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앤조이-이은혜 기자] 성폭력 피해자 대부분은 수십 년 전 일어났던 그 사건을 어제 일처럼 기억한다. 당시 상황, 가해자가 건넨 말, 지었던 표정까지도 생생하게. 누군가는 그 모든 것을 기억하는 성폭력 피해자를 가리켜 "천재"라고 비아냥댔지만, 성폭력은 가해 정도를 떠나 피해자 뇌리에 강력한 인상을 남긴다.

수십 년 전 신학교 교수들에게 겪은 성폭력 사건을 생생하게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 A 교수는 한국교회 주요 교단 신학교에서 중추 역할을 맡은 이들의 성폭력을 고발하고 싶다며 <뉴스앤조이>에 인터뷰를 요청해 왔다. A 교수 역시 신학교를 졸업하고 현직에 있는 사람이다. 그는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자신이 겪은 성폭력, 이 일을 고발하게 된 이유 등을 털어놓았다.

A 교수와의 대화를 일문일답 형식으로 정리했다.

- 겪은 일을 설명해 줄 수 있겠나.

수십 년 전, 한 기독교 기관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B는 그때 기관에서 일하던 신학자이자 목사였다. 그는 한국 주요 교단 신학교에서 총장대행까지 맡았고 지금도 현직 교수로 있다. 당시 내가 다니던 신학교는 여성에게 목사 안수를 허락하지 않아서, 목회보다는 공부에 더 뜻이 있었다. 그는 내가 신학 공부에 관심이 많고 유학을 생각하고 있는 것을 알고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호의를 베풀며 여러 좋은 이야기를 해 줬다.

어느 날, B가 아프다고 해 병문안을 갔다. B는 이미 결혼할 사람이 있었고 그런 사실을 기관에 있는 모두가 알고 있었기 때문에, 별다른 거리낌 없이 그의 집에 갔다. 집 안에 들어갔더니 B는 이불을 깔고 누워 있었다. 발치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갑자기 B가 나를 넘어뜨렸다. 그렇게 나를 덮쳤다. 내가 울면서 뿌리치자 중간에서 멈췄다.

그가 처음에는 미안하다고 했던 것 같은데, 내가 계속 언짢아하니까 나중에는 역정을 내면서 뭘 그런 걸 가지고 그러느냐고 했다. 바로 뿌리치고 그 집을 나왔어야 했는데… 그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잘 몰랐다. 2~3년 쌓아 온 신뢰가 있었기 때문에, B가 한 행동을 한순간의 실수로 치부하고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넘겨야 했는지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 뒤로 학회 같은 곳에서만 그를 만날 수 있었다. 거기서는 그 문제를 꺼낼 상황이 아니었다.

A 교수는 기자와의 대화에서 지난날 겪은 일들을 담담히 털어놓았다. (사진은 기사 내용과 관계없음.)

그 일이 있고 몇 년 후 유학을 떠났다.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십수 년 전, 또 다른 유명 신학자 C와 출판 작업을 함께했다. C는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신학교 중 한 곳에서 구약학을 가르쳤고 얼마 전 은퇴했다. 그 교단 내에서 그의 명성은 지금도 자자하다.

유학을 막 마치고 돌아온 나는, 내가 읽었던 좋은 책들을 번역해 출판하고 싶었다. 하지만 강사 신분이었기 때문에 직접 책을 낼 수 있는 방법이 많지 않았다. 그때 대학교 은사님이 C 교수를 소개해 줬다. C는 개인 연구소도 있었고 출판 작업도 활발하게 하던 사람이었다. 마침 C도 내가 출판하고 싶어 하는 분야에 관심이 많다고 했다. 소개받고 나서 출판 관련해 여러 차례 만났다.

어느 날 관련 학자들 모임이 끝나고 C가 차로 집에 데려다준다고 했다. 평소에 책 관련 대화를 많이 나눴으니 아무런 의심 없이 탔다. 그런데 갑자기 차에서 "우리 손잡고 갈까?"라고 묻더라. 그는 결혼도 했고 자녀도 있었다.

어처구니가 없어 "교수님 미쳤어요?"라고 대답하고 내려 달라고 했다. 내리면서 본 C 교수의 표정이 잊히지 않는다. 예상치 못한 반응이 나와서 그런 것인지 기분 나쁘게 씩 웃는 표정을 지었다.

그 뒤로도 출판 때문에 C 교수와 여러 차례 만날 일이 있었지만, 그날 일에 대해 미안하다는 얘기를 들은 기억은 없다. 오히려 책 출판과 관련해 안 좋은 경험만 남았다.

- 오래전 일을 지금이라도 드러내야겠다고 결심한 이유가 있다면.

얼마 전 지인에게 "나도 미투 운동에 동참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사회에서 계속되는 미투 운동을 보며 과거의 기억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오래전 겪은 일이지만 그 기억은 죽을 때까지 안 없어질 것 같다. 가해자들은 별것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절대 아니다. 60~70살 되신 분들도 예전에 겪은 일을 바로 어제 일처럼 말씀하신다. 나도 마찬가지다.

B에게 당한 후, 나는 내가 실수해서 그런 일이 발생했다고 자책했다. 내가 괜히 병문안 가지 않았다면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했다. 나에게는 정말 은사 같은 사람이었고 아프다고 했기 때문에 걱정이 돼서 간 것뿐이었는데… 그는 나와의 관계를 이용해서 자신의 욕망을 충족하려 했다.

C도 겉으로 보기에는 덕망 있고 성공한 신학자처럼 보인다. 하지만 위선과 가식이 섞여 있다. 예수님 시대에도 거짓 선지자가 있었는데, 사람들은 그 거짓 선지자가 우리 가까이 있다는 걸 잘 모른다. C 교수가 "손잡고 갈까"라고 물었을 때 내가 우물쭈물 방어하지 못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그런 말 자체를 가볍게 생각하는 문화에서, 그것이 가벼운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리는 게 미투 운동의 취지 아닌가. B‧C 둘 다 내가 거부하지 못했다면 어떻게 됐을지 모르겠다.

나는 그 사람들 얼굴을 알고, 그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안다. 나에게 그런 행동을 한 사람들이 목사로서, 신학교 교수로서 거룩을 외치며 그 자리까지 올라간 걸 보면 한편으로는 가증스럽다. 사회에서는 미투 운동 가해자로 지목되면 죗값을 물고 그의 업적을 폐기하는 등의 조치를 취하지만, 교회와 신학교는 그렇지 않다. 여기는 사회보다 더 폐쇄적이다. 성폭력 사실이 인정돼도 다른 곳 가서 목회하는 일도 있지 않은가.

신학교에서 여성 학생들은 여전히 취약한 위치에 있고 안 좋은 일을 당해도 어디 말할 수 있는 곳이 없다. 지난해 감신대 ㅅ 교수 일을 기사로 접하면서, 여전히 그런 일을 겪어도 말 못 하고 있는 학생이 많겠다고 생각했다. 나도 현재 성경을 가르치는 입장인데, 이 일이 남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 같은 학계에 있어서 고발이 쉽지 않았을 것 같다.

나는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지만 특정 기관에 속해 있는 것도 아니고 매여 있는 게 없어 여러 조건에서 자유로웠다. 미투 운동을 보며 교계나 신학교는 더 많을 것이라 생각했다. 신학교는 여러 얽힌 관계가 있기 때문에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

지난 일들을 내 개인 일로 덮고 간다면 신학교에서 비슷한 일이 반복됐을 때 죄책감을 느낄 것 같았다. 그때 왜 공개적으로 목소리를 내지 못했을까 하고 자책하기 싫었다. 신학교에서 성 윤리를 제대로 배워야 나중에 목회자가 되어 교회에 가서도 이 부분을 의식하고 목회할 텐데, 지금은 전혀 그런 장치가 없다고 들었다.

A 교수는 이런 나쁜 관행이 신학교와 교회에서 근절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인터뷰에 임한다고 했다. 뉴스앤조이 하민지

- 이번 일로 바라는 점이 있다면.

창세기 1장은 하나님이 사람(아담)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시되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고 기록했다. 갈라디아서 3장에도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남자나 여자나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고 기록하고 있다. 모두 인간 존중과 평등에 대한 가르침이다. 성경에 이런 가르침이 없었다면 나는 그런 일들을 겪고 나서 차라리 무교를 선택했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식으로만 배우고 삶과 제도 속에 실천하지 않는다면 결국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하는 것이며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 아니겠는가.

앞으로 이런 나쁜 관행이 신학교와 교회, 더 나아가 사회에서 근절되기를 바란다. 또 신학교 내에 제대로 된 상담 기구가 설립되어 피해를 입은 여성들이 나처럼 오랫동안 혼자 침묵하고 수치스러워하며 괴로워하지 않길 바란다.

미투 운동은 남성과 여성의 대립 문제가 아니다. 내가 겪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그런 일을 겪는 사람이 내 가족일 수도 있고 내 친구일 수도 있고, 내 친구의 가족이거나 이웃일 수도 있다. 그런 일로 힘들어하는 사람이 내가 가르치는 학생일 수도 있고 내 동료일 수도 있다. 모두 하나님 형상을 따라 이 세상에 태어나 예수님의 사랑의 복음을 누리고 전하며 살아가야 할 하나님나라의 공동체다. 신학교가 변해야 교회가 변한다는 여신학도들의 믿음이 열매 맺는 날이 오길 바란다.

"모든 것이 내 잘못, 피해자에게 사죄"

A 교수가 가해자로 지목한 B 교수는 "모든 것이 내 잘못"이라고 말했다. 그는 <뉴스앤조이>와의 통화에서 "내가 먼저 사과했어야 하는데 오래전 일이라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오래전 학회에서 마주칠 일이 있었지만 전혀 그 생각을 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B 교수는 "너무 미안하게 생각하고, 할 수만 있으면 A 교수에게 직접 용서를 구하고 싶다"고 말했다.

C 교수도 <뉴스앤조이>와의 통화에서 "지금이라도 A 교수에게 진심 어린 사과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그때 일은 그날로 끝난 줄 알았고 그래서 먼저 사과하지 못했다. 이 일이 밝혀져 나의 허물이 드러나는 건 괜찮지만, A 교수를 향한 2차 피해가 발생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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