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퍼즐문화연구소'가 격주 간격으로 기독 인문학 칼럼을 연재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인터뷰 기사(바로 가기)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 편집자 주

"키리에 엘레이손, 주여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몇 해 전 함께했던 아동부 아이들이 주일예배가 끝나고 숨바꼭질하며 부르던 노래였다. 과연 5세기 동방교회에서 유래됐다는 저 노래의 의미를 알기나 할까. 저 아이들에게 '자비'를 빌 만한 일이 있기는 할까. 하지만 어른(만)의 궁금증은 이내 사그라든다. 그런 것들이 뭐가 그리 중요한가. 아이들이 놀면서도 하나님께 기도를 하는데 말이다.

3년 전쯤, 교회학교 사역을 맡은 적이 있다. 단순하고 차분한, 그러면서도 아름다운 예배를 드리고 싶어, 다양한 기독교 전통 문화(예전)를 접목한 예배를 준비해 1여 년 아이들과 함께했다. 아이들 이해를 돕기 위해 찬양의 가사, 본문 말씀을 보여 주거나, 설교 시간에 사용할 성화를 보여 주는 것 외에는 음향 기기나 영상 기기를 사용하지 않았다. 요즘 유행하는 어린아이들을 위한 (신나는) 찬양 대신 떼제 찬양과 성공회 성가, 오래된 찬송가 중에서 짧고 반복적인 것들을 골라 찬양을 드렸다.

예배 시작 전에는 항상 제대를 만들었고, 그 위에는 십자가와 성경, 초를 놓았으며, 제대의 빈 공간에는 아이들이 추수감사절에 가져온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소품들을 놓았다. 생일과 같이 특별한 날에는 생일을 맞은 아이들을 위한 초를 올리기도 했다. 예배 시작 전 그리고 설교 시간 전후로는 주제에 맞는 성화를 보여 주었고, 기도 시간에는 아이들이 직접 만든 기도 매듭을 각자의 손에 들고 예수 기도를 함께 외웠다.

예배 첫날, 역시나 아이들은 지루해했다. 방방 뛰면서 신나는 찬양을 하고 싶어했고, 재미있는 설교 동영상을 보고 싶어했고, 기도는 후루룩, 예배는 최대한 짧게 그 후에는 미술학원을 방불케 하는 예배 후 활동이 이어지기를 바랐다. 하지만 몇 주가 지나자 하나둘씩 새로운(?) 예배 방식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곧 초를 켜고 싶어하는 아이, 초를 끄고 싶어하는 아이가 생겼다. (본의 아니게 이들은 복사 역할을 했다.) 짧고, 반복적인 멜로디의 찬양은 곧 아이들의 입에 익어 예배가 끝난 후에도 아이들은 찬양을 부르며 뛰어 놀았다.

제대에 자신들이 좋아하는 소품들이 올라가자 아이들은 제대를 소중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한 아이는 자기가 가지고 온 도토리의 숫자가 맞지 않거나 놓여진 모양이 마음에 안 들면 꼭 고쳐 놓고는 "내가 하나님한테 준 것이니 만지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기도 매듭은 잃어버리거나 끊어지는 경우가 있어 몇 번이고 만들었지만 어느 아이 하나 기도 매듭 없이는 기도하려 하지 않았다. 조그마한 손으로 조물락 거리면서 기도를 하는 아이들은 기도가 길어져도 돌아다니거나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

성화는 언제나 아이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듯 했다. 예배 시간 전, 설교 전후에 아이들은 그림에서 새로운 것들을 발견했고,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냈다. 때로는 내가 준비한 설교보다 아이들이 성화를 보며 만들어 낸 이야기들이 훨씬 재미있었고, 은혜로웠다.

아이들에게 변하고 있음을 가장 먼저 느낀 것은 부모님들이었다. 부모님들에 따르면, 아이들은 교회에서 돌아와 자신들이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이야기했다. "재미있었다"는 말 대신에 "좋았다"고 했다. 차분해졌고, 사뭇 진지해졌다. 집에서도 키리에를 부르고, 자기 전에는 예수 기도를 외웠다. 심지어 사순절에는 왜 엄마, 아빠는 사순절 동안 무엇인가를 참지 않느냐 (40일 동안 예수님을 생각하며 한 가지씩 참기/하기를 했었다) 다그쳤다. 아이들의 변한 모습에 아동부 예배를 궁금해하신 몇몇 부모님은 직접 참여하시기도 했다. 하지만 능숙하게 예배하는 아이들과 달리 부모님들은 뭔가 불편하고, 어색한 표정을 지셨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기독교 전통을 반영한 예배였지만, 어른들에게는 그저 낯설고, 이질감이 느껴지는 것이었을 테니 말이다. 어른들의 머리와 마음(그리고 영)은 아이들의 그것에 비해 훨씬 굳어 있다. 그래서 익숙한 것들을 선호한다. 기독교 문화도 마찬가지다.

한국교회의 기독교 문화

그들에게 익숙한 기독교 문화란 무엇일까. 문화 선교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사용되고 있는 요즘, 대다수의 교회나 선교 단체가 소개하는 기독교 문화는 현대 (대중)문화의 형식을 입은 기독교 문화를 말한다. 구도자들을 위해 기독교적 상징을 최소화한 교회, 다양한 현대적 음향/영상 장비가 가득한 공연장과 같은 예배당, 성찬 같은 예전 대신 CCM과 영상이 주를 이루는 모던 워십 형식의 예배, 대중 강연 못지않은 명쾌함과 유쾌함이 공존하는 설교, 정장이나 캐주얼 차림의 목회자….

쉽게 머릿속에서 그릴 수 있는 것들이 현대 한국 기독교의 주를 이루는 형식이자 상당수 어른 기독교인에게 익숙한 기독교 문화이다. (물론 전통적인 기독교 문화를 고수하는 교회들도 있다. 여기서 전통이란 언어(만)을 주요 소통의 도구로 사용하는 개신교 문화를 의미한다.) 이는 그대로 어린 기독교인에게 대물림됐다. 청년들이나 청소년, 그보다 더 어린아이들을 위한 예배나 교회 행사도 대부분 현대화한 기독교 문화의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물론 시대적 문화를 반영하는 것을 비판적으로만 보는 것은 아니다. 캐스린 태너(Kathryn Tanner)가 이야기했듯이 기독교 문화는 여러 문화의 다양한 형식이 성서와 교리를 바탕으로 해석돼 형성된다. 여기서 말하는 여러 문화라는 틀 안에 현대/대중 문화 역시 포함되어 있으니, 기독교 문화가 현대의 (대중)문화와 비슷한 모양을 갖춘다 한들 그것이 잘못됐다고 볼 수는 없다. 하지만 한국교회가 현대 문화의 형식을 차용하는 과정에 "실용성을 추구하는 전략적 접근"이라는 의도가 어느 정도 작용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20세기 말, 구도자 예배라는 개념이 한국 기독교계에 소개된 이후, 여러 교회는 앞다퉈 교회의 현대화를 모색했다. 얼마 남아 있지 않던 기독교의 전통은 쉽게 사람들 눈에서 사라졌다. 아마도 급감하는 기독교 인구를 회복할 수 있는 세련된 방법이라 생각했으리라. 비기독교인들 눈에 낯설고 불편할 만한 기독교 만의 독특한 전통을 없애면, 더 많은 사람이 편하게 교회에 나오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기독교적 색깔을 줄이는 방향으로의 한국 기독교 내 문화적 변화가 기독교 인구의 증가에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지는 확인된 바가 없다. 오히려 통계상 수치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기독교 인구가 여전히 감소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더불어 기독교에 대한 신뢰도 역시 계속해서 낮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조사 결과를 놓고 본다면, 세련된 문화의 옷을 입은 한국 기독교의 문화 전략이 크게 효과를 보지는 못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 추론이라 할 수 있다.

의미 있는 도전

몇 해 전, 미학적기독교교육이라는 과목을 가르치시는 교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현대 문화로 치장한 교회들이 한때 청소년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긴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곧 대중문화와 별 차이가 없는 기독교 문화에 회의감을 느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Trendy한 교회가 아니라 Sacred한 교회다." 비단 이 교수님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이러한 (젊은 층을 중심으로 한) 신자들 변화에 대한 기사와 연구는 상당히 많이 소개됐다. 물론 미국의 학교에서 나온 이야기이고, 기사와 연구들도 대부분 미국 교회의 구성원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것이다.

이러한 흐름은 이미 한국교회 내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누구보다 목회 현장에 계신 분들이 감지하고 있는 바를 나눠 주셨기에 알게 되었다. 이런저런 인연으로 만나 뵌 목사님들마다 같은 고민을 토로하셨다. 현대화한 기독교 문화가 아닌 기독교 정체성을 드러낼 수 있는 문화 요소들이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

기독교 문화와 대중문화의 관계를 연구하는 내게는 적잖은 책임감이 느껴졌다. 내가 하는 공부가 대중문화의 기독교적 차용에 대한 방법론은 아니지만 (그보다는 그러한 현상에 대한 비판적 접근에 가깝다) 그럼에도 무엇인가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빅퍼즐문화연구소에서 좋은 자리를 마련해 주셨다. 홍대에 위치한 기독교 문화를 연구하는 단체에서 트랜디한 기독교 문화에 대한 대안으로 기독교 전통 문화를 이야기할 수 있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 있는 도전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이 '도전'인 이유는 첫째, 관심 분야이기는 해도 내 전공 분야는 아니기 때문이다. 둘째, 그럼에도 관심을 갖고 있었기에 그동안 조금씩 모아 놓았던 기독교 전통에 대한 자료들이 귀국 이삿짐에 실려 태평양 어디엔가 떠 있는 배 안에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논의가 또 하나의 전략으로 이해되고 사용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다. 의외로 많은 분이 응원을 해 주셨고, 기꺼이 자료를 내어 주셨으며, 함께하고 싶다는 의사를 내비치셨다.

그래서 준비한 모임이 바로 '오래된 미래'라는 클럽이다. 한국 개신교계에는 흐릿하게 흔적만 남은, 하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기독교 전통 문화를 '함께' 찾아보고 공부하는 것이 이 클럽의 주 목적이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소개를 하자면, 6번의 모임을 통해 기독교의 상징, 특히 그리스도의 이미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교회 내부를 채웠던 성구들의 의미와 용도를 살펴볼 것이다.

오래된 건축 양식과 상징물들이 남아 있는 교회 몇 곳을 정해 답사를 하며 예배당에 스며든 전통에 대해 공부하고, 목회자는 과연 무엇을 입어야 할까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예복에 대해 알아볼 것이다. 마침 사순절과 부활절을 지나고 있으니, 어두움과 빛의 상징들을 가지고 죽음과 부활에 간접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예식을 함께 디자인해 보고, 마지막으로 기도와 묵상을 돕기 위한 기도 매듭과 같은 기독교의 전통적 소품을 만들고 체험해 볼 것이다.

이미 언급한 대로 클럽을 이끌어 나갈 사람 역시 전문가가 아니다 보니, 서로가 가지고 있는 지식을 공유하면서 이야기가 풍성해지기를 기대하고 있다. 조금 더 큰 바람이 있다면, 이 클럽을 통해 나눈 이야기를 토대로 이제 막 세워지고 있는 교회를 함께 꾸며 나갈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면 한다. 더불어 지역 예술가들과 연결되어 기독교 전통 문화의 유형적 유산들, 제대나 성찬기, 예복 같은 것들을 제작하고, 판매하는 네트워크가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이제 시작하는 클럽에서 너무 많은 것을 바라는지는 몰라도 결국 아름다운 유산들이 널리 알려지기 위해서는 시연과 보급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직은 많이 부족하다. 관심과 자신감만으로 거창한 계획과 바람을 이루기에는 역부족인 부분들도 있다. 글의 마지막을 쓰는 이 순간에도 클럽 시작일을 조금 미룰까, 글에 소개된 프로그램을 줄일까 하는 고민을 하고 있다. 하지만 그 무엇도 하지 않겠다. 대신에 이 모든 일의 시작이신 분께 책임을 돌리련다. "주여,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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