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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신학자의 두 얼굴②] 피해자 배제한 성폭력 조사

[연중 기획 #교회_내_성폭력_OUT] 남성 중심 리더십이 만든 비극

이은혜 기자   기사승인 2018.03.06  15:4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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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성취했거나 진보적 목소리를 내 온 사람들이 줄줄이 성폭력 가해자로 지목되고 있습니다. 성폭력 가해자로서 피해자에게 사과하고 마땅한 법적·도덕적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그 사람이 이룬 업적은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요.

여기 메노나이트 교단을 대표하는 신학자 존 하워드 요더(John Howard Yoder)가 있습니다. 평화주의, 기독교 윤리학의 새 지평을 연 요더는 수십 년간, 많게는 100명에 가까운 여성에게 성폭력을 가했습니다. 그의 탁월한 신학과 저서를 볼 때 이런 사실을 받아들이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미투 운동'으로 한국 사회가 요동치는 지금, 요더의 성범죄를 다룬 <야수의 송곳니를 뽑다>(대장간)가 출간됐습니다. 존경받는 신학자 요더의 성폭력과 학교 및 교단의 대처, 그것이 드러나기까지 과정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목회자 성폭력이 끊이지 않는 한국교회에 주는 시사점이 많습니다.

<뉴스앤조이>는 연중 기획 '#교회_내_성폭력_OUT 당신의 잘못이 아닙니다'의 일환으로 요더의 성폭력을 통해 본 목회자 성범죄와 교회 문화를 조명합니다. ①요더가 어떤 방법으로 성범죄를 저질렀는지 ②신학교와 교회는 왜 치리에 실패했는지 ③그가 세상을 떠난 뒤 메노나이트교회는 어떤 과정을 거쳐 피해자들의 회복을 위해 힘썼는지 ④한국교회가 요더 사건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는지 살펴봅니다. - 편집자 주


[뉴스앤조이-이은혜 기자] 존 하워드 요더(John Howard Yoder)의 성범죄는 그가 1970년 고센성경대학원(GBS·AMBS 전신)에 부임한 이래 끊임없이 지속됐다. 요더 생전 그를 상담했던 정신과 전문의 두 명은, 요더에게 성폭력 피해를 입은 여성들만 100명 가까이 될 것이라고 했다. 1970년대가 성범죄에 대한 명확한 정의가 부족한 시대였다고 하지만, 비폭력 평화를 강조하는 메노나이트 안에서 아무도 요더의 행동을 막지 못했다는 점은 납득하기 힘들다.

학교와 교회는, 요더가 '성적 실험'이라며 학생들에게 한 행동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더 일찍 그의 행동을 막지 못했고, 피해를 최소화하지 못했다. 피해가 가장 많이 발생한 미국 아나뱁티스트메노나이트성경신학교(AMBS)와 요더가 속한 미국메노나이트교회(MCUSA)가 요더 문제에 접근하는 방식을 보면, 왜 그들이 실패를 거듭했는지 알 수 있다.

가해자 말에만 의존한 진상 조사
수년간 '설득'만…피해자 계속 늘어

요더는 1970년부터 1985년까지 GBS에 재직했다.(GBS는 메노나이트성경대학원과 합병해 1993년 AMBS가 됐다) GBS에서 요더가 여학생, 여성 직원들에게 의심스러운 행동을 한다는 건 이미 공공연하게 알려진 사실이었다. 1975년부터 GBS에 재직하고, 1993년 AMBS 초대 총장을 맡아, 이듬해 심장마비로 사망할 때까지 학교에 있었던 말린 밀러(Marlin Miller)는 1976년부터 비공개로 요더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요더를 설득하려 했던 밀러 총장은 외려 피해자에게 "나는 당신을 추방할 권한이 있다"고 말했다.

요더의 제자이기도 한 밀러는 1975년 이후 요더와 관련한 제보를 수없이 받고 있었다. <야수의 송곳니를 뽑다>(대장간)에는 밀러가 여성 학생·직원들은 물론 동료 교수들에게도 요더와 관련한 제보를 받았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같은 학교 신약학 교수 윌라드 스와틀리(Willard Swartley)는 요더의 옆방을 연구실로 사용하고 있었다.

"어느 늦은 밤에 스와틀리는 다음 날 수업을 준비할 목적으로 강의실에 들러 스위치를 올렸다. 불이 켜지자 의자에 앉아 있는 요더의 두 다리 사이에 한 여성이 무릎을 꿇고 얼굴을 묻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깜짝 놀란 스와틀리는 교실을 얼른 나와 버렸다. 스와틀리는 그 여성이 누구인지 확인하지 못했지만, 여학생 중 하나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음 날 아침 사무실로 출근했을 때 요더의 쪽지가 남겨져 있었는데, 거기에 요더는 그 여학생을 돕기 위해 상담하던 중이었다고 적어 놓았다."(53쪽)

요더에게 직접 항의하지 못한 스와틀리 교수는 밀러 총장에게 자신이 본 것을 보고했다. 진상조사위원회를 구성해야 할 만큼 심각한 사안이었지만, 밀러는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스와틀리 교수의 제보 외에도 밀러 총장이 요더의 문제를 알 수 있었던 여러 경로가 있었다. 그는 요더가 자신의 '성적 실험'을 지속하기 위해 한 여학생을 설득하는 편지를 보내고, 실제로 그에게 지속적으로 성폭력을 가한 사실을 알게 됐다. 요더의 아내가 알려 준 것이었다. 그런데도 밀러는 요더의 성범죄를 불안정한 결혼 관계 때문이라고 오인했고 가족의 일로 치부하며, 어떻게든 이 문제를 과소평가해 학교가 충격받지 않게 하려고 했다.

1978년 가을, 밀러는 요더 때문에 한 여학생의 인생이 완전히 망가지는 것을 목격하면서도 요더에게 강력한 제재를 가하지 못했다. 그해 AMBS에 입학한 '엘레나'(가명)라는 학생 역시 요더의 실험 대상이었다.

요더는 엘레나에게 자신의 행동이 "비이성애적이며 가족적"이라고 설명했다. 요더는 자신의 실험이 폭력을 동반하지 않았다는 점을 자꾸 어필했다. 성적 행위가 강요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엘레나에게 짧게 성기를 삽입하는 행위를 시도했다. "남성들이 굳이 강간범이 될 필요가 없다"는 말과 함께였다(55쪽).

이듬해 요더는 엘레나가 그와 겪은 성적 행동을 모두 글로 남기라고 했다. 엘레나는 이를 기록해 요더에게 보냈는데, 요더의 아내 앤이 이 편지를 발견했다. 앤은 남편에게 따지는 대신 밀러 총장에게 이 편지를 가져갔다.

1979년 여름, 밀러는 엘레나를 직접 만났다. 밀러 총장이 엘레나에게 건넨 말은 뜻밖이었다. 밀러는 "나는 당신을 대학원에서 추방할 권한을 갖고 있다"(56쪽)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엘레나는 우울증에 시달리다 1년이 지나지 않아 학교를 그만뒀다.

요더에게 피해를 입은 피해자를 만나고도 밀러는 요더를 '설득'하려고 했다. 하지만 요더는 이전보다 더 많이, 더 자주 여성들을 탐닉했다. 요더의 기준에 따르면 그의 행위는 '추행'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요더는 오히려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밀러에게 여러 차례 메모를 남겼다.

"요더는 그가 개인적으로 여성들에게 관심을 가진 것은 치유의 차원에서 한 것이라 여겼기 때문에 자신이 음행에 관여했다는 개념 자체를 거절했다. 요더가 갖고 있던 규정에 따르면 사정을 하지 않는 성기 삽입은 성교가 아니었다."(59쪽)

밀러는 요더의 행위를 글로 반박했다. 1979년부터 1980년 초반까지 두 사람은 글을 주고받으며 자신의 입장을 되풀이했다. 두 사람이 신학적인 논쟁을 주고받는 동안에도 요더는 여성들을 지속적으로 추행했다. 피해자를 만났는데도 그의 아픔에 공감하지 못한 밀러. 그는 가해자의 말에 반박하는 데만 집중하다가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

밀러 총장과 요더는 메모를 주고받으며 논쟁했지만, 입장은 평행선을 달렸다. (사진은 기사 내용과 관련 없음.)

남성 중심 리더십의 한계
성폭력 가해자에게 비밀 보장

밀러 총장은 메노나이트 전통 방식에 기초해 요더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마태복음 18장 15~17절이 말하는 것처럼, 형제가 죄를 범하면 1)형제에게 직접 가서 말하고 2)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 그들의 입으로 죄를 확증하게 하고 3)그것도 안 되면 교회에 말하게 하라는 단계를 취했다.

1980년 이전까지 밀러가 수년간 취한 방법이 1단계였다. 이제 2단계를 밟을 차례였다. 2단계를 밟기 전, 밀러는 요더와 계약을 연장하면서 '언약'을 체결했다. 더 이상 성과 관련해 그 어떤 실험도 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밀러는 요더와 대학원 동료 교수 3명이 참여하는 논의체 '언약그룹'을 구성했다. 요더는 이 그룹 모임을 철저하게 비밀로 부쳐 달라고 요구했다. 언약그룹은 3년간 논의했지만 나아지는 건 없었다. 요더는 자신의 행동이 "윤리학자로서 성을 민감하지 않은 세계로 인도하기 위한 폭넓은 실험"이라는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비슷한 시기, 밀러의 문제 해결 방식에 이의를 제기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AMBS 졸업생 루스 크랄(Ruth Krall)은 동료들과 함께 요더의 손이 뻗칠 만한 곳의 여성들을 만나고 다녔다. 크랄은 1982년 9월 밀러 총장에게 보낸 편지에서, 요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것은 "대학원의 모든 위원회가 남성 위주로 짜여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성차별이 당연한 곳에서는 언제든지 성폭력이 발생할 수 있다는 점도 설명했다.

밀러가 문제를 질질 끌며 상황을 악화하는 동안, 메노나이트교회 여성들은 밀러보다 요더의 성폭력 피해에 대해 더 잘 파악하고 있었다. 크랄은 밀러에게 "메노나이트교회 여성들의 네트워크는 당신이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이 문제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설명했다. 밀러는 남성 중심 시각에서 학교를 보호하고, 신학자 요더의 명성에 금이 가지 않게 하는 데만 관심을 두고 있었던 것이다.

교단에서 '목회 자격 정지'
끝내 잘못 인정하지 않은 요더

요더는 당시 GBS와 노트르담대학교(University of Notre Dame) 두 곳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1983년, 요더가 노트르담대학교 여학생 두 명을 성추행했다는 소식을 들은 밀러는, 언약이 파기되고 2단계도 실패로 돌아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결국 요더는 1984년 GBS를 떠나야 했다.

이제 3단계를 진행할 차례였다. GBS를 떠났지만 요더는 여전히 MCUSA 소속이자 노트르담대학교 교수로서 교회와 각종 행사에 불려 다녔다. 이제 '교회에 말할' 차례였다. 처음에는 요더가 속한 '프래리스트리트교회 장로회'가, 그다음에는 교회 내 '존하워드요더대책위원회'(대책위원회)가, 마지막으로 교회가 속한 '인디애나-미시간메노나이트지방회'가 이 사건을 담당했다.

교단으로 치리 과정이 넘어갔을 때는 이미 1990년대였다. 1991년 TV에서는 연방대법원 법관에 임명된 클래런스 토머스(Clarence Thomas) 상원의원이 자신을 향해 제기된 성추행 의혹을 부인하는 장면이 흘러 나왔다. 사회에서는 직장 등에서 일어나는 성추행과 관련한 논쟁이 활발하던 시점이었고, 더 이상 비밀이 유지될 수 없는 시대가 됐다.

1991년 결성된 대책위원회는 요더에게 피해를 입은 여성들을 직접 만났다. 그리고 요더가 행한 13가지 성폭력 목록을 작성해 교회에 전달했고, 교회는 이 내용을 바탕으로 지방회에 요더의 '목회 자격 정지'를 요청했다. 1992년, 요더의 목회 자격은 정지됐고 대책위원회는 해산했다.

요더는 1997년 사망할 때까지도 자신의 성폭력을 인정하지 않았다.

목회 자격은 정지됐지만 여기에도 피해자들을 향한 사과나 배상 등은 없었다. 이제 지방회가 요더를 치리할 차례였다. 요더는 목회 자격이 정지되는 과정에서, 대책위원회가 조사한 13가지 성적 행위를 부인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성범죄'라는 사실은 인정하지 않았다.

지방회는 피해자가 몇 명인지 파악하고 용서를 구하는 대신, 요더 부부의 회복에만 관심을 보였다. 1992년 시작한 징계와 회복 절차는 1996년이 되어서야 끝이 난다. 요더 부부의 요청에 따라 몇 번이나 다시 쓰인 공식 발표문에는, 요더의 목회 자격 정지를 유지한다는 내용과 치리 과정에 참여해 준 요더에게 감사하다는 말 외에 별다른 내용이 없었다.

1997년 1월 이스턴메노나이트신학대학원의 한 특강에 초청된 요더는, 잘못을 인정하는 문서를 작성해 달라는 요청에 "내가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지 않아도 될 일을 끊임없이 잘못 인식해 온 기관의 결정들에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발표했다. 같은 해 12월, 요더는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그는 죽을 때까지 자신이 성폭력의 가해자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지워진 피해자의 목소리가
다시 복원되기까지

요더 사후, 그를 칭송하는 목소리는 계속됐다. 어떤 이들은 '성폭력 가해자 요더'와 '평화신학자 요더'를 애써 떼어 놓으려 했다. 요더의 성폭력이 드러난 뒤에도 그의 저작들이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학교 교재로 사용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피해자들의 목소리는 지워졌고, 그들은 고통스럽고 혼란스러운 삶을 살았다.

가해자 요더에게만 초점을 맞춘 나머지 피해자들의 회복과 치유에는 관심이 없던 나날이 지나, AMBS는 2013년 요더 문제를 다시 수면 위로 끌어올리게 된다. 결국 교단의 공식 요청을 받아 진행한 2년간의 연구 끝에 레이첼 왈트너 구센의 <야수의 송곳니를 뽑다>라는 논문이 출간됐다.

많이 늦었지만, AMBS와 MCUSA는 요더에게 성폭력 피해를 입은 사람들의 회복과 치유를 위한 여정을 시작했다. 다음 기사에서는 이 문제가 어떻게 요더가 사망한 지 16년이 지난 후에 다시 공론화됐는지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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