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동교회 전덕기 목사의 민족운동은 민중 목회와 이어져 있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상동교회는 민중 선교와 민족 목회가 합류하는 곳이었습니다. 그는 일제에서 독립을 쟁취할 때 비참한 민중 현실을 치유할 수 있다고 인식해 민중을 섬기는 한편 민족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한 것입니다.

1888년 설립한 상동교회는 일제강점기에 두드러졌습니다. 엡웟청년회·공옥학교·상동청년학원을 통해 안창호·신채호·주시경·구연영·양기탁·김구·이승만·이동녕·이동휘·이준·이시영·노백린 등이 민족운동에서 핵심 역할을 맡았는데, 이들은 상동파로 불렸습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됐을 때 조약 무효 상소문을 올리고 을사오적 암살을 모의했습니다. 1907년에는 상동교회 청년회장 이준이 헤이그 밀사로 갔습니다. 그해, 상동파가 중심이 돼 항일 비밀결사 신민회를 조직합니다.

이 민족운동의 중심에 전덕기 목사가 있었습니다. 전덕기 목사는 1875년 12월 서울 정동에서 태어났습니다. 9살 때 부모를 여의고 남대문에서 숯 장사를 하던 숙부 집에서 기거했습니다. 그는 빈민과 상인이 많았던 상동에서 살았습니다. 전덕기는 17세에 미국 선교사 집을 찾아가 까닭 없이 돌을 던져 유리창을 박살 내고는 대결을 불사하듯 당차게 섰습니다. 그런데 집에서 나온 스크랜턴 선교사는 자상한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전덕기는 그를 보고 당황했습니다. 스크랜턴은 그의 어깨에 손을 얹고 위로하면서 예수를 믿으라고 권고했습니다. 이것이 결정적 계기가 돼 전덕기는 1896년 21세의 나이로 스크랜턴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전덕기는 서재필 목사가 세운 독립협회에서 활약하였고, 엡웟청년회 핵심 회원으로 활동합니다. 그는 열정적인 노방전도는 민중들에게서 인기를 끌었습니다. 전덕기는 전염병 등으로 죽어 방치된 주검을 거둬 장례를 치러 주고는 했는데, 때로 부패한 시신의 체액 때문에 나막신을 신고 들어가 염을 했습니다.

1907년 제6대 상동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한 전덕기는 고종의 밀서를 구해 교회 지하실에서 헤이그 밀사 파견을 모의했고, 주시경 선생을 통해 한글 보급 운동을 전개했으며, 한국YMCA 창립에 동참했습니다. 공덕교회·세검정교회·청파교회 등을 개척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안창호·윤치호 등과 신민회를 조직해 본격적으로 민족 독립운동을 추진합니다. 일제는 기독교인들이 중심에 있는 신민회를 항일 민족 세력 제거의 첫 대상으로 삼아, 1911년 데라우치 총독 암살을 모의했다며 '105인 사건'을 조작합니다. 전덕기 목사는 윤치호·이승훈 등과 함께 주모자로 체포됐고 모진 고문을 받았습니다. 악형으로 생긴 늑막염은 폐결핵으로 발전했고, 그는 2년 동안 투병하다 결국 1914년 3월 23일에 별세했습니다. 장례식에 애국지사는 물론 빈민·병자·장사꾼·천민·기생 등이 몰려와 상여 행렬이 10리 밖까지 이어졌다고 합니다.

전덕기 목사 영향으로 1919년 3·1 혁명운동이 일어났을 때, 민족 대표 33인 중 4인 최석모·오화영·이필주·신석구는 상동교회 출신이었습니다. 일제강점기 말, 탄압이 가혹해지자 1944년 3월 교회는 폐쇄됐고 예배당은 신사참배와 황도 정신의 훈련장 황도문화관으로 바뀌었습니다.

전덕기 목사는 스크랜턴 선교사에게 영향을 받았습니다. 1885년에 입국한 의사 스크랜턴 목사는 서민적이었습니다. 그가 빈민들을 치료했던 정동병원에 고종황제는 '시병원'이라는 이름을 하사했지만, 그는 민중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열악한 남대문 상동으로 병원을 이전합니다. 어머니 메리 스크랜턴은 한국 최초의 여성 교육기관 이화학당을 세워 여성들의 지위 향상에 결정적으로 기여했습니다.

스크랜턴은 지방으로 다니며 사역하다가 친일파 선교사 해리스 감독과의 의견 대립으로 선교사직으로 사임하고, 성공회 평신도 신분으로 민중 선교를 계속합니다. 한국말로 설교했던 그는 여러 광산에서 가난한 노동자들의 친구로 지냈고, 마지막으로 일본 고베에서 개업했는데 거기서도 억압받는 가난한 조선 민중을 위해 살다가 생을 마감했습니다.

"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주님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포로 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 주고,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눅 4:18-19)".

이 말씀은 스크랜턴 선교사와 전덕기 목사가 사랑했던 성경 구절이었습니다. 1985년부터 펼쳐진 한국 민중 교회 운동 목회자들도 이 말씀을 아꼈습니다. 군사정권 시절 사회변혁의 동력이 민중에게 있다는 것을 깨달은 목회자들은, 노동 현장과 빈민 지역에서 예수의 해방 사건을 재현하고자 민중 교회를 세워 민중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지금은 민중 교회 운동이 약화됐고 작은 교회 운동이 새롭게 민중 선교의 맥을 이어 가려고 힘쓰고 있습니다.

상동교회 예배당. 이근복 그림

얼마 전 서철 담임목사 안내로 상동교회 사료관을 둘러봤습니다. 전덕기 목사의 묘비석(故牧師全公德基紀念碑)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한국 최초의 민중 목회자 전덕기 목사는 경기도 고양에 묻혔으나, 묘지조차 두려워한 일제에 의해 유해가 화장돼 한강에 뿌려졌습니다. 이 석비만 남아 있는 셈입니다.

1901년 건축한 직전 예배당 모형도 참 아름다웠습니다. 서 목사님은 "이 교회당이 남아 있으면 성지가 됐을 터인데"라며 아쉬워했습니다. 1974년 건축한 지금 교회 건물은 서울 미래 유산이기는 하지만, 소중한 역사의 흔적을 사료관에서만 볼 수 있어 참 안타깝습니다. 요즘 태극기가 이상하게 이용되고 있기에 망설였지만, 민족 독립을 위해 헌신한 상동교회를 마음에 새기며 태극기를 넣어 상동교회를 촬영하고 교회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림으로 만나는 한국교회'는 매월 2차례 업데이트됩니다.

이근복 / 목사, 성균관대학교와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을 졸업했다. 영등포산업선교회 총무, 새민족교회 담임목사,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교육훈련원장을 거쳐 현재 크리스챤아카데미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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