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 사건이 70주년을 맞습니다. <뉴스앤조이>는 올 한 해 이 비극적인 사건을 구체적으로 돌아보며, 특별히 한국교회와 그리스도인이 4·3 사건과 어떻게 관련돼 있는지 정리해 보려고 합니다. 많은 이가 제주 4·3 사건을 어렴풋이 알고 있을 뿐, 구체적으로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 잘 모릅니다.

한국교회는 이 사건과 깊이 연루돼 있는데도 그동안 4·3의 진실을 규명하거나 아픔을 어루만지는 데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했습니다. 외면해 온 역사를 직면하면서 지금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며, 우리 신앙을 어떻게 재정비할지 함께 성찰하고자 '4·3과 그리스도인' 프로젝트를 시작합니다. - 4·3특별취재팀

"그때 공산당이 많아서 지방도 혼란하지 않았갔시오. 그때 '서북청년회'라고 우리 영락교회 청년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했시오. 그 청년들이 제주도 반란 사건을 평정하기도 하고 그랬시오. 그러니까 우리 영락교회 청년들이 미움도 많이 사게 되었지요." -<한경직 목사>(김병희 편저, 규장문화사)

[뉴스앤조이-박요셉 기자] 한경직 목사의 유명한 이 발언은 제주 4·3 사건에서 온갖 학살과 만행을 저지른 서북청년회(서청)가 영락교회와 관련 있다는 주장에 근거로 활용돼 왔다. 하지만 아직까지 영락교회와 서청이 얼마나 연관되어 있는지 자세히 밝혀진 바 없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교회협·이홍정 총무)와 제주 교회협,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윤세관 총회장) 제주노회가 공동 주최한 '부활절 맞이 제주 4·3 평화 기행'에서는 서청과 한국교회 그리고 반공주의의 관계를 살펴보는 자리가 열렸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 조사관을 역임한 최태육 목사(한반도통일역사연구소)는 3월 14일 저녁 특별 세미나에서 "해방 이후 기독교를 지배해 온 반공주의와 적대 문화로 당시 기독교인들은 자신의 적을 사탄, 붉은 용으로 규정해 배제하거나 살해했다"고 했다.

최 목사는 한국전쟁 전후로 여러 지역에서 발생한 민간인 학살을 15년간 조사해 왔다. 지금까지 만난 희생자 가족, 가해자 등이 1000여 명이다. 그중에는 기독교인도 상당수 있었다. 대부분 학살에 가담했던 자들이다. 목사·노회장·총회장까지 했던 사람들이 어떻게 이런 끔찍한 참극을 저지를 수 있을까. 취재하면서 갖게 된 충격과 의문을 풀기 위해 지금도 연구를 놓지 못하고 있다고 최 목사는 말했다.

"영락교회 청년들
서북청년회 주도"

북에서 월남한 피난민들로 구성된 서북청년회는 한국전쟁 전후로 온갖 만행을 저질렀다.

최태육 목사는 서청에서 활동한 영락교회 교인들 증언을 바탕으로, 서청과 영락교회의 연관성을 살펴봤다. 최태육 목사가 전화와 면담으로 인터뷰한 복수의 영락교회 교인에 따르면, 한경직 목사 주장대로 영락교회 청년들이 서청을 주도했고 교회 안에 서청 단원들이 상시 사무실처럼 사용하는 장소가 있었다. 서청 핵심 인물 김 아무개는 영락교회에서 장로로 지냈다.

영락교회 청년들이 제주 4·3 사건 당시 제주도에 내려갔다는 증언도 나왔다. 최 목사는 "박 아무개 집사가 4·3 사건 직후 서귀포경찰서 소속 형사로 파견됐다. 홍 아무개 집사 역시 같은 시기 제주에 내려가 통역 담당 경찰로 활동했다. 박 집사는 1965년, 홍 집사는 1970년 각각 영락교회에서 안수집사로 임직됐다"고 말했다.

앞서 소개한 한경직 목사의 말은 일정 부분 사실이었다. 영락교회 청년들 중에는 서청을 주도하는 단원들이 있었고, 일부는 4·3 직후 제주도에 파견됐다. 하지만 자세한 연관성은 더 연구해야 한다고 최 목사는 말했다. 그는 "제주도에 파견된 서청 중 영락교회 교인들이 몇 명인지, 이들이 당시 어떤 역할을 했는지, 어떤 시각으로 4·3 사건을 바라보았는지 추가로 조사해야 한다"고 말했다.

반공주의 신앙 삼고
학살 조장한 기독교인들

4·3 사건 당시 학살을 진두지휘했던 조병옥 경무부장.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4·3위원회·고건 위원장)는 4·3 사건에서 희생된 이들이 2만 5000명에서 3만 명이라고 추정한다. 무고한 사람 수만 명이 목숨을 잃은 학살극을 진두지휘한 인물은 다름 아닌 조병옥 경무부장으로, 감리회 출신 기독교인이다.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은 경찰과 서청의 탄압에 항의하고 단독선거와 단독정부에 반대하면서 통일 정부 수립을 촉구한다는 명분으로 무장봉기를 일으킨다. 이들이 도민에게 보내는 호소문에는 "매국 단선·단정을 결사적으로 반대하고 조국의 통일 독립과 완전한 민족 해방을 위하여"라고 나와 있다.

진압을 책임지고 있는 조병옥 경무부장은 다르게 생각했다. 4·3 사건을 폭동으로 간주했다. 그는 4·3 사건 발발 2주일 후에 발표한 글 '도민에 고함'에서 "무모한 폭동을 일으켜 여러분의 골육인 건국의 일꾼을 살상하여 가뜩이나 빈약한 우리의 재산을 파괴하고 독립을 방해함은 그 무슨 일인가. 여러분은 민족을 소련에 팔아 노예로 만들려 하는 공산 분자의 흉악한 음모와 계략에 속은 것이다"고 했다.

최 목사는 "조병옥에게 공산주의는 무저갱으로 굴러떨어질 사탄의 진영이었고, 자유민주주의는 공산주의 악도의 도량을 막는 세력이었다. 반공주의가 신앙으로 신념화한 것이다. 그는 하나님나라를 건설하겠다는 일념으로 철저하고 지독하게 자신과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을 탄압했다"고 말했다. 

4·3이 교회에 주는 교훈 
"평화의 메시지, 포기 말아야"

최태육 목사는 한국교회가 평화의 메시지를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뉴스앤조이 박요셉

조병옥 경무부장뿐 아니라 군경 지휘부에 무장대를 발근 색원하라고 재촉한 이승만 대통령과, 직접적으로 민간인의 생명과 재산을 빼앗는 데 앞장선 서청 역시 반공주의로 무장되어 있었다. 최태육 목사는 당시 이들의 행동을 독려하고 정당화한 곳이 바로 교회였다고 했다. 다음은 한경직 목사가 1946년 전한 설교 일부다.

"공산주의야말로 일대 괴물이다. 이 괴물을 벨 자 누구냐? 이 사상이야말로 묵시록에 있는 붉은 용이다. 이 용을 멸할 자 누구냐?"

최 목사는 "설교를 들은 영락교회 청년들이 공산주의자를 붉은 용, 말세에 나타나는 사단으로 봤을 것이다"고 했다. 한경직 목사 설교는 서청의 행동을 적극화하고, 그들의 행위(학살)를 붉은 용을 제거하는 행위로 정당화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반공 이념을 신앙으로 신념화할 때 상대편은 단순히 적이 아닌 사탄이자 붉은 용이 된다. 해방 이후 기독교를 지배해 온 적대 문화가 기독교에 팽배해 있었다. 이것이 기독교인의 행동을 적극화했고, 기독교인들이 서슴지 않고 적을 사탄, 붉은 용으로 규정해 배제·제거하게 만들었다."

제주 4·3 사건이 오늘날 한국교회에 주는 교훈은 여기 있다. 자신과 다른 개인 혹은 집단, 종교, 문화에 대한 적대감이 심각해질 때, 신앙이 사람을 살해하는 행위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최태육 목사는 "한국교회가 종교의 본래 메시지, 분열과 적대를 싸매는 평화의 메시지를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4·3과 기독교인이 돌아봐야 할 것' 강의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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