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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교회 목사가 이해하는 성찬

성찬 예식의 기원과 변화, 의미와 논쟁점 짚다

최주훈   기사승인 2018.03.27  13:4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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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찬 예식의 기원

성찬식의 기원을 따지면, 멀게는 출애굽을 기념하는 유월절 식사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기독교 예배의 직접적 근거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제자들과 마지막 식사를 하던 저녁으로 소급됩니다. 보통 '성목요일'이라고 부르는 날,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식탁을 나누고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신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신약성경 저자들 모두 이 맥락에서 성찬식을 언급합니다.

성만찬에 대한 가장 오래된 성경 기록은 서기 50년경 바울의 고린도전서 11장 23–26절입니다. 이는 복음서에서도 기록되어 있습니다(마 26:17–29, 막 14:12–26, 눅 22:14–20, 요 13:1-30). 초대교회 공동체는 식사 교제를 위해 모였는데, 여기에는 성찬이 포함돼 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공동 식사는 예배로 변했습니다. 물론 이것은 오늘날 예배 의식과 달랐습니다. 보리 빵, 포도주를 나누며 예수님의 사건을 회상하고 삶의 자세를 다지는 식탁 교제였습니다. 이것이 점차 고정된 형식의 교회 예배 의식으로 바뀌게 됩니다.

중세 시대에서 종교개혁 시대로
성찬 형식의 변화

중세 시대 당시 성찬 이해는 매우 다양했습니다. 전문 신학자들은 철학 용어를 사용하며 그리스도의 임재 또는 변화 방식에 대한 학문적 논쟁을 활발히 벌였지만, 민간인들은 그런 것에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거슬러 올라가 보면, 고대인들에게 성찬은 죄에 대한 해독제인 동시에 불사의 명약으로 꼽혔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고, 하나님의 아들은 죽지 않은 '신'이기에 그의 살과 피를 받는다는 것은 신이 가진 불사의 능력을 얻는다는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만병통치약으로 생각했기에 교회에 몰래 들어와 성별한 떡을 훔쳐 가는 일이 꽤 있었다고 합니다. 일반인들이 생각할 때 성찬을 받는다는 것은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 가는 것을 넘어 '신처럼 되어 가는 것'으로 이해되고는 했습니다.

게다가 1347년 흑사병이 몰아친 이래로 교회 사제 그룹도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경우가 많았는데, 이는 성찬을 미신적 이해로 더욱 거세게 몰고 가는 계기가 됩니다. 성경에 무지한 사제들이 교육받지 못한 평민들을 가장 편하게 가르칠 수 있는 방법은 성찬을 마법 같은 힘으로 설명하는 것이었습니다.

10세기경 그리스도의 임재 방식에 대한 논의가 격렬했던 때가 있습니다. 그러다 1215년 제4차 라테란공의회에서 떡과 잔 중 떡만 주는 것으로 결정하게 됩니다. 하지만 교회 현장에서는 일반 신자가 떡을 받는 것조차 위험하게 여겼습니다. 어떤 학자들에 따르면, 사제들이 회중을 대신해서 떡을 받았다고 합니다. 회중은 그저 구경꾼이 된 것이지요.

그러니 중세에는 사제가 떡을 들어 올릴 때(성체거양) 떡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당시 신앙과 신학으로는 "미사에 참석하기만 하면 늙지 않고, 그날에는 급사하지 않고, 집이나 곳간이 벼락 맞지 않고, 병이 나을 것"[Eamen Duffy, The Stripping of the Altars (Yale University Press, 1992), 100]이라고 믿기도 했고요. "성찬 빵을 응시하면, 분만하는 산모는 순산하고, 여행가들은 안전하게 도착하고, 먹는 자와 마시는 자는 소화가 잘될 것"(앞의 책, 100)이라고 믿을 정도였습니다.

만일 사제가 떡을 높이 들어 올리지 않아 뒷자리까지 떡이 보이지 않으면, "더 높이 들어 올리라!"고 신자들이 소리쳤다는 기록까지 남아 있을 정도입니다. 여기서 더 문제가 된 것은, 중세 연옥 사상과 맞물려 개인 미사 때 교회 안에서 돈을 받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구원의 사건인 성례전이 돈을 벌어들이는 수단이 됐던 것이지요(물론 16세기가 지나가면서 로마교회 당국은 성례전을 이용한 돈벌이를 공식 금지합니다).

16세기 루터의 종교개혁은 바로 이 점을 공격합니다(참고: 교회의 바벨론 포로, 1520). 성경의 말씀에 제시된 그리스도의 말씀, 특히 성찬을 제정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은 어떤 식으로도 훼손돼서도 안 되며, 타협할 여지가 없다는 것이었지요. 이 원칙에 따라 종교개혁자들은 "떡과 잔을 받으라"는 예수님 말씀 그대로 떡과 잔, 두 가지를 회중에게 모두 분찬하는 이종 배찬을 실행하게 됩니다.

이로써 신자들은 성찬의 구경꾼에서 직접적인 참여자로 신분이 바뀌게 됩니다. 당시에는 이 점이 개신교회의 가장 큰 특징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마술적 변화 과정이나 신비한 효능이 아니라 그 안에 선포되는 그리스도의 말씀, 사제의 권위나 예배 형식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말씀에 대한 믿음이 강조됐습니다.

성찬에 대한 이야기는 오늘날 교회의 예배와 신앙을 되돌아보게 합니다. '보기만 하면, 참석만 하면, 은혜의 효과가 있다'는 가르침, 배운 게 없으니 신비하고 마술 같은 이야기로 가득한 설교, 하나님의 은혜를 돈으로 사고파는 행태, 사제의 권위주의와 거기에 질문이나 군소리 없이 순종(?)하는 교인이 교회를 부패하게 했던 중세의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오직 말씀, 믿음, 은혜만으로'를 외치는 오늘날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어떤 모습일까요.

아직도 교회에 가기만 하면, 늙지도 않고, 벼락 맞지도 않고, 그날에는 급사하지도 않고, 산모는 순산하고, 소화도 잘된다고 말한다면? 그렇다면 아직 우리는 개신교회의 이름을 붙일 수 없습니다.

성찬 형식은 교단마다 다른가

성찬식을 하는 방식은 교단의 신학과 현장 상황에 따라 아주 다양합니다. 재료가 되는 떡과 포도주의 경우도 예수님 당시에는 보리 빵과 물을 섞은 포도주였습니다. 지금은 카스텔라, 제병, 누룩이 있는 것과 없는 것 등 다양하고, 포도 주스를 사용하기도 하고 백포도주를 사용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다양한 이유는 성찬에서 중요한 것은 형식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그리스도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 때문에 언제나 변함없이 고정된 것은 성찬 때 선포되는 제정의 말씀입니다. "이것은 내 몸이라…. 이것은 내 피라…." 최후의만찬 당시 선언하셨던 그리스도의 말씀만 있다면 성찬식의 나머지 형식은 언제나 문화와 신학에 따라 변할 수 있습니다.

분명히 못 박아야 할 것도 있습니다. 어떤 형식으로 성찬을 하든지 주님의 말씀이 강조돼야 하고, 거기서 일어나는 모든 형식이 신자들에게 신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아무리 멋진 예배 형식도 무슨 의미인지 신자들이 알지 못한다면 그것은 겉치레에 불과하고 시간 낭비일 뿐입니다.

루터교회가 성찬을 더 중시하는 이유

루터교회에서 성찬을 중시하는 이유는 성찬을 '보이는 말씀'으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루터신학에서 예배란, 하나님이 죄인들에게 차별 없이 베푸시는 은총의 사건입니다. 이것은 순전히 죄인을 위한 하나님의 행동이고 섬김입니다. 루터는 그 때문에 예배를 '고테스딘스트'(Gottesdienst, divine service, God’s service)라고 부릅니다. 로마 가톨릭에서는 사람이 무언가를 준비해서 하늘로 올려 드리는 제사로 예배를 이해한 반면, 루터는 그 반대로 이해한 것이지요. 인간은 그저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총의 행위에 기도와 감사와 찬양으로 반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루터가 이해한 개신교 예배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의 행동이 예배에서 드러날 때 그 도구는 언제나 말씀입니다. 그래서 루터교회 예배는 두 종류의 말씀 예배로 구성돼 있지요. 전반부는 말씀의 예배, 후반부는 성찬 예배입니다. 은총의 도구인 하나님의 말씀이 전반부에서는 선포되는 보이지 않는 말씀의 형식으로 설교가 있고, 후반부에서는 누구든지 객관적으로 보고 맛보고 깨달을 수 있는 보이는 말씀의 형식으로 성찬 예배가 있는 것이지요. 보이는 말씀과 선포되는 말씀이 모두 공존하는 예배가 루터교회 예배입니다.

매주 교인과 눈을 맞추며 집례하는 성찬

선포된 말씀인 설교가 1대 다수라면, 성찬은 언제나 일대일 형식이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루터 신학에서는 그 때문에 설교가 '우리를 위한'(Christus pro nobis) 하나님의 말씀이고, 성찬은 '나를 위한'(Christus pro me)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이름 붙입니다. 대부분 다른 교회는 회중석으로 떡과 잔을 돌리지만, 루터교회는 절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항상 제단 앞에서 집례자가 일일이 다 떡과 잔을 줍니다. 일대일로요. 루터교회는 원칙적으로 매주 성찬을 합니다. 가능하면 더 많이 하라고 권하고요. 환우 심방이나 지방으로 심방을 갈 때는 성찬을 준비해서 가기도 합니다.

루터교회에서는 성찬을 대충대충 할 수 없습니다. 그 때문에 예배 시간이 길어지기도 하지요. 게다가 교인 숫자가 많아지면 한도 끝도 없이 더 길어질 수도 있어요. 이게 순기능인지 역기능인지 모르겠지만, 이런 식으로 성찬 집례를 하면 교인 숫자는 200명을 넘어설 수 없게 됩니다. 자동적으로 필터링이 돼서 교인 수가 조절됩니다. 대형 교회가 될 수 없는 구조적 조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보통 예배의 모든 순서는 1시간 20분이면 마무리됩니다. 성찬과 광고까지 모두 포함해서요.

200명이 채 안 되는 교인들이기에 주일 성찬 때 눈빛만 봐도 무언가를 감지할 수 있어요. 한 주간 무언가 일이 있던 교우는 분명히 성찬을 받는 태도와 눈빛이 다르지요. 그럴 때면 상담을 하든지, 아니면 심방을 합니다. 이건 대형 교회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반대로 성찬을 하다가 목사인 제가 위로받는 경우도 많습니다. 고난 중에 있는 분이 신실한 눈빛과 자세로 성찬을 받는 모습, 아이들이 제단 위로 올라와 고사리 같은 손을 모으고 기도하며 순서를 기다리는 모습을 통해 제가 받는 위로와 힘이 더욱 큽니다. 성찬의 시간은 교인과 목회자 모두에게 축복의 시간입니다.

성찬의 신비

고대로부터 변하지 않고 있는 성찬의 신앙은, 주님의 몸이 영생의 힘이자 세상에서 꺾이지 않는 불멸의 힘이라는 점입니다. 주님의 몸을 함께 나누었다면 그분이 내 안에서 일하게 된다는 것을 더 명확하게 확신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그분이 내 안에 있기 때문에 매 순간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일상을 살 수 있게 됩니다. 매일 반복되는 삶을 용감하게 일구고, 그 안에서 예수님의 손을 잡고 사는 것이지요. 또한 성찬은 나 혼자 비밀스레 먹는 게 아니라 공동체가 함께 한 식탁을 나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함께 성찬을 나누고 손을 잡기 때문에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 한 공동체라는 사실도 공유하게 됩니다.

떡과 잔을 받는 일은 분명 사람이 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일대일로 사람이 마주 선 사이에 떡과 잔이 있지요. 그때 나와 당신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겨납니다. 그리고 서로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는 의미를 되새기게 됩니다.

한 가지 더 짚는다면, 성찬은 모든 이를 차별 없이 용서하고 받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성찬을 마치고 세상에 나가서, 그 은혜의 힘으로 혐오와 배제, 차별과 구분이 있는 곳을 그리스도의 평화로 하나 되게 만들어야 할 책임도 지게 됩니다. 이렇듯 성찬이란 개인 신앙에서 시작하지만 자연스레 사회 차원의 나눔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성찬은 신비입니다. 이 작은 떡 하나에 주님이 임할 수 있다면, 보잘것없는 우리에게도 희망이 있는 셈입니다. 이 믿음으로 세상에서 살아갈 때 불의와 불가능에 맞설 힘이 생기고, '과연 세상이 변할까' 하는 절망에도 희망을 품을 수 있게 됩니다. 주님도 이 작은 것에 들어와 나와 함께하셨다. 그렇다면 이 절망적인 세상도 주님이 변화시킬 수 있다. 이것이 성찬의 신비이겠지요.

세례교인만 성찬에 참여하고
어린아이는 참여 못 하는 이유

'먹고(성찬) 세례 받느냐, 아니면 세례 받고 먹느냐' 문제는 오래된 신학 문제입니다. 최후의만찬에서는 제자들을 위한 것이었고, 초대교회에서는 식탁 나눔이었기에 세례교인으로만 특정하기 어렵습니다. 현대 교회에서는 통념상 '세례 받은 사람'으로 규정합니다. 하지만 루터는 오히려 먹고 세례 받는 순서에 무게중심을 둡니다.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성만찬을 마음껏 향유해야"(루터의 대교리문답) 하고, 은총을 갈망하는 자는 누구든지 성찬을 받아야 한다고 명시합니다. 성찬은 죄인을 위해 베푸신 은혜의 식탁이기 때문에 차별이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교회 내 무분별한 성찬 참여와 오용 때문에 2세대 개혁가로 넘어오면서 세례 받은 자로 성찬에 제한을 두기 시작합니다(멜란히톤).

그러고 보면 어린아이라고 성찬에서 배제해야 할 이유는 그다지 보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실제로 세계적 흐름으로 보자면, 어린아이뿐만 아니라 누구든지 성찬에 초대한다는 '열린 성찬'이 힘을 얻어 가고 있습니다. 저희 교회에서는 일반적으로 아이들에게 주지 않습니다. 이유는 성찬을 받을 수 있는 나이가 될 때까지 기다리는 것도 '교육'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 대신 어른들과 마찬가지로 성찬 때 제단 앞으로 나오게 한 뒤, 목사가 아이들에게 한 사람씩 머리에 손을 올려 축복 기도를 해 줍니다. 이때 목사는 아이들 눈높이에 맞추어 무릎을 꿇습니다. 이런 것을 통해 아이들 역시 교회의 성찬에서 소외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려 줍니다. 아이를 가진 부모 입장에서 본다면 이런 축복은 더할 나위 없는 기쁨과 위로가 됩니다. 아이들이 떡을 받는 일은 일 년에 한두 번 시행합니다. 그때는 교인들을 향해 아이들에게 떡을 주는 이유를 공적으로 설명하고 성찬을 진행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교회 공동체가 함께 알고 움직이는 게 중요합니다.

원형의 의미 되살아나기를

성찬을 어떤 식으로 집례할 것인지, 교리적으로 어떤 것이 맞는지 논쟁하기보다 그 원형의 의미가 되살아나기를 기대합니다. 반복해서 말씀드리지만, 주님이 베푸신 성찬의 정신은 모든 이를 용서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한국교회에 만연한 구별과 차별, 혐오와 배제를 넘어 그리스도의 사랑과 평화의 가치가 더욱 크게 부각돼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자신의 몸을 받을 자격이 없는 이들에게 나눠 주신 것을 매번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게 우리에게 주셨다면, 우리 역시 섬김과 나눔의 삶을 일상에서 실천해야겠지요. 그리고 교단과 신학이 달라도 결국 그리스도의 한 식탁에서 우리가 시작됐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각 교회 현장에서 성찬을 함께 나눌 때, 서로의 다름이 구분하고 차별하는 출발선이 아니라 무지개처럼 빛나는 하나님나라의 조화와 질서라는 것을 모두가 공유하기를 기대해 봅니다. 우리는 결국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입니다.

이런 깨달음과 감동을 맛보기 위해서는 목회자나 신자 모두가 성찬이 무엇인지 질문하고 찾아가는 공부의 자세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아는 만큼 보이고, 아는 만큼 즐기는 여행의 이치와 같습니다. 신앙생활이란 하나님나라를 향한 여행이니, 성찬을 교회 공동체가 함께 알아 가는 것도 그 여정의 귀중한 부분이 될 것입니다.

최주훈 / 중앙루터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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