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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운동과 민족운동의 요람

[그림으로 만나는 한국교회] 승동교회

이근복   기사승인 2018.03.09  20:3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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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양반들이 사무엘 무어 선교사에게 면회를 요청한 뒤 말했습니다. "선교사님, 우리 양반들에게만 따로 앞자리를 마련해 주면 좋겠습니다." 대답은 이렇습니다. "예수 안에서는 양반과 천민의 구별이 없습니다. 교회는 신분 위세를 부리는 곳이 아닙니다."

*승동교회 예배당 앞에 있는 3·1 운동 기념비에는 이런 문구가 새겨져 있습니다. "3·1 독립운동 거사를 위해 학생 대표들이 모의하였던 곳."

*승동교회 담임목사가 된 곽안련(알렌 클라크) 선교사는 몽양 여운형 선생을 조사(지금의 전도사)로 임명했고, 몽양은 5년간 승동교회에서 시무했습니다.

사무엘 무어 선교사가 1893년 설립한 서울 인사동의 승동교회에 담긴 역사입니다.

3·1 운동은 일제에 항거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하게 한 혁명이자, 한국교회 역사를 혁신한 결정적 사건입니다.

"기독교인들의 3·1 운동 참여는 기독교를 외래 종교라 하여 비판적으로 보거나 백안시하던 일반인들의 인식을 바꾸어 놓기도 하였다. 당시 기독교인들이 선봉에 서서 나라와 민족을 위해 당한 핍박과 희생을 목격한 민중들은 그들에 대한 반감을 거두고 오히려 존경하게 되었던 것이다."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한국 기독교의 역사Ⅱ>(기독교문사), 40쪽]

당시 교세는 20만여 명으로 인구의 1.8%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리스도인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희생은 기독교가 민족사에 뿌리내릴 수 있는 토양을 마련했습니다. 민족 대표 33인 중에 16명이 교회 지도자였다는 점보다는, 독립 만세 운동이 지방으로 확산하는 데 교회가 희생적으로(피해자의 20%) 활동해서 거점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역사가들은 높이 평가합니다.

승동교회 예배당. 이근복 그림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경, 민족 대표 33인 중 29명이 태화관에 모여 "대한 독립 만세"를 부른 후 일제 경무총감부에 독립선언 사실을 통고했고 곧 구속됐습니다. 같은 시각, 탑골공원에 민족 대표들이 나타나지 않자, 학생 대표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곧바로 시가행진에 나섰습니다. 이렇게 만세 운동을 촉발한 것은 학생들이었기 때문에, 승동교회 역할은 대단히 소중합니다. 1919년 2월 20일, 승동교회 지하에서 청년면려회장 김원벽을 중심으로 경성의 각 전문학교 학생 대표 20여 명이 모여 3·1 만세 운동의 지침과 계획을 논의했습니다. 그날 승동교회가 교회적으로 참여했고, 3월 14일에는 승동교회 차상진 담임목사가 교우들과 '12인의 장서(청원서)'를 작성해 총독에게 제출한 일로 투옥됩니다.

승동교회는 민족주의적 색채가 짙었지만 실은 백정들을 중심으로 민중 교회로 출발했습니다. 완고한 신분제 사회에서 백정 박성춘은 자식들이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 곤당골교회(승동교회 전신)에 나가게 합니다. 콜레라가 창궐해 쓰러졌을 때, 사무엘 무어 선교사는 그를 극진히 치료합니다. 고종 황제 주치의가 천민을 치료했으니 사람들이 놀랐고, 그도 곤당골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습니다.

박성춘이 승동교회에 출석하자, 양반들은 함께 예배할 수 없다며 반발합니다. 그들은 들락거리다가 선교부 허락으로 북촌에 안동교회를 세웁니다(1909년). 1911년에 박성춘은 승동교회 초대 장로가 됩니다. 무어 선교사에게 신앙 훈련을 받은 박 장로는 계급 타파에 앞장섰고, 만민공동회의 연사로 나서기도 합니다. 아들 박양서는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해 한인 최초로 양의사가 됐으며, 3·1 운동 당시 만주 독립군 단체 대한국민회를 크게 지원했습니다. 더욱 놀라운 일은 딸이 성균관 박사이자 항일 독립운동가 단재 신채호의 동생 신필호의 부인이 됐다는 것입니다.

승동교회 역사는 골곡이 많습니다. 1940년 4월 진보 조선신학교(한신대 신학대학원 전신)가 개교한 곳이지만, 1959년 대한예수교장로회가 WCC(세계교회협의회) 가입 문제로 통합과 합동으로 분열할 당시, 세계 교회 일치를 추구하며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WCC를 진보와 자유주의라고 공격하며 참가를 거부한 예장합동 총회가 모인 장소이기도 합니다.

계층·이념·지역·빈부 등의 문제로 극심히 갈등하는 오늘날, 제3지대를 추구한 몽양 여운형이 새삼 주목받고 있습니다. 곽안련 목사 권유로 신앙을 갖게 된 몽양은 상동교회 전덕기 목사를 만나 민족 현실에 눈을 떴으며, 1907년 고향 양평에 예배당을 겸한 광동학교를 설립했는데, 가나안농군학교 김용기 장로가 이 학교 출신입니다. 몽양은 평양신학교를 2년 다닌 후 신학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 1914년 난징 금릉대학에 입학하려 중국에 갔지만 독립운동에 매진했습니다.

그는 목사가 되고자 했지만 나라를 구하겠다는 일념이 너무 커 정치가가 됐다고 평가합니다. 몽양은 해방 정국에서 좌우합작을 이끌었으나 권력을 장악한 보수 정권에 의해 공산주의자로 내몰렸고, 결국 1947년 백주 테러로 최후를 맞았습니다.

올해 3월 1일, 집회와 강연에서 당시 영향력 있던 일반 사회 지도자들은 독립무용론이나 패배주의에 빠져 선언서 서명을 거부했으나, 종교인들이 희생정신으로 만세 운동에 나섰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내년 3·1 운동 100주년을 위해 지난해 시작한 한반도평화만들기 은빛순례단 행사가 승동교회에서 진행됐습니다.

지금의 승동교회가 전형적인 보수 교회인데도 이런 행사를 마당에서 열었던 것은 교회의 역사성 때문입니다. 행사 중 종탑 앞 의자에 앉아 바라보니 곽안련 목사가 1913년 현대식으로 건축한 교회당 벽의 빛바랜 붉은 벽돌 한 장 한 장이 참 귀하게 여겨졌습니다.

*'그림으로 만나는 한국교회'은 매월 2차례 업데이트됩니다.

이근복 / 목사, 성균관대학교와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을 졸업했다. 영등포산업선교회 총무, 새민족교회 담임목사,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교육훈련원장을 거쳐 현재 크리스챤아카데미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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