다니며 설교를 하는 순례 목회를 했죠. 할아버지는 그 난리 통에도 위험을 무릅쓰고 설교를 하러 고산리에서 대정교회로 오는 길이었어요. 그러다 폭도들에게 붙잡혀 참혹하게 돌아가신 거죠."

이도종 목사는 오랫동안 실종 상태였다. 누구도 그의 행방을 아는 이가 없었다. 그러던 중, 한 무장대원이 붙잡히면서 이 목사가 희생됐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무장대원의 소지품에서 이 목사의 회중시계가 발견된 것이다. 이 목사의 죽음은 가족들에게 커다란 충격이었다.

"그렇게 교회에 충성한 일꾼이 산 채로 처참하게 돌아가셨어요. 이 일로 가족과 친지들은 실의에 젖고 교회에 발길을 끊었어요. 아버지는 '하나님이 정말로 살아 계시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겠느냐'고 한탄하셨죠. 수십 년이 지난 뒤, 어머니와 저는 다시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어요. 그러나 아버지는 끝내 신앙을 버린 채 생을 마감하셨어요."

이동해 장로는 단 한 번도 희생자 추념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뉴스앤조이 박요셉

이 장로에게 4·3 사건은 조부의 목숨을 빼앗고 일가족의 평화를 망가뜨린 비극이었다. 하지만 4·3 진상 규명 운동이 일어나고 특별법이 제정된 후 여론은 4·3 사건의 희생자 중 약 80%를 차지하는, 군경에 의해 희생된 사람들을 집중 조명했다. 그는 4·3 사건 본래 의미가 변질됐다고 보고 있다. 특히, 정부의 진상 규명 결과나 사과를 납득하기 어려웠다. '4·3'이 무장 공비가 주도한 '폭동'이 아니라 군경이 일으킨 학살로 의미가 바뀌는 것 같았다.

그가 희생자 추념식에 가지 않은 이유

"'4·3'은 남로당 제주도당 유격대 350명이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에 제주 경찰지서 24개소 중 12개를 급습하면서 발생한 사건이에요. 엄연히 공비들이 일으킨 폭동인 겁니다. 그런데 이런 내용은 아주 싹 사라지고 최근에는 민중 항쟁이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어요. 그분들에게 묻고 싶어요. 성실하게 목회만 했던 조부님은 어떤 잘못을 저질렀기에 '항쟁'의 대상이 되는 건지요.

군경에 희생된 이가 많은 건 인정해요. 그분들 명예가 회복되고 적절한 배·보상도 이뤄져야 한다고 봅니다. 하지만 4·3 사건을 공산당이 일으켰다는 사실을 축소해서는 안 되죠. 아무리 이런 말을 해도 정부나 언론은 저희들을 외면합니다. 많은 시민이 사건의 원인은 모른 채 결과만 보고 편향된 시각으로 4·3을 보고 있어요."

4·3 희생자 명단에는 군경 토벌대에 의해 희생된 이들 뿐 아니라 무장대에 의해 살해된 희생자들도 등록돼 있다. 이도종 목사 역시 일찌감치 희생자로 등록됐다. 그러나 이동해 장로는 아직 한 번도 4‧3 희생자 추념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는 정부가 4·3에 대한 자신들 입장을 받아들이고, 제주 4·3 사건의 실체가 완전히 드러나게 되었을 때 4·3 희생자 추념식에 참석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4·3과 그리스도인' 프로젝트 바로 가기
'4·3과 그리스도인' 프로젝트 후원 바로 가기

각주

1) 조남수, <4·3 진상>(월간관광제주), 131~132쪽
2) 에밀리 쉰들러, 독일의 사업가 오스카 쉰들러의 부인으로 '쉰들러 리스트'를 작성해 1200명에 달하는 유대인을 구해 냈다.
3) <제주 4·3 사건 진상 조사 보고서>(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536쪽
4) <모슬포교회 100년사>(모슬포교회100년사편찬위원회) 255쪽
5)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록(1947~1955)>, 67~68쪽
6) 조남수, <4·3 진상>, 78쪽
7) 같은 책, 143쪽
8) 제민일보4‧3취재반, <4‧3은 말한다 5>(전예원)
9) 조남수, <4·3 진상>, 51쪽
10) 같은 책, 12쪽
11) 같은 책, 128쪽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